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규 우리은행장이 고종황제 홍유릉을 찾아 참배하고 은행의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우리은행 모든 경영진이 새해마다 참여하는 연례행사로 올해에는 특히 상생금융·사회공헌을 강조했다. 1일 우리은행에 따르면 조병규 행장은 이날 경영진 24명과 갑진년 첫 날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을 방문해 고종황제를 참배했다. 조 행장은 "고종황제 참배는 우리은행 설립 이념을 되새기고 은행의 역할과 책임을 되짚어 보는 경건한 자리"라며 "갑진년 한 해 우리은행은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금융으로 상생금융·사회공헌·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고종황제가 탄생을 이끌었다. 구한말 개항과 함께 상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자 고종황제는 황실 운영자금을 자본금으로 편성해 은행 설립을 주도했다.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중앙은행 역할을 겸했다. 상업을 이롭게 하고 화폐를 융통시켜 민족자본을 육성하겠다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담아 상업자본 육성, 금융주권 회복 등에 역할을 해왔다. 김나경 기자
2024-01-01 18:30:57[파이낸셜뉴스]조병규 우리은행장이 고종황제 홍유릉을 찾아 참배하고 은행의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우리은행 모든 경영진이 새해마다 참여하는 연례행사로 올해에는 특히 상생금융·사회공헌을 강조했다. 1일 우리은행에 따르면 조병규 행장은 이날 경영진 24명과 갑진년 첫 날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을 방문해 고종황제를 참배했다. 조 행장은 "고종황제 참배는 우리은행 설립 이념을 되새기고 은행의 역할과 책임을 되짚어 보는 경건한 자리"라며 "갑진년 한 해 우리은행은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금융으로 상생금융·사회공헌·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고종황제가 탄생을 이끌었다. 구한말 개항과 함께 상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자 고종황제는 황실 운영자금을 자본금으로 편성해 은행 설립을 주도했다.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중앙은행 역할을 겸했다. 상업을 이롭게 하고 화폐를 융통시켜 민족자본을 육성하겠다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담아 상업자본 육성, 금융주권 회복 등에 역할을 해왔다. 우리은행은 대한천일은행에 대해 "서구식 은행 경영방식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조선 후기까지 개성상인이 사용하던 복식부기법(현금 입출·외상거래를 기록하던 방법)인 송도사개부치법을 사용하는 등 일본계 은행에 맞서 우리나라 금융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라고 평가했다. 대한천일은행을 계승한 우리은행은 125년 된 우리나라 첫 은행이다. 우리은행 경영진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21년부터 매년 1월 1일 경기 남양주 홍유릉을 찾아 고종황제를 참배해왔다. dearname@fnnews.com 김나경 기자
2024-01-01 14:20:31[파이낸셜뉴스] 1896년 조선 고종 임금이 러시아 니콜라이황제 2세 대관식에 전달한 ‘흑칠나전이층농’, 장승업 ‘고사인물도’, ‘백동향로’ 등 ‘외교선물’이 9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특별전 개막식을 통해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된다. 8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이 중 ‘흑칠나전이층농’은 2020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국외소재문화재 보존.복원 및 활용지원 사업’을 통해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 복원예산을 지원함으로써, 이번에 함께 공개될 수 있었다. 크렘린박물관이 이번 전시(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에 출품한 유물들은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러시아 니콜라이황제2세 대관식(1896.5.26.)을 맞아 민영환(1861~1905)을 전권공사로 파견해 전달한 ‘외교선물’ 가운데 일부다. 고종이 전달한 선물들은 민영환을 수행해 대관식에 함께 참석했던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그 목록의 일부가 언급된 바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물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특별전 전시과정에서 1896년 고종이 전달한 선물은 총 17점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특별전 출품작은 ‘흑칠나전이층농’ 1점, 장승업 ‘고사인물도’ 2점, ‘백동향로’ 2점 등 총 5점이며, 이는 모두 크렘린박물관 소장품들이다. 그밖에 나머지 선물들은 현재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고종의 선물들 가운데 현재 크렘린박물관 소장품은 “19세기 수준 높은 조선 공예 및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 유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흑칠나전이층농’의 경우, 고종의 특명에 의해 당대에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되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농 하단부에 나전 십장생을 부착해 황제로 즉위하는 니콜라이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점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그간 1920년 일본에서 ‘실톱’이 도입되면서 나전공예에 ‘끊음질’ 기법이 유행했는데, 그보다 30여 년 앞서 ‘흑칠나전이층농’에 이 기법이 월등히 적용된 것으로 확인돼 공예사적으로도 ‘흑칠나전이층농’이 매우 중요한 유물임을 보여준다. 장승업 ‘고사인물도’의 경우, 크렘린박물관 소장품 4점이 처음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2점이 이번에 공개되는 것이다. 조선의 4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1843~1897)의 이번 작품들은 지금껏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것으로, 크기만 174cm가 넘는 보기 드문 대작에 속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장승업의 각 작품에는 ‘朝鮮(조선)’이라는 국호를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 서명 앞에 붙였다. 이는 장승업 작품 가운데 처음 확인되는 희귀사례로, 이 작품이 ‘외교선물’을 전제로 창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동향로’의 경우, 사각과 원형의 기형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의 치세를 표상하는 대관식의 취지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길상 문자를 기준으로 직선과 유려한 곡선을 조화롭게 융합해 정교하게 투조한 문양의 구조는 일반적인 공예품에서 보기 힘든 복잡하고 세밀한 얼개를 보여주고 있다. 