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 너랑 있으면 평소에는 밤을 새우며 머리를 쥐어짜도 한 줄도 떠오르지 않던 문장들이 넘치도록 흘러나와 하지만 나는 그걸 쓰지 않을 거야 왜냐면 시간이 아까우니까 그냥 이렇게 너를 보고 있는 게 더 좋으니까 그 문장들이 모두 다 사라져서 기억나지 않게 될 때까지만 너를 볼 수 있게 허락해줘 2013년 6월, 그러니까 지금보다 9살 어렸을 적 쓴 글이다. 당시에 나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회사에 취업한지 2개월이 되었으며, 1년을 더 기다리면 장풍을 쏠 수 있다고 놀림을 받던 20대 후반의 모쏠이었다. 갑자기 9년 전의 글을 들춰본 연유란 몇 시간 전에 보고 온 뮤지컬 '물랑루즈!' 때문이고,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오늘(사실 30분 전에 21일은 어제가 됐지만) 돌아오는 길에 서울 거리에 쌓인 하얀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빨갛게 달군 하트 모양의 돌을 쌓인 눈 위에 던지면 그 모양대로 깊은 동굴이 생기는 것처럼, 작품의 여운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물론, 30대 후반 경제지 기자의 가슴이란 눈처럼 폭신하진 않아서 자국이 크게 남지는 않는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1890년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디바 사틴과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했다. 다양한 공연들을 보다보면 때때로 작품의 배경과 상황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할 때가 있다. 동일시할 등장 인물을 찾지 못하거나, 공연 자체가 지루하거나, 전날의 숙취로 공연 자체에 집중을 할 수 없다거나 등등 공연에 빠져들지 못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되면 작품 속이 아닌 바깥에서 작품을 '관찰'하며 보다 더 비판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볼 수 밖에 없다. '물랑루즈!'는 2시간이 넘는 긴 공연이었지만 작품 안에 제대로 들어가서 즐겁게 관람했다. 뮤지컬에는 매우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관객은 그 중 어느 한 명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적어도 그들이 표상하는 대표적인 인간 군상을 통해 자신의 상황 혹은 주변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어려운 말로, 극중 등장인물의 개별성을 통해 그들이 대표하는 보편적 인간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 명의 캐릭터 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입체적으로 변화,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랑루즈의 다이아몬드이자 화려한 디바인 사틴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매춘부는 잊으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자신이 늙고 아름다움을 잃으면 지금의 화려함도 시들어 버릴 것임을 알고 있다. 화려함 속에 숨겨진 연약함은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극 중 주요 남성 배역은 △크리스티안 △몬로스 공작 △해롤드 지들러 △툴루즈 로트렉 △산티아고 등 5명이다. 크리스티안은 가난한 무명의 작곡가로 사틴과 사랑에 빠진다. 몬로스 공작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틴은 물론 그녀들의 보금자리인 물랑루즈를 통째로 삼키려고 한다. 해롤드 지들러는 물랑루즈의 단장으로 물랑루즈를 살리기 위해 물랑루즈는 물론 사틴까지 팔아 넘긴다. 툴루즈 로트렉은 크리스티안을 물랑루즈로 인도한다. 산티아고는 열정 넘치는 댄서이자 카사노바다. 주인공인 크리스티안과 그와 대척점에 있는 몬로스 공작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툴루즈 로트렉이란 캐릭터도 놓치기 아깝다. 극 중 넘버 가사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해당 구절을 들으며 크리스티안과 몬로스 대신 툴루즈 로트렉을 떠올렸다. 툴루즈 로트렉은 거리에서 구걸하던 어린 사틴을 거둬들이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 주제에 무슨, 언감생심"이라는 혼잣말을 되뇌일뿐이다. 사랑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절대적인 타자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노력을 해도 그것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니니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다. 물랑루즈의 댄서로 압도적인 춤실력과 매력이 있지만 사틴에 가려져 있다. 그녀는 사틴을 질투하지만 사틴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사틴이 사라져야 자신이 더 빛날 수 있지만 사틴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고 교육받지만 살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서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누군가는 조연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세상에 주인공은 그리 많지 않음을. 그리고 확률상 자신은 주인공보다 조연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7월 24일의 거리'에는 이 같은 사실을 담담하지만 서늘하게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 사람의 매력이란 각자가 쌓아온 인생 경험에서 배어나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게 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토시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순전한 거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연극을 한다고 치자. 