[파이낸셜뉴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내각 인선에 대해 '대통령 눈이 너무 높다'고 평가한 것을 두고 "아첨도 적당히"라고 비판했다. 주 의원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논문 표절·부동산 투기·음주운전·갑질·탈세·자료 미제출이 모두 '이 대통령 눈 높이'라는 자백"이라며 이같이 썼다. 앞서 강 비서실장은 김윤덕 국토교통부·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지명을 끝으로 1기 내각 추천을 마치면서 "대통령님의 눈이 너무 높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주 의원은 "자기가 인선을 주도했다는 자랑인 동시에 아첨인데, '국민 귀 높이'에 한참 모자라는 소리"라며 "그럴 만도 하다. 자고로 유유상종이라고 했다"며 지적했다. 이어 이 대통령을 향한 비판도 쏟아냈다. 주 의원은 "가천대 논문을 표절해 반납한 이 대통령에게 이진숙 교육부 장관의 제자 논문 표절이 충분히 이해된다"며 "대장동·백현동 업자에게 수천억원의 특혜를 주고, 측근이 수십억원 대가를 받은 이 대통령에게 한성숙·구윤철·정동영·정은경 남편의 농지 투기쯤은 귀엽다"며 꼬집었다. 그러면서 "음주운전 전력 이 대통령과 무면허 운전 전력 강 비서실장은 윤호중, 김영훈 후보자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며 "술자리 여성 동석자에게 술을 따르라고 병을 건네는 이 대통령은 강선우 후보자의 '갑질'보다는 '이부자리 지극정성'이 눈에 밟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주 의원은 "개인 변호사비를 공천·공직으로 대신 내고 법카로 세금을 빼 먹는 꼼수로 재판을 미뤄 온 이 대통령에게 탈세와 자료 미제출은 걸릴돌일 수 없다"며 "'강훈식 아첨'은 왜 이리 오글거리나"라고 적었다. 한편, 오는 14일을 시작으로 5일간 이 정부의 장관 후보자 16명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줄줄이 예정돼 있다. 국민의힘은 '송곳 검증'을 벼르고 있으나, 더불어민주당은 '전원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어 강한 충돌이 예상된다. haeram@fnnews.com 이해람 기자
2025-07-13 12:20:50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1892~1950)는 국토를 기행하면서 국가의 미래 발전을 위한 많은 생각과 의견을 기행문으로 기록한다. 춘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꼽혔다. 전래로 조선의 선비들과 학자, 관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와 국토를 기행하면서 기행문과 감상문 등을 많이 남기고 있다. 춘원을 사례로 기행록을 살펴본다. 그의 대표적인 기행록은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1922),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 1913~1919), '남유잡감'(南遊雜感, 1913~1931) 등이 있다. 금강산유기는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과 금강산을 기록한 것이다. 오도답파여행은 한국의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 5도를 둘러본 여행기이고, 남유잡감은 일본, 중국, 연해주 등 해외여행기다. 오도답파여행은 1917년 6월 ‘매일신보’에 연재한 글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다음해에 다시 정리해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는 ‘청춘’ 잡지에 매호 실었다. 여기서 춘원은 각 지역의 모습을 간단히 설명하고 지역의 발전을 위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미래의 기대하는 상상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기행문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가능하면 춘원 특유의 말투를 그대로 살리고자 한다. 오도답파여행의 일부를 살펴본다. 1913년 6월 26일 서울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조치원역에 내려 자동차로 공주로 달아난다. 도로가 좋다. 질풍같이 달려도 요동이 없다.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는 거의 ‘빨간산’ 뿐이다. 그리고 바싹 마른 개천,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을 보면 비관이 생긴다. 금강(錦江)은 3~4년 전만 하더라도 공주, 부강까지 선박이 통행하였다 하나, 점차 수량이 감소하여 지금은 소선박도 운행이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원래가 아닌 주민들의 부족함 때문이라 본다. 자각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다. 충남도청을 들러 식림 대책을 물으니 ‘25년 예정으로 충남에 식목을 하고 벌채를 금지하며 각 군면에서 묘목을 기르도록 할 예정으로 대전, 연기, 천안 등 철도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실행할 것’이라 하니 그런대로 안심을 가진다. 산업에 대해서도 들어본다. 본도는 역시 농업이 주산업이다. 관계설비와 종자개량에 적극 노력하여 경지면적과 수확고가 증가하여 간다. 또한 잠업과 저포업(苧布業, 모시옷 제조)을 적극 장려한다. 본도는 기후와 토질은 잠업에 적당하므로 10년 계획으로 뽕나무를 심을 것이라 한다. 유해무익했던 금강의 수리를 응용하여 공주에 대규모 제사공장을 세우고 부를 증진하여 철도로 발전한 대전, 논산, 조치원에 빼앗긴 공주에 신생명을 부여하려 한다. 공주라고 부름은 시가지를 두룬 산들이 공자형(公字形)을 띄는 까닭이라 한다. 다음날 공주산성을 오른다. 금강의 남안에 돌출한 고지상에 있는 성으로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울창한 송림의 산길을 걸어서 과거 승병의 총본산인 영은사(靈隱寺)를 들린다. 법당문을 반쯤 잘라내고 유리창을 단 것과 계하(階下)에 석유 광명등을 켠 것이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으로 보인다. 진남문을 통해 공산성에서 나왔다. 버들 그늘에 모옥(茅屋, 띠집)으로 된 주점이 있어 막걸리를 메기 안주로 한잔을 마셨다. 여주인에게 물은 즉, 여기 지명은 왕자터요, 부여서 20리라 한다. 문앞에 청강(靑江)이 있어 메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부여군 현내면 가증리(佳增里)에 유명한 유사이전(有史以前)의 묘지가 있다. 일본인 전문가 감정으로는 4천년 전이라 한다. 백제의 서울이 어떠한 것이론고 하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부소산 동편 모퉁이를 돌아 초갓집 20~30여채가 적적이 누워있는 부여 읍내에 도달했다. ‘이것이 부여런가’ 사비(泗沘) 서울이라 누가 믿으리오. 부소산 동쪽 영월대 넘어 있는 창고터를 보았다. 아직도 쌀과 밀과 콩이 까맣게 탄화하여서 남아있다. 백마강 물소리 들리는 절벽 밑 반석 위에 있는 것이 유명한 고란사(皐蘭寺)이다. 아마도 불법을 존중한 백제왕실의 수호사일 것이다. 연화를 아로새긴 주춧돌이며 빤빤히 닳아진 섬돌에는 당시의 귀인의 발자욱이 있을 것이다. 낙화암상에서 방혼(芳魂)이 스러진 궁녀들도 아마도 이 법당에서 최후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우리 배는 규암진(窺岩津)을 떠났다. 옛날 백제의 상선과 병함이 떠났던 데요, 당·일본·안남의 상선이 각색(各色) 물자를 만재하고 복진하던 데다. 자온대(自溫臺)의 기암은 의자왕이 일유(逸遊)하던 명성이 전하지만, 당시에는 이별암(離別岩·삼천궁녀 바위)으로 유명했을 것이다. 조선의 제일의 평야요, 제일의 미(米) 산지인 전북평야에 들어섰다. 일망무제다. 평야 중에는 조산(造山)같은 조그마한 산들이 있고, 산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밑에 촌락이 있다. 마치 바위에 의지하여 굴이 붙어 있는 것 같다. 들에 나가 먹고 산에 들어와 자는 것이 이 지방의 특색이다. 그러나 어떤 촌락은 그만한 산도 얻지 못하여 광야에 길 잃은 자 모양으로 벌판에 있는 자도 있다. 퍽 산이 귀하다. 이 평야는 고래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겸수(兼修)하므로 농민의 생활이 극히 불안정하였다. 만일 수리(水利)가 정리되면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넉넉히 3할 이상의 증수(增收)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산에 도착하였다. 군산은 전북 유일의 개항장이요, 조선 제일의 곡물 수출항이다. 가구의 정연함과 가옥의 정제함이 꽤 미관이다. 이리역(裡里驛)에 하차하여 경철로 전주로 항하였다. 이름은 경철이라하지만 차창도 훌륭하고 속도도 어지간히 빠르다. 전주의 수려한 봉만(峰巒)이 가까워진다. 산은 참으로 수려하다. 전주의 특색은 산이라 하였다. 대장촌, 삼례 등지의 농장이며 송림이 울창한 건북산릉의 승경은 귀로에 찾기로 했다. 전주는 백제시절에 완산 혹은 비사벌이라 하였다 하며, 견훤의 후백제의 왕도라 한다. 전주 금융기관으로는 금융조합이 있으나 중농 이상 이용이 가능하여 뒤에 소농도 가능한 전주농사조합을 시험적으로 설립하였다. 전주에 제지공업을 기계공업적으로 가능하도록 시험중이라 한다. 전주는 죽기, 목기, 지류, 선자(扇子) 등은 전부터 유명하였다. 당국의 장려로 더욱 발전하였다. 이를 위해 전주공립간이공업학교 생도들의 죽기와 목기, 장수의 석기, 운봉의 목기는 세계 어느 시장에 내어도 부끄럽지 아니한 것이다. 이상의 춘원답사기는 ‘오도답파’의 충남과 전북의 일부를 담은 것이다. 본 글은 1963년에 나온 이광수전집 18권에서 인용했다. 그의 전집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집으로 소설, 시, 수필, 기행문, 서간문 등 다양한 글들의 모음이다. 편집위원으로는 주요한, 박종화, 백철, 정비석, 박계주 등 당대 한국 최고의 문학인들이다. 이 전집에서 춘원은 우리 한글과 어려운 한자, 당시의 일본식 한자, 일본어, 영어 등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춘원의 대단한 문학 수행의 결과일 것이다. 후대에 춘원의 의식과 사상에 대한 비판론도 많이 나왔지만, 당시 근현대 교육이 매우 부족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많은 지리정보와 함께 개인적 삶의 개선과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춘원의 친일론으로 전국 50곳이 넘는 문학관이 있지만 이광수문학관은 없다. 다만 인천의 한국근대문학관의 11인의 문학인에 춘원이 들어 있다. 춘원이 북한 평북 정주 태생이고 자강도 강계에서 별세한 영향도 있는 것일까? 아무튼 춘원의 기행문은 문학적인 표현과 함께 당대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미래 의견을 함께 보여준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5-02-18 15:26:28[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임진왜란(1592~1598년)이 발발하자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로 피난했다. 당시 태의(太醫)였던 허준은 피난길에 함께 올라 왕을 보살폈다. 다행히 선조는 다시 건강한 상태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는 허준을 지극히 신임했다. 선조는 애민정신이 강해서 항상 백성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래서 새로운 의서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의서도 들어와 있었고 조선에서 출간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있었지만, 이 의서들만으로 조선 백성들의 병을 쉽게 치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을 불러 하교를 하였다.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현존하는 잡다한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도록 하라. 