사각향로 노신에 ‘향연(香煙)’, 둥근향로 노신에 ‘진수영보(眞壽永寶)’를 각각 새겨 대관식을 축원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이번 크렘린박물관 특별전에 출품된 ‘흑칠나전이층농’을 복원하는데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온전한 복원을 돕고, 나아가 전시로 이어지도록 함으로써 지금껏 세상에 알려진 바 없던 1896년 ‘외교선물’의 실체를 크렘린박물관과 함께 공개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3-02-08 09:08:12[파이낸셜뉴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오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1층 전시실에서 대한제국 선포 125주년을 맞아 유물과 기록을 통해 고종과 그의 시대를 돌아보는 ‘황제 고종’ 특별전을 개최한다. 고종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되짚어보고자 마련되는 특별전이니만큼 다양한 기획이 6개의 전시실에 준비되었다. △첫 마당(프롤로그)인 ‘고종, 회상의 시작’은 고종의 치세와 사후 고종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담은 영상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고종에 대한 재평가에서 시작된 기획의도를 담았다. 1전시실 ‘쇄국을 넘은 개화군주’에서는 18세기 서구열강이 동아시아를 침략하던 국제정세 속에서 개화를 선택한 고종의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2전시실 ‘조선의 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에서는 황룡포와 12면류관 등의 의장을 비롯해 열강과의 외교에서 국격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왕과 황제로서의 고종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어 3전시실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꿈꾼 황제’에서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부강한 국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한편 전통의 가치와 군주상도 포기하지 않는 고종의 복합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전시실 ‘국권의 침탈과 저항’에서는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저항을, 5전시실 ‘퇴위와 저항, 기억 속의 황제’에서는 강제 퇴위를 당한 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고종과 그의 죽음이 낳은 반향을 만날 수 있다. 고종의 젊은 시절과 만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사이에 거울을 배치해 관람객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전시는 12일 오후 2시 석조전 1층 중앙홀에서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별도의 사전예매 없이 현장에서 당일 오후 4시부터 무료(덕수궁 입장료 별도)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은 덕수궁 휴궁일(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며, 입장마감은 오후 5시이다. 이번 전시는 거울을 이용하는 것이 특징 중 하나다. 거울은 관람객 자신이 그 시대를 살아갔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장치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개요 판(패널) 제목에 ‘정직한 만남’이라는 글귀가 들어간 것도 같은 의도이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2-10-07 09:10:43[파이낸셜뉴스] 1902년, 통신사인 제국익문사가 만들어졌다. 국내·외에 통신원을 파견했으며 서적 출간도 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한제국 황제 직속의 비밀정보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실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소속 요원의 이름이 밝혀진 경우도 없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성공적으로 비밀조직을 운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 '손탁 빈관'(정명섭 작, 인디페이퍼 펴냄)은 고종 황제가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려고 했던 1907년 대한제국이 배경이다. 작가는 손탁 여사가 운영한 손탁 호텔을 무대로 헤이그 밀사 파견과 제국익문사를 엮어 긴장감이 넘칠 수밖에 없는 혼란한 시대를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제국익문사 최고 요원이 손탁 호텔의 보이가 된 전직 군인을 미끼로 삼아 추격해오는 일본 통감부의 눈을 속이고 헤이그 밀사를 발탁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얼개다. 작가는 군대 해산, 아관파천 등 구한말 벌어진 실제 사실과 인물을 뼈대로 채워지지 않은 빈 역사 공간에 살아 날뛰는 상상력을 덧댄다. 무척 정교하기까지 해서 팩션이라는 가공의 살덩이가 진짜인 것처럼 매끄럽게 느껴진다. 작가가 빈 역사 공간을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소설 작가이기도 하지만 역사 관련 전문 작가로 다진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손탁 빈관'은 출간도 하기 전에 영상화 판권을 사고파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E-IP마켓' 공식 선정작으로 뽑혔다. "가상의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정교하고 탁월하게 창조됐다", "역사적 공간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에 집중해 스파이물로 풀어낸 발상의 탁월함" 같은 선정평에서 보듯, 역사와 상상력이 잘 버무려진 팩션으로서의 매력이 이 작품에서 진하게 우러난다. cynical73@fnnews.com 김병덕 기자
2021-10-07 13:56:35[파이낸셜뉴스] "...(중략)...한진창씨는 광무태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만큼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는 모두 구강 안에서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中 20세기 초,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오랫동안 노렸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약 500년 간 이어진 조선과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主權)은 일본에게 철저히 종속됐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이제는 그저 일본의 식민지(植民地)가 된 나라의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그동안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황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민비 외척(外戚) 세력과 해외 열강들에게 크게 휘둘렸고, 결국 나라가 망국(亡國)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항상 뒤따랐다. 