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이탈리아 로마의 유명한 분수대 옆에 앉아 새벽 시간에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신 미국인 관광객이 63만원 벌금을 물게 됐다. 관광객 폭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로마가 관광질서 유지를 강화하는 가운데 벌금이 매겨졌다. CNN은 7일(이하 현지시간) 로마의 유명한 분수대 가운데 하나인 '폰타나 데이 카테쿠메니' 가장 자리에 지난 3일 새벽 1시에 앉아 음료수와 과자를 먹은 올해 55세의 미국인 관광객이 450유로(약 63만원) 벌금을 물게 됐다고 보도했다. 로마 경찰에 따르면 이 미국인 관광객은 분수대 가장 자리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과자를 먹던 도중 경찰의 제지로 이를 중단했다. 이 분수대는 1588~1589년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가 만든 것으로 1997년 복원됐다. 이 분수대는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정된 문화재 보호법 대상이다. 이번에 이 미국인 관광객에게 적용된 규정은 지난해 이후 로마가 시행하고 있는 강화된 규정이다. 문화재 주변 환경을 젊잖게 유지하는 이른바 '주변환경 예의범절(environmental decorum)'에 초점을 맞춘 규정이다. 로마 경찰에 따르면 문화재 주변에서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 경찰은 성명에서 지난 주말 거리 순찰을 강화해 300여건의 범칙금을 끊었다면서 술집의 음악 소리 제한을 비롯해 경찰의 순찰이 강화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범칙금 발부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강화된 규정에 따라 길거리에서 술을 마실 수도 없고, 술집에서 무리지어 다니거나 분수대 안에 발이나 손을 담가도 안된다. 단순 벌금으로 끝나지 않고, 해당 지역에 48시간 동안 접근이 금지될 수도 있다. 재범의 경우에는 최대 60일까지 해당 지역 접근이 금지된다. 로마의 강화된 관광객 단속은 넘쳐나는 관광객들이 원인이다. 팬데믹 이전 로마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1000만명에 육박했다. 한편 강화된 규정 위반으로 출국이 금지되기도 한다. 5월에는 밀라노 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려던 37세의 사우디아라비아 남성이 체포됐다. 그는 마세라티 자동차를 빌린 뒤 로마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스페인계단'을 질주한 뒤 자동차를 버리고 달아난 혐의다. 한 달 뒤에는 미 관광객 2명이 벌금과 함께 로마 중심부 접근 금지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전기 스쿠터를 타고 로마시의 계단을 훼손한 뒤 이같은 처분을 받았다. 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2022-09-08 07:25:48[파이낸셜뉴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찌와 문화재청이 경복궁에서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대표 궁궐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였지만 최근 청와대 활용을 둘러싼 논란을 의식해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29일 패션업계 등에 따르면 문화재청과 구찌 코리아는 오는 11월 1일 경복궁 근정전 일대에서 '구찌 코스모고니 패션쇼 인(in) 서울 경복궁' 행사를 열기로 했다가 최근 취소했다. 문화재청은 "(청와대 관련) 화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심의를 받아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며 "여러 효과가 기대되지만 현 상황에서는 진행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행사명인 '코스모고니'는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인 새 컬렉션이다. '우주기원론'이라는 뜻처럼 별자리에 담긴 신화 이야기 등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찌는 지난 5월 이탈리아 남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몬테 성)'에서 컬렉션을 처음 선보였다.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구찌 측은 '세계적 수준의 천문학이 연구됐던 경복궁의 역사적 가치와 천문에서 영감을 받은 패션쇼의 주제를 국내외로 널리 알리겠다'며 장소 사용을 신청했다. 이에 문화재위원회는 '관계 전문가 조언을 받아 경복궁이라는 역사문화유산의 가치를 강화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 확실히 고증받을 것' 등 조건을 붙여 '조건부 가결' 결정을 내렸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국가의식을 하고 외국 사신을 맞았던 곳이다. 이 곳에서 패션 브랜드 행사가 열린 적은 없다. 구찌 측은 외교·재계 인사와 연예인 등 초청을 고려해 500명 규모 야간 행사를 열 계획이었다.