또한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한글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인 정작, 태의인 양예수와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함께 관청을 설치해서 의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양예수는 허준보다 선배 어의였고, 정작은 민간 의사로 어의는 아니었지만 도교적 양생술과 함께 의학에 도통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이명원은 침술에 뛰어났으며, 김응탁과 정예남은 신참 어의였다. 허준은 가장 먼저 목차를 잡았다. 맨 앞에는 오장육부와 함께 각 기관이 그려진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라는 해부도를 넣고자 했다. 그 이유는 질병뿐만이 아니라 몸을 치료하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는 의안(醫案)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나서 정(精), 기(氣), 신(神), 혈(血)을 중심으로 해서 내과에 해당하는 내경편(內景篇), 근골격계와 외과에 해당하는 외형편(外形篇), 다양한 병증들을 다룬 잡병편(雜病篇), 본초를 분류하고 설명한 탕액편(湯液篇), 침구와 경락을 설명한 침구편(針灸篇) 순으로 편집하고자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막바지에 일본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바로 정유재란(1597~1598년)이다. 의서 편찬에 참여한 어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허준은 어쩔 수 없이 의서의 편찬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고작 목차만 정해졌을 뿐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의서를 편찬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리고선 궁에 소장하고 있는 의서 500권은 내주고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는데 참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의서 편찬 작업이 절반 정도 이루어졌을 때 선조는 승하하고 말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허준은 선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주로 유배가 되었다. 선조가 죽자 어의였던 허준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광해군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치료해 준 것 때문에 광해군 또한 허준을 신임했다. 그래서 허준은 유배 중에도 의서를 집필할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 바로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났다. 허준은 선왕의 유지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서 의서를 집필했다. 1610년(광해군 3년), 허준은 드디어 새로운 의서를 완성했다. 집필을 시작해서 1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방대한 양이었다.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광해군에게 진상했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읽어보고는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太僕馬)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노라. 그리고 서둘러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그러자 내의원 제조가 아뢰기를 “동의보감은 이미 한 부를 필사해서 완성해 놓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책 수가 25권, 25책으로 많고 다른 의서와 달리 작은 두 줄로 소주(小註)가 달려 글자를 새기기 무척 어려워서 지방 인쇄소에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습니다. 따라서 궁에 별로도 국을 설치해서 활자로 인쇄하고 의관들이 감수하고 교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궁에 보관 중이던 금속활자를 왜놈들에게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송구하게도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를 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를 윤허했다. 감수와 교정의 책임을 맡은 감교관(監校官)으로는 통훈대부 내의원 직장(直長)인 이희헌과 통훈대부 내의원 부봉사(副奉事)인 윤지미가 맡았다. 제조가 목판인쇄가 아니라 목활자로 인쇄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목판인쇄는 책의 한 장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을 판 하나에 새겨서 인쇄하는 방식으로 손상되거나 오자가 생기면 판을 통째로 한꺼번에 모두 바꿔야 했지만, 목활자는 한 개의 한자를 양각으로 도장처럼 새겨서 한 글자씩 끼워 넣어서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누락된 한자나 손상된 한자만을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용이했다. 사실 전란을 겪으면서 목판인쇄로 사용할 만한 나무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결국 내의원자(內醫院字) 목활자로 인쇄하기로 했다. 내의원자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을해자란 1455년(세조 1년, 을해년)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당대의 명필가로 알려진 강희안(姜希顏)의 글씨를 본떠서 만든 구리활자를 말한다. 내의원자는 을해자를 바탕으로 목각(木刻)한 것으로 선조가 승하한 해부터 광해군 7년까지 내의원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목활자로 주로 의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훈련도감에서 출판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에도 목활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의보감은 내의원에서 직접 만든 내의원자 목활자를 이용해서 편찬, 인행, 교정까지 시행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음력 11월 어느 날, 동의보감 초판본이 세상에 나왔다. 동의보감이 완성된 지 3년 만이었다. 허준은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후 2년 만에 향년 77세에 별세했다. 이후 동의보감은 전남관찰영, 호남관찰영, 영남관찰영 등의 지방 인쇄소에서 추가로 인쇄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명성은 이웃나라에도 퍼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쇄되었다. 인쇄소마다 새롭게 목판을 만들거나 제각기 만든 활자로 인쇄를 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동의보감은 판본마다 한자의 모양도 다르고 오탈자 등이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통 동의보감을 허준이 지었기 때문에 동의보감의 글씨체를 허준이 직접 쓴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동의보감 초판본의 글씨체는 허준의 글씨가 아니라, 명필가 강희안(姜希顏)의 서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허준의 필체는 없다. * 제목의 ○○○은 ‘강희안(姜希顏)’입니다. 항간에 동의보감 초판본이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나 훈련도감 목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설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동의보감 서문> 東醫寶鑑序. ○ 我宣宗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庸, 不足觀爾, 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無醫藥, 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産, 而人不能知爾. 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 太醫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値丁酉之亂, 諸醫星散, 事遂寢. 厥後, 先王又敎許浚, 獨爲撰成, 仍出內藏方書五百卷以資考據. 撰未半而龍馭賓天. 至聖上卽位之三年庚戌, 浚始卒業而投進, 目之曰東醫寶鑑, 書凡二十五卷. (동의보감 서문. ○ 우리 선종대왕은 몸을 다스리는 법도를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확장시켜 의학에 마음을 두시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셨습니다. 병신년에 태의 허준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라.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허준이 물러나와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관청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여 대략 중요한 골격을 이루었는데, 정유재란을 만나 여러 의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선종대왕이 다시 허준에게 하교하여 홀로 책을 편찬하게 하시고 대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 오백권을 내어주어 고증하게 하셨는데 편찬 작업이 반도 끝나기 전에 선종대왕이 승하하셨습니다. 성상이 즉위한 지 삼년이 된 경술년에 허준이 비로소 작업을 마치고 진상하면서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모두 25권입니다.) ○ 上覽而嘉之, 下敎曰, 陽平君許浚, 曾在先祖, 特承撰集醫方之命, 積年覃思, 至於竄謫流離之中, 不廢其功, 今乃編帙以進. 仍念先王命撰之書, 告成於寡昧嗣服之後, 予不勝悲感. 其賜浚太僕馬一匹, 以酬其勞, 速令內醫院設廳鋟梓, 廣布中外. 且命提調臣廷龜撰序文 弁之卷首. (성상께서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시기를,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종대왕 때에 의서를 지으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어 여러 해를 고심하여 귀양을 가서 떠돌아다닐 때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제 책을 편찬하여 진상하였다.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고, 서둘러 내의원으로 하여금 관청을 설치하고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조 신 이정구에게 명하여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싣게 하셨습니다.) ○ 萬曆三十九年辛亥孟夏, 崇祿大夫, 行吏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筳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臣李延龜奉敎謹序. (만력 39년 신해년 1611년 초여름에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이정구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서문을 짓습니다.) ○ 萬曆四十一年十一月日, 內醫院奉敎刊行. 監校官 通訓大夫, 行內醫院直長臣李希憲. 通訓大夫, 行內醫院副奉事臣尹知微. (만력 41년 1613년 11월 어느 날, 내의원이 하교를 받들어 간행하다. 감교관 통훈대부 행내의원직장 이희헌, 통훈대부 행내의원부봉사 윤지미) <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1610년 11월 21일. 