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전에 대규모 특수부대 병력 등을 파병하면서 유라시아 및 인도·태평양 지정학적 및 군사학적 구도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우리나라와 미국,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에 따르면 현재 3000명의 북한군 병력이 러시아에서 전투 투입을 위한 군사 훈련에 들어갔고, 내달 중 총 1만2000명이 우크라 전쟁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군 파병은 단순히 우크라 전쟁을 연장시키는 것을 넘어 유라시아 등 국제정세에 미치는 지정학적, 군사학적 의미가 크다. 아시아와 유럽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연계시킨 사태이기도 하고, 러시아가 파병의 대가로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이전을 할 경우 북핵이 급속히 고도화되면서 국제사회가 감당할 핵 위기가 가중된다. 특히 우리나라가 가장 큰 안보 위협을 받는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북핵이 고도화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북러가 단순한 무기거래를 넘어 함께 참전하면서 명실상부한 군사동맹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북러가 지난 6월 체결한 조약상 ‘유사시 상호 지원’이 실체를 가지게 되면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도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 공산이 커진 것을 가장 큰 우려 사안이라고 봤다. 이에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27일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남 원장과 긴급 특별대담을 갖고 북한군 우크라 파병 사태가 국제정세에 미치는 다양한 파급력과 한국과 한미일의 대북 공조 강화 방안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대담=노동일 주필 다음은 남 원장의 일문일답. ―북한군 우크라 파병으로 국제정세와 한반도 정세에 굉장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계절도 겨울이 오고, 국제정치도 겨울이 오고 있는 것 같다. 북한 정권 수립 이래 대규모 파병은 초유의 일이라 한반도가 국제정치 전면에 부상했다. 굉장히 큰 위험과 여러 변화가 야기될 것이라 노심초사하며 바라보고 있다. ―북한군이 단계적으로 1만2000명까지 파병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국가정보원이 우크라 정보당국과 함께 최초로 사진과 숫자를 발표했다. 3장의 사진 중 한 장이 제주도 국제위성센터에서 우리 위성으로 찍은 사진이다. 나머지 2장은 유럽의 민간 위성 사진이다. 러시아 군함이 1991년 이후 34년 만에 북한 항구에 정박한 사진이다. 거기에서 병력을 단계적으로 실어 나르고 있는데 3000명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런 속도라면 1만2000명이 다음 달이면 넘어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에 병력을 파견해 어떤 전략적 댓가를 기대하는 것인지. ▲가장 우려스러운 건 지난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해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했는데, 조약 4조가 자위권과 관련된 유엔헌장 51조를 넣고 일방이 전쟁이 벌어지면 지체 없이 타방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이 러시아를 돕는 것이 한반도에 가져오는 가장 큰 함의는 한반도에 분쟁이 났을 때 러시아가 참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요청하면 러시아 군대가 언제든 한반도에 올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걱정스러운 점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했는데, 그로부터 열흘 정도 전에 소련이 참전 선언을 하고 북한 쪽에 주둔하면서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뿌려진 바 있다. 또 북한은 6차례 핵실험을 해서 50개 정도의 핵무기를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핵무기는 전투기에 실어 떨어뜨리려고 하면 요격이 되니까 결국 미국을 타격하려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야 한다. 북한의 ICBM 개발은 2% 부족한 것으로 보는데, 대기권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6000도 고열을 견디는 재진입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눈이 될 정찰위성도 필요하다. 북한은 핵무기를 쏘아 올릴 핵추진잠수함도 개발하고 싶어 한다. 파병이 북한에 러시아의 첨단무기 기술이 넘어오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로선 이것을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도 이럴 경우 우크라에 공격용 무기를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거기다 파병된 북한군들이 용병으로서 한 달에 2000불 정도를 받으면 1만2000명을 보내면 1년에 4000억원 정도가 나온다. 10만명의 북한 근로자가 중국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니 상당한 경제적 도움도 될 것이다. ―파병 북한군을 찍은 동영상을 보면 아주 어리다. 한국 문화에 노출된 세대라서 자칫 탈영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있다. ▲북한군은 17세에 입대해 10년을 근무한다. 우리가 보기엔 아주 어린 병사들로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평안남도 덕천에 있는 폭풍군단으로 우리나라의 특전사와 같다. 그래서 군기와 군사력 측면에선 상당히 강하다. 문제는 어느 지역에 배치되느냐이다. 파병되면 위험한 지역으로 가게 마련이니 우크라가 처음으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한 최전방인 쿠르스크로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바로 타깃이 될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 정보당국에서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 좋은 옷을 줄 테니 빨리 투항하라고 선무공작을 하고 있다. 