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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경조사비 20만원, 아내 눈치 보여"... 돈한푼 안벌면서, 왜 그러고 사세요 [은퇴자 X의 설계]

인맥 150명이면 충분... 의무감때문에 만나는 관계 줄이고
힘들 때 꺼내 쓸 수 있는 '관계 통장', 현직서부터 쟁여놔야

"주말마다 경조사비 20만원, 아내 눈치 보여"... 돈한푼 안벌면서, 왜 그러고 사세요 [은퇴자 X의 설계]
사람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맥은 150명 정도라고 한다. 은퇴 후 인간관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모임, 저 모임 나가면서 자신을 소모 시키기보다는 등산, 독서, 운동, 사회봉사처럼 공통 활동이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주말마다 경조사비 20만원, 아내 눈치 보여"... 돈한푼 안벌면서, 왜 그러고 사세요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퇴직하고 나서 한동안은 정말 바빴다. 불러주는 곳도 많았고 갈 곳도 많았다. 회사를 나오기 전과 큰 차이를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에 사는 이동철씨(가명·59)는 은퇴 첫 해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동창회, 직장 선후배 모임, 향우회까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매번 불러주는 지인들이 고마웠다. “아직 내가 잊힌 사람은 아니구나.” 회사라는 이름표가 사라져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생활을 1년 가까이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 일정을 보다 묘한 공허함이 들었다. 약속은 여전히 많았지만 '이 중에 내가 정말 가고 싶은 자리는 몇 개나 될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깊은 생각 끝에 '사람을 많이 만나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허전한 날이 많았다'는 판단이 든 그는 모임 수를 절반 이하로 줄였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를 이야기할 때 보통 한 가지 걱정만 한다.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 실제 은퇴 후에는 연락이 줄고 모임도 빠르게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은퇴자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관계가 줄어드는 것도 겁이 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버겁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는 인간관계도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유지할 수 있는 지인은 150명?

그렇다면 사람이 실제로 유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인간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던바의 수(Dunbar’s Number)’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수를 약 150명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는 영장류의 뇌 크기와 사회적 집단 규모를 비교한 연구에서 나온 결과다. 쉽게 말하면 사람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던바는 인간관계가 하나의 숫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층(layer)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핵심 관계 약 5명 : 배우자, 가족,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된 사람들
△친밀 관계 약 15명 : 자주 연락하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가까운 친구나 친척
△우호 관계 약 50명 : 가끔 만나거나 안부를 나누는 지인
△사회적 관계 약 150명 : 얼굴과 이름을 알고 서로 인지하는 관계
휴대폰 연락처에는 수백 명, 수천 명이 저장될 수 있지만 실제로 깊은 관계는 이 구조 안에 들어간다는 설명이다.

친밀한 지인은 4.1명

"주말마다 경조사비 20만원, 아내 눈치 보여"... 돈한푼 안벌면서, 왜 그러고 사세요 [은퇴자 X의 설계]
평균 친밀한 지인 수 추이 /그래픽=정기현 기자

실제 한국리서치가 지난 연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친밀한 지인' 수는 평균 4.1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지난 2022년 6.4명에서 2023년 6.3명, 2024년 5.7명 등 감소세를 이어간 것이다. 친밀한 지인은 사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혈연관계의 가족 및 친척은 제외됐다.

그러나 인간관계 만족도는 6.4점으로 지난해보다 상승했고, 만족한다는 응답도 68%로 7%p 늘었다. 지인 수가 줄어도 만족도는 높아진 것이다. 이는 관계의 양보다 질이 중요해졌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해석된다.

"주말마다 경조사비 20만원, 아내 눈치 보여"... 돈한푼 안벌면서, 왜 그러고 사세요 [은퇴자 X의 설계]
친밀한 지인 수(2025년) /그래픽=정기현 기자
수는 줄었지만 관계는 또렷

은퇴 후 인간관계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다. 직장에 다닐 때 인간관계는 대부분 회사라는 플랫폼 위에서 만들어진다. 직장 동료, 선후배, 거래처와의 회의 및 회식 등. 업무가 관계를 만들고 자동으로 유지시켜 준다.

