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좌승훈 기자] 제주시 조천읍 모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30대 여성이 범행을 시인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범행 동기, 시신 유기방법·장소, 공범유무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제주동부경찰서는 2일 오후 브리핑을 통해 살인 등의 혐의로 긴급 체포된 고모(36)씨가 1차 조사에서 "혼자서 죽이고 빠져 나왔다“며 전 남편 강모(36)씨를 살해한 혐의를 인정했지만 범행 동기나 시신 유기 등에 대한 2차 조사를 거부하고 있디고 밝혔다. 경찰은 “피의자가 단독범행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충구 청주시에 거주하는 고씨의 자택과 차량 등을 압수수색해 범행 도구로 추정되는 흉기를 확인했다며, 보강 조사 후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흉기에서 전 남편의 혈흔과 뼛가루 등이 확인돼 고씨가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씨는 지난달 말 제주시 조천읍의 모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한 뒤 배편을 이용해 제주를 빠져나간 혐의로 1일 청주에서 긴급 체포돼 제주로 압송됐다.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2019-06-02 18:42:12고민정 아나운서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고민정 KBS 아나운서와 조기영 시인 부부가 새해 첫날 방송되는 KBS 2TV 프로그램 '결혼 이야기' 공동 MC로 나선다. '결혼 이야기'는 실제 부부들의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를 드라마로 재구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기혼자들에게는 사랑에 대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고, 싱글 남녀에게는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과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게 목표다. '결혼 이야기' 제작진은 "오래 전부터 고민정, 조기영 부부의 헌신적이고 지고지순한 결혼 이야기를 접하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전달해주는 프로그램의 MC로 제격이라고 판단해 MC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고민정 아나운서는 "남편과 연애 3년 차에 남편이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소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시절에 남편을 보러 갈 때마다 상태가 악화되는 모습을 보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결혼 이야기'는 2015년 1월 1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매주 월~목 오후 8시 30분 KBS 2TV를 통해 방송된다. / fn스타 fnstar@fnnews.com
2014-12-30 18:50:23[파이낸셜뉴스] 남편이 부인을 폭행해 이혼 소송을 제기한 아내가 다른 남성과 모텔로 들어갔다면 유책배우자는 누구일까 지난 18일 YTN라디오 ‘조인섭 변호사의 상담소’에는 전통찻집을 운영하는 아내와 2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며 한 명의 아이를 뒀다는 남성 A씨의 사연이 전해졌다. 시인으로 활동 중인 A씨는 “제가 벌이가 적었기 때문에 아내가 전통찻집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며 “그런데 아내가 찻집에 드나드는 남자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 같더라”고 토로했다. 그는 “한 번은 차 안에서 그 일로 말다툼을 했는데 아내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더라”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 차를 야산으로 돌렸다. 차 안에서 작은 둔기를 꺼냈지만 별 뜻은 없었다. 그저 겁을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아내는 소리를 지르며 제게 욕을 했고 저는 그만 이성을 잃고 아내를 깔고 앉아 둔기로 얼굴을 짓눌렀다”며 “몸싸움을 하다가 도망친 아내는 경찰에 신고했고, 저는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결국 A씨의 아내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고 한 달 뒤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아내에 연락을 했으나 응답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A씨는 아내가 다른 남성과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A씨는 “분노가 치밀어서 모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며 “아내는 저를 보자마자 놀라 비명을 지르고 남자는 도망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A씨는 “두 사람이 모텔에 간 걸 보니 아내가 집을 나가기 훨씬 전부터 바람을 피웠을 것 같다”며 “아내는 절대 아니라고 잡아뗀다. 제가 이대로 이혼을 당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사연을 접한 조윤용 변호사는 “폭력도 부정행위도 모두 혼인 파탄에서 중요한 유책 사유들이다. 누가 더 잘못해 혼인 파탄에 이르게 된 건지 경중을 따지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상대방이 집을 나가 별거하면서 이혼 소송을 제기한 이후라 이미 혼인 파탄 이후에 이성을 만난 것이기에 유책성이 부인될 가능성이 있다”며 “아내의 부정행위는 파탄 이전부터의 만남이었다는 정황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전부터 불화가 깊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별거 직전 A씨가 상대방을 야산으로 끌고 가 망치로 폭력을 행사한 행위는 상당히 그 책임이 무겁다”며 “상대방이 혼인 생활 중에 부정행위를 한 것으로 밝혀져 상대방의 유책성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A씨가 행한 폭력의 유책성 역시 중대해 이혼 기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덧붙였다. 