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가수 임영웅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로 새로운 기록을 또다시 만들며 눈부신 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임영웅의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25일 오전 8시 40분 현재 뮤직비디오 조회수 3672만뷰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발매된 임영웅 정규 1집 'IM HERO' 타이틀곡인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서정적인 가사와 편안한 멜로디에 임영웅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임영웅은 뮤직비디오에서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삼아 눈부신 매력을 발산했다. 한편 임영웅의 팔색조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마이 리틀 히어로’는 오는 27일 오후 9시 25분 KBS2를 통해 첫 방송된다. 그 후 6월 3일 2회, 6월 10일 3회, 6월 18일 4회, 6월 25일 5회가 방송된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3-05-25 08:47:45[파이낸셜뉴스] 가수 임영웅 정규 1집 타이틀곡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뮤직비디오와 음원 영상이 1000만 뷰를 돌파했다. 오늘 26일 기준 임영웅 공식 유튜브 채널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뮤직비디오는 734만 뷰를 달성했고 음원 영상도 268만 뷰를 돌파했다. 임영웅 데뷔 첫 정규 앨범 'IM HERO' 타이틀곡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가수 이적이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양시온이 편곡, 정재일이 스트링 편곡을 맡았다. 임영웅의 감성적인 목소리가 서정적인 가사, 편안한 멜로디와 한 데 어우러진 곡이다. 최근 발매된 임영웅의 첫 정규앨범 'IM HERO'(아임 히어로)는 하루 만에 94만장(한터차트 2일 오후 11시 10분 기준) 판매됐다. 솔로 가수 음반 초동 역대 1위를 기록했으며, 초동 110만장을 돌파 했다. 임영웅은 데뷔 6년 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중이다. 지난 6일을 경기 고양을 시작으로 임영우의 콘서트는 창원, 광주, 대전, 인천, 대구, 서울에서 개최된다. 임영웅의 첫 단독 콘서트는 총 21회 공연이다. ck7024@fnnews.com 홍창기 기자
2022-05-26 22:36:55[파이낸셜뉴스] 가수 임영웅이 ‘엠카운트다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임영웅은 지난 12일 오후 방송된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타이틀곡 ‘다시 만날 수 있을까’로 싸이와 수많은 아이돌 팀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이날 임영웅은 “영웅시대 여러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감사하다”라고 팬들을 향한 감사 인사로 훈훈함을 안겼고, 영웅시대와 함께 1위의 영광을 나누었다. 음원과 음반점수 그리고 글로벌 팬 투표 점수에서도 높은 점수를 기록한 임영웅은 1위 공약으로 손하트를 내건 만큼, 이어진 앵콜 무대에서 센스 넘치는 손하트로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무대를 통해 임영웅은 한층 더 깊어진 감성은 물론,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링으로 넘사벽 비주얼도 뽐냈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데뷔 첫 정규 앨범 ‘IM HERO’(아임 히어로)의 타이틀곡으로, 이적이 작사와 작곡에 정재일이 스트링 편곡을 맡은 임영웅표 감성 발라드다. 파리 올로케이션으로 제작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뮤직비디오에는 경이로운 풍경의 연속과 함께 임영웅의 고품격 감성이 어우러졌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2-05-13 08:55:37[파이낸셜뉴스] 가수 임영웅이 대중의 눈과 귀를 제대로 호강시킨다. 3일 오전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채널을 통해 임영웅의 데뷔 첫 정규 앨범 ‘IM HERO’(아임 히어로)의 타이틀곡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가수 이적이 작사와 작곡에 양시온이 편곡에, 정재일이 스트링 편곡을 맡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는 누구나 공감 가능한 서정적인 가사와 감성적인 임영웅의 목소리, 편안한 멜로디 등이 특징인 고품격 발라드다. 파리 올로케로 촬영된 뮤직비디오는 한 편의 그림같은 경이로운 풍경의 연속과 함께 청량함을 선사하는 절벽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훈훈한 비주얼의 임영웅 모습도 담겨있다. 이미 세 가지의 각기 다른 티저로 화제를 모았던 만큼, 이번 뮤직비디오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감각적인 영상까지 돋보이며 꾸준히 관심을 받고 있다. 1번부터 12번까지 모든 트랙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임영웅의 ‘IM HERO’는 지난 2일 오후 6시 공개와 동시에 음원사이트 차트인을 기록, 명불허전 존재감을 드러낸다. 임영웅은 정규 1집 발표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며, 오는 6일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개최한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2-05-03 08:17:54▲ 용팔이 마지막회용팔이 마지막회 용팔이 마지막회가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SBS 수목드라마 ‘용팔이’가 마지막회를 앞두고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높이고 있다. 난달 30일 방송에서는 극과 극 삶을 살고 있는 태현(주원 분)과 여진(김태희 분)의 모습을 그려졌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으로 인해 삶의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겠다며 새 생활을 선택한 태현이 더 할 나위 없는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면, 여진은 극도의 공포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강한 대조를 이뤘다. 