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 말기 김홍륙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한양 정동에 살아서 사람들은 정동대감이라고 불렀다. 김홍륙은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고종 옆에서 통역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승승장구했다. 러시아공사에도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김홍륙을 더더욱 필요로 했다. 급기야 김홍륙은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넘겼고 고종에게도 함부로 대했다. 그래서 고종은 아관파천 후 1년 정도 지난 뒤에 환궁을 하고 나서 김홍륙을 처단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김홍륙은 신하들의 상소로 인해서 파면을 당하고 곤장 100대를 맞고서 흑산도로 유배된다.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고종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김홍륙은 유배를 떠나기 전에 손주머니 안에서 아편 1냥을 꺼내서 심복인 공흥식에게 전하면서 나지막하게 “이 아편을 어선(御膳)에 몰래 섞어서 올리도록 하게나.”라고 했다. 공흥식은 “염려마십시오. 차질없이 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흥식은 이 거사를 김종화에게 맡겼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창고지기로서 임금에게 바치는 서양요리 전담 요리사였다. 일전에 요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쫓겨난 상태였기에 역모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공홍식은 김종화에게 은화 1000원을 주고 포섭했다. 김종화는 고종의 생일날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고종은 커피를 즐겼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커피를 처음 마셔본 이후 계속해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 1898년(고종 35년) 9월 12일, 김종화는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었다. 아편은 특이한 맛이 있으면서 강한 쓴맛이 난다. 그리고 물이나 술에 잘 녹는다. 그러니 커피에 아편을 넣어서 녹이면 커피의 쓴맛 때문에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평소에 마시는 커피맛이 아니었기에 “오늘은 커피맛이 다르구나.”라고 하면서 몇 번 맛을 보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반면에 커피 맛을 잘 몰랐던 세자는 모두 마셨고, 결국 구토를 하고서 쓰러졌다. 바로 그 유명한 독다사건(毒茶事件)이었다. 당시 고종은 43세, 세자는 25세였다. 궁내부 대신 이재순이 고종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와 태자가 동시에 수라를 통해 건강을 해쳤다고 하는데, 수라를 진공할 때 애당초 신중히 살피지 못했음에 너무나 놀랍고 송구하옵니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법부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나라의 형률을 바로 잡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엄한 목소리로 “이 사건을 경무청으로 하여금 근본 원인을 엄히 밝혀내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결국 경무청의 조사를 통해 사주한 인물이 김홍륙이란 것이 밝혀졌다. 경무청은 관련된 범인들을 모두 잡아냈고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마약 커피를 마시지 않은 고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세자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세자는 며칠동안 드러누워 혈변을 봤고 치아가 모두 빠졌다. 세자는 결국 젊은 나이에 틀니를 끼게 되었다. 훗날 순종왕이 되어서도 자녀가 없는 이유가 아편독으로 인해서 생식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다면 아편으로 독살이 가능한 것일까? 아편은 다른 마약류에 비해서 약성이 강해서 적은 양이라도 한꺼번에 복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공흥식이 김홍륙에게 건네 받은 아편이 1냥이니 37.5그램이었다. 아편은 한번에 2그램 정도면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양으로 그 이상의 양이면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김종화가 커피에 얼마만큼의 아편을 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사량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보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서 나라의 주권이 박탈되자 <매천야록>을 지은 구한말의 재야 문인인 황현은 소주에 아편을 섞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가 있다. 황현은 당시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는데, 그가 지은 <매천집>에는 다음과 같은 싯구가 있다. ‘아편을 탄 술은 달기가 꿀과 같네[아연지주(鴉烟之酒) 감지약밀(甘之若蜜)]’라는 내용이다. 아편은 양귀비(앵속각)의 덜 익은 씨앗의 꼬투리에서 유액을 말려 농축한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양귀비가 많았다. 양귀비는 앵속각이라고 해서 약으로도 사용했는데, 기침, 천식에 효과적이었고 특히 지사제로도 썼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귀비는 마약보다는 가정상비약의 인식이 강해서 양귀비를 기르는 것을 특별한 단속하지 않았다. 현재는 양귀비는 마약류로 분류되어 재배 및 약용이 금지되어 있다. 다만 아편과 같은 일부 마약류는 철저한 관리하에 의약품으로 허가되어 있다. 조선 후기만 해도 아편은 조선에서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청나라에는 일찍이 서양에서부터 아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840년 헌종 6년에 중국을 다녀온 사신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사람이 아편(鴉片)을 몰래 가져와 몸과 목숨을 상해하는데, 그 해독(害毒)을 입은 어리석은 백성이 유혹을 받고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러도 뉘우쳐 고칠 줄 모르므로 황제가 진노하여 여러 번 유지를 내려 엄히 금지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에서부터 들어온 아편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1840년에는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청나라 사람들이 빼앗아 불태워 아편전쟁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아편을 금하고 있었다. 1848년(헌종 14년)에는 조선의 통역관 중 한 명이 아편 연기를 빠는 기구를 중국에서 가져오다가 의주에서 잡히자 사형을 시키고자 했으나 특별한 법령이 없어서 사형은 면하고 추자도로 종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은 누구나 아편을 피웠다. 1872년(고종 9년) 청나라를 사신으로 다녀온 민치상이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기도 했다. “전에는 아편연(鴉片烟)을 피우는 자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아편을 피우는 도구들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오히려 아편을 피우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었으며 아편을 피우는 도구를 아무렇게나 마구 팔고 있어도 금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관에서 세금을 걷고 있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아편연은 아편을 곰방대에 넣어서 담배처럼 피우는 것을 말한다. 구한말 이후 조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아편이 보편화되었다. 아편은 일본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주요 수단이 되어 한반도내에서 직접 양귀비를 다량 재배해서 아편을 만들었다. 당시 아편은 모르핀 진통제로서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조금만 아파도 모르핀을 맞았다. 심지어 아편은 밭일을 나가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손쉽게 재울 수 있는 특효약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도 아편 중독자들이 상당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아편은 일국의 왕을 독살시키는 독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편은 마약의 심각한 폐해 때문에 철저한 단속을 한다고 하지만, 최근에 다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땅에는 다시 새로운 아편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 제목의 ○○은 ‘아편’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고종실록> 고종 35년 1898년 9월 12일. 陰曆本年七月十日, 金鴻陸承流配詔勅, 同日發配之路, 暫住金光植家, 搜出一兩鴉片於所携手帒, 猝發凶逆之心, 給付所親人孔洪植, 密嗾調進於御膳矣. 陰曆七月二十六日, 洪植逢金鍾和, 備說受嗾於鴻陸之狀, 以此藥物調進於御供茶, 則當以一千元銀酬勞云. 鍾和曾以寶賢堂庫直, 御供洋料理擧行, 因不善擧行而見汰者也. 卽袖該藥入廚房, 投下珈琲茶罐, 竟至進御.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을 받고 그날로 배소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에게 주면서 어선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어공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의 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의 창고지기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헌종실록> 헌종 6년 1840년 3월 25일. 首譯別單. 전략. 西洋人入中國者, 播傳邪敎, 陷溺人心, 挾帶鴉片, 戕害身命, 而愚氓之受其毒者, 始則被人引諉, 繼則習染邪說, 甚至蕩産戕生, 罔知悛改, 皇帝震怒, 屢下諭旨, 嚴加禁斷. 上自朝官, 下至軍民, 以此獲罪, 不下屢萬. (수역의 별단에 이르기를, 전략. 중국에 들어온 서양 사람이 사교를 퍼뜨려 인심이 빠져들고, 아편을 몰래 가져와 몸과 목숨을 상해하는데, 그 해독을 입은 어리석은 백성이 처음에는 남의 유혹을 받고 이어서 사설에 물들어 심하면 가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러도 뉘우쳐 고칠 줄 모르므로, 황제가 진노하여 여러 번 유지를 내려 엄히 금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로 조관으로부터 아래로 군민에 이르기까지 이 때문에 죄받은 자가 수만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 헌종 14년 1848년 5월 9일. 命秋曹囚朴禧英, 減死爲奴于楸子島. 禧英, 象譯流也, 鴉片烟取吸器具, 被捉於灣府, 而用律無可據, 有是命. (추조의 수인 박희영을 사형을 감면하여 추자도에 보내어 종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박희영은 역관배인데 아편 연기를 빠는 기구를 가져오다가 만부에서 잡혔으나 의거할 율문이 없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9년 1872년 4월 4일. 致庠曰, 전략. 且鴉片烟之無人不吸, 大可憂憫, 前日則吸之者, 恐或人知, 祕其烟具, 今行見之, 反以不吸爲恥, 烟具亂賣, 非徒不禁, 至有自官征稅, 其習俗之漸變, 於此可見矣. (민치상이 아뢰기를 “전략. 또 아편연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크게 걱정할 만하였습니다. 