內醫院官員以提調意, 啓曰: “以東醫寶鑑分送下三道, 使之刊刻事, 曾已啓下, 移文各道, 日月已久. 而卷秩甚多, 功役不貲, 故各處頉報及狀啓, 前後非一, 然猶申飭各道, 整備材料, 歲後卽爲分刊矣. 因念此書, 與他冊有異, 小註分行, 字數細密, 刊刻甚難. 藥名病方, 小有差誤, 則關係性命, 旣無本冊, 只以寫出一件飜刻, 更無憑准之路. 今若付之外方, 則非但玩愒稽遲, 完畢無期, 抑恐舛錯訛謬, 終爲無用一本. 臣等爲是之慮, 更爲商量, 則自本院, 別爲設局, 以活字印出, 醫官監校, 如頃日醫書印出時例, 則事必易就, 而又無訛誤之慮矣. 후략.” 傳曰: “依啓.” (내의원에서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을 하삼도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 책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이 감수하고 교열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후략.”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논문> ○ 하정용. 내의원자본(內醫院字本) 연구의 제문제(諸問題) - 동의보감(東醫寶鑑) 연구를 위한 선행과제. 의사학(醫史學) 제17권 제1호(통권 제32호) 17ː2336 June 2008 : 서지학계에서 소위 내의원자본이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의 금속활자인 을해자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여기서 을해자란 1455(세조 1, 을해)에 강희안(姜希顔, 1424-1483)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를 말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5-07 17:15:06사방이 꽃으로 가득했던 밤, 제자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 봄을 어쩌면 좋아요" 무슨 사정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취해 우는 그 앞에서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 돼 있었다 제자는 다음날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꽃길을 걸으며 되는 일 없는 자신이 떠올랐다 했다. 아름다움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꽃이 지고 녹음이 오면 그 마음도 단단해지리라 지난해는 4월에 비가 내렸다. 막 피어 오르던 꽃들이 봄비에 젖어 흘러내려 화사한 봄꽃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 젖은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올해는 너무 화려하다. 여기저기 눈길이 가는 곳에는 꽃이 있다. 올해처럼 완벽한 봄을 보는 일은 큰 행복이다. 우리 동네는 효성고등학교 옆에 벚꽃동산이 있는데, 외출할 때나 산책을 하다 보면 거의 전교생이 나와 선생님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본다. 왜 이리 설레는가. 개나리는 지금도 남아 있고, 조팝나무도 하얗게 고개를 내밀고 멀리서 산벚나무들의 연한 봄빛이 너울거리고 있다. 내 작은 정원에는 할미꽃, 명자나무꽃, 돌단풍, 수선화들이 피어 있다. 모란은 곧 터질 것 같은 봉오리를 지어 올리고 있다. 풀을 뽑다가 꽃 피운 풀은 뽑지 않는다. 그것도 봄의 한가락에 음악의 한 곡조가 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날 밤이었다. 11시쯤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 울리는 것은 위급뿐인데, 서둘러 받았는데 제자 민식군이었다. "선생님 봄이 왔어요. 이 봄을 어쩌면 좋아요." 그는 취해 있었다. 아마도 술에 취하고 봄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봄에는 남자가, 가을에는 여자가 취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에게 무슨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는가 나는 그것부터 걱정했다. 그만큼 나는 현실적이 되어버렸고, 아직 그는 봄에 취해 울었던 것이다. 남자는 울어선 안 된다고 어른들은 가르쳤다. 우리 어머니도 외아들인 내 동생에게 오직 한가지 울면 회초리를 들었다. 울음을 허락받지 못한 남성들은 미세한 감정을 어디다 풀어버리는지 모르지만 사실 인간은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강한 남자로 보이려면 눈물은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남자에겐 거의 철칙이었다. 이 세상에는 절벽 같은 좌절이 있고, 얼음 덩어리 같은 냉대도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은 주고 싶은데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벚꽃잎처럼 후다닥 떨어져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온몸을 털어도 달라붙어 있는 홀로라는 외로운 병은 함께 살아가는 몸속의 장기 같기도 한 것이다. 그다음 날 그는 말했다. 온 천지에 꽃들이 피어나고 봄은 온통 사람 마음을 흔들고 있는데 되는 것이라곤 없고 뼛속까지 외로운데 늦게 친구들과 헤어져 잎이 자욱이 쌓인 분홍빛 꽃길이었다고 한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다가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고 순간 '사나이의 울음'에 대한 내 강의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눈물이 터질 때 그의 운동화에는 연분홍 꽃잎들이 묻어 있었을 것이고, 그의 눈에는 자신의 눈물방울로 보였을 것이다. 꽃잎은 지고 신록이 눈부시다가 곧 녹음으로 변하고 검푸른 녹음으로, 짙푸른 녹음으로 변하면서 민식이도 마음이 단단해지리라 생각한다. 젊은 날 꽃잎 위를 걸으며 봄에 취하고 술에 취해 한번 울었다는 것,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말해 주었다. 그다음 날도 민식이는 다시 전화를 해 죄송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내게 잘했어, 그런 순간에 전화하고 싶은 선생이 되어 나는 많이 기뻤어 그리고 걱정도 되고. 세번이나 신춘문예에 떨어졌지만 반드시 기회는 올 거야. 넌 이미 시인이다. 이번엔 그가 웃었다. 술에 취해 언, 골목길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단다. 가끔 아름다움은 우리들 상처를 건드리지. 외로움을 툭 차기도 하지. 그러면서 그 아름다움을 힘으로 다시 살아가는 거지. 네 가슴속에 쌓인 꽃잎들이 하나하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면 너의 글은 사람들을 위로하게 될거야. 난 널 믿는다. 딸이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 왔다. 식탁에 놓으니 집이 환하다. 밤에도 낮에도 전등불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밖은 꽃들이 피어나 거리를 환하게 하지만, 아직은 집 안에 두는 꽃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꽃을 자주 사는 편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언제나 꽃을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눈길을 주게 하였다. 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다. 함께 보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 꽃에 대한 예의다. 꽃을 바라보면서 찡그리는 사람은 없다. 아주 옛날에 고향 마당 뒤편은 화려한 꽃밭이었다.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얼굴이 붉어지고 한바탕 싸움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 시간엔 아버지가, 어느 시간엔 어머니가 그 꽃밭에 서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화를 다스리느라 그 꽃밭에 계셨다는 것을. 내가 남편과 싸우고 나서 알았다. 내가 마흔쯤이었을 때 우리 집은 한 오십평의 정원이 있었다. 집안이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워지면 때로는 남편이 그 정원에 서 있고, 그가 들어오면 내가 그 정원에 서 있었다. 자신을 견디느라 남편과 나도 그 정원이 어머니 같은 곳이었다. 산수유와 개나리, 진달래, 목련과 작약과 모란이 피어나는 그 정원에서 참 오랫동안 눈물을 견디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만 시끄러워도 정원에만 나가면 어머니의 쓰다듬는 손길이 있고, 함께 웃어 주는 어머니의 미소가 있었다. 그 정원을 떠나왔지만, 그래서 아파트에서도 빌라에서도 살았지만 언제나 꽃을 안고 살았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그 견디는 힘을 나는 참 많이도 꽃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는 그를 반려라고 하지만 나는 꽃이 반려다. 너무 시간이 짧다고 친구는 말하지만 꽃이 피려는 준비기간에도, 몽우리로 바시시 얼굴을 내밀려는 순간에도 개화에서 지는 과정이 다 인생사다. 꽃이 지고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담을 때도 한바탕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그 사랑 때문에 빈자리를 견디어 낸다. 고맙다고 말하면서. 기다림을 배우면서. 지금은 꽃의 계절이다. 민식이가 꽃처럼 피어나는 생의 계절이 오기를….
2024-04-16 18:26:49[파이낸셜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일 선관위가 대파를 들고 투표장에 가는 것을 정치 행위로 규정한 것에 대해 "자유를 노래 부르는 대통령이 이제는 국민들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날 경기 용인시병 부승찬 후보 지지유세에서 "정부기관들이, 철저하게 중립적이어야 할 선관위조차도 이제는 이 폭압적인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느냐"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표는 "나중에 혹시 사전투표 가시면 대파는 빼고 쪽파만 붙여서 가시라"며 "이 나라가 '입틀막'도 부족해서 생선 회칼로 기자들 허벅지를 테러했다고 용산의 시민사회수석이라는 사람이 언론을 겁박하더니, 이번에는 파를 틀어막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표는 "이 참담한 현실을 두고 스웨덴 연구기관이 '선진국 중에서 독재화의 길을 가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느냐. 망신스럽지 않느냐"면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고 무역흑자 세계 5대 강국이던 대한민국이 1년 10개월도 안 되는 이 기간에 북한보다도 못한 200위대 무역적자 국가가 되고 말았다"고 몰아세웠다. 아울러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순방이 민생이라고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소리를 하면서 해외를 줄곧 들락거리시더니, 결국은 외교 망신에 국제적으로 고립돼서 우리 기업들의 수출 환경만 악화되는, 경제 영토가 줄어드는 외교 실패만 불러오지 않았느냐"며 "물가, 이자는 왜 이리 높고 월세는 왜 이렇게 빨리 올라가나. 도대체 국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했는가"라고 맹공했다. 이 대표는 "고통 속에 절규하는 우리 국민들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며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엎드려 큰 절 하면서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강자들이 권력을 누리다가 그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악어의 눈물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 대표는 "우리는 약자들이 고통스러운 눈물에는 동정할지라도 결코 잘못된 권력을 계속 누리려는 저 악어의 눈물에는 일말의 동정도 보내서는 안 된다"며 "더 이상 이 나라를 망치지 못하도록 4월 10일에 확실히 책임을 물어달라"고 촉구했다.