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키이우 등 우크라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
계엄령 상황에서도 집회...2022년 개전 이후 첫 대규모 시위
젤렌스키 정부의 반부패기관 탄압 정책에 항의
우크라 매체 "젤렌스키가 민주주의를 배신했다" 격렬 항의
우크라 지원하던 유럽 등 서방도 이번 사태 주시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다.AFP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약 3년 반 동안 러시아의 침공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개전 이후 처음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최근 정부의 부패 수사 탄압을 지적하며 젤렌스키가 약 10년 전 친러 부패 정부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개전 이후 첫 대규모 반정부 시위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에 따르면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이반 프랑코 극장 인근에는 2000~3000명 규모의 반정부 시위대가 집결했다. 젤렌스키 정부는 러시아가 침공한 2022년 2월 이후 계엄령을 선언하고 국내 정치 활동 및 집회를 금지했다. NYT는 이날 시위가 전후에 열린 첫 번째 대규모 반정부 시위라고 평가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고 경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날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도뿐만 아니라 서부 리비우, 남부 오데사 등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시위가 열렸다.
수도에 모인 시위대는 젤렌스키가 정부 감시 기구를 망가뜨려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앞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공공 기관인 국가반부패국(NABU)는 지난달 올렉시 체르니쇼우 우크라이나 전 부총리를 겨냥한 부패 수사에 착수했다. 현지 수사 당국은 사임한 체르니쇼우 외에도 불구하고 주요 국회의원 및 대통령실 관계자에 대한 부패 수사를 진행한다고 알려졌다. NABU는 기소권 없는 수사기관으로 지난 2014년 설립됐다.
우크라이나 검찰과 보안국(SBU)은 이달 21일 NABU 관련 건물을 집중 수색하고 NABU 직원 1명을 러시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SBU는 NABU 외에 부패 사건 기소를 담당하는 반부패특별검사실(SAPO)도 수색했다. SAPO는 NABU의 지원 조직으로 2015년 설립됐다. SBU는 NABU와 SAPO 수장들이 해외에 머무는 상황에서 법원 영장없이 수색을 강행했다. 이달 초에는 우크라이나 수사국(SBI)이 유명 반부패 활동가인 비탈린 샤부닌을 수사하면서 그의 휴대 전화와 PC 등을 압수하기도 했다. 샤부닌은 17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젤렌스키는 내 사건을 본인에게 위협이 되는 언론인, 활동가, 군 인사를 향한 메시지로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정부의 반부패 기관 압박 조치는 22일 정점을 찍었다. 젤렌스키는 이날 저녁 NABU와 SAPO에 대한 우크라이나 검찰 통제를 확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같은 날 오후에 국회를 통과한 새 법률에 따르면 검찰총장은 NABU 수사를 지휘하거나 NABU 외부 기관에 수사를 지정할 수 있다. 또 SAPO의 권한을 다른 검사에게 지정할 수 있게 되며, 변호인의 요청이 있으면 NABU의 수사를 종료할 수 있다. 젤렌스키는 이 법에 대해 "잘 작동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영향력이 없어야 한다. 정의가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연히 NABU와 SAPO는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5월 19일 수도 키이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젤렌스키가 민주주의 배신했다"
우크라이나 영자지 키이우 인디펜던트는 22일 사설에서 "젤렌스키는 방금 모두가 지키려고 싸웠던 민주주의를 배신했다"며 젤렌스키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2014년 '유로 마이단' 혁명을 통해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부를 몰아내면서 친러 노선을 버렸다. NABU는 성명에서 22일 발효된 법률이 "NABU와 SAPO의 독립성을 파괴하고 실질적으로 검찰총장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른 우크라이나 매체 키이우 포스트도 이번 법률이 반부패기관들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NYT에 따르면 참전 용사 출신 인플루언서인 드미트로 코지아틴스키는 22일 소셜미디어에 “시간이 없다. 오늘밤 거리로 나가 젤렌스키가 야누코비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오늘 저녁에 보자!”라고 썼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사쉬코 아담류크(25)는 우크라이나가 단순히 땅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면서 “우리 민주주의가 공격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투에서 두 다리를 잃은 참전용사 올렉산드르 테렌(29)은 정부의 조치가 전쟁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투명한 정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이번 결정은 유럽의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우는 군인들의 사기를 꺾는 일”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정부를 지원하는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이번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마르타 코스 EU 확장 담당 집행위원은 22일 발효된 법안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우크라이나 주재 주요 7개국(G7) 대사들은 21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낸 성명에서 "NABU의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정부 지도부와 상황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22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마이단 광장에 2014년 '유로 마이단' 시위 당시 사망한 시민들의 초상들이 설치되어 있다.EPA연합뉴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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