이혼 시 위자료에 대해서는 “부정행위만이 아닌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 전반적인 과정을 살펴 주된 책임이 있는 자에게 부과하는 것이므로 유책의 정도를 비교할 때 오히려 아내에게 심각한 폭력을 행사한 A씨가 위자료 책임을 부담하게 될 수도 있고, 부정행위를 한 아내와 유책의 정도가 비슷하다고 보아 쌍방 위자료를 부담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만약 배우자의 부정행위로 이혼에 이르게 됐을 경우 부정행위의 상대에게도 손해배상, 즉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며 “상간남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를 하고자 한다면 우선 상간남을 특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10-21 07:10:31한국의 피는 붉다. 그러나 그냥 붉은 것이 아니라 가을 햇볕에 맑은 하늘을 담아 발효시킨 고추처럼 붉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피는 푸르다. 그냥 푸른 것이 아니라 한여름 진초록 잎새 끝에 흐르는 진액처럼 푸르다. 무조건 내가 태어난 나라라고 해서 치켜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 보면 한국은 그런 낭랑한 피로 무(無)를 유(有)로 만들어 나라를 재건축한 힘의 나라라고 말해도 된다. 지금 이 나라를 재건한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은 가난하고 배를 주리면서도 책을 폈고, 그 책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리 한주먹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도 내일의 우리나라가 사람 사는 나라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땅을 팠던 것이다. 어디 책상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아궁이 위 찌그러진 솥이 걸린 그 옆에 손바닥만 한 평평한 곳에서 책을 펴고 글씨를 썼던 그 세대들이 결국은 노동의 가치를 넘어 지식의 세상을 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뚜막 정신이라고 불렀다. 한국인의 정신에 이만한 것도 없다. 책상이 없다면 나뭇잎 위에도 책을 놓고 봐야만 하는 당찬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고추정신이 아닌가. 그러니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더러 자기 것을 파먹고는 텅텅 비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이 아니다. 진정한 한국인은 "없다"가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내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인의 붉은 피의 상징인 것이리라. 자신에게 오는 달갑지 않은 '걸림돌'도 거뜬히 스스로의 맨몸으로, 불의 정신으로 '디딤돌'로 만들어 고통의 위기를 건너갔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의 정신이다. 이 세상 우리가 흔히 한국인을 '빨리빨리'의 대명사로 부르지만 나쁘지 않다. 이 빠른 정신이 오늘의 한국 토목공사가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터널을 뚫고 산을 지나가는 길을 만든 것도 바로 그 '빨리'의 정신이다. 한국인에게는 '막차의식'이 있다. 마지막 기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어느 나라처럼 지금 못 가면 내일 가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은 막차를 못 타면 죽는다는 각오로 모든 장애물을 비집고 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탄다. 그러면 꼭 그 기차를 타야 하는 지상 절대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집단 속에서 그저 늦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집단적 흥분과 스스로의 강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힙쓸려든다.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처지지 말라"는 자기 암시가 그토록 급하게 거의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없지 않다. 다 좋을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결국 "해내고 만다"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많은 부작용을 거쳤다. 아니 지금도 겪고 있다. 마지막이란 말에 한국인은 절박해진다. 연애도, 학교도, 직장도, 돈에서도 이 마지막은 피를 끓게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 대학 진학으로 이어 직장에서 진급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뚜막은 순수 욕망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은 더러 거친 욕망이나 과도한 욕망으로 자기를 패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손바닥만 한 부뚜막의 온기는 인간까지 순하게 만들어 할머니 그 할머니 어머니들이 오늘의 삶을 이어준 것이다. 내 어머니는 무학이다. 학교 부근에도 가본 적이 없다. 여자는 남자 아래에 머물러야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 여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느 날 아침 깨달은 부처처럼 우리에게 말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소리치시던 그 어머니가 얼굴 표정도 단호하게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다." 이 말을 연거푸 세 번을 힘주어 말하고는 "알아들었제. 못 알아들었나!" 