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2024-04-06 13:51:15[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 장대인(張戴人)이라는 의원이 있었다. 장대인은 명의 중 한 사람으로 약을 잘 썼다. 그러나 모든 병을 약으로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의원들이 약을 처방해서 치료 효과가 없으면 장대인을 찾았다. 장대인은 한 남자의 심통(心痛)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어느 마을에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금은보화를 싣고 산을 넘다가 도적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죽게 되었다. 관리는 그 소식을 듣고서는 크게 슬퍼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 후에 관리에게 갑자기 흉통이 나타났다. “아 심장이 너무 아프다. 명치까지 답답하구나.” 관리의 흉통은 날마다 심해지더니 그치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윗배에 덩어리가 잡히는 듯하더니 사발을 엎어놓은 듯 부어올랐다. 관리의 흉통은 실제로는 심장통은 아니었다. 이것은 위장증상을 겸한 신체형 자율신경 장애에 의한 흉통으로 보통 위완심통(胃脘心痛)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역류성 식도염에 의한 흉통도 실제 심장통과 구별해야 한다. 또한 심리적인 문제를 겸한 경우를 칠정심통(七情心痛)이라고 한다. 그 관리는 가슴의 통증이 심해서 참을 수 없었다. 한 의원이 약을 써 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의원은 다시 침을 불에 달궈서 놓는 번침(燔鍼)이나 뜸치료를 해보고자 했지만 관리는 불침과 뜸 치료는 무섭다고 거부했다. 그래서 그 의원은 어쩔 수 없이 장대인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장대인은 왕진을 가서 진찰을 했다. 관리를 눕혀 놓고 전중혈(膻中穴)을 눌러 보니 자지러지는 듯한 통증을 호소했다. 전중혈은 양쪽 젖가슴 사이의 정중앙 부위로 이 자리를 눌러서 통증이 심하다는 것은 기가 울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나 화병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당이 굿을 하려고 왔다. 보통 제대로 된 의원이라면 ‘어찌 환자의 병을 무당에게 맡기는 것인가?’하고 호통을 쳤을 텐데, 장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무당에게 “여기에 잘 오셨네.”라고 덕담까지 했다. 장대인은 무당을 불러서 “내 부탁이 있소. 다른 말과 행동은 하지 말고 여러 가지 미친 듯한 소리나 흉내를 내서 병자를 즐겁게 해 주시오.”라고 하면서 몰래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무당은 돈을 벌려고 굿을 하는 터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당은 갖가지 동물 흉내를 내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작두를 타는 듯하다가 일부러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도 했다. 관리는 그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크게 웃었다. 굿이 끝난 이후에도 관리는 혼자서 웃어댔다. 웃음을 참지 못할 때는 남몰래 벽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하루 이틀 동안 있기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가슴 아래에 뭉친 덩어리가 모두 흩어졌고 흉통도 사라졌다. 관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제 제 흉통이 모두 없어졌습니다.”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의원이 장대인에 물었다. “대인은 그 관리를 어떻게 치료를 하신 겁니까?” 그러자 장대인이 말하기를 “<내경>에 ‘우즉기결(憂則氣結)’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울해하면 기가 뭉친다는 의미입니다. 또 말하기를 ‘희승비(喜勝悲)’라고 했는데, 이 의미는 기쁨은 우울하거나 슬픔을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희즉기완(喜則氣緩)’하기 때문에 기뻐하게 되면 뭉친 기운이 풀어집니다. 따라서 관리를 기쁘고 즐겁게 해서 뭉친 기운을 풀어서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몰아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고 오로지 약이나 침구(鍼灸)만을 이용해서 치료하려고 한다면 그 통증만 증가시킬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의원은 장대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번은 장대인이 분노가 지나쳐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부인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관리의 부인은 분노로 인해서 음식을 전혀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부인은 억지로 시집을 왔기에 억울함이 있었다. 시집을 와 보니 자신의 친정보다 가난하고 남편도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다. 부인은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하인들을 꾸짖기만 했다. 심지어 수가 틀리면 주위 사람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악담을 퍼붓기까지 했다. 관리와 부인 사이에는 아직 자식이 없었는데, 부인이 하도 화를 내는 바람에 관리는 합방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많은 의원들이 처방을 해 봤지만 부인의 증상은 거의 반년 동안 차도가 없었다. 부인은 몸이 핼쑥해졌다. 그래서 부인의 남편이 장대인에게 진료를 요청했다. 장대인이 진찰을 해보더니, “부인의 증상은 약으로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관리는 당황하며 “그럼 이대로 두고만 보란 말이요?”라고 되물었다. 장대인은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장대인은 2명의 기녀(妓女)에게 화장을 진하게 시켜서 광대처럼 분장을 한 후 부인 앞에 나서게 했다. 그랬더니 부인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크게 웃었다. 다음 날에는 기녀들에게 서로 붙잡고 씨름을 시켰더니 그 모습을 본 부인은 다시 더 크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는 사람을 시켜서 부인의 양쪽 옆에서 음식을 차려놓고서는 과장하면서 게걸스럽고 맛있게 먹도록 했다. 그러자 부인은 “그 음식이 그렇게 맛이 있소? 나도 한번 먹어봐도 되겠소?”하고 물으면서 맛을 보기까지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부인은 분노하는 것이 점차 줄어들더니 식욕이 점차 좋아지면서 식사량이 늘었다. 장대인은 관리에게 “부인은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것이요. 그러니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즐겁고 웃을 만한 일을 만들어주시면 이유없이 분노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라고 당부했다. 관리는 항상 부인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어떻게든지 웃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부인은 조금씩 자신의 삶과 처치에 만족하더니 분노하는 증상이 사라지고 얼마 후에는 합방도 하게 되어 자식도 낳게 되었다. 한번은 걱정이 많은 한 부잣집 부인의 불면증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 부인은 예민한 성격으로 별것 아닌 일로도 근심 걱정이 많았다. 약 2년 전에 부자였던 친정집이 망한 이후로 근심 걱정에 휩싸여 거의 2년 동안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불안 초조해했다. 문제는 잠을 전혀 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의원들이 치료를 해 봤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부인의 남편은 결국 장대인을 찾아 치료를 부탁했다. 장대인이 진찰을 해보더니 “양쪽 촌구맥이 모두 늘어져 있을 것을 보면 이것은 비(脾)가 사기(邪氣)를 받은 것입니다. 의서에 ‘비주사(脾主思)’라고 했는데, 바로 비(脾)는 사려(思慮)를 주관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비기(脾氣)가 뭉쳐서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고 입맛이 없고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건망증과 불면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남편은 “그럼 어떻게 치료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장대인은 “의서에 보면 목극토(木克土)라고 했습니다. 간목(肝木)의 기운이 비토(脾土)의 기운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간목의 감정은 분노이기 때문에 부인을 화나게 하면 비토(脾土)의 기운인 근심 걱정이 꺾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제 부인은 화를 낼지 모르는 사람이오.”라면서 걱정했다. 장대인은 부인의 분노를 유발하기 위해서 남편과 작당 모의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인의 패물이며 집문서, 땅문서 등 재산을 모두 거두어 부인 모르게 다른 곳으로 숨겨두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취해서 밤늦게 들어오고 부인이 재산을 행방을 물어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부인이 조금씩 화가 날 즈음, 이제는 집에도 아예 들어오지 말고 잠시 멀리 떠나 있으라고 했다. 마을에는 ‘남편이 부인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이 소문도 남편의 하인들을 시켜서 일부러 내게 한 것이다. 부인은 그 소문을 듣고서는 대노(大怒)를 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부인은 “아이고 내 팔자야. 분하고 원통하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서는 땀을 흠뻑 흘리고 나더니 그날 밤은 곤히 잠들었다. 다음 날도 하루종일 잠만 잤다. 이렇게 누워있기를 8~9일 정도까지 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음식을 찾았다. 장대인은 부인을 찾아 진맥을 해보더니 “이제야 맥이 평화로움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고서는 밖을 보면서 “이제 들어오시오.”라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랬더니 문밖에 있던 남편이 패물과 집문서 땅문서를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야 환하게 웃으며 장대인에게 감사를 전했다. 모든 증상이 약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약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증상은 마음을 다스려 치료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 제목의 ○○은 ‘마음’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유문사친(儒門事親)> ○ 息城司侯, 聞父死於賊, 乃大悲哭之, 罷, 便覺心痛, 日增不已, 月餘成塊, 狀若覆杯, 大痛不住, 藥皆無功. 議用燔針炷艾, 病患惡之, 乃求於戴人. 