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연 생활경제부 차장
"은행 돈 빌려 남이 애써 지은 공장 덜렁 사서 사업하면 장사꾼이지 기업인이 아니다." 지난 1991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 말이다. 당시 발언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진 않았다.
다만, 당시 현대의 최대 라이벌이면서 대우그룹을 이끌던 고 김우중 회장을 겨냥했다고 추정될 뿐이다. 김우중 회장은 지난 1967년 500만원으로 출발한 대우실업을 30여년 만에 국내 2위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김 회장의 당시 경영전략 핵심은 '수출과 기업 인수합병(M&A)'이었다.
"기업인이라면 마땅히 정부 허가를 받아 공장 터에 말뚝을 박고,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짓고, 기계를 넣고, 종업원을 훈련시켜 제품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은행 돈 빌려 남이 애써 지은 공장 덜렁 사서 사업하는 사람은 장사꾼이지 기업인이 아닙니다."
정주영 회장이 21세나 아래인 김우중 회장에 대한 라이벌 의식 이면에 기업 M&A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기업 M&A는 자연스러운 기업 운영의 형태인 만큼 비판할 사안은 아니다.
다만, 최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가 시작된 홈플러스 사태를 보면 정주영 회장의 기업인 정신이 다시금 뇌리를 스친다.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는 지난 2015년 7조2000억원을 들여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인수했다. 이 중 5조원가량은 홈플러스 명의의 대출과 MBK 측의 인수금융 대출로 충당했다. 사실상 빚을 내 거대 공룡 유통기업을 사들인 셈이다.
인수 과정의 절차적 문제는 없다. 하지만 기업이 경영상 위기에 놓이면 자구노력을 통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홈플러스는 지난 4일 0시3분께 기습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갑작스러운 법정관리로 직원 2만여명은 물론 협력업체, 개인투자자 등이 위기에 놓였다. 빚내 기업을 산 뒤 자산매각으로 이익을 내고, 경쟁력이 떨어지면 나 몰라라 하는 전형적인 '먹튀 경영'이다.
사모펀드가 투자를 통한 이익창출이 최우선이긴 하나, 수만명의 일터와 수십만명에 달하는 그 가족들의 생계와 직결된 기업을 인수한 이상 최소한의 사회적 도리는 다해야 한다. 지난해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이 시작된 태영건설의 윤세영 창업회장은 여러 말들이 돌긴 했지만, 사재까지 출연하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까지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의 사재 출연 소식은 안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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