너무 뜻밖이어서 딸들은 어안만 벙벙 어머니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2의 인생이라고 장독대 위 호박 하나를 탁 깨트리며 강연하듯 말하는 어머니는 도무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아무리 얼굴을 들어도 시어머니, 남편 모든 가족들이 꾹꾹 눌러 사람 대접이 아니라 개 대접도 못 받는 하루하루를 겪으며 어머니는 스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아니야, 나는 틀렸어, 내 딸들이라도 사람 대접을 받게 해야 해, 결국은 교육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셋째 딸을 1955년 거창에서 마산여고로, 1957년도에 넷째를 마산여고를 보내 졸업시켰는데 집안 어른들의 그 전쟁 같은 반대로 몸도 마음도 상했지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다섯째인 나에게 말했다. "마산은 터가 나쁘다. 넌 부산으로 가래이." 나는 거창이 좋다고 떼를 쓰고 가지 않았다. 거창여고 1학년 가을 어머니는 집에 들어가는 나에게 말했다. "내일 너 부산 간다. 부산에 학교하고 하숙집 얻어 놨다." 그렇게 나는 부산의 여고생이 되었고 그다음엔 동생 둘도 모두 서울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무슨 원수 갚듯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면서 어머니는 만족하셨을까. 한 가지 어머니의 작심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기하면 저절로 자식들도 포기하는 '포기덩어리'가 아니라 나는 내리고 자식은 올리는 어머니식의 인생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족시킬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아니라 어둠만 밝히는 어느 날 절망에 처한 나에게 "그래도 니는 될끼다"란 단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말 한마디를 지팡이로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이 짙푸르고 질긴 정신을 나는 한국인 부뚜막 정신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어머니는 언제나 풀리는 힘이 아니라 떠받쳐 올리는 힘이 아니던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도 이런 힘의 돌출구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심으로 한국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다. 부뚜막 정신을! 신달자 시인
2024-10-15 18:18:15'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누군가를 기뻐하며 칭찬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몇 년 전, 시창작 수업을 들었던 지인이 회갑을 기념하며 시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100편의 시를 보내왔다. 주변에 많은 시인이 있었지만, 필자의 시창작 수업을 들으며 받았던 날카로운 비평이 떠올라 부탁한다고 했다. 그의 작품을 몇 번 읽었던 것 같다. 합평했던 수업시간에 지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기분이 무척 상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칭찬을 받았다면, 그는 시를 그렇게 오기로 열심히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은 뛰어났다. "훌륭한 시인이 될 거라고 믿어요"라는 진심 어린 칭찬과 함께 수정된 원고를 보내줬다. 시 원고가 좋았다. 칭찬에 인색했던 필자가 이번에는 칭찬의 비평을 한 것이다. 멈추지 않고 시를 계속 쓴 그는 이미 등단시인 이상의 감동적인 시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여러분, 위기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두 불안합니다. 특히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면서 우리 회사의 매출은 점점 급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기업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위기는 항상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칭찬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빈자리는 실체 없는 불안과 뻔한 꾸짖음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는 꾸짖음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꾸짖음은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데만 유용할 뿐인데 해결책으로 볼 때가 많다. 칭찬은 좋은 행동을 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라고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아이가 나쁜 습관을 반복하거나 직원이 규칙을 어길 때 심하게 꾸짖고 처벌하는 것은 그 행동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더 나은 인사를 하게 하거나 직원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꾸짖음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오직 칭찬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려면 천 번은 흔들려야 한다'라는 책의 저자 김난도는 가족 관계를 "작은 말로 쌓은 탑"이라고 표현했다. 그 작은 말 중 최고는 칭찬이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고마워요' '잘했어요'와 같은 말이다. "수고했어"라는 작은 칭찬이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칭찬을 받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으니, 먼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열심히 칭찬해야 하는 것이 가족이다. 남편이 가족하고 보낼 좋은 여행지와 레스토랑을 고르고 예약하면 칭찬해야 한다. 또 아내가 새로운 맛있는 요리를 계속 시도하게 하거나, 아이가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고 싶다면 칭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 배우자, 동료에게 "수고했어"라고 하는 말 한마디가 선물이다. 