戴人, 適巫者在其旁, 乃學巫者, 雜以狂言以謔病者, 至是大笑, 不忍回. 面向壁, 一, 二日, 心下結塊皆散. 戴人曰: 內經言, 憂則氣結, 喜則百脈舒和. 又雲:喜勝悲. 內經自有此法治之, 不知何用針灸哉? 適足增其痛耳! (식성에 사는 사후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가 도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후에 갑자기 심통을 느꼈는데 날마다 증가하여 그치지 않았고, 한 달쯤 되었을 때 덩어리가 생겼는데 모양이 잔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았다. 통증이 심하여서 잘 참지를 못하였고, 약을 써도 모두 효과가 없었다. 불에 달구침을 놓거나 뜸을 사용하려고 의논하는데 환자가 싫어하여 이에 대인을 찾아와 도움을 구하였다. 대인이 이르렀을 때 마침 무당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어서, 이에 무당에게 여러가지 광언으로써 병자를 즐겁게 해 주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하였더니 크게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얼굴을 벽을 향한 채 1~2일 동안 있었더니 심하에 뭉쳐있던 덩어리가 모두 흩어졌다. 대인이 말하기를 내경의 말에 ‘우즉기결’한다고 하였는데, 기뻐하게 되면 모든 맥이 펼쳐지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희승비’라, 내경에 이러한 방법으로 치료하라고 하였는데,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찌 침구를 사용한단 말인가? 그 통증만 증가시킬 뿐이리라!) ○ 項關令之妻, 病食不欲食, 常好叫呼怒罵, 欲殺左右, 惡言不輟. 眾醫皆處藥, 幾半載尚爾. 其夫命戴人視之. 戴人曰, 此難以藥治. 乃使二娼, 各塗丹粉, 作伶人狀, 其婦大笑; 次日, 又令作角抵, 又大笑; 其旁常以兩個能食之婦, 誇其食美, 其婦亦索其食, 而爲一嘗. 不數日, 怒減食增, 不藥而瘥, 後得一子. 夫醫貴有才, 若無才, 何足應變無窮? (항관령의 부인이 노하는 병으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고, 항상 소리치거나 꾸짖는 것을 좋아하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고 악언을 그치지 않았다. 많은 의사들이 모두 처방을 하여 약을 먹였지만 거의 반 년 동안 여전하였다. 그 남편이 대인으로 하여금 진료하게 하였는데, 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약물로 치료하기는 힘듭니다.”하고, 이에 2명의 기녀로 하여금 화장을 하게 하여 희극배우처럼 만들었더니 그 부인이 크게 웃었다. 다음날 또한 그렇게 하여 씨름을 하게 하였더니 또 크게 웃었다. 그녀의 곁에서는 항상 양쪽으로 잘 먹는 부인을 두고서 음식이 맛있음을 과장하게 하였더니 그 부인도 역시 그 음식을 찾아서 한 번 맛보게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노하는 것이 줄어들면서 식욕도 증가하여 약을 먹지 않아도 나았으며, 나중에 자녀도 낳았다. 무릇 의사에게는 재주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만약 재주가 없다면 어찌 변화가 무궁한 것에 충분히 호응할 수 있으리오!) ○ 一富家婦人, 傷思慮過甚, 二年不寐, 無藥可療. 其夫求戴人治之. 戴人曰:兩手脈俱緩, 此脾受之也. 脾主思故也. 乃與其夫, 以怒而激之. 多取其財, 飲酒數日, 不處一法而去. 其人大怒汗出, 是夜困眠, 如此者, 八, 九日不寤, 自是而食進, 脈得其平. (한 부잣집 부인이 사려가 지나치게 심하여서 2년 동안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이 없어서, 그 남편이 대인을 찾아와서 치료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대인이 말하기를 “양쪽 수맥이 모두 완하니 이것은 비가 사기를 받은 것으로 ‘비주사’하는 까닭이다.”라고 하면서, 이에 그 남편과 함께 분노가 밀려들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의 재물을 많이 취하여 여러 날 동안 음주하고선 한 가지 방법도 가르쳐 주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그 부인이 크게 노하면서 땀을 흘리고는 그날 밤 곤하게 잠을 잤다. 이와 같이 잠자기를 8~9일 동안 깨지 않더니, 그 이후로 음식을 먹고 맥도 그 평해졌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1-12 11:14:22[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 어느 겨울날 한 부인의 옆구리에 내종(內腫)이 생겼다. 내종이란 복부의 안쪽에 난 혹의 일종으로 배 안쪽에서 살덩이처럼 만져지면서 마치 아주 큰 종기처럼도 보였다. 부인의 남편은 고종사촌지간인 친척 의원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친척 의원은 벌써 몇몇 의원들이 치료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바라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촌 형님이 자신을 일부러 부른 것을 알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친척 의원이 도착했다. 그곳에는 사촌 형님과 일가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형수의 병세를 물어보니 대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벌써 20일이 다 되었다고 했다. 창만(脹滿)도 심했는데, 특히 아랫배는 더 볼록했다. 더군다나 왼쪽 옆구리에 있는 장문혈 근처에는 주먹만 한 혹이 튀어나와 있었다. 의원이 손으로 혹을 만져 진찰을 하려고 하자 형수는 정신이 있는 듯 없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 손도 못 대게 했다. 형수는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했다. 창만 때문인 것 같기도 했지만 폐장과 명치 부위에서 가래가 들끓은 듯했다. 의원이 한숨을 쉬면서 멍하니 보고 있자니 갑자기 형수의 아랫배 배꼽근처에서 ‘꾸룩~’하고 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덩어리진 가래가 올라오다가 숨길을 막는 듯했다. 형수는 가래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컥컥거리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의원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런 증상은 본 적이 없었기에 진맥을 할 엄두도 나지 않고 멀뚱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내 이런 병증은 평생....”이라면서 나지막이 내뱉었다. 분명 독백이었으나 주위 사람들도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형수의 괴증(怪症) 앞에서 의원의 넋이 나간 모습을 보고서는 주변의 친척들은 이 참담함을 견딜 수가 없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촌 형님이 울먹이며 물었다. “자네. 형수는 어찌 되는 것인가? 대체 어떤 병증인가? 살릴 수는 있겠는가?” 그러나 의원은 “형님, 내 이런 병증은 지금껏 본적도 없고, 의서에서조차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손쓸 방도가 있겠습니까. 형수님을 살릴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친척들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곡소리였다. 그때 가까운 친척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부인의 손을 잡고 울면서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님, 이것이 뭔일이다요. 내가 그렇게 말렸건만, 그렇게 추운 날 차가운 대청마루에서 삼베옷만 입고 하루종일 솜을 타니 병이 나지 안 나겠소. 평소에도 냉증으로 고생을 하던 양반이 그렇게 추운 날 몸을 혹사시켰으니.... 흑흑~ 내 형님이 죽거든 볕이 드는 따뜻한 양지바른 곳에 묻어 드리리다. 죽어서는 냉증으로 고생하지 마시오. 아이고~ 아이고~”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인의 말을 듣고서는 의원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깜짝 놀랐다. ‘대소변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것은 장에 적취(積聚) 등이 있을 때 간혹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창만(脹滿)하면서 가래를 뱉어내지 못하고 싸늘함이 이리 극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여인의 말이 옳구나. 참으로 옳구나. 이것은 냉적(冷積)이 분명하다. 소변을 보지 못한 것도 산기(疝氣)로 인한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냉적(冷積)은 냉증(冷症)이 오래돼서 쌓인 것을 말하고, 산기(疝氣)란 냉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하복부가 켕기는 증상과 비뇨기질환을 통틀어 말하는 병증이다. 의원은 이제야 형수의 맥을 잡았다. 촌구맥은 미세(微細)하게 느껴지면서도 간간이 유력(有力)하고 현삭(弦數)했다. 맥을 보니 아직도 양기(陽氣)가 끊기지 않고 작은 불씨처럼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의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의원은 사내에게 “형님, 형수님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형수님의 병은 분명 냉증(冷症) 때문입니다. 지금 이 방에 있는 화로에 있는 숯불을 가져와서 손을 덥힌 후에 뜨거워지면 그 손으로 형수님의 가슴을 계속해서 문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남편은 의원의 말대로 덥혀진 손으로 아내의 흉골 가슴부위를 이리저리 문질러 주었다. 그랬더니 목에서 ‘꾸루륵~’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가래와 거품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입안에 가득 찬 뭔가를 명주천으로 급히 집어서 빼내 보니 3~4촌 정도 되는 낫자루같은 누렇게 뭉친 가래였다. 형수는 전보다 좀 편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는데, 아직 정신은 들지 않았다. 한 식경(食頃)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의원은 큰 쑥뜸을 가져다가 명치 아래에 있는 거궐혈에 뜸을 떴다. 가래소리는 조금씩 가라앉았고 정신이 조금 드는 듯 신음소리를 냈다. 의원은 다행스러워하면서 이제야 침을 놓을 생각을 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불을 밝히게 하고,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울음을 멈추게 한 후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서는 옛 침법을 따라 먼저 합곡을 보(補)하고 그 다음 태충, 삼음교, 해계를 사(瀉)하였다. 합곡과 태충은 사관혈로 막힌 기운을 뚫고자 함이고, 해계는 비위의 기운을 풀어주고 삼음교로 간비신(肝脾腎)의 기운을 동시에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침을 놓고 나서 의원은 방금 전 형수의 손을 잡고 통곡을 했던 여인에게 부탁을 해서 작은 솥과 명주천 그리고 대파 한단과 굵은 소금을 준비해 오라고 했다. 여인이 부탁한 것들을 가져오자 의원은 대파의 흰뿌리 부분과 소금을 함께 섞어서 솥에 넣고 화로 위에서 살짝 노릇한 연기가 날 때까지 볶기 시작했다. 이것을 명추천으로 감싸서 배꼽과 아랫배에 찜질을 하게 했다. 찜질을 하는 도중에도 새로운 대파와 소금을 볶아서 식으면 바로 뜨거운 것으로 교체했다. 이 찜질법은 냉증으로 인한 제반 증상이나 냉증으로 인해 소변을 보지 못하는 전포증(轉脬證)을 치료하는 찜질법이다. 