여진이 택한 단 하나의 해법은 태현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던 태현 곁에는 채영이 대신하고 있었고 오히려 자신이 진 무거운 짐을 태현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이 여진을 가로막았다. 설상가상으로 복수에 눈이 먼 채영은 여진과 태현이 만나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여진을 끌어내리려는 한신그룹 회장단을 비롯해 비서실장(최병모 분)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가 않다. 엇갈린 운명 속 극과 극 삶을 살고 있는 ‘용한커플’ 두 사람의 앞날이 주목된다. 용팔이 마지막회 소식에 누리꾼들은 “용팔이 마지막회, 벌써 마지막이라니.” “용팔이 마지막회, 보고 싶을 거예요.” “용팔이 마지막회, 완전 재미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fnstar@fnnews.com fn스타
2015-10-01 08:51:36그룹 god가 유명 프로듀서팀 이단옆차기의 곡으로 컴백한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god 3월 컴백설이 또 한번 대두되고 있다. 이에 멤버들의 각 소속사는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없다”고 일축했다. 현재 곡을 받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단 옆차기의 곡이 타이틀곡이 될 것인지는 결정된 바 없다는 것. 윤계상과 데니안이 모두 드라마 촬영 중이기 때문에 3월 컴백설 또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god는 2004년 윤계상의 탈퇴 이후 2005년까지 4인 체제로 활동했다. 이후 멤버들은 각종 방송을 통해 재결합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준 바 있다. 2012년에는 윤계상이 진행하던 올‘리브 요리 프로그램 ’윤계상의 원테이블‘에서 오랜만에 다섯 멤버가 함께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역시 god는 재결합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활동 시절부터 서로 간의 우애가 깊기로 유명한 god인만큼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멤버들이 각각 다른 소속사에 소속돼 있다는 것은 god 재결합에 작지 않은 걸림돌이다. 현재 김태우와 박준형은 소울샵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각각 음악과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윤계상은 사람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기활동 중이며 데니안은 god 시절 소속사인 싸이더스 HQ에 그대로 남아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손호영은 CJ E&M에 소속돼 있다. 이에 네티즌들은 “god 컴백, 언제가 되도 좋으니 하기만 해라”, “god 컴백에 다들 관심 많은 것 같다”, “god 컴백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편집부 news@fnnews.com
2014-02-24 14:37:39이승만 부부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그를 존경하는 미군의 화이트 대장, 램니처 장군, 맥나마라, 맥아더, 밴플리트 등 많은 장군들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방문해 위로하고 갔다. 특히 화이트 대장은 이 박사가 하와이에서 병원 혜택을 받는 데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트리풀러 병원에서의 정기 검사와 치료는 물론이고, 훗날 임종 직전까지 많은 의료 혜택을 주선해 주었다.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이 박사는 귀국이 좌절됨에 따른 분노로 몸져 눕기도 했다. 트리풀러 병원의 주치의는 진찰 끝에 이 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하와이 총영사를 지낸 오중정씨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사회를 다시 한번 움직이게 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오중정, 최백렬씨 등이 머리를 맞대고 사과성명을 급조해 이 박사 명의로 발표했다. 이로써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고려나 조율 따위는 없었다. 최백렬씨는 한국의 날씨를 고려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는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으며, 이 박사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했다. 곤궁했던 말년의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준 윌버트 최에게 이 박사는 자신의 거주지인 이화장(梨花莊)의 토지와 시설 소유권 일체를 양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윌버트 최는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으며, 그 자제들도 이 박사 부부에 대한 후원이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음을 강조했다). 출발 날짜가 확정되자 이 박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교민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애드버타이저지(紙)는 이승만의 귀국을 축하하는 특별 사설을 게재했다. 1962년 3월 17일 아침, 이 박사는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소파에서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 한 대가 언덕길을 올라오더니 이 박사의 집 앞에 섰다. 뒷자리에서 5·16 군사정권이 임명한 김세원 총영사가 최백렬씨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내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는 이 박사의 왼쪽에 양자 이인수씨, 오른쪽에 최백렬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인수씨 맞은편에 앉았다. 