물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국권(國權) 침탈 후 '유폐(幽閉)된 황제' 고종은 일본의 감시와 압제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나름의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안들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 무렵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서(急逝)였기에 민중들의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급기야 고종이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현재 정사(正史)로 받아 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과 증언 등으로 인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고종 독살설은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설움과 분노가 크게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민족 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 ■국권 침탈, 유폐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됐다. 직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돼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에 완전히 장악됐고 외교권은 박탈됐다. 이때부터 사실상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감으로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 고종에게 이를 재가(裁可)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늑약의 재가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으로 체결됐는데, 여기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고 조약 명칭도 기재되지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해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했다"고 주장하며 무효를 선언했고, 국제 사회에 친서를 보내 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했다.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보호 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急電)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을 밀사(密使)로 파견해 끝까지 을사늑약 무효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일본의 공작 등으로 인해 무위(無爲)에 그쳤고,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유약한 순종(純宗)을 즉위시켰고,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꿨다. 폐위된 고종은 '유폐된 황제'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한국의 황실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병력을 동원해 고종의 주변을 철저히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특히 '궁금령'(宮禁令)을 제정 공포해 모든 외부인들이 궁궐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도록 했다. 만약 허가증을 받지 않고 출입하면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와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는 '궁궐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결국 고종은 한 나라의 황제에서 신하들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매우 처량한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반전 모색, 급서 고종의 유폐 생활은 장기간 지속됐지만, 이 와중에도 고종은 은밀히 밀지(密旨)를 내려 항일 의병 투쟁을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과 농민을 비롯해 군인과 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8년에 이르러 고종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포착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중심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 원리의 하나로서 민족 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청산하는 국제 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울러 이 즈음 고종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베이징으로의 망명(亡命)을 은밀히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면 독립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求心點)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민비의 사촌동생인 민영달이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회영은 이 자금으로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 할 행궁(行宮)을 마련하려고 했다. 기실 고종이 망명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종은 1904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로의 망명을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총 5차례에 걸쳐 해외 망명을 모색했다. 이처럼 유폐된 황제는 나름대로 반전(反轉)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단순한 계획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밤, 별안간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건강했던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한 것이다. ■독살설 논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중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평소에 고종이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이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도 그가 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서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혹시 창덕궁(순종) 쪽이 아닌가 반문했다"면서 "그렇게 물은 것은 왕 전하께서 평소 병약하셨기 때문이며 덕수궁(고종)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승하하기 얼마 전까지도 고종은 수라(水刺)를 잘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민중들 사이에선 고종의 죽음과 관련한 논란이 증폭됐다. 바로 '고종 독살설'이다. 고종의 평소 건강 상태와 그가 은밀히 추진했던 반전을 감안할 때 고종이 일본 및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독살설은 그 이유와 연루자들의 실명까지 등장하며 구체화됐다. 광화문 앞 전수학교의 벽에는 '저들(일본)이 파리강화회의를 두려워해 우리 황제를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이 붙여졌다. 