어느 유치원에서든 왕자 역할을 맡게 되는 남자애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공주 역에 어울리는 여자애가 반드시 있다. 태어난 지 고작 3, 4년밖에 안 된 아이들이 왕자나 공주 역할에 어울리는 인생 경험을 쌓았을 리가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화사한 매력은 인생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랑루즈!'의 음악과 가사도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틴과 사틴이 서로에게 불러주는 "네가 있는 세상, 참 아름다워"라는 가사는 단순하지만 곱씹게 된다. 단순하게 "네가 참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대신 너로 인해 세상 전체가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 박재범처럼 "니가 너무 섹시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라고 훅 치고 들어오는 것도 멋있지만, 에드 시런처럼 "나는 너라는 모양과 사랑에 빠졌어(I'm in love with the shape of you)"라고 '몸매'를 애둘러 칭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연출적인 부분도 훌륭하다. 무대의 화려한 세팅과 조명을 제외하더라도 극 중에서 서로 다른 두 명의 인물과 두 가지 상황이 교차로 진행되는데 대사들이 오묘하게 이어진다. 또 극중에서 무대에 올리는 액자식 구성의 작품에서 특정 주요 대사가 반복되는데 실제로 리허설이 아닌 최종 공연에서의 대사는 앞 뒤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레드벨벳은 이미 5년전에 이렇게 노래했다. "빨간 맛 궁금해 허니". 물랑루즈는 빨간 맛이다. 하지만 빨강의 매력은 참 다양하고 오묘해서 같은 빨강이라도 채도와 명도,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빨강은 저급하고 야해보이지만 어떤 빨강은 압도적으로 품격있고 섹시하다. 물랑루즈의 빨간 맛은 이 겨울, 30대 후반의 이미 딱딱해진 가슴을 가진 경제지 기자에게 기꺼이 초과 근무를 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이환주의 아트살롱'은 회화, 조각, 음악, 공연,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시, 시사회 등의 후기와 리뷰, 각종 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코너입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2-12-22 02:05:50[파이낸셜뉴스] ■역사상 가장 똑똑한 인간은? 30만년전 인류가 탄생하고 현재까지 단일 개체로 가장 똑똑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리스토 텔레스, 소크라테스, 유클리드, 레오나르도다빈치,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리처드 파인만 등 여러 후보가 있을 것이다. 똑똑함(지능)을 정량화해 순위를 매기기 위한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식이 IQ(지능지수)다. 2012년 비영리단체 수퍼스칼라는 당시 기준 현존하는 가장 똑똑한 사람 10명을 꼽았다. 순위에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IQ 160), IQ 210으로 10년간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던 한국인 김웅용씨도 포함됐다. 2위는 IQ 225의 미국 천채물리학자 크리스토퍼 히라타, 대망의 1위는 IQ 230인 호주의 수학자 테렌스 타오가 이름을 올렸다. 수퍼스칼라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는 IQ가 90~110사이며 하위 2.5%는 IQ 70 이하다. 상위 2.5%는 IQ 130 이상, 0.5%는 IQ 140 이상에 속한다. IQ 테스트 방식이 알려지며 현대로 올수록 최고 IQ가 높아진다는 점, 이미 죽었기 때문에 IQ 테스트를 할 수 없는 과거의 사람에게 가산점을 소량 준다고 가정했을 때 개별 인간으로서 가장 똑똑한 'X'의 IQ는 넉넉하게 240정도 될 것 같다. 30만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평균적인 인류의 약 2배 정도 IQ수치가 되는 것이다. 개별 개체 간에 2배라는 IQ 차이는 엄청 커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같은 '종' 내에서의 이야기다.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으로 비교를 확대하면 그 차이는 더 커진다. 예를 들어 인류와 가장 흡사한 원숭이나 고릴라의 경우 두 종간에는 넘을 수 없는 지적 장벽이 존재한다. 인간은 시멘트와 나무와 철로 거대한 건물을 만들고 수도와 전기, 불을 사용하며 건물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원숭이 역사상 가장 똑똑한 원숭이를 데려와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평균적인 아이보다 지능이 떨어질 것이다. 원숭이는 종의 차원에서 개나 고양이보다 똑똑하고, 개나 고양이는 닭이나 비둘기 보다 똑똑하다. 비둘기는 물고기 보다, 물고기는 지렁이나 플라나리아 보다 더 똑똑하다. 원숭이, 개와 고양이 등은 IQ 측정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점점 더 그 층위를 내려가면 IQ 측정이 불가능한 생물도 나온다. 그렇다면 여기부터 IQ가 아닌 '종'별 층위라는 다른 단위를 하나 더 만들어 보자.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의 종간 층위를 임의로 10으로 설정한다. 그 아래인 원숭이는 9, 돌고래는 8, 개는 7 이런 식으로 내려간다. 2단계 쯤은 단세포 생물, 1단계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종간 층위는 1단계 뿐일지라도 서로 간에 넘을 수 없는 지적 능력 차이가 존재한다. ■'양자역학'만큼 충격적이었던 '특이점' 2014년 6월 14일, 필자는 양자역학 이론을 처음 접했던 날 만큼의 큰 지적 충격을 받았다. 