본격 배치가 된 후 한 달 정도 지나보면 이들이 탈출할지, 죽음으로 갈지 양상이 나올 것이다. ―북한군 파병으로 우크라 전쟁의 전세가 역전될까. 일각에선 '총알받이' 얘기도 나온다. ▲러시아의 상황이 복잡하다. 우크라 정부가 밝힌 러시아 측 사상자가 70만명에 폭파된 탱크가 9000여대이다. 러시아는 고위층과 상류층 입대를 피해 민심을 관리하려고 부분징집을 하고 있다. 그래서 70만명 사상자가 나오면서 한계가 오고 있다. 푸틴 대통령 입장에선 격전지에 어떤 병력이든 일단 세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전세를 바꾸진 못하더라도 우크라 군이 본토에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시키려는 것이다. ―인간방패 정도로 쓰인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 러시아가 북한에 핵잠수함이나 ICBM 등 첨단무기 기술을 이전할까. ▲그건 앞으로의 상황에 달려있다. 파병된 북한군의 피해가 늘어날수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선 러시아에 대한 채권이 생기는 것이다. 북한군 사망자가 늘면 더 충원이 될 것이고, 김 위원장이 사상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내놓으라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리가 그것을 레드라인으로 보고 있다. ICBM이나 핵잠수함 기술이 넘어간다면 우크라가 요청하는 첨단 공격용 무기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K2 전차는 최고이고 K9 자주포는 폴란드 대통령이 방한해서 연속적으로 구매하는 정도이다. ―한국이 이 시점에 국제정세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에서 큰 전쟁이 2개 정도는 동시에 일어나기도 했지만 3개나 발생하는 건 이례적이다. 우크라 전쟁과 중동 분쟁의 파편이 아시아로 넘어오지 않게 관리해야 하는 데 그 키를 쥔 게 미국이다. 그런데 미국이 대선 국면이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우리 국정원이 치고 나가서 북한군 파병 사실을 확인하고 나선 것이다. 국제정치는 자국 중심이라 중동 분쟁 휴전이 급한 미국이 남의 나라 일을 자기 일처럼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미국은 타국 정보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해 판단하지 않는다. 국정원은 이달 초에 우크라 현지를 가서 직접 파악했는데 CIA(미 중앙정보국)는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정보 역량을 중동에 쏟고 있어서 늦어졌던 것이다. ―북한군의 우크라 파병을 계기로 한국이 유럽, 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과 연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나. ▲한 가지 변수는 우크라가 나토 회원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유럽국가들이 무기는 지원하지만 직접 파병은 안 하고 있는 것이다. 나토가 우리나라에 무기를 지원해달라는 이야기는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이를 신중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크라에 살상무기를 지원하는 게 현명한 걸까.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무기지원에 대해 러시아의 반응은 한러관계만 파탄 나고 우크라 전쟁 전황은 바뀌지 않으니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러시아에 레드라인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북한에 첨단무기 기술을 지원해 우리 안보를 위협하면 좌시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한러가 서로의 국익을 갖고 기싸움을 하는 것이다. 미 대선 결과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미 대통령이 결정되면 우크라 전쟁을 어떻게 할지 방향을 잡을 것이고, 그에 따라 상황도 달라지면서 우리나라도 여러 변수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유사시 한반도에 러시아 군의 파병 가능성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러시아대사 이야기로는 우리가 북한을 공격하지 않으면 러시아 군대가 북한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묘한 발언을 했다. 북한이 도발해 우리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확전이 될 경우 러시아가 남측이 공격했다면서 병력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로선 고통스러운 시나리오다. 그래서 한러관계도 우크라 전쟁이 끝나면 관리를 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보는 중국의 시선이 미묘한 것 같다. ▲불편해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북한에 대한 지분은 러시아보다 중국이 훨씬 많다. 6·25전쟁 때 중공군이 30만명 이상 사망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 나라를 물리치고 그 옆에 있는 나라에 파병해 아시아에 긴장을 가져오는 건 중국의 국익에 맞지는 않는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경제가 어려운데 우방인 북러가 손을 잡고 화약 냄새를 피우는 건 맞지 않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러시아에 비군수용 물자만 무역거래를 하고 무기를 지원하거나 전쟁에 직접 개입하진 않고 있는 것이다. 또 한중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시 주석이 참석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내년에 경북 경주에서 열려서 시 주석 방한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으로선 불량국가 취급을 받는 북러 쪽에 발을 딛지 않으려 한다. 남성욱 원장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 졸업 ▲미주리주립대 대학원 ▲남북경제연구소장 ▲KBS·CBS 북한문제 객원해설위원 ▲경기도 남북관계 자문위원 ▲북한연구학회 부회장▲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고려대 교수 정리= uknow@fnnews.com 김윤호 기자
