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간디의 ‘무저항 정신’에 비유하며 “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추미애 전 장관은 21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이재명 대표는 대장동 사건으로 그냥 막 색칠이 되어 있다”며 “사람들은 그 복잡한 사건에 대해서 맥락을 잘 짚어내지를 못한다. 언론이 잘 짚어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적인 폭력에 언론, 대중매체의 역할이 큰데 이재명 대표가 그런 문화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일제 통치가 손쉬웠던 게 피해자끼리 밀정이 되어서 우리나라 국민을 괴롭혔기 때문”이라며 “마찬가지로 이재명 대표도 민주당 안에서 저격을 당하는 거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정말 사법 리스크가 맞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라고 했다. 이재명 대표가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한 것에 대해서는 “그런 국가 폭력에 대해서 이재명 대표가 혼자서 감당할 일이 아니다”라며 “제2의 이재명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추미애 전 장관은 “어떤 보호 장치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무저항 정신”이라며 “참 눈물 나는 것”이라고 했다. 진행자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했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것’이냐고 묻자 추미애 전 장관은 “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런 때에는 이 구조적 폭력에 대한 투쟁을 해 줘야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6-21 20:55:57【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정근식)는 한국전쟁 당시 울산에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 누락된 민간인 희생자 60명 대상 20일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전날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에서 열린 제37차 위원회에서 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과 강원도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은 1950년 6월 말~8월 사이에 울산지역에서 비무장 민간인 60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예비검속돼 군인과 경찰에 의해 1950년 8월께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9년 사상범 전향을 명목으로 결성한 관변 단체이다. 대상자들은 대부분 정부의 강제적·폭력적 행정집행 절차를 거쳐 가입됐다. 애초 좌익 경력자가 주요 가입대상이었으나, 좌익 관련자뿐만 아니라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무고한 국민들도 상당수 가입됐다. 예비검속이란 일제강점기에 범죄 방지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으로, 이를 규정한 법률인 예비검속법에 따른 것이다. 일제는 1941년 식민지 조선에 ‘조선정치범 예비구금령’을 시행한 바 있다. ■ 진실 원하는 유족까지 2차 피해 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으로 진실규명된 희생자들의 출신지는 울주군 두서면, 범서읍, 상북면을 비롯하여 온산읍과 서생면을 제외한 울산시 전역에 걸쳐 있다.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거나,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울산경찰서 또는 각 지서 등에 구금됐다.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이후 울산경찰서와 육군 정보국 소속 CIC 울산지구 파견대에 의해 1950년 8월 울산지역의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일대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 일대에서 집단 살해됐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20~30대 남성으로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울산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1960년 ‘울산 원사자(怨死者) 유족회’를 결성해 유해 발굴을 추진하고, 성안동 백양사 인근에 합동묘를 조성했다. ■ 군사정부, 진실 규명 목소리까지 억압 또한 정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진실규명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1960년 유족회의 활동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들이 ‘혁명재판’에 회부되면서 중지되었으며, 합동묘는 파묘됐다.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들로 인해 큰 정신적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희생자의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에 이르기까지 시험 탈락, 취업 제한, 업무 제한, 출국 제한 등의 연좌제 피해를 받았다. 일부 유족은 ‘관찰보호’ 대상자로 지정돼 국가의 감시를 받았다.진실화해위원회는 군과 경찰이 비무장·무저항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해 법적 근거와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절차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위령사업 지원방안 등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울산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대통령이 국가 차원에서 첫 공식 사과를 했던 계기가 된 사건”이라며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1기 진실화해위원회 때 누락된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 규명을 내렸으며 결정 이후 국가에 대한 권고사항이 잘 이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하였다. ■ 1기 진실규명서 희생자 412명 확인 앞서 진행된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1950년 8월경 국군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울산지구CIC와 울산경찰서 경찰에 의해 412명의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10여 차례에 걸쳐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 등에서 집단 총살된 사실이 규명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1월 24일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영상메세지를 통해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무고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아울러 지난날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과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강원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1949년과 1951년에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 주민 6명이 좌익혐의로 대한청년단과 국민방위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조사 결과, 강원 영월군 하동면 내리에서 농사를 짓던 주민 3명은 1949년 8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대한청년단에 