의서에는 총위법(蔥熨法, 파찜질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원은 찜질을 충분하게 한 후에는 또다시 신궐(배꼽)과 아랫배에 있는 기해, 관원혈에 뜸을 떴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을 지나 벌써 새벽이 되었다. “꼬끼오~ 꼬끼오~” 닭이 두번 울자 형수에게서 대소변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의원은 가족들에게 옷을 새로 갈아입히게 한 후 급히 따뜻한 죽과 물 한 사발을 먹이고자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죽을 먹이려고 형수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형수가 벌떡 일어나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습니까? 친척들은 왜들 이렇게 다들 모여 있습니까?”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도 또렷해졌고 숨도 편안했다. 혹처럼 부풀어 있던 곳을 만져보니 다시 평평하게 되었으며 처음처럼 통증도 호소하지 않았다. 의원이 생각하기에 이렇게 좋아진 것을 보니 형수의 옆구리 혹은 벽음(癖飮)으로 여겨졌다. 벽음(癖飮)은 수기(水氣)가 옆구리에 고여 있다가 한기(寒氣)를 받아서 엉키고 뭉쳐서 덩어리가 생긴 것이다. 쉽게 말하면 찬 자극으로 인한 장경련이나 내장근육의 뭉침으로 나타난 냉적(冷積)이었던 것이다. 의원은 사촌 형님에게 “이제야 병이 물러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형수님은 오랫동안 냉적(冷積)을 앓고 계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냉증에 명방인 부자이중탕(附子理中湯)을 처방해 주고서는 잘 조리하기를 당부했다. 벌써 아침이 되어 해가 떴고, 집안의 친척들은 안심하고 각자 제집으로 돌아갔다. 냉증(冷症)은 단지 단순한 수족냉증으로 시작하지만 관리되지 않고 만성화되는 경우 냉적(冷積)이 되면 실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병증으로 나타난다. 수족냉증도 문제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특히 여성의 경우 기해혈과 단전이 위치한 아랫배가 차가워짐을 경계해야 한다. 냉증은 만병의 근원이다. * 글 제목의 ○○은 ‘냉적(冷積)’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명의경험록> 醫案. 冷結似肉腫. 余之內從兄李某, 以其妻內腫請我, 去見病症, 則大小便不通, 已至二十日, 胸腹皆極鼓脹, 右過章門穴, 腫核突出如拳, 痛不近手, 而氣息惟存, 眼睛突出胞外. 俄見, 痰氣自臍而上, 聲如猪, 嘔而直上塞喉. 時蒼黃之狀, 不能自忍, 擧家號哭, 余亦無所用手之望. 門外有一婦人, 聞哭聲顚倒而來入於後門, 高聲曰, 叔主叔主, 不知病源, 徒稱內疽, 可訝可訝. 此人本有冷病, 而向日極寒, 以單衣坐於冷地, 終日彈花, 得此病狀. 何不以此早言乎醫而治之云云. 余聞此言, 頓然覺悟曰, 大小便塞, 雖內腫或有, 其然腹胸之脹, 奚如此極也. 婦人之言, 是哉是哉. 適於其時炭火極好, 卽招內從父子言曰, 此病必是冷也, 持此炭火而去, 以手灸火乘熱, 掌熨膈上云云, 如其言熨之, 須臾似有喉聲, 而痰沫照出齒外, 急鑷而拨之, 鎌柄如焉黃痰, 長三四寸許. 自此似通呼吸, 而猶未知也. 食頃之間, 又有痰聲如初, 自臍漸上, 急取大艾炷, 灸巨闕穴分, 而使不得上沮, 以手尤勤摩熨, 則痰聲稍止. 時已夜半, 使兒輩止哭聲明火燭, 銘念持針, 用手提揷, 依古人之鍼法, 先補合谷, 次瀉太沖ㆍ三陰交ㆍ解溪矣. 至雞二鳴, 大小便一時俱下, 急取溫粥水, 呑飮一甫兒, 病人忽然起坐曰, 吾何如此, 以何事多會云云. 氣息晏然, 更見其腫處, 則核至平平, 雖猛按無痛處, 有若病虛. 日出, 一家皆大笑而罷歸.(의안. 냉결은 육종과 비슷하다. 우리 고종 사촌형 이 아무개가 아내의 내종 때문에 나를 불렀다. 가서 증세를 살펴보니 대소변이 모두 나오지 않은 채 이미 20일이 되어 흉복부가 대단히 팽팽해져 있었고 오른쪽 장문혈 근처에 주먹만한 종기가 튀어나와 있는데 아파서 손도 못 대게 했으며 숨은 겨우 쉬고 있었지만 눈알은 눈꺼풀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잠시 보고 있으니 담기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와 돼지 같은 소리가 났고 구역질하자 곧장 올라와 목구멍을 막았다.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참을 수 없어 온 집안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었고 나도 손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 그때 문 밖에 한 부인이 곡소리로 전도된 것을 듣고 뒷문으로 들어와서는 큰 소리로 질책하는 말이 “아저씨, 아저씨, 병의 원인은 알지 못하고 겨우 내저라고만 하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원래 냉병이 있었는데 얼마 전 매우 추운 날 얇은 옷을 입고 찬 곳에 앉아서 종일토록 솜을 타다가 이 병을 얻은 것입니다. 어찌 이런 말을 의원에게 미리 말하여 치료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말하였다. “대소변이 막힌 것은 내종이 있을 때 간혹 생길 수 있긴 하지만 흉복의 창만이 어찌 이리도 극심한가? 부인의 말이 옳구나. 참으로 옳구나.” 때마침 숯불이 잘 만들어졌기에 고종 사촌형과 조카를 불러 “이 병은 분명 냉증 때문입니다. 이 숯불을 가지고 가서 손으로 불을 쬔 다음 뜨거워진 손으로 가슴을 문질러 주십시오.”라고 말하니 그대로 하였다. 잠시 후에 목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가래와 거품이 입 밖으로 새어나와서 급히 집어서 빼내니 3~4촌 정도 되는 낫자루같은 누런 가래였다. 이때부터 숨은 잘 쉬는 것 같았지만 아직 정신은 들지 않았다. 한 식경 동안 또 아까처럼 가래 소리가 들리며 배꼽부터 점점 위로 올라갔는데 급히 큰 쑥뜸을 가져다가 거궐에 뜸을 뜨고 막힘없이 위로 갈 수 있도록 손으로 더욱 부지런히 문질러 따뜻하게 해주니 가래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때는 이미 한밤중에 되어서 아이들에게 울음을 멈추고 불을 밝히게 한 후 정신을 집중하여 침을 잡았다. 손으로 잡아당기며 꽂으면서 옛 사람의 침법을 따라 먼저 합곡을 보하고 그 다음 태충, 삼음교, 해계를 사하였다. 닭이 두번 울자 대소변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서 급히 따뜻한 죽과 물 한 보시기를 먹였더니 환자가 벌떡 일어나 “내가 왜 이렇게 있습니까? 왜들 이렇게 많이 모여 있습니까?” 하고 숨도 편안해졌다. 종기가 있던 곳을 다시 보니 평평하게 되었으며 비록 빨갛기는 했지만 눌렀을 때 아픈 곳이 없었으므로 병이 물러난 것 같았다. 해가 뜨자 집안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 동의보감> 洗熨法. 小便難, 小腹脹, 不急治殺人. 葱白三斤, 細剉炒熱, 以帕子包分兩裹, 更替熨臍下卽通. 又炒鹽半斤, 囊盛, 熨臍下亦通.(소변을 누기 어렵고 아랫배가 불러 오를 때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 총백 3근을 가늘게 썰어 뜨겁게 볶은 후 수건으로 싸되 두 꾸러미로 만든 후 번갈아 배꼽 아래를 찜질하면 소변이 나온다. 볶은 소금 반 근을 주머니에 채워서 배꼽 아래를 찜질하여도 소변이 나온다.) ○ 冷極脣靑, 厥逆無脉, 陰囊縮者, 急用葱熨法, 或吳茱萸熨法, 幷艾灸臍中, 與氣海, 關元 各三五十壯.(냉기가 극심하여 입술이 퍼렇고 손발이 싸늘하며, 맥이 없고 음낭이 오그라들 때는 급히 파찜질법, 오수유찜질법을 쓰고, 아울러 배꼽과 기해, 관원에 각각 30~50장 쑥뜸을 뜬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2-12-19 15:57:56[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먼 옛날, 한 남자가 중년의 사내를 업고 의원을 부리나케 찾았다. 환자를 업고 온 남자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으며 기진맥진했다. 한참의 거리를 업고 온 듯했다. 의원은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된 것이요?” 환자를 업고 온 남자는 “지금 제가 업고 온 이는 제 형님으로 함께 나무를 하고 있는데, 형님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지면서 ‘억’라고 쓰러져서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되었소?”하고 의원이 물었다. 남자는 “약방 바로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업고 왔으니 한 일식경(一食頃) 정도 된 듯하오.”라고 했다. 일식경은 밥 한끼를 먹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보통 30분 정도를 의미한다. 의원은 진맥을 해 보고서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체념한 듯 “어찌 손을 쓸 방도가 없소이다.”라고 했다. 형을 업고 온 남자는 “아니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시오? 급하게 침이라도 한 대 놔야 하는 것 아니오.”하며 언성을 높였다. 의원은 “지금 침이 문제가 아니요. 이 사내는 지금 심병(心病)으로 인해 쓰러진 것으로 벌써 이렇게 팔다리 오금부위 아래까지 청색이 나타나면서 싸늘한 것을 보면 이제 곧 명을 다 할 것이요. 의서에 보면 이러한 심통을 진심통(眞心痛)이라 했는데, 아침에 발작하면 저녁에 죽고, 저녁에 발작하면 다음 날 아침에 죽는다고 했소. 그럼 나절 만에 죽는다는 말인데 사실 나절도 긴 시간이고 발병하면 곧 죽는다는 의미일 뿐으로 진심통은 죽을 뿐 고칠 방법이 없소이다.” 그러면서 “내 행침(行針)을 하지 않는 이유는 침을 맞고서도 죽을 것이 뻔한데, 설령 침을 맞고 나서 죽으면 괜히 조잡한 침술 때문에 죽었다는 꼬투리가 잡힐 것이 아니겠소. 어서 관이나 준비하시구려.” 의원은 명을 재촉하는 환자의 치료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미안했지만 자신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진심통은 요즘 병명으로 급성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를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의원이 말이 끝날 무렵 환자는 명을 다해 숨을 거두었다. 형을 업고 온 사내는 통곡을 하면서 다시 형을 업어 집으로 갔다. 의원에게는 한 제자가 있었다. 스승의 진료를 말없이 지켜보던 제가가 물었다. “스승님, 허임은 진심통에 단중혈(丹中穴, 전중혈)에서 사방으로 각각 1치가량 떨어진 곳에 침을 놓은 후 부항을 붙인다고 했습니다. 분명 해당 침법으로 살렸던 진심통 환자가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허임(許任)은 조선 중기의 최고의 침의(鍼醫)로 명의 중 한 명이었다. 의원은 차분하게 “허임이 기록한 진심통의 침법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심장은 군주지관(君主之官)으로 원래 병들지 않는다. 그래서 심장의 혈맥(血脈)이 막히면 치료방법이 없는 것이다. 허임이 침법으로 심통환자를 살렸다지만 이는 본경의 혈맥이 완전하게 막힌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너도 맥동(脈動)을 느껴봐서 알겠지만 혈맥이 온전하면 옥구슬이 쟁반을 구르듯 맥의 흐름이 부드럽고, 혈맥이 약간이라도 막히면 맥의 흐름이 껄끄럽고 막혀서 마치 빗방울이 모래에 떨어지는 듯 혹은 칼로 대나무를 긁는 것 같으며, 혈액이 완전하게 막히면 맥동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혈맥이 지나지 않는 살집만을 누르는 느낌인 것이다. 따라서 심통이 생겼을지라도 혈맥이 완전하게 막히지 않았다면 죽음만은 면할 수 있지만 때때로 발작하면서 오래도록 낫지 않고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완전한 진심통이 생길 것이다.” 의원이 제자에게 심통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 한 남자가 약방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문을 열어보자 남자는 급체(急滯)를 했다고 하면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부위를 툭!툭!툭! 치고 있었다. 의원은 환자를 진맥을 해 보더니 급하게 “통증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점심을 급하게 먹고 나서 일을 하러 나갔는데, 갑자기 마치 흉곽이 수레에 깔린 듯 답답해졌습니다. 뒷목도 뻐근하고 턱과 왼팔 겨드랑이도 아프오. 중완에 침 한방만 놔 주시오.”라고 말했다. 의원은 복진을 해 보고 환자의 손발을 만져 보더니 “당신은 체한 것이 아니라 심통이오. 만약 체기가 있었다면 손발이 서늘했을 것이외다. 지금 위병이 아니라 심병이기에 중완에 침을 놓아서는 효과가 없소. 