주변을 찾아보면 칭찬할 것이 너무 많다. 팬데믹 기간 헌신적으로 일한 의료진, 그들의 희생과 용기로 우리는 희망을 얻었다. 또한 변화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소상공인들의 회복력은 놀라웠다. 온라인 학습을 넘어 인공지능(AI)으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이끌어내는 교육자들의 노력 역시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고, 학생들이 학습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세계적 IT 강국으로 설 수 있도록 힘쓰는 그들에게 격려와 칭찬을 해야 한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ESG 경영과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업과 시민들, 어려운 시기에도 자선활동을 멈추지 않은 단체와 개인들, 또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젊은 인재들을 우리는 칭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들의 노력에 대해 "수고했어"라고 말할 차례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오늘부터 작은 칭찬을 시작해 보자.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그 고마움을 전하자. 그 작은 말들이 우리 사회를 더 밝고 긍정적으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가희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2024-07-11 18:32:39기업과는 무관한 광고 하나.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 광고다(조선일보 1967년 7월 23일자·사진). 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과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의 '플라토닉 러브'는 잘 알려진 연애사다. 이 책은 유치환이 연모의 정을 담아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0여통을 골라 엮은 것이다. 청마는 정운에게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는데 전쟁 통에 많이 분실하고 5000여통이 남았다고 한다. 시집에 가까운 이 책은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2만5000부를 찍었다. 광고에는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도 들어 있다. 사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청마의 행동은 짝사랑을 뛰어넘어 스토킹 또는 불륜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운은 남편과 사별한 홀몸의 미망인이었지만, 청마는 권재순이라는 부인이 엄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지금까지도 세기적 러브 스토리로 좋게 포장하고 있지만, 정신적 연애였다고는 해도 남편의 애정행각을 모를 리 없었을 부인의 속앓이는 어땠을까. 이영도도 유치환의 사정을 알았기에 답장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치환이 쓴 시와 같은 제목의 시로 마음을 전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그리움', 유치환), "생각을 멀리하면/잊을 수도 있다는데/고된 살음에/잊었는가 하다가도/가다가/월컥 한 가슴/밀고 드는 그리움"('그리움', 이영도) 이를 보면 유치환의 일방적인 구애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니 편지를 묶어서 책으로 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치환을 향한 마음이 드러난 이영도의 시가 여러 편 더 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무제1', 이영도)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함께 경남 통영여중 교사로 재직할 때였다. 청마는 만주에서 떠돌다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국어 교사가 됐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나 1945년 대구의 문예 동인지 '죽순'에 시 '제야'를 발표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산이여, 목메인 듯/지긋이 숨죽이고/바다를 굽어보는/먼 침묵은/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아픈 견딤이랴"('황혼에 서서', 이영도) 일찍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던 정운은 21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통영 언니 집에 머물며 수예점을 운영하다 통영여중 가사 교사가 됐다. 미모에 촉망받던 시인이었고 행실이 조신하던 정운에게 뭇 남성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청마도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는 여덟살 연상의 유부남이었다. 그때부터 청마는 죽는 날까지 거의 매일같이 정운에게 편지를 썼다.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도 연서를 썼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책 제목이 들어 있는 유치환의 시 '행복'의 뒷부분이다. 청마는 부산 등지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다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운도 부산에서 교사와 대학 강사로 일했고, 청마가 죽은 뒤 서울로 집을 옮겨 살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4-05-02 18:06:44사방이 꽃으로 가득했던 밤, 제자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 봄을 어쩌면 좋아요" 무슨 사정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취해 우는 그 앞에서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 돼 있었다 제자는 다음날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꽃길을 걸으며 되는 일 없는 자신이 떠올랐다 했다. 