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잊혀진 영웅들, 국군포로
정권 차원 마약밀매에 혐의 씌워 온갖 고문..탈북 결심
인천공항서 화려한 조명에 '빛 못본' 아버지 생각나 주저 앉아
유해 수습 도왔던 여동생, 오빠는 정치범 수용소로
국군포로 출신 정당한 대우 위해 끝없는 소송전
탈북민 손명화씨가 보훈처로부터 받은 답변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이진석 기자
북한에서는 1990년대 중반 최악의 식량난이 일어나 약 33만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이 찾아왔다. 북한 정권은 외화벌이를 위해 마약밀매에도 손을 댔다. 지방에서 양귀비(북한명 백도라지)를 생산하면 이를 평양으로 수거해 중국과 옛 소련 등지에 판매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국군포로의 딸인 손명화(56)씨가 근무했던 보위사령부 518소도 양귀비 생산에 관여했다가 일이 터졌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판매책이 붙잡혀 518소에 대해 실토한 것이다. 하룻밤 만에 해산 명령이 떨어졌고, 명분이 필요했던 보위부는 출신성분이 나빴던 손씨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당시 보위부 구치소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꼴이라는 얘기가 돌 만큼 악독한 곳이었다.
10개월 동안 고문을 받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온 손씨는 부모도 없이 1년을 지내온 16살과 14살 아들들을 본 순간 탈북을 결심했다. 2005년 신병교육을 받고 휴가를 나와 군복도 갈아입지 않은 작은 아들의 손을 잡고, 무작정 탈북을 시도했다. 그리고 중국을 거쳐 2005년 12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버지 피로 지켜낸 이 나라..유해수습 요청에 '모르쇠'?
손씨는 "공항에 내리니 사방에 불이 번쩍번쩍하는 모습을 보고 벌러덩 주저 앉았다"며 "아버지가 피흘려 지켜낸 조국은 전깃불이 남아돌아 펑펑쓰고 있는데, 국군포로였던 아버지는 버림 받아 평생을 어두운 탄광에서 보냈나'는 생각에 화가 났었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아버지의 명예를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고향인 경남 김해에 유해를 묻어달라'는 유언부터 받들어야 했다.
수 년간 고생 끝에 지난 2013년 9월 북한에 남아있는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한 뒤 북중 접경인 연길로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중국 브로커가 보관 중인 유해를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국방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정치적 사고가 생길 수 있다'며 거부당했다.
손씨는 박선영 당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이사장으로부터 800만원을 지원받아 중국으로 향했다. 30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유해를 안는 순간 '내 아버지다'는 확신이 가슴에 꽂혔다. 아버지의 유골 하나하나에는 부친임을 증명하는 여동생의 필체가 새겨져있었다.
손씨는 중국에 27일간 방치됐던 유해를 되찾고, 중국 세관을 통과한 후 당도한 연안부두에서 기막힌 광경을 봤다고 했다.
그는 "유해를 찾으러 갈 때에만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그 곳에 수십 명의 취재진들과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며 "그렇게 울고불고 했어도 모른 척 했으면서 목숨을 걸고 유해를 찾아오니 마치 자신들이 모셔온 것 마냥 행사를 열었다"고 했다. 이후 들려온 소식은 처참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했던 여동생과 오빠가 정치범으로 간주돼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2012년 9월 13일 손명화씨에게 아버지 고(故) 손동식씨에 대한 국가유공자증서를 전달했다./사진=이진석 기자
■보훈처서 국가유공자증서 받았건만.."유공자 명단에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9월 13일 국가보훈처는 아버지 고(故) 손동식씨에게 '대통령 이명박' 직인이 날인된 '국가유공자증서'를 수여했다.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2016년 5월 보훈처로부터 받은 증서를 토대로 보훈지청에 국가유자녀 신청을 접수했으나 '손동식씨는 국가유공자등록자 명단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보훈처를 찾아가 따졌더니 '유공자증서를 준 일이 없다'는 겁니다. 손동식이라는 이름조차 등록된 일이 없었습니다. '증서에 적힌 등록번호는 무엇이냐'고 따져도 모르겠다는 대답 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짜 증서를 줬던겁니다."
보훈처는 이후 손씨의 부친에 대해 참전유공자로 새롭게 등록했다. 전쟁에서 전사한 국가유공자와는 달리 참전유공자의 유족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나마 한국으로 귀환에 성공한 국군포로 출신들은 미지급된 군인 보수를 받을 순 있지만,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에 대한 지원은 전혀 없다.
국군포로들이 이렇게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은 법이 잘못되서라는 판단이 들었다. 손씨는 혼자 힘으로 국가를 상대로 수 차례 소송전을 치렀고, 모두 승소했다.
지난 2016년 8월에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에 대한 예우 등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지 않은 건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냈고, 헌재는 지난 5월 31일 해당 부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재 6·25 국군포로가족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손씨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단 한명의 국군포로 출신이 남아있더라도 그들의 삶에 행복을 주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fnljs@fnnews.com 이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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