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디젤 갤런당 6.5달러 사상 최고치
대형 트럭·농기계 등 사용처 광범위
운송·생산비 더해져 실물경제 압박
'수출금지' 통해 단기 물가안정 노려
미국산 디젤 의존도 높은 유럽 화들짝
트럼프도 정유업계 반발에 절충안 선택
G7, 1억배럴 방출 합의… 시간은 벌어
러·중동 공급 정상화 없인 문제 되풀이
지난 9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리엄스의 5번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붙어있는 휘발유·디젤 가격 안내판 옆으로 세미 트럭이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짧게는 약, 길게는 독이다." 미국이 검토해온 디젤 수출금지에 대한 월가의 경고다. 결국 미국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은 2일(현지시간) 수출 제한으로 모두가 피해를 보기 전에 4개월간 비축유 1억배럴을 풀기로 했다. 미국 경유 가격을 낮추면서 정유사 감산과 휘발유 가격 상승이라는 '부메랑'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러·중동서 하루 130만배럴 사라져
이번 디젤 가격 급등은 원유 자체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러시아와 중동의 정유시설 가동 차질로 국제시장에 공급되는 디젤이 크게 줄어든 영향이 크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전 세계 디젤 소비량은 하루 약 2800만배럴이다. 하지만 국제 가격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해상 거래시장 규모는 하루 약 800만배럴에 불과하다.
이 시장에서 두 개의 주요 공급원이 동시에 흔들렸다. 중동에서는 하루 약 150만배럴의 정제능력이 사실상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정유시설은 호르무즈해협 안쪽에 있어 제품 수출에 제약을 받고 있고 일부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중동의 디젤 수출은 전년보다 하루 약 50만배럴 감소했다.
러시아에서는 드론 공격 등으로 하루 약 350만배럴의 정제능력이 가동 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 디젤 수출도 전년보다 하루 약 80만배럴 줄었다. 두 지역에서 사라진 물량만 하루 약 130만배럴이다. 전 세계 소비량의 5%가 채 안 되지만 하루 800만배럴 규모의 해상 거래량과 비교하면 약 15%다. 국제 디젤 가격이 원유보다 훨씬 가파르게 오른 이유다.
공급난은 더 심해지고 있다. 러시아는 정유업체의 디젤 수출금지를 10월 말까지 연장했고 중국 정유업체들도 홍콩·마카오 이외 지역으로의 10월 석유제품 수출을 중단했다. 러시아와 중동의 공급 차질에 중국까지 가세한 것이다.
미국은 이 공급 공백을 메워온 핵심 국가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올해 5~6월 미국의 디젤 생산량은 하루 평균 515만배럴이다. 이 가운데 국내 소비는 369만배럴, 순수출은 140만배럴이었다. 글로벌 공급난이 심해지면서 미국의 디젤 순수출은 지난해 하루 110만배럴에서 최근 160만배럴 안팎까지 늘었다.
■美 경유 6.5달러…수출금지 카드
문제는 세계의 부족분을 미국이 채우면서 미국 내 재고도 빠듯해졌다는 점이다. 미국 전국 평균 소매 디젤 가격은 갤런당 6.50달러로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원유와 디젤 가격 차이를 나타내는 디젤 정제마진도 배럴당 105달러로 치솟아 지난 15년 중간값의 약 4배에 달한다.
경유 가격 급등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에도 부담이다. 디젤은 대형 트럭과 농기계, 건설장비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만큼 가격 상승이 운송비와 생산비를 거쳐 소비자 물가로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연료 가격을 낮추기 위해 디젤 수출금지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G7 합의 전까지 골드만삭스는 수출쿼터를 포함한 일정 형태의 제한을 "충분히 현실적인(very plausible)" 시나리오로 평가하기도 했다. 다만 전면적인 수출금지를 기본 시나리오로 보지는 않았다.
수출금지의 단기 효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현재 해외로 나가는 하루 150만~160만배럴 안팎의 디젤을 미국에 남기면 재고가 빠르게 증가하고 가격에는 하락 압력이 생긴다. 골드만삭스는 저장공간이 충분한 초기에는 수출금지가 1주일 지속될 때마다 미국 평균 소매 디젤 가격이 갤런당 25센트씩 떨어질 것으로 추정했다. JP모건은 효과를 더 크게 봤다. 하루 약 110만배럴이 미국에 남는다고 가정하면 약 2주 만에 재고가 최근 5년 평균 수준으로 회복되고 30일간 수출을 막으면 약 3000만배럴이 추가될 것으로 계산했다. 이에 따라 갤런당 6.50달러인 경유 가격이 15일 뒤 4.70달러, 30일 뒤 4.40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JP모건의 분석대로라면 미국 내 항구 간 운송에 미국산 선박 사용 등을 의무화한 존스법을 한시적으로 면제해 걸프만의 디젤을 미 동부로 쉽게 옮기도록 하고 30일 정도 수출을 제한하면 초기에는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다.
■3주 지나면 정유 감산 '부메랑'
문제는 수출되지 못한 디젤을 미국이 무한정 저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디젤 생산의 중심인 걸프만의 저장공간이 문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미국 전체 디젤 저장능력은 약 2억800만배럴이지만 걸프만은 6500만배럴이다. 이 가운데 이미 4400만배럴이 차 있어 여유 공간은 2100만배럴 정도다.