전에는 그것을 피우는 자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아편을 피우는 도구들을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행으로 가서 보니 오히려 아편을 피우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었으며, 아편을 피우는 도구를 아무렇게나 마구 팔고 있어도 금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관에서 세금을 걷고 있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습속이 점차 변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9-04 13:38:45[파이낸셜뉴스] 태국의 수도 방콕의 한 호텔 방에서 베트남 국적의 남녀 6명이 청산가리 중독돼 숨진 채 발견됐다. 17일(현지시간) AP 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방콕 라차프라송에 위치한 한 유명 호텔 객실 안에서 베트남 국적 남성 3명과 여성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중 2명은 미국 시민권자로 사망자 6명 중 5명은 객실 내부에서, 1명은 외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경찰에 따르면 사망자들은 이 호텔에서 각기 다른 층 객실에 머문 손님들이다. 호텔 직원은 이들이 체크아웃 시간을 넘겨서도 나오지 않자 객실을 찾았다가 이들의 시신을 한 방에서 발견했다. 현지 경찰은 이들이 독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방 안에서는 커피와 차를 마신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추가 검사 결과 청산가리 중독에 의한 살인이었다고 전했다. 당초 이 사건은 총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도되기도 했으나 현장에서는 다투거나 몸싸움을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숨진 6명과 함께 호텔 예약에 참여했던 7번째 사람인 A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추적에 나섰으며, 사망자들이 독극물을 섭취한 정확한 경위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4-07-17 08:06:30[파이낸셜뉴스]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망상장애로 이웃을 살해하고 거주지에 불을 지른 60대 남성에게 선고된 징역 20년의 형이 확정됐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살인, 현주건조물방화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를 지난 11일 기각했다. A씨는 지난해 1월 거주지인 서울 다세대주택에서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져 직장 동료이자, 이웃을 둔기로 살해하고, 집 주인의 목숨도 빼앗기 위해 주택에 불을 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여전히 망상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등 재범 위험성이 높은 점, 가족의 보호력이 부족한 점, 타인과 정서적 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형법상 심신미약감경 대상이라고 판단해 징역 20년에 보호관찰 5년을 선고했다. 다만 1심은 “망상장애는 적절한 정신과적인 치료를 통해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검찰의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청구는 기각했다. A씨와 검찰은 형이 무겁거나 가볍다며 각각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역시 “징역 20년을 선고한 1심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
2024-02-07 00:26:38[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한나라 선제는 허황후를 황후로 책봉했다. 허황후는 슬기롭고 어질며 사서를 많이 읽어서 총명했고, 후궁 비빈(妃嬪)을 통솔하여 모든 일에 예와 도리에 맞게 처리했다. 그런데 선제가 허황후를 급하게 황후로 책봉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궁에는 대장군 곽광(霍光)이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곽광에게는 부인 현(顯)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권력욕과 질투심이 강했다. 그녀는 자신의 막내딸인 성군(成君)을 황후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현씨 부인이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허황후는 잉태까지 했다. 현씨 부인은 별다른 방법이 없어 거의 포기할 즈음 기회가 생겼다. 분만을 앞둔 허황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시 담당 의사는 여의사인 순우연(淳于衍)이었다. 순우연은 한나라 때의 궁중 산부인과 여의사로 날마다 입궁을 해서 황후의 병을 간호했다. 문헌 기록상 중국 최초의 여의사로 알려져 있다. 순우연의 남편은 궁의 문지기였다. 남편은 순우연에게 “곽광의 부인인 현씨에게 들려서 인사를 드리고 그 김에 나를 안지감(安池監) 벼슬로 청탁해 주실 수 있겠소?”라고 부탁을 했다. 순우연은 남편이 벼슬을 하면 집안 살림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남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순우연은 현씨 부인을 찾아가 “부인께 청이 있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총애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곽광 장군에게 잘 말씀드려서 제 남편에게 안지감 벼슬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했다. 현씨 부인은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다가 눈을 번뜩이더니 시종들을 물리쳤다. 그녀는 바로 붓과 종이를 준비하더니 글자를 써 내려갔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려는 것 같았다. 내용인즉슨, ‘자네가 고맙게도 나를 찾아 주었으니, 나 역시 자네에게 보답하려는데 괜찮겠는가?’라고 적었다. 순우연은 “부인께서 제 청을 들어주시는 대가로 말씀하시는 일이라면 안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현씨 부인은 ‘곽광 장군은 평소 막내딸 성군을 아껴서 특별히 귀한 자리에 오르게 하고 싶은데, 자네 신세를 졌으면 하네.’라고 적었다. 순우연은 “어떤 신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현씨 부인은 ‘보통 부인(婦人)이 아이 낳는 것은 큰일이라서 출산을 하다가 도중에 열 사람 중 아홉은 죽고 하나만 살아나네. 지금 황후가 해산달에 다다랐으니 독약을 먹여서 제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성군은 곧 황후가 되지 않겠는가. 자네가 도와주어 성사된다면 부귀영화를 자네와 함께하겠네.’라고 적었다. 순우연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곧바로 붓글씨로 ‘의원들이 약을 섞어 조제하여 올리면 먼저 맛을 봐서 독의 유무를 확인하도록 되어 있으니 어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적었다. 현씨 부인은 ‘이것은 자네 하기에 달렸을 것이네. 곽광 장군이 천하를 호령하시는데 누가 감히 역모를 논할 수 있겠는가? 자네가 위급하게 되면 내 지켜 주겠네. 다만 자네가 가담할 뜻이 없을까 걱정일세.’라고 적었다. 순우연을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순우연은 붓글씨 대화가 적힌 종이를 물에 적셔서 먹물을 풀어 버린 후 현씨 부인 집에서 물러나왔다. 순우연은 황후의 해산일에 맞춰서 생 부자(附子)를 가루로 내서 장정궁(長定宮)에 가지고 들어갔다. 부자는 성질이 아주 뜨겁고 맛은 맵고 달며 대독(大毒)한 약재이다. 부자는 미나리아재비과인 오두(烏頭)의 뿌리로 아코니틴이란 독성분은 중추 신경계를 자극해서 감각이상, 호흡곤란, 경련, 쇼크를 유발할 수 있고 소량으로도 심장호흡부전으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생부자는 독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사약(賜藥)의 주 원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부자는 냉증제거나 관절염 등의 치료 목적으로 한의서 처방에도 들어가는데, 이 때 부자는 감두탕(甘豆湯)에 넣어 달여 독을 제거하고 이후에도 찬물에 하룻밤 이상을 담가서 수치를 해서 사용한다. 황후가 해산한 다음 순우연은 황후전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구석에서 아무도 몰래 태의(太醫)가 만들어 온 대환(大丸)을 으깨서 여기에 숨겨 온 부자가루를 섞어서 다시 환으로 빚어 놓았다. 순우연이 황후에게 환약을 올렸다. 황후는 순우연을 멀끔하게 쳐다보았다. 어서 한번 먼저 먹어 보라는 것이다. 순우연은 황우 앞에서 부자 가루가 안 들어간 환약을 하나 꺼내서 씹어 삼켰다. 그러고 나서는 부자가 섞인 부자환을 집어서 황후에게 올렸다. 황후가 부자환을 씹어 삼키더니 잠시 후 “혀가 따끔거리고 머리가 띵하면서 어지럽고 아프구나. 구역질도 난다. 가슴도 답답해지구나. 혹시 약 속에 독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순우연은 “이미 보신 바와 같이 제가 한 알을 먹어 봤지만 독은 없었습니다. 안심하고 마저 삼키셔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황후는 부자환을 삼키고 나자 잠시 후 구토를 했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면서 이후 호흡곤란으로 붕서(崩逝)했다. 순우연은 황후전을 나와서 현씨 부인에게 가서 “일을 잘 처리했습니다.”라고 했다. 현씨 부인은 “수고가 많았다.”고 답했다. 황후가 갑자기 환약을 먹고서 붕서한 사건을 이상하게 여긴 신하 중에 한 명이 상소를 했다. ‘이것은 독살로 보이니 황후의 병 치료를 담당한 의원들을 체포해서 옥에 가둬 황후의 죽음에 대한 실체를 밝혀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순우연을 비롯한 의원들이 모두 옥에 갇혔다. 그러나 고문을 해도 아무도 실토하는 의원이 없었다. 사실 순우연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만약 순우연이 입을 열면 현씨 부인뿐만 아니라 곽광 장군에게도 불똥이 튈 것은 뻔했다. 그래서 현씨 부인은 장군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이 역모는 제가 순우연과 함께 모사(謀士)를 꾸민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옥리(獄吏)에게 순우연을 고문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사정을 했다. 곽광은 깜짝 놀라며 묵묵히 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계략을 꾸민 것에 당황했던 것이다. 곽광은 전혀 모르고 있던 계략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곽광은 조옥(詔獄)에서 보고서가 올라오자 “순우연은 논죄하지 말지어다.”라고 하명했다. 우선은 이렇게 일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사건이 좀 잠잠해지자 현씨 부인은 순우연을 불러 사례를 했다. 현씨 부인은 순우연에게 진보광 집안에서 생산된 포도 그림이 그려진 비단 24필과 산화릉(散花綾) 25필을 보냈다. 이 비단은 현씨 부인의 저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진보광의 아내는 비단 직조법을 전수 받았기에, 현씨 부인이 진보광의 아내를 집으로 불러서 직기를 이용해서 비단을 짰다. 또한 진주구슬 한 꿰미와 푸른 비단 100단, 돈 백만 전, 황금 백 냥을 주었다. 게다가 큰 저택을 지어 주었으며 많은 노비까지 주었다. 그런데도 순우연은 곽씨 부인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을 이뤄 주었는데 내게 겨우 이렇게 보답하다니요?” 순우연은 이 사례가 부족하다고 불만족스러워했다. 다음해 현씨 부인의 딸 성군이 마침내 황후로 책봉이 되었다. 현씨 부인과 곽광 장군 일가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곽광이 죽고 나자 선제는 독살당한 허황후의 아들 석(奭)을 황태자로 삼아버렸다. 현씨 부인의 딸은 황후이면서 후사가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씨 가문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미망인이 된 현씨 부인은 분통해서 다시 석을 독살하려고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했다. 곽씨 가문은 반란을 일으켜서 정세를 모면해 보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심지어 허황후의 독살을 주도한 것이 밝혀져 곽씨 가문의 일족은 멸문지화를 맞이했다. 의사이면서도 돈에 눈이 멀어 황후 독살에 가담한 순우연(淳于衍), 최초의 여의사라는 칭호와 함께 불명예스러운 치욕적인 역사로 남아 있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끝이 없다. ** 제목의 ○○는 ‘부자’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의부전록> ○ 紀事. 漢書, 許皇后傳: 霍光夫人顯, 欲貴其小女, 道無從. 明年, 許皇后當娠病. 女醫淳于衍者, 霍氏所愛, 嘗入宮侍皇后疾. 