김 총영사는 윌버트 최 옆에 앉게 되어 이 박사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백렬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이 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 총영사가 "아직은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 박사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이인수씨는 양아버지의 싸늘해진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김 총영사의 말이 다 끝나자 이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아주 조그맣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가는 것이…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하기 바라오…." 그러고는 가냘프게 "나라…나라…" 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이 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이날 이후 이 박사는 두 번 다시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이인수씨는 자신이 국내로 들어와 이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로 결심하고 그날로 하와이를 떠났다. 귀국이 좌절된 채 아들도 떠난 집에서 87세의 이승만은 뇌출혈을 겪었다. 급히 트리풀러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후유증인 중풍으로 수족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야말로 가장 막막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의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우리 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승만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병이 절실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주어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그녀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서도 매월 200달러씩 보내주고 있었다. 한번은 친정에서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 '종이 옷장'은 지금도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건국한 지 77년째가 되는 오늘날, 대통령과 영부인의 기상천외한 일탈로 나라 전체가 어지럽다. 우리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처럼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04 18:12:03<51> 아이슬란드 북부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아이슬란드 여행 6일 차. 섬 동부에서 북부쪽으로 이동한다. 간만에 날씨가 맑아 기분이 좋다. 길이 산으로 이어져 지그재그 도로로 올라가다보니 산아래 바다로 이어진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척 멋있었다. 거의 정상까지 올라왔는데 길 위에 눈이 눈사태같이 쏟아져 막혀있는 곳에 다다랐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살펴보니 꽁꽁 얼어있어 답이 안 나온다. 아무리 우리 렌트카가 4륜구동 지프라도 빙판에 경사도 무척 가팔라서 그대로 통과하다가 잘못하다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상황.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산을 다시 내려가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겨울의 아이슬란드에 오면 이렇게 갑자기 갈수 없게 된 도로를 만나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4월이었지만 아직도 산 위에는 눈이 안 녹은 곳이 많았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을 넘을 수 있는데... 너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쿠레이리이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이어 아이슬란드의 제 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섬을 시계로 생각하면 12시 방향에 있는데 어제까지 머물렀던 동쪽의 에이일스타디르에서 약 3시간 거리이다. 에이일스타디르에서 아쿠레이리까지 3시간 걸린다 우리의 아이슬란드 여행 계획을 카우치서핑에 올렸더니 감사하게도 아쿠레이리에 사는 친구가 우리를 초대해주었다. 친구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마구 설레었다. 아이슬란드의 어마어마한 물가에 며칠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보다도 바쁘게 여행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아이슬란드에 대해 현지 친구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어젯밤 새벽에 외진 곳으로 차를 몰고가서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기다렸는데 오로라를 볼 수 없었다. 친구에게 오로라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 또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친구가 좋아하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찾아가 보고싶다. 여행지에서 현지 친구가 생기면 좋은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친구네 집으로 향한다. 회색 구름으로 꾸물꾸물해진 하늘아래 아쿠레이리에 도착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이 길가의 빨간 신호등. 하트모양으로 켜진다! 와, 정말 쇼킹하다.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했지? 너무너무 예쁘다. 신호등 불이 동그랗기만 할 필요가 뭐있나. 가는 곳 마다 빨간 하트를 보고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보통 신호등을 건널 때 빨간불이 켜지면 좀 답답하고 기분이 별로인데 이 하트를 보고 있으면 빨간불이어도 덜 답답하고 심장을 연상하면서 더 주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쿠레이리가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친구네 집에 가기 전 핑크색 돼지가 상징인 보너스라는 마트에 들렀다. 