고종의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성명서'에는 일본이 이완용에게 윤덕영, 한상학이라는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리도록 했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외국인인 마티 윌콕스 노블의 일기에도 등장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한 때 독립운동가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쓴 일기였다. 윤치호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민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매우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 후 짧은 시간 내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그 시신의 팔다리는 하루 이틀 만에 크게 부어올라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실제로 염(殮)을 행한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전제한 후 죽은 고종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기다란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고 적혀있다. 승하 직후 고종에게 식혜를 올린 궁녀 2명도 의문사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병조판서를 지낸 민영휘가 홍건이라는 사람에게 한 말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고종이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 돼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고, 잠시 후 고종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돼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더욱이 고종이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어서 환관이 이를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한다. 윤치호는 일기에 증언자들의 실명을 모두 기재함으로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는 윤치호 일기에 나와있는 고종의 심한 경련은 독성 급성중독에 의한 것이고, 시신이 부어오른 것은 중독에 의해 사후 부패가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목에서 복부까지 난 검은 줄은 시신 부패 시 피부 혈관들이 그물처럼 나타나는 '부패망'이며, 고종이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쥔 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에 맞서 본능적으로 생명줄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고 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총독부의 주요 관리였던 구라토미가 남긴 일기와 (앞서 언급한) 곤도 시로스케가 남긴 회고록에는 한일 합방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 독살에 깊숙이 연루돼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구라토미 일기는 고종의 죽음에 '윗선'이 개입돼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즉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고종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자 윤덕영, 민병석을 통해 독살을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요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종이 공식적으로 한일 합방이 잘 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정황과 증언, 자료들을 토대로 기정사실처럼 받아 들여졌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만큼 현재에 이것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이 고종이 불미스럽게 죽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후과(後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독살설은 가능성이 희박한 설(說)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지 간에 고종의 죽음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민족운동의 도화선 고종이 사망한 후 민족의 설움과 분노는 끓어올랐다. 당시 민중들은 순종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고종을 마지막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렸지만, 어쨌든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석연치 않게 숨을 거뒀으니 민중들은 쓰라린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결국 거국적인 3.1 운동의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그런데 이 민족 운동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선 3.1 운동은 이전의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부 의병 운동이 조선 왕정 복위 등을 염두에 둔 복고(復古)적인 성격을 나타냈다면, 3.1 운동은 복고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해 보다 근대적인 '대한 독립'에 무게를 뒀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촉진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 같은 거국적 민족 운동의 열기는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는 독립 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 국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표방하고, 향후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됐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주권 국민의 대표 기관(정부)으로, 또한 대내적으로는 독립 운동 통할 기구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며 '광복'(光復)의 촉매제가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9-04 13:55:38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3월 1일~31일까지 한 달간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작은 전시를 개최한다. 고종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승하 직후, 고종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이는 사람들의 울분을 폭발시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고종의 승하’, ‘고종의 국장’, ‘고종의 영면’ 등 총 3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국장 때 촬영된 당시 사진과 의궤 등에 남겨진 기록,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의 사진 등 총 15건의 작품이 소개된다. 