衍夫賞爲掖庭戶衞, 謂衍: “可過辭霍夫人, 行爲我求安池監.” 衍如言報顯. 顯因生心, 辟左右, 字謂衍: “少夫幸報我以事, 我亦欲報少夫可乎?” 衍曰: “夫人所言, 何等不可者?” 顯曰: “將軍素愛小女成君, 欲奇貴之, 願以累少夫.” 衍曰: “何謂邪?” 顯曰: “婦人免乳大故, 十死一生. 今皇后當免身, 可因投毒藥去也. 成君即得爲皇后矣. 如蒙力事成, 富貴與少夫共之.” 衍曰: “藥雜治, 當先嘗, 安可?” 顯曰: “在少夫爲之耳. 將軍領天下, 誰敢言者? 緩急相護. 但恐少夫無意耳.” 衍良久曰: “願盡力.” 即擣附子, 齎入長定宮. 皇后免身後, 衍取附子并合大醫大丸, 以飲皇后. 有頃曰: “我頭岑岑也, 藥中得無有毒?” 對曰: “無有.” 遂加煩懣, 崩. 衍出, 過見顯, 相勞問, 亦未敢重謝衍. 後人有上書告諸醫侍疾無狀者, 皆收繫詔獄, 劾不道. 顯恐事急, 即以狀俱語光. 因曰: “既失計, 爲之無令吏急衍.” 光驚鄂, 默然不應, 其後奏上, 署衍勿論. (기사. 한서 허황후전: 곽광의 부인 현은 자기 막내딸을 귀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듬해에 허황후가 임신하여 편찮았다. 여의사 순우연이라는 자는 곽씨가 친애하던 사람으로, 늘 입궁하여 황후의 병을 간호했다. 연의 남편 상은 궁정의 문지기였는데, 연에게 “곽부인께 들러서 인사드리는 김에 나를 위해 안지감 벼슬을 청탁해 주시오.”라 했다. 연은 그 말대로 현을 찾아갔다. 현은 그로 인해 마음이 동해서 시종들을 물리치고는 글자로 써서 연에게 “자네가 고맙게도 나를 찾아 주었으니, 나 역시 자네에게 보답하려는데 괜찮겠는가?”라 하니, 연은 “부인께서 말씀하시는 일이라면 안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라 했다. 현이 “장군은 평소 막내딸 성군을 아끼셔서 특별히 귀하게 만들고자 하는데, 자네 신세를 졌으면 하네.”라 하자 연은 “무엇에 대해서인지요?”라 했다. 현은 “부인이 아이 낳는 것은 큰일이라, 열 사람은 죽고 하나만 살아나네. 지금 황후가 해산하게 되었으니 독약을 먹여서 제거할 수 있지. 그러면 성군은 곧 황후가 될 걸세. 자네가 도와주어 성사된다면 부귀를 자네와 함께하겠네.”라 했다. 연이 “약을 섞어 조제하면 먼저 맛을 보도록 되어 있는데, 어찌 가능하겠습니까?”라 하자 현은 “자네 하기에 달렸네. 장군이 천하를 호령하시는데 누가 감히 말을 하겠나? 위급하게 되면 지켜 주겠네. 다만 자네가 가담할 뜻이 없을까 걱정일세.”라 했다. 연은 한참 후 “힘을 다하겠습니다.”라 하고, 곧 부자를 빻아서 장정궁에 가지고 들어갔다. 황후가 해산한 다음 연은 태의가 만든 대환에다가 부자를 합해서 황후에게 복용시켰다. 얼마 후 “머리가 띵하면서 아프구나. 약 속에 독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 하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번만이 심해져서 붕하였다. 연이 나와서 현을 뵈러 가자, ‘수고했다’고 다독이기는 했으나 감히 연에게 중하게 사례하지 못했다. 후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서 황후의 병 치료를 잘못한 의사들을 고발하니 모두 체포하여 조옥에 가두었는데, 캐물어도 실토하지 않았다. 현은 일이 급하게 된 것이 두려워서 즉시 곽광에게 사정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는 “이미 계획은 틀어졌으나, 그 일로 옥리가 연을 닦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 했다. 곽광은 깜짝 놀라서 묵묵히 대답하지 않더니, 그 후 보고서가 올라오자 ‘연은 논죄하지 말 것’이라고 썼다.) ○ 西京雜記: 霍光妻遺淳于衍蒲桃錦二十四匹, 散花綾二十五匹, 綾出鉅鹿陳寶光家. 寶光妻傳其法, 霍顯召入其第, 使作之, 機用一百二十鑷, 六十日成一匹, 匹值万錢. 又與走珠一琲, 綠綾百端, 錢百萬, 黃金百兩, 爲起第宅, 奴婢不可勝數. 衍猶怨曰: “吾爲爾成何功, 而報我若是哉?” (서경잡기: 곽광의 아내는 순우연에게 포도백 24필과 산화릉 25필을 보냈는데, 이 무늬비단은 거록 사람 진보광의 집안에서 생산되었다. 보광의 아내가 그 직조법을 계승했으므로 곽광의 부인 현은 저택으로 불러들여서 짜게 했는데, 직기에는 발로 밟아 조종하는 판이 120개나 사용되고 60일에 한 필이 완성되었으며 한 필 값이 만 전이었다. 또 주주 한 꿰미와 녹릉 100단, 돈 백만 전, 황금 백 냥을 주고 저택을 지어 주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노비까지 주었다. 연은 그래도 원망하면서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공을 이뤄 주었는데 내게 겨우 이렇게 보답하는가?”라고 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1-05 15:02:23[파이낸셜뉴스] 동료 택시기사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빠져 살해한 뒤 주택에 불을 지른 택시기사가 중형을 선고 받았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이태웅 부장판사)는 살인, 현주건조물방회 등 혐의를 받는 김모씨(63)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지금도 사주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해자의 거래내역을 조사해 달라고 주장하며 반성하지 않는 점, 잔혹한 수법 등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고 유가족에게 용서를 받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엄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다만 "망상장애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로 범죄를 저지른 점, 10년 전 벌금형 외에 다른 전과가 없는 점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지난 1월 8일 오후 8시38분쯤 서울 중랑구의 한 주택에서 동료 택시 기사인 B씨를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다음날 오후 11시 2분쯤 가족의 집으로 도주하기 전 세 들어 살던 집에 고의로 불을 지른 혐의도 받는다. 김씨는 B씨와 같은 주택 다른 방에 세 들어 살며 이웃 사이로 교류하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평소 지인들이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범행 직전에는 B씨와 다른 택시기사가 자신을 독살하라는 사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김씨는 집주인인 C씨도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생각해 앙갚음을 위해 자신이 살던 방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것으로 확인됐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3-07-15 10:37:16[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때는 조선 1800년(정조 24년) 음력 6월 10일. 정조의 머리와 등에 종기가 생겼다. 정조는 7년 전에도 종기가 났었는데, 그때도 내의원 어의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을 피재길이라는 지방 의원이 고약을 올려 고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잠잠하던 종기가 다시 재발한 것이다. 정조의 종기에는 열감도 심했다. 두통과 함께 등쪽에서 열감이 오르는 것을 정조는 스스로 가슴 속의 화기(火氣)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대체로 나에게 생긴 열은 전적으로 가슴 속 화기가 오래 머물러 있어서 생긴 지병인데, 요즘 더 심해진 것은 과거의 억울함을 풀어 버리지 못한 것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가미소요산(加減逍遙散)을 복용하기를 청했다. 가미소요산은 간화(肝火)로 인한 분노를 잠재우는 처방이다. 정조는 일찍이 있었던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은 일 때문에 화가 쌓인 것이다. 사실 발열은 종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평소에 화기가 치받쳐 오르는 증상이 있었기에 열감은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음력 6월 21일, 발병 11일째. 정조의 증상은 날로 악화되었다. 정조는 정신까지 오락가락했다. 종기가 난 곳이 당기고 통증은 고통스러웠으며 오한발열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신이 흐릿해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6월 23일, 발병 13일째. 정조의 종기는 터진 곳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고 척추와 등에서부터 후두부 머리카락 난 부위까지 여러 개의 종기가 부어올랐다. 큰 것은 연적(硯滴)만 했다. 이것을 보면 종기가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조의 열은 더욱 심해졌다. 종기에 있어 발열 증상은 세균감염에 의한 증상이 분명했다. 내의원에서는 기력이 쇠하기 때문에 경옥고(瓊玉膏)를 처방하고자 했지만, 정조는 경옥고에 들어간 인삼을 걱정했다. 일전에도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복용하고 열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력 6월 24일, 발병 14일째. 정조는 밤에 열이 너무 심하게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양력으로 치면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니 날이 습하고 더워서도 힘들었겠지만 열까지 나니 설상가상이었다. 정조는 일어나 앉아 신하들을 소접(召接)할 수도 없어 계속 누워만 있었다. 정조의 열은 수면 중에 특히 심했다. 정조는 열은 났다가 다시 낮아졌다가 하면서 다시 발열이 반복되는 이완열과 간헐열의 특징을 보였다. 종기에 의해서 흔하게 감염되는 흔한 균은 황색포도상구균인데, 이러한 열형은 세균에 의한 혈액감염인 패혈증을 의심할 수 있는 열형이다. 정조는 증세가 악화되자 연훈방(煙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연훈방은 심환지가 추천한 자신의 친척인 심인에 의해서 고안된 처방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연훈방 처방은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고 성전고는 파두(巴豆) 등의 독약을 사용하므로 섣불리 시도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렸다. 그러나 정조는 내의원들의 실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래서 연훈방조차도 어의들의 여러 약이 효과가 없자 마침내 써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훈방을 사용하고 나서 종기에서 흘러 내린 피고름이 몇 되가 되었다. 신하들은 피고름을 많이 쏟은 것은 종기의 근(根)이 녹은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른 증상들은 여전했다. 음력 6월 25일, 발병 15일째. 정조는 이상하게 배가 부풀어 오르는 창만감을 느끼면서 갑자기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피고름도 많이 쏟고 기력이 쇠해있는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함을 의아하게 생각해서 내의원 신하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조의 급격한 식욕부진은 아마도 연훈방에 의한 수은중독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수은중독은 식욕부진, 두통, 전신권태, 떨림, 불안 등의 정신이상 등이 나타난다. 수은이 중추신경계, 특히 시상하부의 식욕중추의 활성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도 연훈방을 의심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전날 연훈방을 시술하는 동안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연훈방을 시술한 다음 날 정조는 “지금 이렇게 방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으니 도리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하기도 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서 연훈방을 시술했기에 호흡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은이 흡입되었을 것이다. 열은 더더욱 심해졌다. “열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다. 지금은 열을 다스릴 약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약을 의논하는 의관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어의 이시수가 몇 명을 언급하자, “탕제(湯劑)를 의논하여 정할 때 약성(藥性)을 잘 아는 의관이 전혀 없으니, 나라의 체모로 볼 때 또한 어찌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어찌 자신의 열을 잡을 수 있는 의관이 없음을 탄식했다. 