살인적 물가의 아이슬란드에서 그나마 식료품 등을 가성비 있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높은 물가로 외식이 어려워 식료품 구입이 중요하다 친구와 함께 먹기 위해 고기와 채소 그리고 과일을 잔뜩 샀다.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은색 기아 소렌토 차량이 집 앞에 서있다. 메세지로 대화를 나눌 때 한국차가 있다고 했는데 친구의 차인 모양이다. 친구의 차 기아쏘렌토 아이슬랜드 험로를 다니기에 좋은 선택이었나보다. 친구의 집은 2층 주택이었는데 담도 없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안전한 동네 같아 보이고 좋았다. 더부룩한 턱수염에 거의 2미터가 되어 보이는 장신인 비기는 친절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묵을 방은 커다란 더블배드에 깨끗하고 좋은 환경이었다. 비기는 주로 재택근무를 한다고 한다. 인사후 비기는 다시 일을 하러 방에 들어가고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상추를 닮은 채소를 쌈채소 삼고 돼지고기를 굽는다. 쌀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튀르키예 메르신에서 받은 인스턴트 떡국과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 캔김치까지 한식 한상차림이다. 비기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고 경험도 무척 많았다. 한국에는 아직 안가봤지만 2020년 일본에 갔다가 코로나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식사하며 맥주를 마시다가 한국에서는 건배를 할 때 뭐라고 하냐고 물어봐서 "짠!"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건배사가 너무 많아서 가장 쉬운 것으로 골라 알려주었다. 서양사람들이 매운 것을 못 먹는다는 것은 선입견일 뿐이다. 물론 잘 못 먹는 사람도 있지만 의외로 매운 것을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들도 많다. 비기도 매운 맛을 좋아해서 고추장을 맛보고는 무척 좋아했다. 고기를 채소에 싸먹는 것을 알려주니 계속 그렇게 먹는다. 절대 한입에 다 넣어야한다고 제대로 가르쳐주었다. 즐겁게 식사를 하며 아이슬란드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묻고 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도 과거 가난한 나라였다가 2차대전 이후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국과 비슷한 것이 흥미로왔다. 아이슬란드 전통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기가 상어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딱 보기에 하얀 참치살덩이 같아보이는 것이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삭혔나보다. 하나 쿡 찍어 입에 쏙 넣은 탄이랑 달리 나는 냄새부터 맡아보고 먹으려 입을 벌리다가 멈칫. "어우, 나는 쉽게 못 먹겠는데?" 하며 웃었다. 탄에게 확인해본다. "괜찮아?" "응~" 탄이 잘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한입에 넣었다. 맛있다기보다는 먹을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좋은 경험이었다. 상어도 먹어보고ㅎㅎ 저녁식사 후 비기의 소장품을 구경했다. 어릴 때 삼촌과 새알을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멋진 투명케이스에 크기와 색이 다른 여러가지 새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다 직접 주워온 것이라고 한다. 제일 큰 것이 백조알이라고 하는 얘기에 깜짝 놀라며 "오 나 백조알 처음 봐요!"하자 비기가 갑자기 케이스를 열고 백조알을 꺼내어 내손 위에 올려놓는다. 살짝 당황했지만 깨질까 조심조심 두 손으로 알을 받아 보았는데 달걀의 네다섯배는 되보이는 크기에 무척 단단한 느낌이다. 신기했다. 아이슬란드라서 가능한 취미일 것 같았다. 알 컬렉션이라니. 그렇게 비기네서 3일간 머물면서 그 근처를 여기저기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로 했다. 탄이는 목감기가 빨리 낫지를 않아 힘들어하면서도 여행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음날은 날씨가 맑아 동네 근처를 드라이브하러 나왔다. 어딜 가나 처음 보는 자연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삼각형으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진 듯한 높은 산맥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마치 검은 피라미드가 늘어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젯밤 비기가 해준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다니면서 왜 이렇게 나무가 없다 했는데 역시나 아이슬란드 전체에 나무가 있는 지역이 거의 없다고 한다. 동물들도 여우와 새들이 조금 있을뿐이라 예전에 유럽에서 순록을 데려와 풀어놓고 길렀는데 혹독한 기후에 서쪽에는 다 죽어버리고 동쪽에 조금 남아있다고 한다.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 경험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맑은 물도 이렇게 많고 넓은 땅에 나무와 동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길을 가다가 일차로밖에 없는 터널을 만났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중간중간에 잠깐 옆에 댈 수 있는 조금 넓은 곳을 찾아 비키면 된다. 그러니 속도를 절대 높이지 않고 조심조심 가야한다. 워낙 큰 땅에 적은 수의 사람이 살다보니 도로도 일차로인 경우가 많아 한쪽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후 가야하는 길도 자주 만난다. 확실히 북쪽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많은 관광객이 레이캬비크를 중심으로 남서쪽에 주로 다녀서 그런가보다. 덕분에 우리는 한적한 풍경을 여유있게 보며 다닐 수 있었다. 북쪽 바다를 볼 수 있는 쉼터에 멈춰서서 북극이 있을 곳을 쳐다보기도 하고 절벽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를 구경하기도 하고 마음 가는대로 다니는 것이 참 좋았다. 