우연히 참석하게된 한 시민교양 강좌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로부터 처음으로 '인공지능과 특이점'에 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종별 지적 층위' 개념은 그날 강의에서 따왔다. 김대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 곡선은 2차 함수를 따른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선형적(1차 함수)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을 계기로 급속하게 속도가 증가하는 '수확 가속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구를 통해 인간(호모 사피엔스) 6세 정도에 해당하는 AI를 개발하는데 약 2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가정하자. 그 이후에 인간 성인에 해당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데는 1년, 그것을 뛰어 넘는데는 1달, 또 그것을 뛰어넘는데는 1시간, 다시 그것을 뛰어넘는데는 1분이 걸린다는 식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적 층위를 10으로 정의했을 때 AI가 인간 수준의 지능에 도달하는 시점을 '특이점(싱귤래러티)'이라고 부른다. 만약 AI가 특이점을 돌파해 종간 지적 수준 10에 도달하는 순간 그 다음날 11단계, 그리고 1시간 뒤에는 20단계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은 시간이 지나 AI는 지적 층간 레벨 1000단계, 10만단계를 초월해 쭈욱 발전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인공지능이 인류를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미래는 영화 '터미네이터'나 '메트릭스' 등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인간이 바퀴벌레를 유해한 생물로 보지만 멸종시키는데 총력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인류를 초월한 초지능적 존재도 인류를 그냥 바퀴벌레 취급하며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대식 교수는 그날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과 자유의지를 가진(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로봇이 등장할 지도 모릅니다. 로봇에게는 인간에게 가장 큰 질문이었던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미래 로봇에게 가장 큰 고민은 '내 생각이 과연 진짜 내 생각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의심과 '불완전한 인간이 왜 지구에 존재해야 하는가'가 될지도 모릅니다." 구글의 인공지능 책임자이자 뇌공학자인 레이먼드 커즈와일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2029년과 2045년을 AI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2029년쯤엔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감정까지 느끼는 인공지능이 출현하고, 2045년에는 인공지능과 결합으로 인류의 육체적·지적 능력이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시점, 특이점이 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20~40대 젊은 남녀 과학자 300명을 대상으로 특이점에 대해 조사한 결과 약 90%가 2050년에 AI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역사학자 유발하라리 역시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4차 산업혁명의 발달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전공학, 빅데이터, 나노기술, AI의 발달로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수만년간 이어져 온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자체에 변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인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을 뜻한다. 현재는 사람에게 오늘의 날씨나 주요 뉴스를 정리해주고,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는데 불과한 인공지능이 30년 뒤에는 실연당한 인간을 위로해 주거나, 최신 '끈이론'과 양자역학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 설명해 주고, 모차르트와 피카소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결함에 대해 강의를 할지도 모른다. ■'이환주의 아트살롱'은 회화, 조각, 음악, 공연,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시, 시사회 등의 후기와 리뷰, 각종 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코너입니다. ▶관련 기사 보기 “미래엔 존재 고민하는 로봇 나올 것”..김대식 KAIST 교수 파이낸셜뉴스입력 2014.06.15 16:34 "언젠가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AI)과 자유의지를 가진(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로봇이 등장할 지도 모릅니다. 로봇에게는 인간에게 가장 큰 질문이었던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미래 로봇에게 가장 큰 고민은 '내 생각이 과연 진짜 내 생각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의심과 '불완전한 인간이 왜 지구에 존재해야 하는가'가 될지도 모릅니다." 과학하는 철학자, 혹은 철학하는 과학자. 