정조는 여전히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갈증조차 느끼지 못해서 찻물 또한 마시지 않게 되는 증상을 괴이하게 생각했다. 열이 나면 탈수에 빠지면서 갈증을 느껴야 하는데, 발열증상이 있으면서도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갈증중추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한의학에서는 열사(熱邪)가 기분(氣分)을 침범했을 때는 갈증을 느끼지만 영분(營分)을 침범하면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영분을 침범했다는 의미는 사기가 몸속 깊이 들어와 심해졌다는 의미다. 음력 6월 26일, 발병 16일째. 심환지와 심인 등이 다시 진찰에 나섰다. 이들은 증상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다시 연훈방을 사용하고자 했다. 이시수와 같은 어의들도 연훈방을 사용하면서 종기가 현저하게 효과를 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연훈방을 처방했다. 음력 6월 27일, 발병 17일째. 정조는 고통스럽게 하룻밤을 넘겼고 간간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신하들이 보기에 자는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했으면 정신이 흐릿해 보였다. 진맥을 해 보면 맥은 너무 약했고 정신과 기운이 모두 미약해져 있었다. 정조는 간간이 신하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몽롱하게 잠이 들려고 했다. 이시수는 정조의 정신이 흐릿한 것이 혹시 연훈방 때문이 아닐까 우려했다.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져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심인 등은 연훈방은 우선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의들은 정조가 기력이 너무 쇠약해져서 결국 인삼을 적극적으로 처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삼 5돈을 넣은 속미음(粟米飮)과 1냥을 넣은 속미음을 두차례나 올렸다. 인삼을 극히 꺼렸던 정조에게 과량의 인삼을 처방한 것은 의아하지만 그것을 허락한 정조의 판단력 또한 정신이 흐릿해진 결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음력 6월 28일, 발병 18일째. 신하들은 궁궐 밖에서 의원들이 진찰을 청하자 가까스로 진료 마치고, 다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신하들은 자리에 누워 있는 정조의 앞에 엎드렸다. 신하들이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수정전(壽靜殿)......”이라고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있는 곳이다. 정조는 왕대비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자 했을까. 신하들은 다시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정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의들이 풍병(風病)을 의심해서 성향정기산을 숟가락으로 해서 입에 집어 넣었지만 토해했다. 인삼차와 청심원을 갈아서 넣었으나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만 머물고 있었다. 강명길이 진맥을 마치고 “맥의 상태로 보아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곡(哭)을 했다. 이날 유시(酉時, 17~19시), 정조는 종기를 앓은 지 18일 만에 승하했다. 정조가 승하한 후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바로 수은과 인삼이다. 특히 연훈방의 수은으로 독살했다는 주장을 보면 연훈방으로 치료하자고 했던 이들이 이시수의 중간에 연훈방 치료를 잠시 중지하자고 한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수은 독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령 단시간에 수은에 중독되거나 다량의 인삼을 복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왕이 어의들의 치료를 받다가 죽었으니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독살설은 정치적인 주장일 뿐으로 정조는 의학적으로 병사한 것이 맞다. 정조는 종기에 의한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제목의 ○○○은 패혈증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승정원일기> 正祖 24年 庚申 6月 14日 乙丑/上, 自是月旬前, 有癤候, 連進傅貼之劑, 久未奏效, 召見內醫院提調徐龍輔于便殿. 龍輔問候, 上曰: “夜來寢睡, 全未穩着, 而日前傅藥處, 今旣膿潰矣.” 6月 23日. 召見藥院諸臣. 時秀曰: “午後則熱候之升降, 果若何?” 上曰: “今亦方有熱候矣.” 6月 24日. 命進沈鏔所製烟熏方聖傳膏. 其方用鏡面朱砂, 聖傳膏, 用巴豆等藥, 諸臣言不可輕試, 至是, 諸藥罔效, 上, 欲一試烟熏, 遂至進用. 6月 25日. 上曰: “今曉以後, 尙未進食, 而神氣則惺惺, 口味則終不開者何也?” 鏔曰: “神氣旣勝, 則口味自當漸開矣.” 上曰: “烟熏方, 今日亦當試用乎?” 鏔曰: “今日則姑爲停止, 更觀夜來動靜而試之似好矣.” 6月 27日. 時秀曰: “烟熏方, 雖是癤候當劑, 而聖候昏沈之時, 烟氣若或發散於房闥之內, 則恐或有妨神氣矣.” 柳光翼, 沈鏔等 奏曰: “烟熏方, 姑爲時時間斷, 徐觀動靜試用, 亦無妨矣.” 進人蔘五錢重粟米飮。召見藥院諸臣. 命煎入人蔘一兩重粟米飮. 6月 28日. 時秀又令命吉診候, 命吉診候訖, 退伏曰: “脈度已無可望矣.” 諸臣竝遑遑罔措, 環坐號泣. 是日酉時, 上, 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是日日光相盪, 三角山鳴. (정조 24년 경신(1800) 음력 6월 14일.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터졌다.”라고 하였다. 6울 23일.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오후 들어 열이 오르내리는 증세가 어떠합니까?”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지금도 열이 나고 있다.”라고 하였다. 6월 24일. 심연이 조제한 연훈방과 성전고를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처방은 경면 주사를 사용하였고 성전고는 파두 등 약을 사용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섣불리 시험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든 약이 효과가 없어 상이 연훈법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하므로 마침내 가져다가 써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25일.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 새벽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정신은 말짱한데 입맛은 끝내 돌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 것인가?”라고 하자 심인이 아뢰기를 “정신이 좋아지셨으니 입맛도 저절로 점점 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도 연훈방(煙熏方)을 써 볼 것인가?”하니 심인이 아뢰기를 “오늘은 우선 정지하고, 밤에 병세가 어떠한지 다시 살펴보고 나서 써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6월 27일. 이시수는 아뢰기를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지기라도 하면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유광익과 심인 등은 아뢰기를 “연훈방은 우선 수시로 중단했다가 천천히 경과를 살펴 가며 써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삼 5돈쭝을 넣은 속미음을 들였다. 상은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인삼 1냥쭝을 넣은 속미음을 끓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6-02 17:25:40[파이낸셜뉴스] 태국에서 발생한 '청산가리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최소 15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용의자인 임신 5개월 30대 여성은 여전히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 여성은 수년에 걸쳐 재산을 노리고 남자친구, 지인 등 주변인을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8일 현지 매체 네이션에 따르면 청산가리를 사용한 연쇄살인 혐의로 체포된 사라랏 랑시유타뽄은 최소 14명을 살해했으며, 1명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으로 밝혀졌다. 보도에 따르면 치안정감급 경찰 간부를 전 남편으로 둔 용의자 사라랏은 랏차부리주 매끌롱강 강둑에서 쓰러져 사망한 32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지난달 25일 체포됐다. 여성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체내에서 청산가리 성분이 나왔다. 유족들은 물고기 방생을 위해 사망자와 함께 강에 갔던 사라랏을 의심해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사라랏의 집에서는 실제로 범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청산가리가 발견됐다. 지난해 사라랏이 경찰 남편과 이혼하고 만난 남자친구는 지난 3월 12일 사라랏과 사원을 방문하고 식사를 한 후 정신을 잃었다. 남자친구는 구조대에 의해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했다. 사라랏은 피해자의 음식에 청간가리를 타 살해 후 귀중품을 훔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 조사 결과 사라랏은 이번 살해 혐의 외에도 또 다른 10여건의 독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애초 사라랏을 청산가리로 9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했지만, 조사결과 사망한 피해자가 최소 14명에 이를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찰은 공범이 있는지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용의자의 전 남편인 경찰 간부가 수사선상에 올랐으며, 청산가리 구매자들이 경찰에 대거 소환되기도 했다. 경찰은 용의자가 사용한 것과 같은 청산가리를 구매한 100여명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이 중에는 여배우 쁘리차야 뽕타나니콘도 포함돼 이목이 쏠렸다. 쁘리차야는 전날 경찰에 출석해 애완견을 공격하는 파충류를 제거하려고 청산가리를 구했다고 해명했다. 한편, 용의자 사라랏은 랏차부리주 매끌롱강 강둑에서 쓰러져 사망한 32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지난달 25일 체포됐다. 조사 결과 사라랏이 또 다른 10여건의 독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5-09 09:07:32[파이낸셜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최고 보안을 자랑하는 교도소에 이감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러시아의 국영 매체인 타스통신 등 외신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지역 공공감동위원회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해 나발니가 블라디미드 멜레호보에 있는 최고 보안 수준의 교도소로 이감됐다고 보도했다. 그는 이전까지 블라미디르 포크로프 교도소에 이감됐다. 나발니는 지난달 텔레그램을 통해 자신이 멜레호보 교도소로 이감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나발니가 교도소로 이감된 후 나발니의 대변인인 키라 야르미시는 SNS를 통해 나발니가 정확히 어느 교도소로 이감됐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앞서 나발니의 변호인들도 나발니가 이감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주장했다. 나발니의 변호사인 올가 미하일로바는 "새 판결이 집행되면서 나발니가 최고 보안 시설 교도소로 이감됐지만 우니는 그가 어느 교도소로 옮겨졌는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계속해서 그를 찾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나발니는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앞장서 비판해 온 지도자로 지난 2020년 8월 러시아에서 비행기 탑승 중 독살 시도를 당했지만 독일에서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망명하지 않고 이듬해인 지난해 1월 러시아로 자진 귀국했고 체포돼 복역 중이다. 이후 러시아 법원은 사기 등의 혐의와 법정 모독 혐의를 인정해 징역 9년과 벌금 120만 루블(약 1400만원)을 선고했다. 나발니는 이에 정치적 의도가 담긴 재판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theknight@fnnews.com 정경수 기자