2024-10-26 03:17:39[파이낸셜뉴스] 평소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아버지의 후배로부터 성폭행당한 충격으로 4살 지능으로 퇴행했다 끝내 사망한 20대 여성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딸을 떠나보낸 유족은 법정에서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절규했다. 25일 뉴시스에 따르면 지난 23일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재판장 이현우)에서는 유가족 증인 심문으로 재판이 진행됐다. 이날 재판에서 피해자 모친 A씨는 고인이 된 딸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피해 당시 딸이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출석해 재판장을 숙연케 했다. A씨는 “존경하는 판사님! 우리 딸 소원을 들어주세요. 우리 딸 갈 때도 눈을 못 감고 눈뜨고 갔어요. 딸이 눈을 감았으면 오늘 법정에 오지도 않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절규에 엄중했던 재판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증인 심문에 참석한 성폭력상담소장 C씨는 “피해자인 B씨를 처음 대면했을 때 빵을 먹다가 침을 흘리는 등 이미 24살 성인으로 보이지 않았다”며 “유아 퇴행까지 가는 것은 처음 봤을 정도로 피해자의 상태는 심각했다”고 증언했다. 피의자 혐의를 받고 있는 D씨는 B씨 아버지의 지인으로 B씨가 삼촌처럼 따르던 이였다. 모친 A 씨는 "아이 아빠와 제가 일을 하느라 부재 중일 때가 많았고 보험 일을 하던 D씨가 생활에 많은 부분을 도와줘 평소 가족처럼 지냈다"며 "친지들과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2005년부터 가족보다 친한 사이였다"고 설명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 A씨는 “관내 노성산성 인근 주차장에서 도로운전 연수를 핑계로 뒷좌석에서 강제로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들었다”며 “그 당시 딸아이가 차량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쳐 상처를 입은 것을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A씨는 “세상을 모두 준다고 해도 B씨와 합의할 생각이 전혀 없다”라며 “그에게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분노했다. B씨의 안타까운 사연은 지난 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뤘다. '4살이 된 24살-흩어진 증언과 다이어리'라는 제목의 방영분에서 B씨는 승무원 취업을 꿈꾸던 대학 졸업생이었다. B씨는 성폭행을 당한 뒤 부모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빠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4살 수준으로 인지능력이 퇴행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B씨는 지속적인 치료와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지난해 6월 마트에서 우연히 D씨와 마주친 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두 달 후 사망했다. 현재 D씨는 지난 6월 강간치상,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그는 2021년 11월 충남 논산시에서 B씨를 5차례 성폭행하고 그 충격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는다. 다음 증인심문은 내달 1일 열릴 예정이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0-25 20:35:55[파이낸셜뉴스] 매력이 없는 사람들의 수명이 평균수명보다 짧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코너 M. 시핸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부교수와 대니얼 S. 하머메시 텍사스 오스틴대 노동경제학 교수가 지난 8개월간 공동 연구한 결과를 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 Medicine) 8월호에 실렸다. 연구 제목은 ‘외모와 장수: 예쁜 사람이 더 오래 살까?’(Looks and longevity: Do prettier people live longer?)이다. 연구팀은 1957년 위스콘신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평생 추적한 설문 조사 ‘위스콘신 종단연구’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2022년까지 추적 가능한 남녀 8386명을 대상으로 고교 졸업 앨범 사진을 사용해 이들의 매력도를 측정했다.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훈련 받은 남녀 각 6명의 평가자들이 졸업생들의 매력을 11점 척도로 평가했다. 연구 결과 졸업 사진에서 매력 없는 얼굴로 평가된 사람들의 수명이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매력도를 기준으로 1~6등급으로 나눴을 때 가장 낮은 6등급에 속한 사람들은 1~4등급에 비해 사망률이 16.8%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차이가 컸다. 졸업 사진에서 가장 매력이 없다고 평가된 6등급에 속한 여성들은 다른 등급의 여성들보다 평균 2년가량 일찍 사망했다. 남성의 경우 이 차이는 약 1년이었다. 시핸 교수는 “여성이 외모에 대해 견뎌야 하는 불균형적인 사회적 압력과 판단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전 연구에 따르면 덜 매력적이라고 여겨지는 여성은 수입이 적고 교육 수준이 낮은 남성과 결혼하는 경향이 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더 나은 외모가 더 긴 수명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졸업 사진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평가된 사람들과 중간 점수를 받은 사람들 사이의 수명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시핸 교수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들이 소득, 성적, 결혼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수명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라며 "이는 매력의 이점보다는 매력 부족에서 오는 