이는 궐심통(厥心痛)으로 치료를 급히 하지 않으면 진심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이요.” 의원은 급하게 단삼, 삼칠근, 용뇌 그리고 침향을 가루내어 환자에게 먹였다. “이 가루를 입안에 넣고 삼키지 말고 침으로 녹여드시오. 원래 혀는 심장의 관문으로 혀로 약을 녹이면 심장의 경락으로 가장 빠르게 도달하게 될 것이요” 그리고 등에 있는 심수혈(心兪穴)에 침과 뜸을 놓았다. 그랬더니 환자는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들면서 편해졌습니다.”라고 했다. 환자는 요즘 병명으로 협심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환자가 심통이 나아졌다고 좋아하는 순간 또 다른 환자가 찾아왔다. 환자는 자신이 심통이 생겨 곧 죽게 생겼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진찰을 해 보니 이 환자는 위장병에 의한 급성 위통이었다. 의원이 사관(四關)에 침을 놓고 엄지손가락에 있는 소상혈(少商穴)과 엄지발가락에 있는 은백혈(隱白穴)에 사혈을 했더니 그 자리에서 통증이 사라졌다. 제자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스승님, 이 환자는 자신이 심통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이리 태연하게 자침을 행하신 것입니까?” 의원은 “이 환자는 심장통이 아니었다. 보통 위장의 윗 입구를 분문(賁門)이라 일컫는데, 세속 의원들은 분문이 심장과 연결되어 있어서 위완통(胃脘痛)까지 심통이라고 해서 위완심통(胃脘心痛)이란 표현까지 하는 바람에 심장통으로 오인한 것 뿐으로 이는 심장과는 무관한 것이다. 요즘 세간에서 이를 심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심한 위통이나 식도의 통증 또한 심장의 통증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삼가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의서에 보면 진심통 이외에도 심장에 나타나는 통증을 9종류로 구분해 놓은 것으로 이 모든 종류를 서로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내가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진찰을 하고 있지만, 사실 머릿속은 태풍이 몰아치듯이 불안과 걱정이 많구나. 나는 심통과 관련된 증상을 오진하여 많은 환자들을 죽었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새벽에 약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면서 체했다고 왔던 환자의 3할은 바로 진심통(심근경색)이나 궐심통(협심증)이 원인인 심통이었던 것 같다. 의술이 미천하여 병을 보는 눈을 뜨지 못했을 때는 단지 환자의 말만 듣고 위장병에 쓰는 소체환(消滯丸) 등만을 주었는데, 진심통이었던 환자들은 환약을 먹기도 전에 아니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명횡사를 했다. 이제 병을 보는 의안(醫眼)을 얻었지만, 이는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얻게 된 것이니 부끄럽고 괴롭구나. 세속에 보면 자신이 명의라고 떠드는 의원들이 있지만, 명의는 결국 환자들이 만들어 주는 것일 뿐이기에 겸손해야 할 것이다.” 제자는 “스승님께서는 진심통(眞心痛)은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방하는 방법은 있을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의원은 “우선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또한 너무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여색과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고 정기를 보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혈(瘀血)을 없애는 것이다. 어혈이란 혈액을 탁하게 하고 동시에 혈관이 막히게 한다. 어혈을 없애고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팔다리와 몸을 자주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다만, 농사일로 너무 과로하는 것은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좋지 않다. 고서에 보면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의 지도리는 좀 먹지 않는 것은 바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도 바로 기혈순환의 중요성을 의미한 것이다.”라고 했다. 제자는 다양한 종류의 심통이 있다는 것을 문헌으로는 봤지만 하루만에 3종류의 심통 환자를 경험한 것에 당황스러웠다. 심통에 있어 자칫 판단을 잘못하면 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기에 두려움도 있었다. 불현듯 스승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인 ‘명의는 환자가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에 오진(誤診)과 같은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제자는 오늘에서야 과거 선인들이 왜 심장을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고 해서 ‘왕과 같은 장부’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광제비급> 眞心痛, 朝發夕死, 夕發朝死, 心爲莊府之主, 故神去氣竭, 手足靑至節, 死, 無治法, 許任方云, 丹中穴, 四方各去一寸, 針後, 付缸云.(진심통은 아침에 발생하면 저녁에 죽고 저녁에 발생하면 아침에 죽는다. 심장이 오장과 육부의 주관자이므로 신이 없어지고 기가 고갈하여 손과 발 끝에서 관절까지 퍼렇게 되면 죽게 되며 치료법이 없다. 허임방에는 단중혈에서 사방한 치 떨어진 곳에 침을 놓고 그 자리에 부항을 붙이라고 하였다.) < 단곡경험방> 眞心痛卽死不治. 其久心痛者, 是心之與別絡爲風邪冷炅所乘痛, 故成殄不死, 發作有時, 經久不得差也. 胃之上口名曰賁門, 賁門與心相連, 故經所謂胃脘當止而痛. 今俗呼謂心痛者, 誤也. 夫九種心痛, 詳其所由, 皆在胃脘, 而實不在心也.(진심통은 곧 죽으므로 치료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심통을 앓는 것은 심에서 갈라져 나온 낙맥이 풍사와 냉열의 침습을 받아서 아픈 것으로 병이 들었으나 죽지는 않고, 때때로 발작하면서 오래도록 낫지 않는다. 위의 상구를 분문이라 일컫고 분문은 심과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내경에서는 ‘위완은 심에 해당되는 부위가 아프다.’고 하였다. 요즘 세간에서 심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무릇 9가지 심통이 있는데, 그 원인을 자세히 보면 모두 위완에 병이 있는 것이지 실제로 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의종손익> 俗稱心痛, 非眞心痛, 乃胃脘當心痛, 或脾連心痛, 或腸虛陰厥, 亦令心下痛. 久者心之別絡, 爲風冷熱所乘痛, 故成疹不死. 眞心痛者, 大寒或汚血衝心, 手足靑至節, 痛甚, 死不治.(민간에서 심통으로 일컫는 병은 진심통이 아니라, 위가 아픈 것을 심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비장이 심장과 연결되어 아픈 것이다. 혹은 양허로 음궐이 되어도 명치 아래가 아프다. 오래된 심통은 심에서 갈라진 낙맥이 풍사나 냉열의 침입을 받아 아픈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앓아도 죽지는 않는다. 진심통이란 병은 심한 한기나 더러운 피가 심장을 침범하여 손발에서 관절까지 퍼렇게 되는 증상으로, 통증이 심하며 죽어도 치료할 수 없다.) < 동의보감> 嵇康曰, 養性有五難, 名利不去爲一難, 喜怒不除爲二難, 聲色不去爲三難, 滋味不絶爲四難, 神虛精散爲五難. 五者無於胸中, 則信順日躋, 道德日全, 不祈善而有福, 不求壽而自延, 此養生之大旨也. (중략) 孫眞人曰, 雖常服餌, 而不知養性之術, 亦難以長生也. 養性之道, 常欲少勞, 但莫大疲及强所不能堪耳. 夫流水不腐, 戶樞不蠹, 以其運動故也. 養性之道, 莫久行, 久立, 久坐, 久臥, 久視, 久聽, 皆令損壽也. (혜강이 말하기를 양성에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 명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첫째 어려움이고, 희노를 없애지 못하는 것이 둘째 어려움이며, 소리와 여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셋째 어려움이고, 기름진 음식을 끊지 못하는 것이 넷째 어려움이며, 신이 허하고 정이 흩어지는 것이 다섯째 어려움이다. 이 다섯 가지가 가슴속에 없으면 믿고 따르는 마음이 날로 두터워지고 도와 덕이 날로 온전해져서 선을 구하지 않아도 복이 오고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아도 절로 장수하게 된다. 이것이 양생의 큰 요지라고 하였다. 손진인이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음식을 늘 먹더라도 양성술을 알지 못하면 장수하기 어렵다. 양성하는 방법은 늘 힘을 적게 쓰고 너무 피로하게 만들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고 문의 지도리가 좀먹지 않는 것은 늘 움직이기 때문이다. 양성하는 방법은 오래 걷거나 오래 서 있거나 오래 앉아 있거나 오래 누워 있거나 오래 보거나 오래 듣지 않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지 않으면 모두 수명을 단축한다고 하였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2-10-31 10:48:37어느날 아침,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그 전화가 왔다. "줄리, 그가 또 술을 마셔." 가족이 안 좋은 상태로 되돌아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내 상태도 나빠지는 걸 느꼈다. 음주 때문이 아니었다. 내 삶을 손쓸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 '고약한 사고'라는 왜곡된 사고 양식 때문이었다. 과하게 분석하고 끙끙거리며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사고 말이다. 내가 커피를 따르는 동안, 노란 네살배기 래브라도 레트리버 클라이드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무게 45㎏의 개로서는 최대한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녀석은 지금이 산책 시간인 걸 알았다. "넌 언제나 행복해. 그렇지 않니, 아가야?" 금주하다가 다시 음주를 시작한 가족이 휘말릴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커피를 마셨다. 전화 한 통으로 20년 동안 내가 알아넌(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의 음주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자조 모임)에서 회복을 위해 애쓴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12단계(알코올중독자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치료 단계)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걱정하는 편이 나았다. "클라이드, 이리 오렴. 산책하러 가자." 클라이드는 날 앞장서서 후문까지 요란스럽게 뛰어갔다. 걱정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내게 오시게끔 하는 단계에 이른 적이 있던가? 아이팟을 꺼내고 클라이드의 목줄은 쓰지 않기로 했다. 녀석은 절대 떨어져서 돌아다니는 법이 없었다. 다람쥐를 쫓는 법도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우리는 몇 에이커에 이르는 숲속 깊숙한 곳에 산다. 도로에서는 우리 통나무집이 보이지 않았다. 자갈을 깐 진입로는 530m 정도였고 산책할 만한 곳이 많았다.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무선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높여서 음악으로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몇 달 전, 포기해야 했던 또 다른 상황에 부닥쳤을 때 알아넌에서 만난 조력자 BJ와 이야기를 나눴다. "줄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네가 통제할 수 없어. 