아름다움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꽃이 지고 녹음이 오면 그 마음도 단단해지리라 지난해는 4월에 비가 내렸다. 막 피어 오르던 꽃들이 봄비에 젖어 흘러내려 화사한 봄꽃을 제대로 못 본 것 같다. 젖은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올해는 너무 화려하다. 여기저기 눈길이 가는 곳에는 꽃이 있다. 올해처럼 완벽한 봄을 보는 일은 큰 행복이다. 우리 동네는 효성고등학교 옆에 벚꽃동산이 있는데, 외출할 때나 산책을 하다 보면 거의 전교생이 나와 선생님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본다. 왜 이리 설레는가. 개나리는 지금도 남아 있고, 조팝나무도 하얗게 고개를 내밀고 멀리서 산벚나무들의 연한 봄빛이 너울거리고 있다. 내 작은 정원에는 할미꽃, 명자나무꽃, 돌단풍, 수선화들이 피어 있다. 모란은 곧 터질 것 같은 봉오리를 지어 올리고 있다. 풀을 뽑다가 꽃 피운 풀은 뽑지 않는다. 그것도 봄의 한가락에 음악의 한 곡조가 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날 밤이었다. 11시쯤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 울리는 것은 위급뿐인데, 서둘러 받았는데 제자 민식군이었다. "선생님 봄이 왔어요. 이 봄을 어쩌면 좋아요." 그는 취해 있었다. 아마도 술에 취하고 봄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봄에는 남자가, 가을에는 여자가 취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에게 무슨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는가 나는 그것부터 걱정했다. 그만큼 나는 현실적이 되어버렸고, 아직 그는 봄에 취해 울었던 것이다. 남자는 울어선 안 된다고 어른들은 가르쳤다. 우리 어머니도 외아들인 내 동생에게 오직 한가지 울면 회초리를 들었다. 울음을 허락받지 못한 남성들은 미세한 감정을 어디다 풀어버리는지 모르지만 사실 인간은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강한 남자로 보이려면 눈물은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남자에겐 거의 철칙이었다. 이 세상에는 절벽 같은 좌절이 있고, 얼음 덩어리 같은 냉대도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은 주고 싶은데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벚꽃잎처럼 후다닥 떨어져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온몸을 털어도 달라붙어 있는 홀로라는 외로운 병은 함께 살아가는 몸속의 장기 같기도 한 것이다. 그다음 날 그는 말했다. 온 천지에 꽃들이 피어나고 봄은 온통 사람 마음을 흔들고 있는데 되는 것이라곤 없고 뼛속까지 외로운데 늦게 친구들과 헤어져 잎이 자욱이 쌓인 분홍빛 꽃길이었다고 한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다가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고 순간 '사나이의 울음'에 대한 내 강의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눈물이 터질 때 그의 운동화에는 연분홍 꽃잎들이 묻어 있었을 것이고, 그의 눈에는 자신의 눈물방울로 보였을 것이다. 꽃잎은 지고 신록이 눈부시다가 곧 녹음으로 변하고 검푸른 녹음으로, 짙푸른 녹음으로 변하면서 민식이도 마음이 단단해지리라 생각한다. 젊은 날 꽃잎 위를 걸으며 봄에 취하고 술에 취해 한번 울었다는 것,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말해 주었다. 그다음 날도 민식이는 다시 전화를 해 죄송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내게 잘했어, 그런 순간에 전화하고 싶은 선생이 되어 나는 많이 기뻤어 그리고 걱정도 되고. 세번이나 신춘문예에 떨어졌지만 반드시 기회는 올 거야. 넌 이미 시인이다. 이번엔 그가 웃었다. 술에 취해 언, 골목길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단다. 가끔 아름다움은 우리들 상처를 건드리지. 외로움을 툭 차기도 하지. 그러면서 그 아름다움을 힘으로 다시 살아가는 거지. 네 가슴속에 쌓인 꽃잎들이 하나하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면 너의 글은 사람들을 위로하게 될거야. 난 널 믿는다. 딸이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 왔다. 식탁에 놓으니 집이 환하다. 밤에도 낮에도 전등불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밖은 꽃들이 피어나 거리를 환하게 하지만, 아직은 집 안에 두는 꽃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꽃을 자주 사는 편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언제나 꽃을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눈길을 주게 하였다. 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다. 함께 보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 꽃에 대한 예의다. 꽃을 바라보면서 찡그리는 사람은 없다. 아주 옛날에 고향 마당 뒤편은 화려한 꽃밭이었다.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얼굴이 붉어지고 한바탕 싸움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 시간엔 아버지가, 어느 시간엔 어머니가 그 꽃밭에 서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화를 다스리느라 그 꽃밭에 계셨다는 것을. 내가 남편과 싸우고 나서 알았다. 내가 마흔쯤이었을 때 우리 집은 한 오십평의 정원이 있었다. 집안이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워지면 때로는 남편이 그 정원에 서 있고, 그가 들어오면 내가 그 정원에 서 있었다. 자신을 견디느라 남편과 나도 그 정원이 어머니 같은 곳이었다. 산수유와 개나리, 진달래, 목련과 작약과 모란이 피어나는 그 정원에서 참 오랫동안 눈물을 견디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만 시끄러워도 정원에만 나가면 어머니의 쓰다듬는 손길이 있고, 함께 웃어 주는 어머니의 미소가 있었다. 그 정원을 떠나왔지만, 그래서 아파트에서도 빌라에서도 살았지만 언제나 꽃을 안고 살았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그 견디는 힘을 나는 참 많이도 꽃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는 그를 반려라고 하지만 나는 꽃이 반려다. 너무 시간이 짧다고 친구는 말하지만 꽃이 피려는 준비기간에도, 몽우리로 바시시 얼굴을 내밀려는 순간에도 개화에서 지는 과정이 다 인생사다. 꽃이 지고 그것을 쓰레기봉투에 담을 때도 한바탕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그 사랑 때문에 빈자리를 견디어 낸다. 고맙다고 말하면서. 기다림을 배우면서. 지금은 꽃의 계절이다. 민식이가 꽃처럼 피어나는 생의 계절이 오기를….