비기네 집에 들어가기 전 다시 마트를 잠시 들렀는데 한 구석에 맥주를 무지 싸게 파는 것 같아 놀라서 가보니 논알콜 맥주라고 한다. 맥주는 정부가 운영하는 특별한 가게에서만 비싼값에 판다고. 비기에게 오로라에 대해 물어보니 오로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페이스북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리고 앱도 하나 알려줬는데 매일매일 아이슬란드 지역별로 오로라지수가 나오는 앱이어서 오로라헌터들이 반드시 깔고 지수가 높은 날을 확인하고 나온다고 한다. 우리도 페북도 가보고 앱도 깔아두었다. 마침 오로라지수가 조금 높은 KP 4가 떴다. 방해안되게 조용히 새벽 1시에 나가보았지만 그 시각에도 하늘은 완전히 까매지지 않았고 아쉽게도 오로라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여러번 시도를 하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어두운 곳을 찾아 도시에서 멀리 벗어난 곳까지 갔던 것이 여러차례인데 모두 실패했다. 가기전에 볼 수 있을까? 궂은 날씨에 도착한 온천 '지오씨'...따뜻한 온천욕을 할 수 있겠지? 일어나보니 눈보라가 휘날린다. 비오는 날은 자주 있었는데 눈이 내리는 것은 처음이다. 오늘은 아쿠레이리에서 북쪽으로 한시간거리의 지오씨(Geosea)에 왔다. 남부의 블루라군이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데 인당 14만원이 넘는 입장료가 너무 부담이 되어 대신 이곳을 찾아왔다. 넓은 주차장에 차가 몇대 없다. 이곳의 입장료는 약 5만7000원. 알뜰한 탄이가 모바일 쿠폰을 다운받아와서 10%할인도 받았다. 인터넷으로 다운받았는데 진짜 할인해줄까 싶었는데 흔쾌히 해준다. 탄이와 헤어져 탈의실로 들어갔는데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실내가 매우 고급스럽고 깨끗하다. 샤워시설과 비치용품들도 매우 품질이 좋았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보니 거센 바람에다가 무지 추워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물속으로 곧장 들어갔다. 물 온도도 적당하고 너무 좋다. 이곳은 해수 온천이라 짠물이다. 바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뜨끈한 온천욕을 하며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너무너무 매력적이었다. 사람들도 많지않아 편안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탄이도 무척 행복해한다. 얼굴에는 눈송이가 떨어지지만 몸이 따뜻하니 기분이 좋다. 풀도 꽤 넓고 여러개가 있어서 이곳저곳을 다녀보는 재미가 있다. 한 쪽에는 음료와 스낵을 파는 곳이 있는데 가격이 후달달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출출해졌을때 탈의실 라커에 가서 미리 비기네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탄이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고 탈의실 가서 잘 먹으라고 줬다. 조금 궁상스럽기는 했지만 이곳 물가를 보면 기꺼이 그럴만 하다. 온천에 들어가있는데 추운 날씨에 수증기가 머리에 맺힌 것이 얼어버렸나보다. 탄이 보고 안스러워한다. "아니야 괜찮아. 하나도 안추워. 따뜻하고 편하고 너무 좋아." 한쪽에는 습식 사우나도 있었는데 사람이 없어 우리가 전세내고 마음껏 즐겼다. 규모는 크기 않지만 온천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던 지오씨, 아이슬란드에서 최고로 좋았던 경험이다. 바다와 눈 쌓인 산을 바라보며 뜨끈한 온천욕을 즐긴 추억은 평생 갈 것 같다. 아이슬란드 여행 중 최고의 경험이었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hN2xDlFg720?si=1fYzN4IZ2Wq1QmUj>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5-02-18 14:02:15<41> 튀르키예 서남부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나일항공을 타고 2시간의 짧은 비행 후 택시를 타고 곧장 사비하 귁첸공항 근처의 까브리가 서있는 곳으로 갔다. 혹시 차가 털리거나 뭐가 깨져있거나 견인되버린건 아닌지 불안해 하면서 갔는데 떠난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멀쩡히 서있는 까브리를 보자 너무너무 반가왔다. "야~ 까브리야! 잘 있었어? 아따, 오랜만에 본다." 다시 까브리에 타니 내집같이 편안하다. 원래 이집트 가기 전에는 다녀와서 튀르키예를 해안도로를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며 계속해서 여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지 벌써 7개월. 그동안 여행의 피로가 많이 쌓인데다 이집트에서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몸도 마음도 피곤에 절어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곳에 좀 오래 머물며 영상작업도 하고 휴식도 취하자고 마음을 모으고 저렴하고 조용한 숙소를 찾아보았다. 번잡하고 비싼 대도시 이스탄불을 떠나 튀르키예 서남부 사클리켄트 국립공원 근처의 시골마을에 무지무지 저렴하고 조용한 숙소를 구했다. 3주에 430달러, 1박에 3만원도 안된다. 숙소까지는 750km, 차로 9시간 거리. 이동중에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설경을 만났다. 아침까지만해도 한여름 같은 뙤약볕의 카이로에 있다가 오후에는 눈 쌓인 풍경을 보다니 기분이 참 묘했다. 맛있는 것도 해먹고 편히 쉴 생각에 기운이 났다. 중간에 길가에서 하루 차박을 하고 다음날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빠져나와 또 산속길로 한참을 들어가서 도착한 숙소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얀 3층 건물의 1층을 통으로 쓸 수 있었다. 와이파이도 느리지만 있고 넓은 거실에 방 세개에 화장실 두개를 우리가 몽땅 사용한다. 지은지 얼마 안된 집인듯 깨끗하고 정말 좋았다. 저렴한데다 시골에 있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집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한 곳은 베란다였는데 커다란 창이 유리도 없이 뻥 뚫려 있어 거기를 통해서 보면 산과 들과 나무들이 마치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와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시간 거리에 관광도시인 페티예(Fethiye)가 있다. 장을 보러 한두번 갔다오기도 했다. 