2022-06-15 11:26:44[파이낸셜뉴스] "...(중략)...한진창씨는 광무태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만큼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는 모두 구강 안에서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中 20세기 초,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오랫동안 노렸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약 500년 간 이어진 조선과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主權)은 일본에게 철저히 종속됐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이제는 그저 일본의 식민지(植民地)가 된 나라의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그동안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황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민비 외척(外戚) 세력과 해외 열강들에게 크게 휘둘렸고, 결국 나라가 망국(亡國)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항상 뒤따랐다. 물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국권(國權) 침탈 후 '유폐(幽閉)된 황제' 고종은 일본의 감시와 압제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나름의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안들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 무렵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서(急逝)였기에 민중들의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급기야 고종이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현재 정사(正史)로 받아 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과 증언 등으로 인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고종 독살설은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설움과 분노가 크게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민족 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 ■국권 침탈, 유폐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됐다. 직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돼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에 완전히 장악됐고 외교권은 박탈됐다. 이때부터 사실상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감으로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 고종에게 이를 재가(裁可)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늑약의 재가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으로 체결됐는데, 여기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고 조약 명칭도 기재되지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해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했다"고 주장하며 무효를 선언했고, 국제 사회에 친서를 보내 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했다.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보호 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急電)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을 밀사(密使)로 파견해 끝까지 을사늑약 무효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일본의 공작 등으로 인해 무위(無爲)에 그쳤고,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유약한 순종(純宗)을 즉위시켰고,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꿨다. 폐위된 고종은 '유폐된 황제'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한국의 황실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병력을 동원해 고종의 주변을 철저히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특히 '궁금령'(宮禁令)을 제정 공포해 모든 외부인들이 궁궐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도록 했다. 만약 허가증을 받지 않고 출입하면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와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는 '궁궐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결국 고종은 한 나라의 황제에서 신하들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매우 처량한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반전 모색, 급서 고종의 유폐 생활은 장기간 지속됐지만, 이 와중에도 고종은 은밀히 밀지(密旨)를 내려 항일 의병 투쟁을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과 농민을 비롯해 군인과 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8년에 이르러 고종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포착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중심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 원리의 하나로서 민족 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청산하는 국제 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울러 이 즈음 고종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베이징으로의 망명(亡命)을 은밀히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면 독립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求心點)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민비의 사촌동생인 민영달이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회영은 이 자금으로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 할 행궁(行宮)을 마련하려고 했다. 기실 고종이 망명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종은 1904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로의 망명을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총 5차례에 걸쳐 해외 망명을 모색했다. 이처럼 유폐된 황제는 나름대로 반전(反轉)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단순한 계획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밤, 별안간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건강했던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한 것이다. ■독살설 논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중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평소에 고종이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이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도 그가 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서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혹시 창덕궁(순종) 쪽이 아닌가 반문했다"면서 "그렇게 물은 것은 왕 전하께서 평소 병약하셨기 때문이며 덕수궁(고종)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승하하기 얼마 전까지도 고종은 수라(水刺)를 잘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민중들 사이에선 고종의 죽음과 관련한 논란이 증폭됐다. 바로 '고종 독살설'이다. 고종의 평소 건강 상태와 그가 은밀히 추진했던 반전을 감안할 때 고종이 일본 및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독살설은 그 이유와 연루자들의 실명까지 등장하며 구체화됐다. 광화문 앞 전수학교의 벽에는 '저들(일본)이 파리강화회의를 두려워해 우리 황제를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이 붙여졌다. 고종의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성명서'에는 일본이 이완용에게 윤덕영, 한상학이라는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리도록 했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외국인인 마티 윌콕스 노블의 일기에도 등장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한 때 독립운동가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쓴 일기였다. 윤치호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민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매우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 후 짧은 시간 내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그 시신의 팔다리는 하루 이틀 만에 크게 부어올라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실제로 염(殮)을 행한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전제한 후 죽은 고종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기다란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고 적혀있다. 승하 직후 고종에게 식혜를 올린 궁녀 2명도 의문사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병조판서를 지낸 민영휘가 홍건이라는 사람에게 한 말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고종이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 돼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고, 잠시 후 고종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돼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더욱이 고종이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어서 환관이 이를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한다. 