2024-04-16 18:26:49[파이낸셜뉴스] 두 아들을 둔 남성이 암투병 아내를 돌봐, 부인이 완쾌에 이르렀지만 건강을 되찾은 아내는 댄스동회에 나가 불륜을 저지른 사연이 전해졌다. 남편은 내연남을 상대로 어떤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자문을 구했다. 15일 YTN라디오 '조인섭 변호사의 상담소'에는 합의서에 대한 법적 효력을 묻는 사연이 올라왔다. 자신을 두 아들을 둔 결혼 15년 차, 라고 밝힌 A 씨는 "지난해 아내가 갑상선암에 걸리자 간병 휴직을 받아서 지극정성 간병, 완치시켰다"고 했다. 이어 "집과 직장밖에 모르던 아내가 암 투병 과정에서 느낀 바가 있는 듯 '이제부터 내 인생을 즐기겠다'며 댄스 동호회에 가입한 뒤 벌어졌다"고 했다. A 씨는 "아내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늘었고, 1박 2일 워크숍을 핑계로 외박을 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차량 블랙박스를 돌려봤는데 동호회에서 만난 내연남과 진한 애정 표현, 모텔에 드나드는 장면이 모두 찍혀 있었다"고 했다. 이에 "아내를 추궁하자 아내도 시인하면서 내연남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며 "그 남성을 만나 '두 번 다시 아내와 만난다면, 한번 만날 때마다 200만 원씩을 위약금으로 지급하겠다'는 합의서를 받아냈다"고 했다. A 씨는 "얼마 뒤 아내가 다시 내연남과 만나는 정황을 포착했다"면서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내연남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하고 싶다"라며 합의서대로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연을 접한 류현주 변호사는 "우리 법은 기본적으로 계약자유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기에 A 씨와 내연남 사이의 합의서는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또 내연남이 약속대로 위약금을 지불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류 변호사는 "돈을 안 주면 강제로 받아낼 방법이 없어 대부분 소송을 통해 약정금을 청구하고 있다"며 "소송을 통해 합의서를 위반했다는 점을 객관적 증거를 통해 밝히고, 이에 따라 얼마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을 것"을 권했다. 아울러 류 변호사는 "판결이 났는데도 상대가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판결문을 가지고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A 씨와 달리 위반할 때마다 '위약금 1억 원씩'이라는 금액을 약정했을 경우에 대해 류 변호사는 "당사자 간 합의한 금액이 부당하게 과다할 경우에는 판사가 적절한 금액으로 감액할 수 있다"며 " 합의서를 작성할 때도 가능하면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서 합의 내용과 합의금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3-15 08:47:10팔순 시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하도 강의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신달자 시인이다. 스물한 살에 작가의 길을 걸어 내년이면 등단 60년을 맞는다. 80년 생을 돌아보면 시련이 일상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생을 들어 올린 쪽은 시인이다. 젊은 날 쓰러진 남편을 홀로 돌보며 딸 셋을 키운 시인은 역경의 시간을 곱씹어 시와 산문을 지었다. 어느새 든든한 문학의 집, 생각지 못한 평화가 시인의 것이 됐다. 굴욕과 상처가 없었던 때가 없고, 그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돌아보면 나는 뜨겁고 넘치고 과해서 운명으로부터 귀싸대기를 얻어맞으며 살았지만 열정은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시인의 고백에 어느 정도 답이 있을 것이다. 그는 팔순을 맞아 올해 작심한 듯 연거푸 책을 내고 있다. 쇠한 육신을 위로한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을 펴낸 데 이어 최근 묵상집, 시선집을 출간했다. 묵상집은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도문 같은 책이다. 제목이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다. 시인에 따르면 지금은 모든 게 아슴하고 피가 얼 듯한 고독도 없고 눈알이 터질 듯한 슬픔도 없다. 온몸을 쥐어짜면서 통곡하는 울음도 없다. 그래서 아쉬운가? 그렇지 않다. "편안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일이다. 계단은 힘들고 고달프다. 노동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시련 없는 축복이 어디에 있겠나. 계단을 오르는 일, 그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시인을 지난 25일 서울역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고로, 수술로 병원 신세를 졌던 몸은 곳곳에 통증이 남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꼿꼿했다. "젊은 날엔 팔십까지 살 줄 정말 몰랐다"며 웃는 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안다. 