불이익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위스콘신 고등학교 졸업생들로 이뤄진 이 집단에서는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번 연구결과로 외모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보다 공평하게 대하는 사회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8-05 18:54:33[파이낸셜뉴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용의자로 지목된 토머스 매슈 크룩스(20·사망)는 전국 수학·과학 장학금을 받은 우등생인 것으로 전해졌다. 14일(현지시간) 미 펜실베이니아 남서부 지역 언론인 '트리뷴 리뷰'에 따르면 트럼프 총격 용의자 토마스 매튜 크룩스는 전국 수학·과학 이니셔티브 스타상과 5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NYT는 "크룩스가 17세 때인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선서 날에는 민주당 기부 플랫폼을 통해 15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라며 "크룩스가 지역 양로원 주방에서 일한 기록도 있다"고 전했다. 크룩스는 2022년 베설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당시 졸업식에 참석했다는 그르지벡 의원은 크룩스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를 안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한 결과 크룩스는 차분하고 (성적은) 평균 이상이었다고 한다"고 매체에 전했다. 크룩스의 신원이 공개된 뒤 온라인과 SNS에는 그가 등장하는 고등학교 졸업식 녹화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크룩스로 보이는 이는 졸업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등장한다. 그는 학교 관계자와 기념사진을 찍는 듯 잠시 웃으며 포즈를 취한 뒤 졸업장을 받는다. 한편, 수사당국은 사건 현장인 유세장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펜실베이니아주 베설 파크의 크룩스 자택 진입로 주변을 통제하고 이번 사건과 관련된 증거물 확보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익명의 수사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암살 용의자가 현장 인근에 세워둔 차에서 폭발 장치를 찾았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용의자의 차량이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의 유세장 인근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폭발물을 이 곳에서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수사당국은 또 “경찰이 용의자가 있던 곳 근처에서 의심스러운 물건이 있다는 신고를 여러 건 받았으며, 이 물건들을 확인하기 위해 폭발물 기술자를 파견했다”고 덧붙였다. 폭발물의 양이나 종류 등은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폭발물은 용의자의 집에서도 발견됐다. AP통신 역시 익명의 수사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에서 “용의자의 집에서도 폭발물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 지역 카운티(앨러게니 카운티) 의회의 댄 그르즈벡 의원은 NYT에 "(총격범은) 공화당원으로 등록돼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민주당원이었으며 아버지는 자유주의 성향이었다"면서 "우리 지역에서는 전형적인, 정치 성향이 혼재된 가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금까지는 용의자가 외국의 극단주의 조직이나 개인 등 테러 범행과 연계됐다는 흔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당국은 전했다. 이와 관련해 수사기관의 감시 대상 명단에 오른 적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언론들은 이번 사건이 조직적 배후가 없는 자생적 테러리스트, 이른바 ‘외로운 늑대(Lone Wolf)’의 소행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7-15 05:51:26[파이낸셜뉴스] 성적 압박과 학대에 모친을 살해한 뒤 8개월간 모친의 시신과 동거한 아들이 13년 만에 심경을 드러냈다. 지난 17일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에는 당시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살인범이 된 전교 1등 아들'의 이야기가 방송됐다. 2011년 11월 23일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었던 강준수(가명) 씨는 자기 집 안방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했다. 숨진 어머니 시신은 방안에 둔 채 8개월간 방치했다. 범행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안방 문을 공업용 본드로 밀폐했다. 강 씨는 별거 중인 아버지의 신고로 붙잡혔다. 존속살해 최소 형량은 7년, 강 씨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판결인 징역 3년을 받고 현재 출소한 상태다. 중학교 입학 후 시작된 체벌…"전교 1등하자 '전국 1등 올라가라'"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착한 아이인 강 씨는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압박, 연이어 이어진 체벌에 못 이겨 범행을 저질렀다. 강 씨는 "비난하는 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확실히 있다. 잘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당시) 명확하게 기억 안 난다. 먼저는 너무 무서웠고 그다음으로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어머니 주무시는 안방으로 가서 해쳤다"고 말했다. 강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토익 875점을 맞았다고 했다. 그는 "공부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첫 번째는 초등학교 4학년 쉬는 날 기준으로 11시간 정도 공부했다. 재밌었다. 공부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초등학생 영어 경시대회에서 1학기 처음 나가 장려상을 받았다. 