모건스탠리는 수출금지 이후 국내 소비 증가와 미 동부의 수입 대체 등을 감안해도 하루 약 100만배럴의 잉여 디젤이 남을 것으로 계산했다. 걸프만의 여유 저장능력을 감안하면 약 3주면 저장탱크가 찰 수 있다는 분석이다.
탱크가 차면 정유사는 생산을 줄여야 한다. 여기서 수출금지의 역설이 시작된다. 정유공장은 디젤만 골라 생산을 중단할 수 없다. 원유를 투입하면 디젤과 휘발유, 제트연료 등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디젤 생산을 대폭 줄이려면 원유 처리량 자체를 낮춰야 한다.
모건스탠리는 이 경우 미국 정유업체들이 원유 처리량을 하루 약 200만배럴 줄여야 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휘발유 생산도 하루 약 65만배럴 감소할 것으로 봤다.
골드만삭스의 추정은 더 크다. 정유 처리량이 하루 210만배럴, 휘발유 생산은 하루 약 125만배럴 감소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저장공간이 한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수출금지가 1주일 연장될 때마다 미국 소매 휘발유 가격에 갤런당 30센트의 상승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디젤 수출금지→미국 디젤 공급 증가→경유값 하락→저장시설 포화→정유사 감산→휘발유 공급 감소→휘발유값 상승이라는 부메랑이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美가 문 잠그면 유럽 직격탄
미국이 수출을 막으면 해외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취약한 곳은 유럽이다. 유럽은 러시아산 석유제품 의존도를 낮춘 데다 자체 정유능력도 지난 20년간 감소하면서 미국산 디젤 의존도가 높아졌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북서유럽은 미국에서 하루 약 25만배럴의 디젤을 수입한다. 이 물량이 계속 들어온다는 전제에서도 유럽 디젤 재고는 오는 11월까지 2018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산 공급마저 사라지면 유럽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 인도와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의 디젤을 끌어와야 한다.
모건스탠리는 이를 2022년 유럽 액화천연가스(LNG) 시장과 비슷한 상황으로 봤다. 당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줄자 유럽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전 세계 LNG를 끌어모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유럽의 디젤 가격 상승이 세계 석유제품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으로 물량이 몰리면 중남미와 아시아 등의 공급은 줄어든다. 골드만삭스는 미국의 수출금지가 1주일 지속될 때마다 유럽 도매 디젤 가격에 배럴당 3달러, 약 2%의 상승 압력이 발생할 것으로 계산했다.
■결국 1억배럴 푼 G7
결국 미국과 유럽은 수출금지 대신 비축유 방출을 택했다. G7 정상들은 2일 앞으로 4개월 동안 원유와 석유제품 비축분 총 1억배럴을 시장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공급 부족이 심각한 디젤은 첫 20일 동안 상당한 물량을 앞당겨 풀기로 했다.
G7은 동시에 회원국 간 에너지와 석유제품 교역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의 디젤 수출금지 가능성도 일단 크게 낮아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서 유럽 국가들이 "대규모로 비축해둔 디젤을 방출하기로 했다"며 "즉시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서 유럽에 향후 6개월간 비축 경유 1억2000만배럴을 풀 것을 요구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미국산 디젤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수출금지 대신 국제 공조를 택한 데는 미국 정유업계의 반발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엑손모빌과 셰브런, 셸, 필립스66 경영진과 로비스트들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와 디젤 공급 문제를 논의하며 전면적인 수출금지의 대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업계는 수출금지가 오히려 미국 정유사의 생산을 줄여 미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연료 가격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세계 시장에 디젤을 공급하고 유럽은 쌓아둔 비축분을 풀어 공급 부족을 함께 메우는 방안이 대안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유럽에도 풀 수 있는 물량은 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유럽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보유한 전략 디젤 비축량은 지난 6월 말 기준 약 1억9000만배럴이다. 유럽이 하루 50만배럴씩 방출하면 미국의 수출금지에 따른 해외 디젤 가격 충격을 절반가량 줄일 수 있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분석이다.
앞서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은 지난 3월 역대 최대인 4억배럴 규모의 비축유 방출에 합의했지만 실제 방출은 미국에 집중됐다. 미국은 이후 전략비축유(SPR)에서 약 1억3000만배럴을 시장에 공급했다. 반면 유럽 최대 비축국인 독일은 8월 말까지 당초 약속한 1950만배럴 가운데 약 500만배럴을 방출하는 데 그쳤다.
G7의 이번 결정은 미국이 자국 시장의 문을 닫는 대신 동맹국들이 비축유를 함께 풀어 글로벌 공급 자체를 늘리는 쪽을 선택했다는 의미가 있다. 미국 경유 가격을 낮추면서도 정유사 감산과 휘발유 가격 상승, 유럽의 디젤 가격 급등이라는 수출금지의 부작용을 피하려는 절충안인 셈이다.
다만 비축유 방출은 시간을 벌어주는 카드에 가깝다. 러시아와 중동에서 하루 약 130만배럴의 디젤 공급이 사라진 데다 중국까지 석유제품 수출을 중단한 상태다. 비축유로 당장의 공급 충격은 완화할 수 있지만 러시아와 중동의 정유시설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글로벌 디젤 공급난의 근본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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