더불어 행복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했다. 인터뷰 = 최진숙 논설위원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라는 제목이 비장하다. ▲내 인생을 세 마디로 줄인다면 저 말밖에 없다. 젊었을 때 미치지 않으면 어디라도 갈 수가 없었다. 미치는 것 또한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삶의 중반엔 흐느낄 일이 너무 많았다. 밥을 먹을 때도, 강의를 할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 때도. 그다음이 견디는 일이다. 삶의 숙제였다.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이 나이까지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책을 썼다. ―팔순 나이가 주는 편안함이 글에서 느껴진다. ▲사실 지금도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선 전쟁도 있지 않은가. 걱정도 되고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쓸쓸하고 외롭고 슬프다. 혼자 울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나이는 그 슬픔들을 마음으로 끌어들여 다독이는 친절함을 안다. 삶에 있어서 지금은 인생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전에는 왜 나한테 이래요, 대들고 했다면 이제는 알겠습니다, 한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수용력이 더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지금 나이가 좋다. ―외로움과 매일 싸운다고도 했는데. ▲살아있는 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외로움이다. 이 세상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 나만 겪는 고통도 없다. 외로움은 내게 소금과 같다. 약간은 간을 맞추는 데 좋지만 조금만 넘치면 요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용용 죽겠지 하고 외로움이 화를 내게 하면서 달아나게 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어른이 가장 잘 버텨야 하는 것이 외로움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외로움을 어떤 방식으로 물리치고 이기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때 우울증 약을 드셨다는 고백은 사실 놀라웠다. ▲남편은 투병 24년에 50번 넘게 입원했다. 2000년 마지막 떠나기 전 3년 동안 주변을 정말 힘들게 했다. 그때 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 당시 한강변에 살았는데 의사가 집을 옮기라고 해서 대모산이 있는 수서로 갔다. 2001년이다. 새벽산을 다녔는데 가기 싫은 날도 당연히 있었다. 매일 확인전화를 하는 의사에게 누워서 가고 있다고 거짓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1년2개월 만에 극복했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질병이라고 한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으면 한다. ―고향과 어머니가 80년 삶과 글의 뿌리이지 않을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거의 전부라 할 만큼 나의 생은 우둘투둘했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웃음이 번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고향 집 마당이 그 첫 번째다. 여름날 마당에 정갈하게 짠 큰 평상이 있다.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동생이 누워 있다. 수박을 나눠서 먹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옛날 가족 생각하면 진저리나지만 그날,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인생은 그런 거 아니겠나. 어머니는 내게 죽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그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여자로서 행복하라. 1959년 9월 첫날 첫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전학 가는 여고 1학년 내게 하셨던 당부다. 딸은 자신과 다르게 살길 그토록 원하셨다.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남긴 말의 유산이 귀하게 느껴진다. ▲내 30대 인생이 누더기처럼 펄럭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병실에 있던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래도, 그래도 니는 될 끼다." 딱 그 한마디였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주저앉아 통곡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내게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그래도, 된다'는 말은 내 생의 지팡이가 됐다. 생의 가파른 언덕을 나는 그 지팡이를 짚고 올랐다. ―그러고 보면 1992년은 생애 가장 눈부신 날들이었다. ▲뭐든 잘 풀리는 해였다. 수필집 '백치애인'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가 됐다. 첫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서로 영화로 만들겠다며 경쟁이 어마어마했다. 수필집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도 날개를 단 듯 팔렸다. 그러다 보니 내 이름이 붙은 책들에 해적판까지 생겨 곤욕을 치렀다. 주머니는 제법 두둑해졌다. 박사학위도 그해 받았다. 검은색 표지 논문집을 잡고 울었다. 그러고 한달도 안 돼 피어선대학(지금의 평택대학)에서 교수 제안이 왔다. 내게는 거룩한 성취였다. 무엇보다 결혼한 딸이 그해 말 아들을 낳았다.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해였다. ―생은 냅다 던져버리든지, 들어올리든지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결국 후자가 됐는데 무엇이 가장 큰 힘이었나. ▲6인실 병실 화장실에서도 글을 썼다. 