의해 좌익 혐의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또한 1·4후퇴와 공비토벌 등으로 마을이 소란하자 인근 봉화군 물야면으로 피난하여 생활하던 주민 3명은 1951년 3월 국민방위군 제11단 42지대 직속 전투중대에 의해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유곡리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거나 대검(帶劍)으로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희생자들은 농사를 짓던 민간인이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60세 이상 노인 2명과 부녀자 1명, 두 살 아이 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2022-07-20 11:33:46근대세계의 예술가, 사상가, 종교가 가운데서 톨스토이의 생애처럼 깊은 의미와 감동과 교훈을 준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문호로서 근대 세계문학의 거봉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사상가로서도 러시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그 공명자들을 얻어, 이른바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톨스토이즘의 계승·실천자들에 의해 각국에 톨스토이협회가 세워졌을 만큼 현대의 예언자로까지 숭앙받으며 유럽 정신계의 위대한 중심이 되었다. 또한 종교가로서는 1901년 러시아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을 만큼 형식에 얽매인 ‘국가’ 그리스도교와 ‘교회’ 그리스도교의 위선과 타락을 비판하고 ‘원시’ 그리스도교를 제창하면서 줄기찬 열정과 의지로써 진리의 탐구와 신약성서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한 자기완성의 고행을 평생을 통하여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가정의 품을 빠져나와 진리와 실생활의 최후의 대조화를 향해 유랑의 길에 오르다가 한 시골역에서 이승의 삶을 마치기까지 철저하게 전인류를 위하여 전인류와 함께 전인류 안에서 살려고 한, 그의 내적 생활의 역사는 이미 하나의 숭고하고 비극성을 띤 전인류의 역사다. 이 같은 전인류의 괴로움을 괴로워한 그의 비극적인 생활의 역사는 그의 위대한 예술과 함께 전세계의 인류에게 남겨진 귀중한 유산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유산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계승함으로써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인류 최대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 최소한 그 암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 나라의 수많은 지식인과 독자들이 그 어느 나라에 있어서보다도 외국작가들 가운데 유독 톨스토이의 문학에 강하게 관심을 보였고, 자주 접촉해왔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펴던 시기와 1945년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친 일대혼란 속에서 온 국민이 한 독립국가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하던 시기의 극심한 정신문화의 공백 속에서 우리 나라의 독자들은 톨스토이의 ‘부활’ ‘민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인생독본(독서의 고리)’ ‘인생의 길’ 등을 통해 정신적 목마름을 식혀왔고, 윤리도덕의 규준을 세우며 지적·예술적 욕구를 채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도덕적 타락과 정신문화의 빈곤이 엄연한 일상적 현실이 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시공을 초월해 톨스토이의 불후의 예술작품 주인공들의 체험과 운명 속에서 높은 예술의 향기에 젖는 가운데 우리 민족문화와 합치되는 것을 찾고 있다. 또한 민족문학 발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확실한 창작방법과 문학활동 방향이 요구되고 있던 20세기 전반 근대문학 형성기의 우리나라 문학의 정신생활에 영향을 준 많은 서유럽의 문학 가운데 러시아문학, 그 중에서도 톨스토이만큼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 우리 나라의 근대작가들은 톨스토이에게서 삶의 진실의 묘사를 배우며 무엇보다 먼저 독특한 성실함, 진실성, 스타일의 정직성과 솔직성, 악의 과감한 폭로, 사회적 불공평과 사회결함의 비판의 무자비함 등등 그들의 마음을 끌었던 톨스토이적 리얼리즘의 예술원칙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또한 톨스토이에게서 인간의 감정과 체험의 세계를 깊이 통찰하는 기교-톨스토이적 심리분석의 특수한 형식, 작중 인물의 영혼의 지극히 비밀스러운 구석구석을 들추어내는 기교로서의 영혼의 변증법을 배웠다. 또한 도덕·심리적 문제를 사회적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주변 세계와의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서 작중인물들의 충실한 성격을 창조할 목적으로 심리분석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 작가로서는 춘원 이광수를 꼽을 수 있다. 톨스토이의 창작, 사상적 미학적 견해의 대부분의 특징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유달리 친근한데다가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우리 나라의 민족문화의 토양 위에서 쉽게 적응되어왔고 적응되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톨스토이에 의한 사랑과 결혼,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암흑의 힘, 즉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물질의 힘, 완전한 아름다움과 진리의 이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등등에 대한 주제의 해석은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이리하여 톨스토이의 목소리 속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를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더욱더 혈연적이며 친근하게 하는 낯익은 친숙한 많은 울림을 느껴왔고 느끼고 있다. 톨스토이 작품의 작중인물들은 이름만 다를 뿐 우리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친근하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우리들 자신의 심장의 고동을 들을 수 있다. 1935년 춘원은 ‘조광’ 창간호에 실은 ‘톨스토이의 인생관’이라는 글 가운데에서 “톨스토이는 지구가 산출한 가장 큰 사람의 하나였다. 예수 이후 첫 사람이라 하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 그는 예술가였으나 그것이 그의 본령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와 인생의 비평가였으나 그것이 그의 본령도 아니었다. 그는 인류의 영적 혁명을 실행하고 선전하는 것으로 그 본령을 삼았다. 인류의 모든 불행이 악에서 오는 것을 믿어 이 악을 분쇄하여 지상에 인류의 이상향을 세우는 것으로 본령을 삼았다”며 톨스토이에 대해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신문화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있다. 이러한 때 시공을 초월해 세계의 양심으로 불리는 톨스토이의 정신세계를 우리와 조응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폐쇄적인 기성세대의 냉담 혹은 무감각의 자성과, 비인간적 폭력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가치질서를 정립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톨스토이문학은 현대적 의의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박형규 전 고려대 교수
2003-05-08 09:2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