시상식 가는 길에 어머니가 '저기 걸어가는 애들이 다 금상 탄 애들로 보인다'고 하더라. 어린 마음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기어코 금상을 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리. 다음 학기에 금상을 탔고 기뻐했다. 어머니가 행복해했고 저도 행복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 어머니의 야단이 시작됐다. 강 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해서 기뻤다. 어머니께 기쁘게 소식을 전했는데 혼나며 맞았다. 전교 2등으로 만족했다고. 올라갈 생각을 해야지 하면서. 약간은 억울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 또 혼났다. 전국에 학교가 몇 갠 줄 아느냐고 전국 1등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체벌은 회초리부터 시작했다. 강 씨는 "웬만큼 어렸을 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주로 뭐로 맞았는지가 기억난다. 맞는 매의 변천사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알루미늄 노, 5~6학년 때 대걸레 봉, 중학교 때 야구 배트로 맞았다고. 강 씨의 부친은 "저도 몰랐다가 애가 목욕할 때 본 적 있다. 회초리 자국을 봤다. 아내와 많이 싸웠다. 애 엄마의 성향이 나보다 더 강하다 보니까 체벌에 대해 내가 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싸워봐야 내가 지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맞을 때 입는 바지 따로 있어…피가 굳어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강 씨의 어머니는 늘 전교 1등을 하던 수재였으나 딸을 진학시킬 생각이 없었던 아버지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고 대학에 갔다. 졸업 후 일본 유학에 가서 남편을 만나 좋아하는 공부도 포기하고 결혼하게 됐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의 외도로 별거를 하게 된 것. 강 씨는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저 태어날 때 20년 교육 플랜을 짜놨다고 한다. '트루먼 쇼' 주인공처럼 섬칫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엄마의 플랜은 명문 외고에 가서 서울대에 가고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전인적인 교육을 완성하려는 목표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강 씨는 성실했고, 모친도 그 이상으로 성실했다. 그는 "1년 치 계획을 탁상 다이어리에 쓰고 한달짜리 체크리스트를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 국어, 영어, 수학, 운동, 독서, 신문. 하루 계획표도 있었다. 아침에 계획하고 저녁에 엄마에게 보고하는 순서도 있었다. 왜 못했고,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게 혼나는 주제였다"고 했다. 모친은 "네가 성공해서 아버지 없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아버지는 네 인생에 없다는 걸 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 씨는 "아버지에 대해 속상함이 커질수록 나에게 간절하게 푸시를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간절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이후 강 씨는 공부가 싫어졌고 엄마가 바라던 외고 입시에 떨어졌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골프를 배워야 한다고 해서 마련했던 7번 아이언이 매로 바뀌었다. 강 씨는 "어머니가 '준비하라'고 하면 바지 갈아입었다. 맞을 때 입는 바지가 있었다. 엉덩이 부분이 피에 절어있었다. 피 나면 바지를 갈아입어야 하니까 감당이 안 됐다. 맞자고 하면 그거 입었다. 빨지도 않고 계속 입고 맞았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강 씨가 체포된 후 사진에는 어머니 사망 8개월이 지났음에도 폭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강 씨는 어머니의 감시 아래 거실에서 공부했다. 졸면 맞았다. 그는 "혼나는 게 길어지니 시간 낭비라고 시간을 재서 맞아야 한다는 엄마의 논리가 있었다. 40분에 한 번씩 정산하듯 맞았다"고 고백했다. 밤새워 공부하고 맞는 것을 반복한 후 등교한 강 씨. 흘러내린 피가 굳어 바지가 살에 달라붙어 의자에 앉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당연히 강 씨에게서 폭행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억압과 폭행을 피해 가출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강 씨는 새 학기가 되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집에 돌아갔다고. 성적은 계속 떨어졌고 강 씨는 성적표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전국 석차를 고쳤지만 강 씨 모친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결국 7번 아이언으로 맞았다. "성적 위조 들키면 엄마에게 맞아 죽겠다 생각…칼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땐 '최악'이라고 했다. 그는 "밥을 먹으면 자니까 밥을 못 먹게 했다. 이틀째 배고픔은 생각보다 견딜만했는데 잠을 못 자는 건 차원이 달랐다"며 "그때마다 훈계와 체벌이 시작됐다. 밤이 새도록"이라고 말했다. 사건 당일 강 씨의 기억은 흐릿했다. 그는 "밤을 새우며 혼이 났고, 어머니가 잔다고 안방에 누웠다. 저는 거실 책상에서 공부하려고 앉다가 달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곧 학부모 입시 상담이었다. 면담하면 성적 위조를 커버할 수 없을 테니 저 날 엄마에게 맞아서 죽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너무 무서웠고 다음은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부엌에 가 칼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게 끝이다"라고 했다. 어머니를 살해한 강 씨는 시신을 그대로 두고 8개월을 한집에서 살았다. 당시에 대해 강 씨는 "사람 같지 않게 살았다. 어머니는 그냥 거기 뒀다. 