그 세월을 견디게 해준 힘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옆에 없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린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이런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가족을 지켜야 하고 살아남아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사회적 욕망이 컸다고 봐야 한다. 남편이 오래 아프면서 별별 일을 다 경험했다. 그 굴욕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이걸 글로 써야지 하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굴욕보다 주목의 시간이 더 많지 않았나. ▲인생 자체가 원래 굴욕이다. 살아가는 바탕에 굴욕이 있다. 그걸 참을 줄 모르면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한다. 굴욕을 견뎌내야 빛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 빛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이들이 없었다면 될 대로 돼라 살았을 것이다. 엄마까지 제대로 생활을 꾸리지 못하면 딸들은 어떻게 되나. 그 생각에 굴욕을 참기로 했다. 먹는 밥보다 굴욕의 양이 많아질 때쯤 앞이 보이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원 갈 때 영어시험에 세번이나 떨어졌다. 그것도 굴욕이었다. 그런데 포기 안하고 했다. ―박목월 시인의 가르침을 받았고, 등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문학적 성취를 돌아보면 감회가 어떤가. ▲모든 걸 말해야 하는 것이 문학이다. 실패도 시련도 그리고 따귀를 맞은 일도, 모든 것이 문학에 들어간다. 좋은 것만 글로 쓰는 건 문학이 아니다. 내 문학을 돌아보면 내가 정직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나, 엄격해진다. 시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국가 명령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했나 묻게 된다. 후회가 있을 수 있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역량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남은 시간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집 하나쯤 더 쓸 수 있을까. 예전엔 계획을 잘 짰는데 이제 답을 확실히 못한다. 남은 시간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가족들과 밥이라도 한번 더 먹고, 손주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더 들려주고 싶다. 앞으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어떨까 궁금하다. 그저 하루하루와 잘 사귀고 싶다. 시간과 잘 지내고 싶다. ■ 신달자 시인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재등단했다. 평택대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지냈다.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화려한 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다. 지금은 지난달 재창간된 문예지 '유심'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2023-10-30 18:13:56'사랑의 시인'이라고 불린 김남조 시인(사진)이 10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규슈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48년 대학 재학 시절 '연합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내디뎠지만 시인 자신은 첫 시집 '목숨'(1953년)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목숨'은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란 갔다가 펴낸 책이다. 고인은 평생 1000여편의 시를 썼는데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장 많이 다뤘다. '목숨' '사랑초서' '바람세례' '귀중한 오늘'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하며 사랑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써냈다. 2020년 출간한 19번째 시집 '사람아, 사람아'에서도 줄곧 사랑을 노래했다. 고인은 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사랑과 윤리의식을 시로 형상화해 온 시인으로 평가된다. 고인은 6·25전쟁 당시이던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마산 성지여고, 마산고, 이화여고 교사를 지냈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발표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해왔다. 생전에 숙명여대 교수를 지내며 신달자 시인 등 수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했으며 한국시인협회장, 한구가톨릭문인회장을 역임했다. 문학 업적을 인정받아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만해대상 등을 받았다. 고인의 남편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조각가 고 김세중씨(1986년 작고)다. 유족으로는 아들 김영, 김범씨(설치미술가) 등이 있다. 남편과 함께 지내던 서울 효창동 자택을 2015년 50억원의 사재를 털어 리모델링해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을 개관한 바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장례는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2일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3-10-10 18:1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