지난 14일 서울 안국동 안국빌딩에서 진행된 문화과학 석강 프로젝트 '문화의 안과 밖' 강연장에서 본 김대식(47) 카이스트(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의 인상이다. 그는 이날 '뇌, 현실, 로봇'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며 철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뇌과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만약 오늘 강연을 듣고 나서 제가 반바지를 입고 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제 강연에 집중하지 않은 겁니다"라고 말해 모든 청중이 그의 반바지(강연)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김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지난 8일 영국 레딩대에서 처음으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AI) 컴퓨터 유진 구스트만을 언급하며 자아를 가진 로봇의 출연 가능성 대해 말했다. 튜링 테스트는 1950년 영국 수학자인 앨런 튜링이 고안한 것으로,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테스트다. 심사위원이 컴퓨터와 5분간 대화하고 인간과 차이를 느낄 수 없다면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본다. "생각은 내면적인 현상으로 우리는 타인이 나와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의식하는지 알 수 없다. 데카르트 역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 했지, '너는 생각한다, 고로 너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우리는 상대의 뇌 안에도 우리와 같은 생각과 의식이 존재할 거라고 단순히 믿어 주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남부 미국인들이 자신과 다른 흑인을 영혼이 없다고 여겨 학살한 사례를 언급하며 로봇인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함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종 차별'과 같은 '기계 차별'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과학의 발달로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이 등장한다면 그들에게 투표권을 줘야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임의대로 로봇의 스위치를 끄는 일도 해서는 안되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과 동일한 로봇을 개발하는 일은 요원하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로봇일지라도 불쌍할 정도로 비틀거리며 걷고, 초당 10의 15승의 숫자들을 처리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도 강아지와 고양이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전자의 경우 인간의 뇌가 예측을 통해 움직이는 것과 달리 로봇은 물리적인 반응 이후에 빠른 계산을 통해 사후 대응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컴퓨터는 정보를 쪼개고 분석해 순차적으로 빠르게 처리하지만 인간의 뇌는 느린 속도로 병렬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로봇과 인공 지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11년 미국의 유명 TV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 2명을 물리치고 우승한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 올초 구글의 로봇회사 '보스톤 다이나믹스' 인수, 아마존의 수송기 '드론' 역시 이런 로봇 기술 선점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김 교수는 언급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우리가 지금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더 길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며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시간의 착시에도 맞대응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에서 김 교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그에 따르면 최근 현대 과학의 많은 실험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회의적인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말해 모든 행동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뇌'라는 것. 실험을 통해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그에 앞서 이미 뇌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뇌의 변화가 사람의 행동에 변화를 준 사례도 다수 관찰됐다. 일례로 미국에서 과거 한 기업의 임원이 갑자기 아내를 살인한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 당시 변호사는 성격을 담당하는 임원의 뇌에 있는 전두엽에 이상이 생겼고 그 살인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망가진 전두엽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담당 판사는 "뇌 과학에서 주장하는 자유의지의 부재가 사실이며 설령 비과학적이라도, 우리는 인간이 여전히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다'는 착시를 믿으며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과거 자신을 담당했던 지도교수가 했던 말을 소개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착시다. 