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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해?" 취준생 아들도, 은퇴 아버지도 불편한 명절..."없애면 안돼요?" [은퇴자 X의 설계]

MZ세대가 부담스러워하던 명절… 이젠 X세대 차례
'50대 백수'에게 쏟아지는 위로·걱정·응원 모두 '불편'

"요즘 뭐해?" 취준생 아들도, 은퇴 아버지도 불편한 명절..."없애면 안돼요?" [은퇴자 X의 설계]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그 불편은 오지랖 넓은 친척들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너 취직은 했니?", "은퇴했다던데 돈은 좀 모아뒀어?" 걱정과 위로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이번 설엔 '입' 대신 '지갑'을 여는 게 어떨까.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뭐해?" 취준생 아들도, 은퇴 아버지도 불편한 명절..."없애면 안돼요?"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설 연휴가 시작됐다. "아~ 너무 즐거운 명절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왕복 7~8시간이 걸리는 귀성길, 고단함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아가지만 머무는 시간은 갈수록 짧아진다. 명절이 주는 '심리적 무게감'이 물리적 거리보다 무거워졌다는 의미다.

그래도 어김없이 사람들은 움직인다. 고향, 집에는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반가움’의 표정은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명절이 모두에게 편한 시간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명절이 불편해진 사람들: "설명이 필요한 시간"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거나 방문 횟수를 줄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취업을 준비 중인 ‘취준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어가는 자녀들이 대표적이다. 명절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를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명절을 앞두고 실시된 여러 조사에서도 이런 변화는 반복해서 확인된다.

취업 준비생, 미혼 자녀들은 명절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들어야 할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를 미리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명절 밥상은 어느새 안부를 묻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확인받는 공간이 됐다.
취업 플랫폼 캐치가 지난해 추석 명절을 앞두고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취준생의 45%가 추석 명절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조언'의 모양을 한 '잔소리'가 가장 클 것 같다. 실제 명절에 '취업은 언제 하니'(38%), 'OO는 이미 취업 했다더라'(14%)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X세대 차례다

이제 여기에 한 세대를 더 포함해야 할지도 모른다. 은퇴자, 혹은 은퇴를 앞둔 X세대다. 이들은 20~30년을 가장으로 살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조직 안에서는 중간 관리자 혹은 핵심 인력으로 일해왔다. 여전히 건강하고 일할 의지도 남아 있다. 직장에서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하지만 주된 일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명절의 공기는 조금 달라진다.

가족끼리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형제·자매와 친인척이 모두 모이는 자리다. 지난해 임원에서 물러난 뒤 첫 명절을 맞은 김충현씨(가명·58)는 그 변화를 또렷이 느꼈다고 했다.

“이제 쉬시면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 “그래도 형님은 벌어놓은 게 있으니 다행이죠.” 동생들이 건넨 위로의 말이다. 하지만 김 씨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악의는 없다는 걸 안다”면서도 “동생들을 챙기던 사람이 이제는 동생들의 걱정을 받는 사람이 됐다는 점에서 짜증이 났다”고 말했다. 예전엔 내가 먼저 안부를 묻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 계획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는 토로다.

재취업을 준비 중인 박종철 씨(가명·56)도 비슷한 감정을 토로했다.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직 일할 생각이 분명히 있는데, 명절만 되면 이미 끝난 사람처럼 취급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이들의 불쾌감은 단순히 예민함이 아니다. 평생을 '주체'로 살아온 세대가 명절 밥상에서 '대상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이다.
모이기 싫어도 모여야 하는 ‘낀 세대’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 나이대는 집안의 중심, 사실상의 가장이었다. 부모 세대는 이미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커 명절이면 자녀들이 모여드는 위치였다. 질문을 받기보다는 던지는 쪽에 가까웠다.

"요즘 뭐해?" 취준생 아들도, 은퇴 아버지도 불편한 명절..."없애면 안돼요?" [은퇴자 X의 설계]
연령별 인구 추이 /그래픽=정기현 기자

하지만 지금의 X세대는 다르다.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상당수는 80~90대에 접어들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 2011년 164만명 수준이던 70~74세 인구는 지난 1월에는 266만명을 넘어섰고 80~84세 어르신은 61만여명에서 133만여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명절은 여전히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하는 날’이다. 부모님 앞에서는 자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현재를 설명해야 하며, 동시에 자녀 세대의 불안도 감싸야 한다.

내색은 못 하지만 재정적인 부담도 있다. 부모님 용돈, 조카들 세뱃돈.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따지지 않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통장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MZ세대는 명절을 ‘선택’할 수 있는 세대지만 X세대는 여전히 명절을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세대다.

세대는 달라도, 질문은 같다

명절 자리에서 오가는 질문은 세대마다 다르다. MZ세대에게는 '어디 다녀?', '결혼은 언제 해?'라는 질문이 오고, X세대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준비는 잘 돼 있지?'라는 질문이 온다. 표현만 다를 뿐, 질문의 핵심은 같다. ‘너의 미래는 괜찮으냐’는 것이다.
질문은 짧지만, 대답은 길다. 그리고 그 대답은 명절 자리에서 하기엔 늘 조금 무겁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웃고 넘기거나, 농담으로 돌리거나, 말을 아낀다.
2년전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 강태석씨(58·가명)는 "친인척이 모이는 명절이 되면 만감이 교차한다"면서 "요즘엔 뭐하냐는 질문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 대학생이나 취준생 조카들을 보면 걱정이랍시고 '취직은'하고 물었던 게 후회될 정도"라고 말했다.

강 씨는 또 "당장 생계는 꾸리고 있지만 설 처럼 번외(?) 지출이 있으면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라면서 "아이들 세뱃돈을 줄일 수는 없고 또 어른들 용돈 챙겨드리는 것도, 내가 퇴직했다고 해서 줄이자니 자존심이 상한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달라지고 있는 것들

"요즘 뭐해?" 취준생 아들도, 은퇴 아버지도 불편한 명절..."없애면 안돼요?" [은퇴자 X의 설계]
연령별 경제활동 /그래픽=정기현 기자

그렇다고 은퇴 이후의 삶이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50~60대의 경제활동 참여도 늘고 있고 주된 일자리 이후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일을 이어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실제 5060세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단순히 생계를 넘어 ‘사회적 연결’을 유지하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많은 은퇴자X들이 '내일배움카드'나 '폴리텍대학'을 통해 기술을 익히고, 프리랜서나 리턴십(재취업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스스로를 재설계하고 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다시 정리하는 구간’이다. 올해 설, 설명이 아니라 안부가, 평가가 아니라 관심이 먼저 오간다면 명절은 다시 반가운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지기 전 따뜻한 찻잔을 먼저 건네는 여유가 필요하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