하지만 은퇴와 동시에 이 구조가 사라진다. 직함이 사라지고 업무라는 공통 주제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던 사람들도 줄어든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은퇴 이후에는 직장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사회적 관계가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라며 "이 시기에는 기존 관계에만 의존하기보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회사에 있을 때는 회식이나 경조사 같은 관계 유지 비용이 업무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모임 비용, 경조사비, 이동 시간, 그리고 감정 에너지까지 모두 개인 부담이 된다. 그래서 많은 은퇴자들이 ‘관계 유지 비용’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사회생활이었다면, 은퇴 이후에는 하나의 선택이 된다.

문제는 이때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극단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한쪽은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한쪽은 아예 관계를 정리해버리고 고립되는 경우다. 결국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다 지치거나, 반대로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경우로 이어진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이다.

실제로 인간관계를 의도적으로 정리하는 은퇴자는 꽤 있다.

대전에 사는 송중현씨(가명·60)는 최근 휴대전화 연락처를 정리했다. 기준은 단순했다. 최근 6개월 동안 연락하지 않은 번호가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혹시 연락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전화번호를 보니 다시 연락할 것 같지 않은 번호들이 많았다. 송 씨는 “번호를 줄이는 것도 일이다. 예전에는 연락처 숫자가 많아야 인간관계가 넓은 줄 알았다"면서 "그런데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실제 연락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줄여야 할 관계와 남겨야 할 관계

은퇴 이후 인간관계를 정리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람을 만나고 나면 에너지가 생기는가, 아니면 소모되는가.' 이 기준으로 관계를 나눠보면 의외로 명확해진다.

줄여도 되는 관계는 보통 이런 특징을 가진다.
△의무감 때문에 유지되는 관계
△개인 친밀도 없이 집단 소속으로만 이어지는 모임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고 챙기는 관계
△만남 이후 피로감이 큰 관계

반대로 은퇴 이후 꼭 남겨야 할 관계도 있다.
△아플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
△정기적으로 안부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취미나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가족 외에 정서적으로 연결된 사람
은퇴 이후 인간관계의 기준은 넓이보다 지속 가능성이다.

은퇴 후에는 ‘활동형 관계’가 오래 간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무엇인가를 하는 관계다.

등산, 독서, 운동, 봉사활동처럼 공통 활동이 있는 관계는 만남의 이유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대화 주제도 끊기지 않는다. 단순한 친목 모임보다 활동 기반 모임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다.

실제로 은퇴 이후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활동 기반 모임이 하나 이상 있다는 점이다.

같이 걷고, 같이 배우고, 같이 움직이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간관계도 포트폴리오다

은퇴 준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돈을 먼저 떠올린다. 연금, 투자, 생활비 같은 숫자다.

하지만 은퇴 이후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는가도 중요하다. 관계도 재테크처럼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정 교수는 "인간관계는 일종의 '관계 통장'과 같아서 평소 꾸준히 쌓아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없다"며 "은퇴 이후를 대비해 지속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00세시대 연구소 강은영 연구위원은 "지난 1980년 제시된 '호위대모델(convoy model)'에 따르면 개인의 대인관계는 세개의 동심원(내부원·중간원·외곽원)으로 설명된다"면서 "내부원에는 배우자나 자녀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중간원에는 가까운 친구나 자주 만나는 이웃, 직장동료등이, 외곽원에는 동호회 회원이나 SNS 친구 등 폭 넓은 인간관계가 포함된다"고 말했다. 이어 "은퇴후에는 특히 내부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지만, 삶의 만족을 높이기 위해서는 중간원과 외곽원까지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호위대'가 누구인지 돌아보고, 은퇴후에도 어떻게 의미있는 관계를 이어갈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의 질문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남길 것인가'로 정리된다.
은퇴 전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은퇴 후에는 관계를 새로 만들 기회가 줄어들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있는 관계 중 남길 관계에는 미리 투자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