식료품 물가가 이집트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생각하면 무지하게 저렴하다. 한번은 장을 보고온 것을 풀어보니 둘다 과일을 좋아해서 담다보니 과일만 7종(사과, 오렌지, 석류, 딸기, 감, 자두, 바나나)이 되었고 계란한판에 두툼한 소고기 1.5kg, 찢어먹는 치즈, 각종 채소(감자, 상추, 고추, 생강, 마늘, 버섯, 파, 양파, 당근 등), 호두 커다란 한봉투, 식빵, 음료수 세병, 마요네즈, 버터, 파스타면과 과자등 어마어마하게 사왔는데 모두 다해서 9만원이 안되었다.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다음날은 어디로 갈지, 어디서 잘지,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할지 걱정이 없이 3주간 우리는 그동안 먹고싶었던 꼬리곰탕, 짬뽕, 짜장면, 닭볶음탕 등등 한식을 마음껏 해먹으며 잘 쉴 수 있었다. 식료품 가격이 4분의 1정도 하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탄이 갑자기 와서 뜬금없이 패러글라이딩을 하고싶지 않냐고 물어본다. 회사 다닐때 한번 타본 경험이 있었는데 썩 좋지 않았더래서 반반이라고 했더니 자기가 타고싶다며 여기서 가까운 욀뤼데니즈(Oludeniz)라는 곳이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인데 가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가볼 수 없지. 인터넷으로 정보를 좀 검색한 후 낙하산을 타러 갔다. 욀루데니즈는 야자수가 있는 예쁜 휴양지같은 마을이었다. 바닷가 옆에 패러글라이딩 업체들이 모여있었다. 비행 후 랜딩하는 곳이 바로 이 해변 모래사장인가보다. 잔잔한 지중해 바다가 햇빛에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여서 너무너무 아름다왔다. 꼭 패러글라이딩을 하지 않더라도 예쁜 해변과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몇개의 업체를 방문해서 가격과 출발시간을 알아보았는데 우리가 인터넷으로 알아본 가격과 큰 차이가 없고 곧 타러갈 수 있는 스케줄의 업체로 정했다. 직원분이 영상을 보여주면서 주의할 점,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셨고 곧 우리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작은 미니버스에 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말고도 손님이 서너명 더 있었고 손님 한명마다 한명의 파일럿이 함께 가기 때문에 일행이 꽤 된다. 파일럿들은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버스 뒤 트렁크에 실었는데 깜짝 놀랄만큼 크기가 컸다. 2월은 비수기로 인당 100$이었는데 눈이 많이 오고 길이 얼어서 1200m까지만 올라간다고 한다. 여름 성수기 가격은 175$인데 거의 산 정상까지 올라가서 1900m에서 뛴다니 어마어마하다. 한라산이 그정도 높이일텐데 역시 튀르키예에는 훨씬 높은 산이 많구나 싶었다. 올라가는 길에 창밖으로 산아래가 보이는데 난간도 없는 비포장 도로를 올라가는 것이 아찔하다. 1200미터도 엄청 높아서 산 아래의 모든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활공장에 도착하니 뿌연 하늘밖에 안보였는데 흐린것이 아니라 산에 걸린 구름속에 있던 것이었다. 바람이 불자 구름이 눈앞에서 흘러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파일럿들이 자기 몸집보다 더 커다란 장비를 짊어지고 넓은 활공장으로 이동해서 낙하산을 펴고 준비를 한다. 흥분과 기대로 미처 탄의 상태를 못보았는데 다시보니 반쯤 실성해서 울상이다 웃다가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탄이가 왜 패러글라이딩을 타자고 했는지 짐작가는 것은, 겁이 많은 본인이 타고 싶었다기보다는 스릴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타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사랑은 겁도 이기는구나. 해발 1200m에 펼쳐진 기가막힌 장면을 보고 벌어진 입이 닫히지를 않는 탄이의 모습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었다. 반면에 나는 언제 패러글라이딩 타는 것에 시큰둥했나 싶게 마냥 신이나고 좋아서 너무너무 설레었다. 다이나믹한 것을 원하면 파일럿에게 말하면 된다. 나는 공중 체류시간이 줄어도 좋으니 다이나믹하게 운전해달라고 부탁했고 탄이는 제발 천천히, 평화롭게 해달라고 몇번이고 강조를 했다. 탄이가 좋아하는 주황색 낙하산을 타고 탄이가 먼저 출발한다. 파일럿이 뒤에 앉아 함께 타는 텐덤덤비행이었다. 아무리 파일럿이 함께 있다해도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앞에서 줄을 잡고 뛰라고 끌어주시는 직원분의 호령소리에 머뭇거릴 새도 없이 탄이가 후딱 뛰어 날아가버렸다. 우와!~ 탄이의 용기에 박수. 다이나믹하게 해달라고 해서 그런건지 내 차례는 맨 마지막이었다. 파일럿이 쓰라고 건네준 까만 헬멧이 귀여워 마음에 들었다. 긴 셀카봉도 받았다. 이곳 사람들은 촬영에 진심인듯 패러글라이딩 장비 말고도 360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등 촬영장비가 매우 잘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내 담당 파일럿이 한국말을 몇마디 하며 긴장을 풀어주신다. 여기도 한국 관광객이 무지 많이 왔었나보다. 같이 달리면서 우리를 끌어주는 직원분이 "달리기~달리기~달리기~!"하며 나에게 열심히 뛰라고 시킨다.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부웅~~ 와... 떴다! 발아래 까마득한 땅과 바다가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보기에 바빴다. 산을 지나 바다위에 떠서 보는 풍경이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왔다. 까마득한 아래에 집들이 레고블럭만하게 보였고 푸르른 지중해가 햇빛을 받아 더욱 푸르게 빛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다만 내 뒤의 파일럿이 한국 손님을 많이 경험하셨는지 자꾸 "행복해? 행복해?"하고 물어봐서 오롯이 내 감동에 푹 빠지는 것을 방해받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저절로 나오는 "우와... 세상에.. 대박..."이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넓은 바다위로 위치를 잡자 파일럿이 "이제 go?" 한다. 