윤치호는 일기에 증언자들의 실명을 모두 기재함으로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는 윤치호 일기에 나와있는 고종의 심한 경련은 독성 급성중독에 의한 것이고, 시신이 부어오른 것은 중독에 의해 사후 부패가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목에서 복부까지 난 검은 줄은 시신 부패 시 피부 혈관들이 그물처럼 나타나는 '부패망'이며, 고종이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쥔 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에 맞서 본능적으로 생명줄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고 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총독부의 주요 관리였던 구라토미가 남긴 일기와 (앞서 언급한) 곤도 시로스케가 남긴 회고록에는 한일 합방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 독살에 깊숙이 연루돼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구라토미 일기는 고종의 죽음에 '윗선'이 개입돼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즉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고종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자 윤덕영, 민병석을 통해 독살을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요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종이 공식적으로 한일 합방이 잘 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정황과 증언, 자료들을 토대로 기정사실처럼 받아 들여졌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만큼 현재에 이것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이 고종이 불미스럽게 죽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후과(後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독살설은 가능성이 희박한 설(說)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지 간에 고종의 죽음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민족운동의 도화선 고종이 사망한 후 민족의 설움과 분노는 끓어올랐다. 당시 민중들은 순종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고종을 마지막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렸지만, 어쨌든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석연치 않게 숨을 거뒀으니 민중들은 쓰라린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결국 거국적인 3.1 운동의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그런데 이 민족 운동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선 3.1 운동은 이전의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부 의병 운동이 조선 왕정 복위 등을 염두에 둔 복고(復古)적인 성격을 나타냈다면, 3.1 운동은 복고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해 보다 근대적인 '대한 독립'에 무게를 뒀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촉진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 같은 거국적 민족 운동의 열기는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는 독립 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 국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표방하고, 향후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됐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주권 국민의 대표 기관(정부)으로, 또한 대내적으로는 독립 운동 통할 기구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며 '광복'(光復)의 촉매제가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9-04 13:55:38[파이낸셜뉴스] "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실록 中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세종(世宗, 제 4대 왕) 이래 최고의 성군이자 개혁군주로 일컬어졌던 정조(正祖, 제 22대 왕)가 병상에 누운 지 불과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개혁이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터진 '대상'(大喪)이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근대화'(近代化)의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던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 역사적인 분기점에서, 조선은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이에 부합해나가지 못하고 되레 퇴행과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 당대 및 후대의 사람들은 정조가 보다 오래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로 원통(寃痛)해 했다. 이런 가운데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까지도 역사학계 등에서 큰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바로 '정조 독살설(毒殺說)'이다. 당시 행해졌던 의료 처방 및 정국 구도에 기반해 독살 가능성은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의 가능성을 낮게 보며 몇 가지 근거를 기반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그 진위(眞僞)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정조'라는 보기 드물게 영민(英敏)했던 군왕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투영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조의 개혁정치와 죽음 등이 갖는 역사적 무게감은 너무나 막중했던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드라마틱했던 개혁정치와 의문의 죽음 및 논란, 정조 사후 조선 정국의 퇴행적 변화 등을 되돌아봤다. ■사도세자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정조는 잘 알려진 대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英祖, 제 21대 왕)의 장자였지만, 영조와의 계속된 갈등 끝에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나 품성 측면에서 매우 보수적이었던 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갈수록 공부를 게을리하고 기행(奇行)을 일삼는 일이 빈번했다. 세자에 대한 실망감이 컸던 영조는 틈만 나면 사도세자를 심하게 다그쳤고, 그럴 때마다 사도세자는 더욱 엇나갔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대놓고 영조의 정치적 대척점에 서있는 언행을 하고 다녔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당시 기록들(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등)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큰아버지이자 영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경종(景宗, 제 20대 왕)을 추종하는 소론(少論)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였고,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현대 의학은 사도세자의 이러한 행각을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위축감 및 자괴감과 계속된 책망에 대한 반감이 어우러져 이 같은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분석이다. 더욱이 사도세자의 정치적 반대파가 된 노론(老論)은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모함하며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참다 못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해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있는 동안 그의 어린 아들인 정조는 이를 적나라하게 지켜봤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영조는 이를 외면했다. 이 같은 영조의 비정한 결정에는 사도세자의 기행도 한몫 했지만, 사도세자가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정적'(政敵)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세자 사건(임오옥(壬午獄))을 노론·소론 간 당쟁(黨爭)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약 9일을 뒤주에서 버티다가 결국 아사(餓死)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 아들이었던 정조의 미래도 온전치 않아 보였다. 특히, 노론 벽파(僻派)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정조를 세손의 위치에서 폐할 것을 주장했다. 추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사도세자 사건을 빌미로 보복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기저(基底)에 깔려있었다. 반면, 노론 시파(時派)는 정조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 결정권자인 영조의 의중(意中)에 관심이 집중됐다. 영조는 일찌감치 정조를 자신의 뒤를 이을 군왕으로 염두에 뒀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달리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고 배우기를 즐겨해 영조를 기쁘게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굳이 뒤주에 가둬 죽인 방식을 봐도 영조가 정조를 생각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만약 사도세자에게 사약 등을 내릴 경우 정조는 명백하게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뒤주에 가둬 죽음을 유도하는 애매한 형벌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入籍)시켜 왕위를 이을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부여해줬다. 그럼에도 사도세자의 반대 세력이었던 강력한 노론 벽파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세손 정조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매사에 조심하게 했고, 정조 역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등 조심스런 모습을 보였다. 노론 벽파는 정조의 동정을 살피려 은밀히 정조의 거처에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 대놓고 정조를 무시하기도 했다. 당시 노론 벽파의 핵심이었던 홍인한은 영조와 정조 앞에서 "동궁(정조)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어느덧 영조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자 정조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키려 할 때도 노론 벽파는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의 병환이 갈수록 깊어졌고, 서명선 등 소론이 정조를 지지함에 따라 대리청정은 실현될 수 있었다. 더욱이 시강원 춘방관이었던 홍국영 등이 정조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섰다. 정조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3개월이 지난 1776년, 정조의 든든한 후견자였던 영조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세손 정조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신변의 위협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정조의 첫 일성(一聲)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사실을 정조는 사실상의 첫 공개석상에서 과감히 고백한 것이다. 이는 정조의 국정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는데, 노론 벽파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정조 즉위년에 왕이 머물던 존현각을 자객이 습격한 것이다. 이들은 정조의 목숨을 노렸다. 