한편, 3월 21일 오후 2시에는 이번 전시와 연계한 특별 학술강연회가 ‘고종 국장과 1919년의 사회’라는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개최된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19-02-28 09:14:05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고종황제 붕어(崩御) 100주기가 되는 해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오는 21일 11시 30분에 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고종과 명성황후)에서 대한제국 고종황제 100주기 제향을 봉행한다. 조선왕릉 제향은 역대 왕과 왕비의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로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600여 년을 이어온 왕실의 제례 문화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당시 덕수궁에서 갑작스럽게 붕어했고, 국장이 3월 3일로 예정됐었다. 고종황제의 붕어는 3월 1일 독립운동과 그해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홍릉봉향회와 대한황실문화원은 고종황제 100주기 제향 주간을 맞이해 특별행사로 제향행사 당일 홍유릉 역사문화관 앞에서 고종이 즐겨 마셨다고 전하는 전통 가배차 무료 시음 행사를 진행한다. 또한, 대한제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전을 오는 18일부터 24일까지 유릉(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 재실에서 펼칠 계획이다. 한편 올해 조선왕릉 제향은 총 54회 진행될 예정이며 문화재청이 지원하고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봉행한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19-01-17 09:47:09600년간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 찬란한 조선의 궁중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4대 궁궐과 종묘가 문을 활짝 열고 상춘객을 반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28일부터 열흘간 '오늘, 궁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펼치는 제3회 궁중문화축전이다. 특히 올해는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중점적으로 마련됐다. 이번 주말부터 시작되는 퐁당퐁당 황금연휴에 조선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해보는 건 어떨까. ■'대한제국' 선포의 순간을 만나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이번 궁중문화축전에서는 이를 기념해 고종황제가 품었던 '대한의 꿈'을 주요 콘셉트로 잡고 당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선포하기 위해 그가 펼쳤던 활동을 소개하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먼저 28일 오후 7시30분부터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진행되는 개막제 '오늘, 궁을 만나다'에서는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재해석한 행사가 진행된다. '황제국'의 탄생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인 '천고(天告)'를 비롯해 고종 대역배우가 황제의 의복을 입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후 궁중문화축전 기간 내내 덕수궁에서는 대한제국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중화전에서는 29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고종의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인 '대한의 꿈' 행사가 펼쳐진다. 120년 전 환구단에서 제사를 모신 뒤 대례복을 입고 즉위식을 거행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또 고종황제와 외국공사와의 외교적 접견을 재현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가 내달 2일부터 7일까지 정관헌에서 열린다. 내달 4일과 5일, 7일에는 중화문에서 '대한제국 음악회'가 열리고, 축전기간 내내 석조전 앞 분수대에서는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대한제국과 가배차' 프로그램이 열린다. 이 밖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대한제국실 상설전시'가 축전기간 내내 진행되고, 고종과 흥선대원군 등 조선 말 왕실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역사 이야기를 그린 야외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가 내달 3일부터 6일까지 창경궁 문정전에서 공연된다. ■봄날 정취 더하는 '궁궐 음악회' 고종 이전의 조선 초.중기 왕실 의례와 생활문화를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대제'가 내달 7일 종묘 정전에서 열리고, 조선시대 왕자가 태어날 때 거행한 의식인 '세종대왕자 태실 태봉안의식'이 내달 2일 경복궁 일원에서 개최된다. 영.정조 시대는 창경궁에서 돌아볼 수 있다. 당시 시대를 재현한 연극 '영조와 창경궁'이 29~30일 열리고, 영조 26년인 1750년 왕실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는 '1750 시간여행, 그날'이 창경궁 일원에서 내달 5일과 6일 양일간 진행된다. 아름다운 궁궐을 배경으로 한 다채로운 선율의 음악도 준비됐다. 낮에는 경복궁 수정전에서도 고궁음악회와 해금 공연이 열리고 밤에는 경복궁 경회루와 종묘 정전에서 야간음악회가 열린다. 이 밖에 국내 무형문화재 공연과 함께 베트남 마지막 봉건왕조인 후에 왕조의 궁정음악인 '냐낙'을 접해볼 수 있는 무형문화유산 공연 '백희가무'가 덕수궁 석조전 앞뜰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17-04-27 20:13:02지난 8일 서울 남대문로1가 종로금융센터(구 광통관)에서 열린 '고종황제 흉상 제막식'에서 이광구 우리은행장(오른쪽)이 고종황제 손자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과 고종황제 흉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서울 남대문로1가 소재 종로금융센터(구 광통관)에서 '고종황제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고 9일 밝혔다. 지난 8일 열린 행사에서 우리은행은 '고종황제의 흉상'을 제작해 공개하고, 점포 일부를 구한말 당시 분위기로 구현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광통관은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해 조선상인의 청원에 기해 고종황제가 황실자금인 내탕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해 설립됐다"며 "1899년 최초 민족자본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의 117년 역사성과 전통성 계승하고자 이런 행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광통관(서울시 기념물 제19호)은 우리은행의 전신이자 우리나라 최초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건물로 국내서 가장 오래된 은행건물이다. 2002년 3월 서울시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longss@fnnews.com 성초롱 기자
2016-12-09 18: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