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8일 서거하고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자동 승계해 찰스 3세로 즉위한 가운데 그의 두번째 아내인 카밀라 파커볼스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찰스 3세와 카밀라는 불륜으로 시작한 관계였다는 의혹을 받아 영국 내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2월 생전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카밀라를 두고 '국왕의 배우자' 칭호를 받기 바란다고 밝히며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어 왕비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찰스 3세는 1981년 다이애나빈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은 1996년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찰스 3세가 카밀라와 불륜관계를 이어가면서 두 사람 사이가 점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이애나 또한 생전 언론을 통해 이 같이 주장 바 있다. 다이애나는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게 된다. 이후 찰스 3세와 카밀라에 대한 영국 국민의 비호감도는 더 높아졌다. 카밀라는 거리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고, 찰스 3세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가 오갔다. 이 때문에 왕위는 찰스 3세가 아닌 아들 윌리엄 왕자에게 계승되어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었다. 윌리엄 왕자는 찰스 3세와 다이애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실제로 지난 5월 여론 조사기관 유고브(YouGov) 조사에 따르면 찰스 3세는 5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81%였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77%였던 월리엄 왕자보다 훨씬 낮은 지지율이다. 또한 키말라가 왕비가 되어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20%에 그쳤다. 이런 가운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난 2월 성명을 통해 "아들 찰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대중들이) 나에게 준 것과 같은 지원을 카밀라에게도 줄 것으로 안다"며 "카밀라가 '국왕의 배우자'로서 충성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카밀라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찰스 3세도 아내 카밀라에게 '왕비' 칭호를 주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 후 이 문제가 영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할 전망이다. 통상 영국 국왕의 아내는 남편의 즉위와 함께 '왕비(Queen Consort)'란 칭호를 받는다. 한편 찰스3세는 카밀라와 2005년 윈저 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결혼 이후 자선 사업을 하며 이미지 개선에 힘쓰고 있다. 찰스 3세는 400여개의 자선단체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도 카밀라와 관련한 영국의 반감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상태다. 찰스 3세는 최근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 가문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찰스 3세와 카밀라는 각종 논란으로 타격을 입은 명성을 회복하는 게 숙제로 남을 전망이다. 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2022-09-09 10:51:03[파이낸셜뉴스]25년 전 오늘,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 찰스 왕세자의 전부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유명을 달리했다. 31일(이하 현지시간)은 다이애나비의 25주기다. 다이애나비는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슬하에 윌리엄과 해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로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간 후 1996년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자신이 가진 대중적 영향력을 통해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알마 터널에서 파파라치를 피해 고속 질주하던 중 차가 터널 안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로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로 전세계적인 애도를 받고 있는 다이애나비의 짧은 일생 36년을 되돌아본다. 불행했던 어린시절 다이애나는 1961년 7월 1일 영국 샌드링엄에서 훗날 스펜서 백작 7세가 되는 올소프 자작 에드워드 존 스펜서와 퍼모이 남작 4세의 딸 프랜시스 사이에서 셋째 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 다이애나의 부모님은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 성격 차이 등으로 매일 다투었고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다. 다이애나는 9살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자택에서 가정교사로부터 홈스쿨링을 했다. 이후 노퍽에 있는 킹스 린 실 필드 학교, 리들워스 홀, 웨스트 히스 여자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찰스와의 만남과 약혼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본 것은 그가 언니 사라의 남자친구였던 17살 때였다. 언니 사라와 8개월간 만남을 이어가던 찰스 왕세자는 사라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다이애나의 눈에서도 사라졌다. 다이애나는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받아 1979년 런던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이애나는 친구들과 함께 살며 가사도우미, 보모, 유치원 보조교사 등의 일을 하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기를 보냈다. 1980년 찰스 왕세자를 다시 만났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며 교제를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1981년 2월 6일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12번 만난 후 청혼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2월 24일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1981년 7월 29일 세기의 결혼식 1981년 7월 29일 전세계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다이애나는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치렀다. 수천 개의 진주가 달린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와 7m 길이의 트레인(머리에 쓰는 베일)으로 치장한 다이애나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성당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결혼식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 7억의 사람들도 모두 찰스 왕세자 부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2004년 NBC가 방영한 테이프에서 다이애나비는 “결혼식날이야말로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파경 결혼 직후부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는 카밀라 파커볼스로 인해 불화했지만, 그들은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들의 갈등을 감추어야만 했다. 원래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던 다이애나비는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언론에 노출되면서 성장한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비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카밀라에 대한 질투와 남편에 대한 불신, 대중 앞에서의 가식적인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이애나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윌리엄과 해리 두명의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면서 1996년 2월 이혼 합의를 공식 발표한 뒤 8월 28일에 이혼했다. 파경설 파다하던 1992년 방한다이애나비는 지난 1992년 11월 2일부터 5일까지 3박 4일간 찰스 왕세자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1883년 한·영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지 109년 만에 영국 왕실 인사로선 첫 공식 한국 방문이었고, 이들 부부의 마지막 외국 방문이었다. 당시 이 부부는 이미 파경설이 전세계에 파다했다. 방한 당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는 한동안 공식석상에 부부동반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애나비는 11월 3일 오전에 찰스 왕세자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혼 후에도 자선·봉사활동 이혼 이후에도 다이애나비는 자선·봉사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다. 짧은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심플한 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는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봉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AIDS 퇴치·아프리카 빈민 구호·적십자 활동·대인지뢰 제거 운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특히 대인지뢰 추방 국제캠페인에 적극 관여해 앙골라·보스니아·르완다 등을 방문하기도했다. 열성적이고 진심어린 다이애나비의 사회 활동을 두고 전 세계가 감동했고, 다이애나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비극적인 죽음, 36세의 짧은 인생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었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다이애니비. 그녀는 1997년 8월 31일 교제 중이던 이집트 출신 재벌 2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파리 알마 터널에서 파파라치를 피해 고속 질주하던 중 차가 터널 안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로 36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당시 윌리엄 왕세손은 15세, 해리 왕자는 12세였다. 장례식은 다이애나가 숨진 지 엿새째 되던 9월 6일 영국 왕실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됐다. 다이애나는 스펜서 가문의 영지에 안장됐다. 다이애나비가 숨진 8월 31일을 앞두고 그가 생전 거주하던 켄싱턴 궁에는 매년 추모 인파가 몰려든다. ssahn@fnnews.com 안삼수 기자
2022-08-29 15: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