다행히 오랜 기간 신변의 위협을 느껴왔던 정조가 그날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책을 보고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사주한 사람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던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홍계희의 조카 홍술해의 아내가 무당의 주술을 이용해 정조를 살해하려 한 것과 정조 살해 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역모(逆謀) 사건에는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와 친밀했던 상궁과 환관들도 참여했다. 사실상 사도세자 및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 사건에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간택(揀擇)한 왕비였고,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으며 정조와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영조가 죽자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됐고, 기실 노론 벽파의 구심점이 됐다. 정순왕후의 친부였던 김한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조는 왕이 되긴 했지만, 즉위 초 목숨마저 위협을 받는 실로 '왕 같지 않은'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조정은 지난 수십년 간 행정과 군권(軍權) 등을 실효적으로 장악한 노론 벽파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정조를 폐위할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었고, 실제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정조는 은밀하지만 치밀하게 '반전'(反轉)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① 정조의 개혁 정치는 궁극적으로 근대화와 왕권 강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우선 외척(外戚) 세력 제거와 세력 균형을 도모하는 탕평(蕩平)책을 시행해나갔다. 당시 대표적인 외척 세력으로 한 편에는 정조를 무시하고 반대했던 홍인한 등이 중심이 된 부홍파(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 가문)가 있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이 중심이 된 공홍파가 있었다. 이러한 외척 세력들은 영조의 탕평책을 통해 득세(得勢)를 했다. 정조는 이들의 존재 자체와 권력 다툼을 '화'(禍)의 근본으로 봤다. 이에 따라 정조는 최측근인 홍국영을 앞세워 홍인한, 정후겸 등을 유배보내며 부홍파의 권세를 약화시켰다. 이어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를 유배보내며 공홍파의 권세 또한 약화시켰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기실 중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외척 세력 제거라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한편, 홍국영의 경우 추후 권력에 취해 세도정치를 펼친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정조는 그마저도 내치게 된다. 이후 정조는 사실상 노론 벽파를 겨냥한 탕평책을 펼쳤다. 정조의 탕평은 영조의 탕평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영조의 탕평은 강경파는 배제하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주력으로 하는 '완론(緩論) 탕평'이었다. 그 결과 노론 중에서 온건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됐다. 반면, 정조는 철저히 왕에 대한 의리(충성)에 기반한 강경한 '준론(峻論) 탕평'을 표방했다. 이 같은 탕평책에는 특정 당파에 대한 구분이 없었던 만큼, 정조는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중앙 정계에서 배제됐던 '남인'(南人)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 '채제공'이라는 인물이 발탁돼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노론 입장에서는 '역당'(逆黨)이었던 남인이 재부상하는 것이 실로 못마땅했지만, 당시 분위기 상 일단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정조의 준론 탕평을 통해 정국 구도는 이전에 비해 균형을 맞춰나가는 모양새였다. 이전에는 정조에게 반대하는 세력인 '벽파'가 다수였다면, 준론 탕평이 이뤄지면서 정조를 지지하는 세력인 '시파'가 세를 불려나갔다. 시파와 벽파는 정조에 대한 세부적인 지지 여부에 따라 나눠졌던 것인 만큼,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남인 내에서도 각각 존재했다. 특히, 정조가 삼정승에 노론 김치인, 소론 이성원, 남인 채제공 등을 임명하는 절묘한 인사를 단행하면서, 정국의 추는 점차 (정조 지지 세력인) 노론 시파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정조는 이 같은 인사 정책을 통해 즉위 초 불리한 정국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② 정조는 즉위 직후 '규장각'(奎章閣) 설치를 서두르기도 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는 관서(官署)였다. 정조는 이 곳에 수많은 서적들 및 군왕 관련 기록서들을 보관했고, 근신(近臣)들을 배치해 국정과 학문을 논했다. 특히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파격적으로 이서구 등 서자(庶子)들을 기용하기도 했고,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해 규장각에 마련된 교육 및 연구 과정을 신하들이 거치도록 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해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되 1개월에 2회의 구술 고사와 1회의 필답 고사로 성과를 평가했다.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본 후 채점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들이 정약용, 이가환 등이다. 정조가 이렇게 규장각에 공을 들인 것은 올바른 정치를 구현함과 더불어 왕권 강화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신진 정치 엘리트들을 육성해 이들을 중심으로 한 친위 세력을 구축하려는 복안(腹案)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규장각은 정조의 복안대로 승정원, 홍문관을 대신해 군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또한 정조는 민생(民生)을 돌보는데도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전국 각지에 역량 있는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해 지방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자 했고, 수령들에게는 지방의 급박한 사정들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왕에게 직보하도록 했다. 상업 진흥에 있어서는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전매 특권인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상업 행위가 보장되면서 소상공인이 살아나고 물가가 안정되는 등의 큰 성과가 나타났다. 아울러 정조는 자기 상전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몸을 피한 노비를 찾아내 본 고장에 돌려보내는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폐지하기도 했다. 이는 추후 순조 때의 공노비 해방의 단초가 됐다. 이 밖에 정조는 버려진 고아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기르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을 제정했고, 학문과 문화, 과학도 크게 진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왕의 덕(德)을 칭송하며 활기차게 생업에 매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정조의 개혁 정치 ③ 왕위에 오른 이후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追崇) 작업을 진행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호를 '장헌'(莊獻)으로 고치고 묘를 격상시켰다. 이후 1789년 7월에 서울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고 명명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와 여타 대신들은 그저 정조의 효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이를 통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화성(華成) 건설'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개혁 정치의 본산(本山)으로 삼고, 기존 '판'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모색했다. 일종의 승부수였던 셈이다. 우선 화성 건설에는 정조의 심복(心腹)들이 총출동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총책임을 맡은 수원 화성은 약 10년으로 전망됐던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때에도 노론 벽파는 화성 건설을 적극 반대했지만, 정조는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며 화성 건설을 흔들림 없이 진행해나갔다. 궁극적으로 정조는 화성을 국가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조는 화성에 '십자로'(十字路)를 만들고 도로 양편에 큰 상가를 조성했다. 당시 정조는 채제공에게 화성 인구의 증가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했는데, 이에 채제공은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다"고 답했다. 정조는 이를 기반으로 국가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조는 화성 주변에서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을 막아 '만석거'(쌀 만석을 생산해 백성들을 풍요롭게 먹고 살게 하겠다는 의미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만(萬)'자를 사용해 자주 국가를 천명하려는 의도)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화성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대유둔'(또는 대유평)이라는 큰 국영농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 대유둔 농토의 일부는 화성 주둔 군사들에게, 또 다른 일부는 농토가 없는 수원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모든 농사 자재는 둔소(화성 관리사무소)에서 제공했고, 대유둔에서 얻은 수확의 60%는 개인이, 나머지 40%는 화성유수부에 세금으로 내게 했다. 이 같은 정책에 따른 효과는 절묘하게 나타났다. 활발한 농경 활동으로 생산량이 늘어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됐고, 여기서 나온 세금으로 화성에 주둔했던 군사들의 월급을 줌에 따라 백성들은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군포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아가 정조는 대유둔의 사례를 전국 8도에 전파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십자로를 통해서는 상업혁명의 모범을, 대유둔을 통해서는 농업혁명의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아울러 정조는 결정적으로 화성에 (앞서 거론했던)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군영을 설치했다. 1785년에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창설했는데,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뒀다. 8년 후 정조는 이 장용위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구분됐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장용영의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던 만큼,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五衛) 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기실 노론 벽파들의 군권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점차 장용영은 수어청과 총융청 등 노론 벽파들의 군사적 기반을 압도하게 된다. 