다만 '자유의지(free will)'는 없을 지라도 인간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free unwill)의지'는 있다. 부정적인 행동을 어디까지 막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김 교수는 흔히 말하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시간의 착시 역시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뇌의 정보전달 속도가 느려지고 외부 세상에 대한 업데이트의 주기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기억에 저장되는 영화필름의 프레임이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과 같다. 김 교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나와 세상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다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이 '갑'이고 인간이 '을'인 상황이죠. 나라는 자아를 '갑'으로 바꾸는 것, 우리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합니다. 미래의 내가 갖게 될 기억을 지금의 내가 의식적인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물론 커피도 집중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5분에 불과하죠."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2-08-13 19:03:19[파이낸셜뉴스] 인공지능(AI)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어떨까. 수년 전 이 질문을 주제로 소설을 하나 쓰려고 했었다. 단편소설 절반쯤 되는 분량(원고지 50매)을 썼을 무렵, 무심코 열어 본 이메일 때문에 하필 노트북이 랜섬웨어에 감염됐다. 원고는 모두 사라졌고, 노트북은 폐기해야만 했다. 기억을 더듬어 처음부터 다시 쓸 수도 있었겠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소개팅을 하고 썸인듯한 데이트를 두 번까지 한 그녀가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오고는 마음이 갑자기 식어버려 내 카톡을 읽씹하는 것처럼 어쩐지 김이 새버린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미술계의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처럼 어느날 소설계에 얼굴 없는 작가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 작가는 2054년부터 매년 6월 7일 00시에 온라인에 한 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한다. 자동 번역시스템으로 인해 그가 발표하는 모든 책은 발표 당일 전세계의 독자들에게 실시간으로 판매된다. 얼굴 없는 작가의 장편 소설은 매년 전세계 대중과 평단의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20년 가까이 부동의 베스트 셀러에 오른다. 그의 정체를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들이 나오고, 마침내 20년간 독보적인 베스트 셀러를 써낸 작가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문학계는 지구상에 있는 어떤 인간보다 더 나은 작품을 20년 동안 꾸준히 써낸 이 인공지능의 예술성을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인다. 콧대 높은 스웨덴 한림원은 2082년 마침내 인공지능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인정하며 예술계에 새로운 경쟁자이자 동업자가 출연했음을 선언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풀어서 별로 재미가 없게 느껴지지만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의 출현은 재미있는 화두라고 생각했다. 당시 바둑계에서는 이미 인간은 절대로 AI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 졌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결전이 열렸던 2016년 3월까지만 해도 인류는 인공지능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다실 말해, 전 우주에 있는 모든 철과 물질을 사용해 지구보다 큰 컴퓨터를 만들어도 바둑의 경우의 수를 모두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류는 기계와 달리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인간만이 가진 '인사이트', 지능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알파고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지 않고 인간의 뇌를 흉내낸 학습을 통해 바둑에서 인류를 초월했다. 알파고는 입력된 바둑의 기보를 분석하고 스스로 가상의 대국을 진행하며 성장했다. 인류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을 이긴 AI는 '알파고 리(LEE)'라고 불렸다. 이후 구글은 '알파고 제로'를 새로 만든다. 알파고 제로는 어떤 바둑의 기보도 입력하지 않고 바둑의 규칙만을 입력받고 스스로 학습했다. 알파고 제로는 72시간 독학을 한 후 ‘알파고 리’와 대국한 결과 100전 100승을 기록했다. 인간은 바둑에 있어사 만큼은 인공지능에 완패했다. 