옮기거나 숨기거나 전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처음엔 문도 안 닫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냄새도 나고 하니까 문 닫고 거실의 불을 켜놓고 살았다. 악몽, 환청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죄책감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자기 기준에서 최고의 사랑을 준거다. 모든 인생을 갈아 넣어서 저를 키웠다"며 "어머니께서 힘들어하며 저에게 압박을 할 때 인제야 조금씩 해석이 되는 것들이 있다. 어머니가 점점 더 불안해지고 두려워졌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강 씨는 "진짜 후회되는 건 어머니께 내가 아니어도 엄마는 대단한 사람, 귀한 사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위로해드리지 못한 게 후회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올해 서른한 살이 된 강 씨는 두 아이를 둔 아빠다. 아내에게 사건에 대해 고백한 후 결혼했다. 그는 "아이들을 보면 두려움이 생긴다. 언젠가 아이들에게도 털어놔야 할 때가 올 텐데. 아내랑 이야기하며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rainbow@fnnews.com 김주리 기자
2024-06-18 14:46:12노태우 정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재봉 전 총리(사진)가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4일 국민의힘 등에 따르면 노 전 총리는 23일 오후 10시10분경 서울성모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 전 총리는 1년 전 혈액암 판정을 받고 혈액투석 등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국제정치학자다. 미국 암스트롱주립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서울대 재직 당시에는 보수 성향 정치사상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복권을 골자로 하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작성에도 참여했다. 1988년 노태우 청와대 외교담당특별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 등 이른바 '북방정책' 추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991년 22대 국무총리직을 맡았다. 취임 후 명지대 강경대 학생 사망사건이 전국적인 시위로 번지며 책임을 지고 4개월 만인 같은 해 5월에 사의를 표명했다. 총리직 이후에도 민주자유당에서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당무위원과 고문으로 활동했다. 명지대 교양교수와 서울디지털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에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엄수된 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한 바 있다. 여러 차례 '각하'라고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노 전 총리의 유족으로는 부인 지연월씨(88), 딸 모라씨(62), 아들 진씨(57)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오전이다. chlee1@fnnews.com 이창훈 기자
2024-04-24 18:08:39[파이낸셜뉴스] 노태우 정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재봉 전 총리( 사진)가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4일 국민의힘 등에 따르면 노 전 총리는 23일 오후 10시 10분 경 서울성모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 전 총리는 1년 전 혈액암 판정을 받고 혈액투석 등 치료를 받아왔다.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국제정치학자다. 미국 암스트롱주립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서울대 재직 당시에는 보수 성향 정치사상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복권을 골자로 하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작성에도 참여했다. 1988년 노태우 청와대 외교담당특별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 등 이른바 '북방정책' 추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991년 22대 국무총리직을 맡았다. 취임 후 명지대 강경대 학생 사망사건이 전국적인 시위로 번지며 책임을 지고 4개월만인 같은해 5월에 사의를 표명했다. 총리직 이후에도 민주자유당에서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당무위원과 고문으로 활동했다. 명지대 교양교수와 서울디지털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에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엄수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한 바 있다. 여러 차례 ‘각하’라고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노 전 총리의 유족으로는 부인 지연월(88)씨, 딸 모라(62)씨, 아들 진(57)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오전이다. chlee1@fnnews.com 이창훈 기자
