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손, 반찬 하나만 올린 297엔 도시락 공개
"실용적이다" vs "가난해진 일본"…600만회 조회 논쟁
실질소비 8개월째 감소…임금 올라도 점심값부터 아꼈다
일본 편의점 로손이 지난 16일 공개한 '잇텐톳파스기(一点突破すぎ·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중)' 도시락.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구운 옥수수, 데리야키 소시지, 보다코(소금에 절인 연어), 매운 키마카레((다진 고기 카레) 도시락이다. 반찬을 한 종류로 줄여 가격을 최대 50% 낮췄다. 출처=TBS 'N스타' 화면 캡처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흰밥 위에 옥수수만 수북이 얹었다. 고기도 달걀도 채소도 없다. 가격은 297엔(약 2600원). 일본 편의점 로손이 지난 16일 공개해 오는 29일 출시하는 신제품이다.
다른 도시락은 넓게 펼친 흰밥 한가운데 잘게 부순 연어를 한 숟갈 남짓 올렸다. 아키타현에서 즐겨 먹는 짭짤한 연어 '보다코'다. 흰밥을 데리야키 소시지로 뒤덮은 제품도 있다. 두 제품은 오는 22일 먼저 출시된다.
이름부터 노골적이다. '잇텐톳파스기(一点突破すぎ·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중)' 도시락이다. 반찬을 한 종류로 줄여 같은 크기의 기존 도시락보다 가격을 최대 절반 낮췄다. 연어·옥수수·키마 카레 도시락은 297엔, 소시지 도시락은 397엔(약 3500원)이다.
신제품이 공개되자 일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맛과 가격보다 '지금의 일본'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너무 가난해졌다. 게다가 별로 싸지도 않다."
"국가는 사상 최대 세수를 거두고 경기는 좋다는데 서민의 점심은 297엔짜리 도시락이 됐다."
"인간의 존엄뿐 아니라 영양까지 포기한 것 같다."
연어 한 숟갈이 올라간 도시락을 두고 나온 마지막 글은 조회 수가 600만회를 넘었다. "나쁜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가는 편이 더 맛있는 밥을 먹겠다"는 날 선 반응도 나왔다.
반대편에서는 "솔직히 이런 게 좋다" "여러 반찬을 어설프게 담느니 좋아하는 것 하나를 많이 주는 편이 낫다" "혼자 먹는 점심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불과 297엔짜리 도시락 하나를 놓고 '가성비 상품'과 '가난해진 일본의 상징'이라는 정반대의 평가가 맞붙은 것이다.
로손의 '잇텐톳파스기(一点突破すぎ·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중)' 도시락을 두고 일본 X 이용자들이 올린 반응. X의 일본어 게시물을 한국어로 번역한 화면이다. 출처=X 캡처
반찬 하나만 담아 가격 '반값'
297엔이라는 가격의 비결은 '덜 담는 것'에 있다. 일반 도시락은 공장에서 밥과 여러 반찬을 열 차례 가량 나눠 담지만 이 도시락은 옥수수나 소시지 한 가지만 올리면 끝이다. 반찬 가짓수를 줄이자 재료비는 물론 조리·포장에 드는 시간과 인건비도 함께 줄었다. 용기 역시 단순하게 바꿨다.
로손은 슈퍼마켓의 저가 도시락과 경쟁하기 위해 이런 상품을 기획했다. 물가가 오르면서 일본 편의점의 고객 1인당 구매액은 지난해 740엔(약 6500원)을 넘어섰다. 도시락에 음료 하나만 더해도 1000엔(약 8800원)에 가까워진다. '편의점은 편리하지만 비싸다'는 인식이 굳어지면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로손이 값싼 상품만 내놓는 것은 아니다. 오는 21일부터 해산물 야키소바와 고기를 푸짐하게 올린 냉중화면, 일본산 밤 몽블랑 등 700엔대의 고급 제품도 순차적으로 판매한다.
매일 먹는 점심에는 돈을 아끼되 마음에 드는 상품에는 지갑을 여는 소비자를 함께 잡겠다는 전략이다. 일본에서 말하는 '메리하리 소비(メリハリ消費)', 우리말로 하면 선택적 소비다.
최근 일본의 임금 지표만 보면 가계 형편이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지난 7월 물가 변동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1년 전보다 2.4% 올라 7개월 연속 상승했다. 기본급도 4.1% 늘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같은 달 2인 이상 가구의 실질 소비지출은 3.6% 줄어 8개월 연속 감소했다. 근로자 가구의 실질소득도 3.8% 줄었다. 실질임금 상승에는 여름 보너스 증가가 크게 작용한 만큼 살림살이가 전반적으로 나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식료품 지출은 실질 기준 1.3% 감소했다. 도시락과 반찬 등 조리식품 지출은 3.2% 줄었다. 총무성은 소비자들이 더 저렴한 제품을 사거나 구매 자체를 줄인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로손이 297엔 도시락을 내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가 부담은 여전히 크다. 지난달 전체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1.9% 올라 일본은행(BOJ)의 목표치인 2%를 밑돌았다. 하지만 정부의 휘발유와 전기·가스 보조금이 물가상승률을 0.62%포인트 낮춘 결과다. 보조금이 없었다면 물가상승률은 2%를 웃돌았을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달 기업물가는 7.6% 올랐고 수입물가도 20% 넘게 뛰었다. 기업의 원가 부담이 시차를 두고 소비자가격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주요 식품업체들이 이달 가격을 올리는 품목은 4923개로 올해 들어 가장 많다. 다음달에도 3033개 품목의 가격이 오른다.
원재료비와 물류비, 포장비는 뛰는데 소비자들은 더 비싼 가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기업으로서는 가격을 올리는 대신 양이나 구성을 줄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297엔 도시락에서 반찬이 사라진 배경이다.
월급 올라도 점심값부터 아낀다
앞으로도 일본 소비자의 먹거리 부담이 크게 줄어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BOJ는 지난 18일 정책금리를 연 1%에서 1.25%로 올렸지만 엔화 가치는 오히려 한때 달러당 158엔대까지 떨어졌다. 엔화 약세가 이어지면 일본이 수입하는 식품과 원재료 가격도 오를 수밖에 없다.
일본 주요 식품업체들이 이달 가격을 올리는 품목은 4923개로 올해 들어 가장 많다. 다음달에도 3033개 품목의 가격이 오른다.
기업은 원재료비와 물류비, 포장비가 올라도 가격을 무작정 높이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더 싼 제품을 찾거나 구매 자체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내년 4월부터 2년간 식료품 소비세율을 현행 8%에서 1%로 낮춰 가계 부담을 덜어줄 계획이다. 그러나 감세 시행까지는 반년 넘게 남아 있고 원가 상승 압력은 이미 식품 가격에 반영되고 있다. 실질임금이 올라도 소비지출이 8개월 연속 줄어든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당장 점심값부터 아끼고 있다.
로손의 297엔 도시락 하나만으로 일본이 가난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찬을 한 종류로 줄여 가격을 낮춘 실용적인 상품이고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 먹고 싶은 소비자의 취향에도 맞는다.
다만 이 도시락을 접한 많은 일본인이 맛보다 먼저 '빈곤'과 '쇠퇴'를 떠올렸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297엔 도시락을 둘러싼 논쟁에는 고물가 장기화로 팍팍해진 일본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AP 연합뉴스
[email protected]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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