하지만 아직 미술, 소설, 영화와 같은 예술 장르에서는 AI가 절대 인간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소설을 통해 당시 필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어 온 특별한 예술적 감성도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지능을 갖춘 존재가 볼 땐 단순한 알고리즘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정말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인간이 느끼기에 예술적인 소설을 써내는 날이 온다면 인간 소설가는 인공지능보다 못한 소설을 계속 써야할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물론, 바둑의 경우 인간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며 인간의 바둑을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긴 하다. 2018년 1월 카이스트 서울캠퍼스에서 '인공지능과 창의성'을 주제로 한 학술 토론회에 청중으로 참여했던 적이 있다. 이날 강연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작품의 예술성이 높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알고리즘이 생산한 예술적 결과물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고, 사회와의 맥락이 없으므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적 느낌을 주더라도 예술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소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하고 '샘'이라고 이름 붙인 마르셀 뒤샹이 현대 미술계에 획을 그은 것은 그의 창작적 의도와, 사회적인 컨텍스트 하에서 예술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 동안 원숭이가 랜덤하게 타자기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완전히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도 그것을 예술이라 부리기는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넥스트 렘브란트'라는 인공지능은 딥러닝을 통해 렘브란트의 모든 작품을 학습했다. 이 AI에게 렘브란트 생전에는 없던 로켓트의 사진을 찍어 출력하면 렘브란트가 그린 것과 완벽하게 흡사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물은 렘브란트가 물감을 손으로 묻혀 번지게 하는 효과, 캔버스 위에 뭉개진 그의 지문까지도 재현해 낼 정도로 정교하다. 실제 렘브란트의 작품과 AI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구별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일반인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넥스트 렘브란트'에 예술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 AI에게 창작의 의도와 사회적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인간적인 지능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강연에서 다른 견해를 냈던 교수도 있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예술적 감성, 혹은 자유의지와 같은 특성들이 과연 정말로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맞을까? 인간보다 고차원의 존재가 봤을 때 사실 인간이 믿고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들은 단순히 조금 더 복잡하고 정교한 알고리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는 취지로 말했다. 2004년 개봉한 SF 영화 '아이로봇'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이 인간형 로봇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윌 스미스는 AI 로봇에게 "너희들은 하얀 캔버스위에 멋진 예술 작품을 그릴 수도 없고, 마음을 움직이는 교향곡도 작곡하지 못하잖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로봇이 단 두 글자의 영단어로 대답한다. "너는?(can you?)" 윌 스미스는 로봇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일반화해 질문을 했고 로봇은 이미 인간의 영역에서 개별적 인격으로 답을 한 것이다. 인류 중에는 피카소도 있고 모차르트도 있지만 너(윌스미스)는 그렇지 못하다. 나도 그렇지 못하다. 너는 어떤데? 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환주의 아트살롱'은 회화, 조각, 음악, 공연,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시, 시사회 등의 후기와 리뷰, 각종 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코너입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2-08-02 09:35:52[파이낸셜뉴스] "글쓰기는 예술이 아닙니다." 2018년 봄쯤,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현직 소설가이기도 한 강사님은 첫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예술'보다 '기술'에 가깝다. 누구나 노력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남긴 히포크라테스 역시 'Art'라는 단어를 쓸 때 '예술'이 아닌 '기술'이라는 의미로 썼다고 설명했다. 당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 사람은 많은데 수많은 의학 '기술'을 익히기엔 한 인간의 삶이 짧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고도 강조했다. 우리는 영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영어를 못한다고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서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해도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스티븐 킹 역시 습작 시절 수많은 글을 여러 곳에 보냈지만 언제나 퇴짜를 맞았다. 