전세 역전을 직감한 정조는 장용영의 군사들을 동원해 노론 벽파가 보란 듯이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정조는 화성 능행(陵幸)길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 때 수많은 장용영의 군사들이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를 겹겹이 에워싸고 호위했다. 이 장면을 노론 벽파 대신들은 매우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 총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했는데, 결국 이 같은 능행은 단순한 참배가 아니라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노론 반발, 의문의 죽음 화성 건설을 기점으로 정조와 노론 벽파의 희비는 엇갈렸다. 정조는 개혁정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 반면 노론 벽파는 위축됐고 정조의 친위 쿠데타와 천도 가능성 등에 대해 실제적인 위협을 느꼈다. 심지어 정조는 노론 벽파 대신들 앞에서 왕의 학문적 우월성과 의리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에 위기감이 극에 달한 노론 벽파는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에 이어 중국 천주교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이 발생했다. 정조는 새로운 서양 문물은 적극 수용했지만, 사상을 수용하는데 있어서는 상반된 모습을 나타냈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며 배척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노론 벽파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노론 벽파들이 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고, 천주교를 옹호했던 정조의 최측근 채제공 등은 수세에 몰린 후 실각하게 된다. 뒤이어 재상 자리는 이병모, 심환지 등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꿰찼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신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가 다시 득세하는 것에 정조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따라 1800년 5월 정조는 마침내 '오회연교'(五晦筵敎)라는 초강수를 띄웠다. 이는 군신의리 및 통치원칙 등을 밝힌 것이다. 즉,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처단하지는 않을 테니) 용서를 빌라는 경고와 함께 향후 정약용, 이가환 등 남인들을 재상에 임명해 크게 쓰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노론 벽파에 대한 협박이자 백기투항 권고였다. 정조실록에는 "내가(정조가) 하려고 하는 정치를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인데, 내가 이처럼 분명히 일러준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여러 말을 하지 않겠다...(중략)...의리를 천명하든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든지 간에 오직 자기 한 몸에 매인 일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또 보람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나와있다. 이에 노론 벽파는 말 그대로 큰 충격에 빠졌다. 코너에 몰린 노론 벽파는 어떻게 대응할 지를 고심했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정국의 주도권은 정조에게 있었다. 100년 동안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왔던 노론 벽파가 마침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정조가 오회연교를 발표한 뒤 보름이 지나 병석에 몸져 누웠고, 그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때 정조의 나이 49세였다. 실로 보기 드문 영민함과 불굴의 의지로 조선 후기 눈부신 개혁을 이끌었던 정조는 끝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석연치 않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독살설 논란 정조의 죽음은 곧바로 격한 논란을 유발시켰다. 바로 왕의 독살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 주장은 정조와 뜻을 함께 했던 일부 남인들을 중심으로 나왔다. 특히, 정조 사망 후 2개월 뒤 인동(현 경북 구미시) 지역의 남인 출신 거족(巨族)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이 "임금이 죽었으니 의관(醫官)이 의심스럽다"라며 처음으로 정조 독살설을 제기했다. 그들은 노비들을 동원해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하겠다며 관아를 습격했지만, 이내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 아울러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정조 독살설과 관련한 내용을 담았다. 그는 "...만나면 전해져 들리는 말들을 이야기 했으니, 당시의 한 정승이 역적 의원인 심인을 천거해서는 독약을 올려 바치게 했건만, 우리들의 손으로 그 역적놈을 제거할 수 없다면서 비분강개하여 눈물까지 흘리곤 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정승이란 바로 좌의정 심환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영수(領袖)였다. 또한 정약용은 "고래(정조)가 해달(노론 벽파)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며 정조 독살설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이 밖에 창원, 의령, 하동 등 경상도 지역에서는 왕의 독살설을 기반으로 백성들을 선동하는 익명의 글들이 연이어 나붙어 조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정조 독살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그 근거로 우선 당시의 정국 구도를 거론한다. 화성 건설 등으로 정조의 개혁정치가 절정에 이르고 오회연교가 발표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론 벽파가 선수를 쳐 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조가 죽기 전 처방받았던 의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정조는 사망하기 보름 전부터 종기가 발생했는데, 그 원인은 해묵은 화병이었다. 수십년 동안 면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노론 벽파)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 때 정조가 처방을 받았던 의료는 수은 성분을 갖고 있는 경면주사(鏡面朱砂)를 태워 환부에 쐬는 '연훈방'이었다. 연훈방을 처방받은 직후에는 정조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했지만, 처방 후 3일 째부터 정조는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숨을 거뒀다. 이에 따라 연훈방 처방으로 인한 수은 중독으로 정조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수은 중독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대신 초반에 종기를 째는 등의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친 것과 연훈방 등을 짧은 시간에 과다 사용해 다량의 출혈을 유발한 것, 그리고 종기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음에도 역효과를 유발하는 보약인 '경옥고'를 복용하게 한 것 등을 정조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이를 종합해보면 정조는 궁궐 주치의 격인 내약원의 잘못된 처방으로 인해 죽음을 맞았는데, 내약원의 총 책임자가 정조의 정적이었던 좌의정 심환지였음을 감안할 때 그러한 잘못된 처방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종기 치료의 대가이자 정조가 무척 총애했던 중인 출신의 명의 피재길이 하필 정조가 위급할 시기에 누군가의 지시로 지방에 내려간 것, 그리고 정조가 죽기 직전 그의 곁에 정순왕후가 있었다는 것과 정조의 마지막 말이 정순왕후가 거처하고 있던 '수정전'이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으로 읽혀지고 있다. 하지만, 정조 독살설을 반박하는 주장들도 만만치 않다. 정조 독살의 근거라고 내세우는 사료들은 가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 과장된 것이고, 몇 가지 근거들을 볼 때 정조 독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우선 노론 벽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죽음을 확인한 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가장 최근에 발견된 정조의 어찰(御札)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정조와 심환지가 정적 관계가 아니라 '밀월'(蜜月) 관계였다는 것이다. 또한 정순왕후가 사망하면서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세력이 주축이 된 정조 계열 시파가 집권했을 때 정조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 제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정조 독살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정조 사후와 독살설 의미 정조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재로서는 독살설의 진위 여부와 관련해 무엇이 진실인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러한 독살설이 나오는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정조 독살설에는 정조라는 위대한 군왕의 죽음과 그의 개혁정치의 좌절 등에 대한 아쉬움 및 슬픔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조가 조선의 군왕으로 존재하고 있을 당시 전 세계에는 '근대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영국 산업혁명 등이 대표적이다. 정조의 조선도 이 거대한 물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조의 헌신적인 주도로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근대적인 개혁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었고, 다시 한번 크게 '웅비'(雄飛)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이라는 뜻밖의 불행으로 이 모든 움직임은 일순간 중단된다. 정조 사후 조선은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휘어잡았고, 정조의 모든 개혁 정책들은 폐기됐으며 정약용 등 정조의 최측근들은 쫓겨났다. 이후 안동김씨 등이 '병인갱화'(丙寅更和)로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행해졌다. 반면, 왕권은 땅에 떨어져 사실상 군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사회 도처에서는 각종 폐단(弊端)들이 횡행했다. 이처럼 역사적 흐름에 어긋나는 퇴행과 반동은 조선을 끝내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이 모든 조선 '통사'(痛史)는 바로 정조의 의문의 죽음에서 비롯됐으며,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한탄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 같은 견해에 기반해 (비록 완전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독살설은 정조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거론되고 있고, 개혁군주 정조와 그가 꿈꿨던 세상을 조망하게 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7-30 08:5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