으아 드디어 시작되는 것인가. 18년 경력의 능수능란한 파일럿의 조종으로 패러글라이더는 롤러코스터 정도는 절대 비할 수 없는, 상상도 못하는 스릴을 맛보게 해주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내 머리위로 바다가 펼쳐지고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돌고 눈앞에 바다만 보이다가 뚝 떨어졌다 상승하고, 그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너무너무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간에 파일럿이 나에게 조종줄을 맡겨 스스로 왼쪽, 오른쪽으로 돌게하도록 해주었는데 내가 움직이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패러글라이딩을 배우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참 다이나믹한 스릴을 경험하고나니 지상이 가까와져 있었다. 손톱만하게 보이던 집들이 점점 커지고 우리는 바다 바로 앞 해변에 안전히 착륙했다. 땅에 발이 닿고나서도 흥분과 감격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함께해준 파일럿께 너무너무 감사했다. 탄이는 원하는대로 고요하고 잔잔한 비행을 했다고 한다. 하늘 위에서 푸른 지중해와 예쁜 튀르키예의 산과 들을 마음껏 보는 것이 너무 좋았고 겁이 많은 편임에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큰 움직임이 없던 탄은 나보다 먼저 출발했지만 15분정도나 늦게 착륙했다. 탄이 내려온 것을 보고 달려가 맞이했다. 탄이 나에게 먼저 물어본다. "좋았어?" "대박~ 미쳤어." "100점 만점에 몇점?" "아유.. 천점!!!"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평생 한번은 꼭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하늘 위에서 지구를 감상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 아닐까 싶다. 새처럼 나는 꿈을 실현한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평생 잊지못할 최고의 추억이 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도시에 간 김에 돼지고기를 파는 곳을 찾아갔는데 삼겹살 비슷한 것을 살 수 있어 매우 반가웠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돼지고기 먹기가 하늘에 별따기이다. 비쌌지만 살 수 있어 다행이라며 숙소에 와서 쌈채소와 함께 맛있게 구워먹었다. 그렇게 마냥 편하고 여유롭게 보내던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핸드폰과 메일등에 온통 난리가 났다. 알고보니 튀르키예에 대지진이 나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지인과 구독자분들의 확인 연락들이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던 곳은 안탈리아 근처의 서쪽으로, 대지진이 발생한 시리아 국경근처 동부 가지안테프 지역과는 매우 떨어져 있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잠만 쿨쿨 잘 자고 일어났던 것이다. 나중에 뉴스를 보고는 우리가 있는 지역이 아닌 것이 너무너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지진이 쓸고 간 후 처참한 모습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다음 목적지가 그곳에서 3시간 거리인 메르신이어서 그곳에서 만날 예정인 분들이 걱정되었다. 혹시나 하며 연락해보니 다행히 그쪽도 큰 피해는 없으시다고 한다. 잘 먹고 쉬고나서 집을 렌트한 기간이 끝나고 메르신을 향해서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7MZZbNOR_dg?si=1N8llVOuOP0l6vSk>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1-28 19:23:33파이낸셜뉴스와 국립오페라단이 공동주최한 오페라 ‘탄호이저’가 지난 10월 20일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45년만, 원어로는 처음 선보인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폐막 이후에도 다양한 이야깃거리,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고, 여운도 깊었다. '탄호이저'는 사랑을 통한 구원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 연출로 참여한 요나 김은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는 베누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설명되는 파리 버전(1861년)과 드레스덴 초연 버전(1845년)을 섞어 ‘뉴 탄호이저’를 탄생시켰다. 시대와 배경을 뚜렷이 규정하지 않는 연출 덕에 오페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됐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인 요나 김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하지만 이번 ‘탄호이저’를 비롯해 내년 8월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선보일 소리악극 ‘심청’으로 또다시 한국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지만 정작 그 모습은 무대 밖에 있다. 폐막 후 3주를 더 서울에 머물며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바라본 그는 어떤 새로운 영감들을 얻었을까. 다음은 요나 김 연출과의 일문일답이다. ―‘탄호이저’ 이후 어떻게 지냈나. ▲작품 하나가 끝나면 머릿속에서 바로 이사가 시작된다. 작품에 대한 파편들, 또 보여주지 못한 것들, 그런 생각들이 널브러진 짐들처럼 남아 있는데 그걸 정리하고 비우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향해 가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하는 것은 뭐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필요한 짐만 싸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는 일과 비슷하다. 이번에는 그 과정이 더욱 과도기처럼 느껴졌다. 고국인데다 여러 가지 요소가 상충되면서 이사가 좀 격렬해졌다고 할까. 공연을 하면서 스태프들의 열정과 실력에 놀란 순간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공연을 하면서 모든 걸 태운 것 같은데 감동의 흔적이 불탄 자국처럼 남아 있는 느낌이다.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쓴 ‘탄호이저’에서 완전히 다른 장르인 ‘심청’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중이다. ―한국에 자주 오나. 서울의 변화를 많이 체감하는지. ▲정해진 건 없다. 