스티븐 킹은 책상에 못을 하나 박아 놓고 퇴짜 맞은 글을 적은 종이를 쌓아 갔다. 어느새 퇴짜 맞은 글이 못의 길이를 가득 채웠을 때, 스티븐 킹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그 못을 뽑고 더 긴 못을 그의 책상에 박았다. 스티븐 킹은 무라카미 하루키 만큼 유명한 작가이자 '글쓰는 법'의 바이블 격인 '유혹하는 글쓰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강사님은 글쓰기는 크게 논리적 글쓰기와 서사적 글쓰기가 있는데 논리적 글쓰기는 누구나 훈련을 통해 잘 쓸수 있다고 말했다. 서사적 글쓰기는 노력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소설 꿈나무들의 첫 수업에서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서사적 글쓰기 혹은 문학적 글쓰기를 "뒤늦게 도착한 편지"라고 정의했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총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뒤늦어야 한다.(음미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둘째, 도착해야 한다(한없이 늦어지면 안 된다.) 셋째, 내용이 있어야 한다.(말장난과 농담도 뒤늦게 도착은 하지만 의미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총 3가지 정의가 나온다.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번째 정의에 따르자면 아름다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글쓰기는 '예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헤겔의 미학 연구에서 쓰였던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등 5개를 기본 예술로 봤다. 이후 근대에 무용·연극 등 공연예술, 영화, 사진 등도 예술의 장르로 보고 있다고 한다.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는 "알면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무언가를 속속들이 알게되면 결국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행동하게 된다"고도 했다. 어쩌면 내가, 혹은 우리가 주말에 미술관에, 극장에, 콘서트홀에 잘 가지 않는 것은 예술을 잘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덕수궁 돌담길을 내 오른편에 두고 걸어 올라가다 보면 갈림길 끝에서 검은색의 사람 6명을 위에서 꾸욱 눌러준 모양의 동상이 나온다. 언제나 그 길을 걸으면서 그 동상에만 시선을 두고 걸었다. 하지만 그 동상에서 왼편 언덕을 올라가니 숨겨져 있던 공간이 나타났다.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를 무료로 볼 수 있는 알찬 공간이었지만 문화부 기자를 하기 전까지 그런 곳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현재는 장 미셸 오토니엘의 '정원과 정원'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 '유리구슬 조각'으로 유명한 프랑스 현대미술가다. 수많은 유리구슬을 쌓아 올린 듯한 은빛 구체를 응시하면 구슬 속에서 조금 다른 각도와 크기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을 마주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뒤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필자도 멋지게 '예술'을 정의해 보자. 무언가를 알아가는 한 가지 방식은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테다. 필자에게 예술은 "암호로 적힌 다잉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예술을 이해하고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이란 'A'라는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A'를 'A'가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한다. 'A'를 'B'나 'C'로 표현하기도 하고 'ㄴ'이나 '木' 등 전혀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술가가 남긴 작품의 진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암호에 대한 해독이 필요하다. 그 암호는 외국어 일수도 있고, 어떤 규칙과 배경 속에서만 이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서 관람자(독자)는 사전 준비가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예술가들조차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A'를 닮은 어떤 것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붓에 물감을 적셔 선풍기를 틀고 캔버스에 붓을 휘두르는 화가는 자신의 작품이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모를 것이다. 다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A'에 다가갈 때까지 그 작업을 여러 번 정밀하게 반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에게 꼭 그 의미가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기는 다잉메시지처럼 그 메시지가 누군가에는 제대로 닿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환주의 아트살롱'은 회화, 조각, 음악, 공연,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시, 시사회 등의 후기와 리뷰, 각종 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코너입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2-06-25 21:5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