2024-04-24 15:31:40[파이낸셜뉴스] 전 남자친구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받다 숨진 여성의 어머니가 "가해자는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온라인에서는 가해 남성의 신상이 확산하고 있다. "우리 딸은 영안실에 누워있는데 누구때문인가" 어머니의 분노 숨진 19살 여대생 이효정씨의 어머니는 지난 18일 경남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에 참석해 "몇 년 동안 따라다니며 딸을 폭행하고 괴롭혔던 가해자로 인해 죽임까지 당하고, 죽고 나서도 편하게 가지 못하고 영안실에 누워 있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국과수에서 딸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이 폭력이 아니라고 해 딸을 죽인 가해자는 구속도 되지 않고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라며 "이것이 법이냐, 무슨 법이 이런가"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폭력에 의해 죽은 것도 아니고 병원에서도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데 건강하던 우리 딸은 왜 죽었나"라며 "수사 당국은 피해자와 유족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가해자의 인권만 지켜주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 어머니는 "국과수에 묻고 싶다. 아무런 병이 없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는데 10일 만에 패혈증으로 죽을 수 있나,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발성 장기부전이라는 병이 온 것이 아니냐"라며 "부디 정밀 검사에서는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와 차가운 지하에 누워 있는 딸의 영혼을 달래주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경남여성단체연합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폭행 가해자의 구속수사를 촉구했다. 기자회견에는 경남여성복지상담소·시설협의회도 함께했다. 가해자 졸업사진 등 신상정보 온라인 확산 한편 이날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씨 폭행 가해자인 김모씨(20)의 신상이 올라왔다. 각종 게시물에 따르면 김씨는 2004년 출생으로, 거제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증명사진도 공개됐는데, 사진 속 김씨는 셔츠 제일 위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헐겁게 맨 상태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또 다른 사진에서 김씨는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냈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입에 흰 막대를 물고 있다.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포즈도 취했다. 경남경찰청은 이날 김씨를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 1일 오전 8시쯤 이씨의 주거지인 경남 거제의 한 원룸에 무단 침입해 이씨의 머리와 얼굴 등을 주먹으로 수차례 때리고 목을 졸라 다치게 한 혐의 등을 받는다. 김씨는 경찰에 긴급체포됐으나 검찰이 긴급체포를 불승인하면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조사받고 있다. 경찰은 이씨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한 결과 '패혈증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이라는 1차 구두소견을 받고 폭행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정밀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2024-04-19 10:04:10【 성남=장충식 기자】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치에 대한 의료계 반발로 지난 2월 시작된 '의료 대란'이 벌써 60여일 동안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의사 출신인 신상진 경기 성남시장(사진)이 연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요청하고 있다. 신 시장은 18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의료공백 장기화로 환자 사망 잇따르고 있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를 인용하며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부러워 하는 최고의 한국의료를 최악으로 만들려 하냐"며 "정부가 해결 방안을 하루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 시장의 이같은 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의료 대란이 시작된 지난 2월 7일부터 지금까지 약 60일 동안 30편이 넘는 글을 SNS에 올리며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의료 대란이 지속된 2개월여 동안 이틀에 1번꼴로 무거운 마음을 전한 셈이다. 당시 신 시장은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하고, 지역의대 정원을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대해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부 정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조속간 해결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역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그 지역에 남아 진료활동을 하느냐, 많은 의사 배출이 부족한 필수 의사수를 채울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전문직 의사 급격한 증가로 인한 과잉 경쟁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의사 출신으로 과거 의료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던 신 시장이 의료 대란과 관련해 SNS를 통해 정부와 의료계에 대한 쓴쏘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신 시장은 서울대 의예과를 졸업하고, 지난 2001년 10월부터 2003년 4월까지 제32대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지내며 의약분업에 반대했고 의료계 파업을 주도했다. 당시 업무방해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기소검사가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였던 윤석열 대통령이었고 당시 변호인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것으로 알려지는 등 특별한 인연도 화제가 됐다. 특히 신 시장의 배우자는 의료대란 과정에서 폐암 수술을 받는 등 환자 보호자로서의 마음도 담아냈다. 그는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 서보니 의료대란이 큰일이 아닐 수 없다"며 "정부 잘못이냐, 의사 잘못이냐를 따지는 사이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애간장이 녹을 것"이라며 보건복지부의 적극적인 대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료대란은 장기화 됐고, 벌써 2개월을 훌쩍 넘겨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정부는 의사 증원과 의료 개혁 필요를 전제로 의료계와 대화를 해야 하고, 전공의는 환자를 위해 복귀해야 한다"며 양측에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jjang@fnnews.com