그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으로 하고 계셔. 줄리가 할 일은 걱정을 내려놓고 그분을 믿는 거야." BJ는 내 조력자일 뿐만 아니라 동물 애호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클라이드를 들였을 때 BJ는 아주 신이 났다. 브리더는 겨우 6주 된 클라이드를 내주었다. 너무 어릴 때 데려가는 건가 싶었다. BJ는 강아지가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켰고, 그 말이 맞았다. 클라이드가 진입로를 따라가며 나무를 킁킁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열다섯살에 세상을 떠난 검은 래브라도 레트리버 쿠퍼를 떠올렸다. 둘은 외모도 성격도 딴판이었다. 클라이드는 쿠퍼처럼 근사한 대회용 체형이 아니었다. 통 모양의 가슴에 다리는 길고 가늘었으며 체중은 쿠퍼보다 7㎏ 정도 더 나갔다. 클라이드는 머리가 무거워서 불안정하고 약간 독특하게 생겼지만, 성격은 어떤가. 느긋하고 충성스러웠다. 자기 가족과 함께 있는 걸 가장 좋아하는 개였다. "클라이드, 너는 걱정하는 법을 몰라. 그렇지, 아가?" 녀석은 내게 활짝 웃어 주며 계속 걸었다. 진입로 끝에 있는 우편함까지 갔다가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으로 향했다. 도로에서 15m쯤 떨어진 곳에서 클라이드가 내 옆에 없다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녀석은 언제나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뺐다. 음악이 큰 소리로 흘렀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짖는 소리나 자동차 경적, 끼익 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라이드의 흔적이 없었다. "클라이드, 이리 와!" 클라이드는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내 소리를 들었다면 뛰어올 것이다. 진입로를 따라 급히 내달렸다. 그러다가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클라이드를 발견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허리께가 안쪽으로 흔들렸다. 발이 피투성이였다. 내 발치에 쓰러지기 전에 겨우 꼬리를 흔들었다. '분명 차에 치였어.' 클라이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따금 호흡이 가빴다. '수의사에게 데려가야 해.' 내가 들고 가기에는 클라이드가 너무 컸다. "클라이드, 이리 와." 녀석은 황갈색 눈으로 날 응시하면서 영양(羚羊) 같은 다리를 쭉 폈다. 그러고 우뚝 섰다. 내 다리를 두드리며 '따라와' 했다. 천천히 한 걸음씩 클라이드는 나와 함께 76m 떨어진 차까지 걸었다. 차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죄책감이 밀어닥쳤다. 목줄을 썼더라면.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아이팟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끙끙대며 걱정하지 말고 조심했더라면. 마침내 차에 이르렀다. 간신히 클라이드를 뒷좌석에 태우고 BJ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도해 줘. 수의사에게 가는 길이야. 클라이드가 차에 치였어." 몇 분 후 우리는 검사실에 있었다. 수의사는 무엇도 단언하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폐와 흉벽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공기가 쌓여서 호흡이 힘들어지는 기흉일 수도 있었다. 수의사는 클라이드를 데리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를 하고 싶어했다. "어떤 개들은 이런 부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고관절 골절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호흡이 악화되면 밤새워 지켜볼 수 있는 더 큰 동물병원으로 옮길 겁니다. 오늘 오후 4시쯤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때쯤이면 더 많은 걸 알아낼 겁니다." 시계를 봤다. 9시30분. 4시까지 기다릴 수 있으려나? 떠나기 전에 클라이드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아가야. 사랑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세세히 되짚으며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점심 즈음이 되자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클라이드를 보러 가야 했다. 수의사의 진료실로 가는 동안 전화가 울렸다. BJ였다. "얘, 괜찮니?" BJ에게 소식을 전했다. "뭘 해야 하는지 알지, 그렇지?" "그렇게 정신 놓고 있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줄리,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 그건 사고였어. 떨쳐 버려야 해. 클라이드와 함께 하나님을 믿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 맡겨라.' 가족, 직장에서의 걱정, 여타 근심거리에 대해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가? "넌 괜찮을 거야. 하나님께서 살피고 계셔." 클라이드가 죽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는 얘기 같았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동물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던가? 정말 그분을 믿었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오늘만 해도, 클라이드와 내 삶의 다른 모든 이를 놓아 줄 수 있을까? 운전대를 움켜쥔 손을 보았다. 단단히 잡았던 걸 느슨하게 풀고 운전대에서 손을 뗀 다음, 손을 뒤집었다. 쫙 편 손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는 아주 강건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요. 클라이드와 제 모든 가족을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기도록 도와주시겠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아시니까요.' 동물병원으로 걸어 들어가서 접수처로 향했다. "일찍 왔어요. 그저 클라이드가 어떤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접수 담당자는 아까 그 검사실로 날 이끌었다. "선생님께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수의사가 어떤 얘기를 하든, 결과가 어떻든,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수의사가 들어오더니 엑스레이 사진과 약 몇 병을 든 채 말했다. "클라이드는 정말 상냥해요. 기흉이 있지만, 골절은 없습니다. 가슴이 통 모양인 덕분에 살았어요. 많이 쉬어야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클라이드가 괜찮아요? 정말요? 회복할 수 있는 거죠? 오, 고맙습니다! 클라이드를 볼 수 있을까요?" 나는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럼요. 같이 귀가하세요." 기사가 검사실로 클라이드를 데려왔다. 녀석은 흔들거리며 내게 몇 걸음 걸어오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큰 머리를 내 무릎에 털썩 얹고는 내 손을 핥았다. 클라이드의 목에 내 팔을 둘렀다. 차에서 BJ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거 알아? 클라이드가 무사해. 지금 같이 있어. 믿을 수 있니?" "당연하지! 나 대신 클라이드 좀 안아줘. 언제든 걱정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들거나 상황을 통제하고 싶을 땐 그게 무슨 뜻인지 네가 잘 알고 있다는 걸 기억해." "응,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해. 다시 또 그래야 해." "하나 더 있어. 클라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넌 괜찮았을 거야." 친구의 말을 믿었다. 내게 벌어진 모든 일에서 그의 말을 믿었다.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내려놓아야 해. 다른 길은 없어." 날 응시하는 클라이드를 백미러로 바라보았다. 녀석은 옆길로 샜고 나도 그랬다.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곁을 떠나 떠돌았지만, 이제는 클라이드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중이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1-07-06 17:36:34【파이낸셜뉴스 안산=강근주 기자】 안산시가 전국 최초로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업소 20개를 장애인 권익옹호 업소 ‘오소가게’로 선정하고, 제1호점 안산연세안과에서 현판식을 19일 개최했다. 오소가게는 물리적 제약과 편견 등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안산시와 장애인복지관, 꿈꾸는느림보 사회적협동조합 등이 함께 장애인에게 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된 곳을 ‘장애인 권익옹호업소’로 선정하고 이를 인증하는 브랜드다. 그동안 휠체어 접근 편의시설을 갖춘 우수업소를 선정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정서적인 편의까지 고려해 자치단체 차원에서 인증하는 것은 전국에서 첫 번째 사례다. 안산시는 올해 5월 관계기관과 함께 인증을 위한 원칙을 정립한데 이어 지난달까지 인증 절차를 거쳐 병-의원, 음식점, 이-미용실 등 20개 업소를 첫 오소가게로 선정했다. 선정된 업소는 오소가게를 인증하는 현판과 함께 그림으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AAC(보완대체의사소통) 도구가 비치되며, 경사로 등 편의시설 설치도 지원된다. 이날 1호점 현판식이 열린 안산연세안과는 2012년 2월 개원해 안산시저소득층 아동진료 지원협약 및 한국농아인협회안산시지회 진료협약을 체결해 지역사회를 돕고 있으며, 의료진이 발달장애인 특성을 이해하고 이들을 배려한 시설도 갖추고 있다. 안산시는 이번 20개소 선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매년 업종을 다양화해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이번 사업을 제안하고 전 과정에 참여한 류경미 꿈꾸는느림보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은 “비장애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흔한 일상이지만, 발달장애인을 동반하는 가족에게는 동네가게 이용조차 용기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곳”이라며 “평소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게 맞아주는 동네가게에 감사하고, 이런 따뜻한 가게를 시민이 더욱 응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오소가게를 적극 홍보해 장애인이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업소를 늘려가고, 장애인 인식 개선에 앞장서겠다”며 “많은 업소가 인증을 받아 장애인이 살기 좋은 안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오소가게는 평범하고 친근한 인사말인 ‘이리(로) 오소’, ‘이리 오세요’를 안산시가 자체 브랜드로 개발했으며, 이미지는 ‘OSO’를 형상화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0-11-20 08:4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