어떨 때는 몇 년 동안 안 온 적도 있고, 두 달가량 이렇게 오래 머무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탄호이저’ 공연이 끝나고 여기저기 둘러볼 기회가 많았는데 시각적으로는 ‘다이내믹 코리아’ 그 자체다. 내가 모르는 건물이 서 있고 새로운 음심점도 생겨나 있고. 유행이 굉장히 빠르게 오고 또 그만큼 휘발성도 강한 것 같다. 순환이 엄청 빠른 거다. 반대로 유럽은 굉장히 느린 대륙이다. 그곳에서 1년 걸리는 일이 한국에서는 한 달 내에 가능한데 일하는 방식에서도 다르다는 걸 늘 느낀다. ―서울 여행을 한 셈인데 구체적 일상은. ▲문화계 지인들도 만나고 갤러리도 가고 그랬다.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엔 다른 공연은 보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경계하는 거다. 오히려 업무 미팅 사이사이 일부러 혼자 걸을 때가 있는데 그때가 가장 좋은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내가 정면 대결하는 순간들, 그러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이 도시에 대해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군중 속에 섞여 걸어가는 것 자체가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편안하고 좋았다. 그렇게 걷다가 본 석양의 아름다움은 유럽과는 또 달랐다. 우는 것처럼 짧은 시간 빨갛게 이글거리다 휙 사라져버리는 모습이 한국 정서와 닮았다. 무대 연출에 있어 조명 작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빛의 요소를 자세히 보는 편이다. 또 거리를 걸으며 한국 사람들, 다양한 연령대의 패션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준비 중인 ‘심청’ 작품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 ▲심청 설화는 인간사에서 정말 너무나 오래된, 원초적인 설화 중에 하나다. 다수의 민중을 통해 전해져온 이야기고, 또 화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으나 주인공은 여성이다. 관심이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소리다. 북소리는 심장 박동 같고, 불완전한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장르보다 혼이 담겨 있다. 오페라와 달리 원초적이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또 오페라는 배우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보완해주지만 판소리는 ‘naked(날 것)’한 장르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한마디로 적나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힘이 크다. ―‘심청’의 무대 연출 방향성은. ▲판소리는 화자 한 명이 나와서 북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소설적 3인칭에서 묘사하기도 하고, 또 그러다 갑자기 그 인물에 들어가 직설화법으로 그 인물의 이야기를 한다. 소리꾼은 하나인데 여러 등장인물이 됐다가 또다시 벗어나는 구조들이 참 신기한데 이 부분이 원자의 핵처럼 굉장히 밀도가 있다. ‘불타는 점’ 또는 태양 같은 그 부분을 풀어 극으로 만들고 싶다. 인간의 목소리가 중심에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파장들이 선과 면, 입체적 공간이 되어 4차원까지 넓혀가는 장치들을 구상하고 있다. 한마디로 소리로 파생된 거대한 태양계를 상상하는 중이다. ―한국 문학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도 구상 중인가. ▲언젠가 시도해 보고 싶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독일어판이 출간됐을 때 읽었다. 다른 작품들도 한국어 판본으로 읽어보고 싶다. 또 한국에 있는 동안 다양한 책을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았다. 최인훈의 ‘광장’, 김만중의 ‘구운몽’ 등. 그중 지인이 선물해 준 ‘꿈꾸다 떠난 사람, 김시습’이라는 책을 밤마다 읽는데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많다. 유럽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을 거의 읽지 못했는데 한국어의 재발견이랄까, 그런 시간들이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한국, 특히 서울은 전 세계적으로 트렌디한 도시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늘 애절하게 그려왔던 도시인만큼 고국의 품이랄까 너무 특별하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장이 있는데 ‘나는 경계선 밖을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 내 마음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다시 그곳으로 넘어오고 싶었다’라는 말이다. 외국에 있다 다시 경계선을 넘어왔는데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게 너무 귀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 같다. 특히 이번에 바쁜 틈틈이 걸으면서 서울을 느끼고 관찰하고 놀란 순간순간들이 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요나 김’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를 또 볼 수 있을까. ▲‘특정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의지나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욕심을 부린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갖되, 늘 열린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탄호이저’ 역시 나를 찾아온 작품이었다. 바그너 작품 중에는 ‘니벨룽의 반지(The Ring of Nibelung)’ 4부작을 한국 프로덕션으로 연출해 보고 싶다. 한국 성악가들이나 제작진이 ‘링’을 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고, 한국 관객들도 바그너의 작품을 받아들일 만큼 수준이 높다. 이외에도 좋은 작품이 찾아오면 시간이 되는 한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11-14 14: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