2024-04-18 17:59:35그 옛날 1960년대 초에는 날마다 스타 배우였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배우라는 이름은 스스로 만든 허깨비였지만 쓸쓸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하는 화려한 배우였던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누구도 부르지도 않는 명동을 싸돌아다니다 집에 가면 두 다리가 퉁퉁 부어 있고 통증이 왔지만 엉터리 시를 밤새 쓰고. 아 나는 국문과 학생. 잠은 거리로 몰아내고 시를 쓰곤 했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시인이 될 것. 이것이 그날 밤의 꿈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학 4년은 참 많이도 웃고 울고 하루하루 주인공이 되어 자작 영화를 수천편 마음으로 만들곤 했던 것이다. 학교를 갈 때 혹은 집으로 갈 때 효창공원을 홀로 걸어다닐 때도 나는 저기 어디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환상은 망상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망상이 텅 빈 환상의 헛된 사치성 생활에 '아름다움'을 꿈꾸게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별명을 짓는 일이 많았다. 우리 반 용자는 으뜸으로 별명을 잘 지어 친구들에게 선물을 했다. 1962년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의 부인 재클린은 세계적 인기 스타가 되었다. 미국에서 얼마나 먼 한국의 서울 효창동까지 재클린의 모든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곤 했다. 특히 그 시절 미장원에선 재클린 스타일 머리가 유행했다. 나도 재클린 머리가 맘에 들었다. 미장원에 가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재클린 머리요." 일본말로 '소두마끼'라고도 했는데 학교에 가면 비슷비슷한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 머리를 많이 하고 다녀서일까. 용자는 내 별명을 '숙명 재클린'으로 정해주고 김밥 한 줄을 먹고 내게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이 별명은 좀 비싼데 너한테 싸게 해준 거야!" 그렇게 숙명 재클린으로 살았다. 그때는 여학교에 남자가 들어올 수 없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늘 남학생들이 우루루 서 있었는데 어느 날 영문과 고향친구가 내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정문 앞에서 어떤 놈이 주더라." 편지 앞에는 큰 글씨로 '숙명 재클린에게'로 되어 있었다. 학교 밖에까지 풍문이 돌고돌았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런 편지를 몇몇 남학생에게 받았지만 꿈쩍도 안 했다. 우리 국문과 친구들도 모두 나를 재클린으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봤다. 와아 거기 나오는 오드리 헵번이 너무 예뻐서, 아름다워서 나는 다음 날 학교에서 용자에게 우선 김밥을 사 먹였다. 커피도 샀다. 그리고 은밀히 비밀처럼 귀에 속삭였다. "내 별명 오드리 헵번으로 해주면 안 되겠니?" "……." 용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한 학기 동안 내 용돈을 거의 다 용자에게 썼다. 그리고 그 애만 보면 하실하실 웃었다. 헵번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비슷하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나는 헵번에 대한 욕심이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김밥을 샀고 커피를 샀고 과자를, 사탕을, 짜장면을, 짬뽕을 샀다. 어느덧 가을학기가 끝나가려는 10월쯤 용자가 귓속말을 했다 "내일 10시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로 와라." 와아 드디어 성공이구나. 나는 오드리 헵번이야, 숙명 오드리 헵번이야, 성공이야.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보고 비슷한 옷을 찾고 얼굴을 매만졌다. 기다리고 기다린 순간이 왔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10명 정도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용자의 기술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용자가 입을 열었다. "지난해부터 달자가 내게 부탁을 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숙명 재클린을 마다하고 오드리 헵번으로 바꿔달라는 거야. 너희도 잘 알지. 오드리 헵번은 달자에게 너무 무리가 많아. 그런데 그동안 달자에게 얻어먹은 게 너무 많아. 나도 양심이 있지. 그래서 오늘 새 별명을 가져 왔어." 용자는 손에 쥐고 있는 긴 종이 한 장을 툴툴 털어 좌악 폈다.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달자의 별명은 오드리 될 뻔." 친구들은 까르르르 웃으며 흩어졌다. 용자가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라. 그래도 오드리가 붙어 있잖아." 나는 조금 눈물이 나려 했지만 참았다. 순간 그냥 오드리라고만 하면 어떨까 '될 뻔'은 빼고. 그렇게 말했으나 친구들은 한순간 웃고 지나가 버렸다. 그 후 '될 뻔'은 나를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1965년 졸업을 하고 취직이 될 뻔하다가 안 되고, 될 뻔하다가 되지 않았다. "나 이 별명 안 해!" 용자에게 화를 내었지만 용자는 갈갈 웃었다. 양재천엔 봄꽃이 다 피었다는데 우리 집 뜰은 이제 빠알간 움이 간지럽게 올라오고 있다. 마치 용자의 웃음소리처럼….
2024-03-19 19: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