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근정전 앞마당을 중심으로 행사를 하되 행각(궁궐 등 정당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을 모델이 걷는 무대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근 청와대에서 촬영한 파격적 포즈의 한복 패션 화보가 논란이 되면서 문화재청은 구찌와 논의 끝에 행사를 취소키로 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밤에 조명을 비춘 경복궁의 모습을 본 외국인은 많지 않다"며 "경복궁을 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였지만 정쟁화될 수 있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구찌 코리아 측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인 경복궁의 문화·학문적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오래 준비했지만 최근 논란이 된 이슈와 국민 정서를 고려해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2-08-29 08:08:35[파이낸셜뉴스] 지난 7월 16일부터 온라인으로 개최됐던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7월 31일(현지시간) 폐막했다. 우리나라의 ‘한국의 갯벌’을 포함해 자연유산 5건, 문화유산 29건 등 총 34건 유산이 새롭게 세계유산에 등재됐고, 3건은 확장 등재됐으며, 영국의 ‘리버풀, 해양산업 도시’는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됐다. 이로써 문화유산 897건, 자연유산 218건, 복합유산 39건으로 세계유산은 이제 총 1154건이 됐다. ‘한국의 갯벌’은 7월 26일(한국시간)에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등재 직후, 앞으로 지방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유산 지역의 추가 등재와 통합 보존 관리 등 위원회의 권고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의지를 밝혔다. 우리나라의 15번째 세계유산이 된 ‘한국의 갯벌’은 세계문화유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등재가 어려운 세계자연유산으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에 이어 국내 2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는 문화재청, 외교부, 지자체 등 유관기관과 함께 적극행정으로 협업을 진행해 이뤄낸 쾌거다. 이와 함께 일본의 ‘일본 북부의 조몬 선사 유적지’(문화)와 ‘아마미오시마 섬, 토쿠노시마 섬, 오키나와 북부, 이리오모테 섬’(자연), 중국의 ‘취안저우 : 송-원나라의 세계적 상업지구’(문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오스트리아, 독일, 슬로바키아, 헝가리가 공동 신청한 ‘로마 제국의 국경 - 다뉴브 라임스’는 지난 위원회에서 헝가리 정부에서 계획 중인 부다페스트 인근 개발계획에 따라 유산의 범위를 조정할 필요성이 인정되면서 자문기구의 ‘등재’ 권고에도 불구하고 ‘보류’됐었다. 하지만 이번 위원회에서 헝가리가 등재를 포기하면서 원래 175개였던 연속유산의 구성요소가 최종적으로 77개로 축소되면서 위원국간 치열한 논의 끝에 등재에 성공했다. 폴란드의 ‘그단스크 조선소 - 연대의 발생지와 유럽의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은 긴 논의를 거쳤으나, 등재 결정이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이번 위원회에서는 코로나19로 2020년에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지 못한 탓에 2020년과 2021년, 2년치의 세계유산 등재 심사 건이 함께 논의되었다. 세계유산 등재는 국가당 1년에 1건에 한해 심사가 이뤄지나, 국가 간 연속유산의 경우 신청 제한을 받지 않아 독일은 5건(독일 내 2건, 국가 간 연속유산 3건)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이탈리아는 3건(이탈리아 내 2건, 국가 간 연속유산 1건)을 등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58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반면 지난 200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던 영국의 ‘리버풀 - 해양산업 도시’는 ‘항만지구 내와 세계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에 새 건물이 들어서자 경관이 악화되어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라는 사유로 역대 3번째로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위원회는 이를 통해 세계유산의 등재뿐 아니라 지속적인 보존과 관리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1984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후 1999년부터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 있던 콩고민주공화국의 ‘살롱가 국립 공원’은 세계유산센터와 자문기구의 적극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보호 관리 체계를 강화한 점 등이 인정되면서 이번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외됐다. 이번에 신규로 등재된 루마니아의 ‘로자 몬타나 광산 경관’은 등재와 동시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도 올랐다. 이로써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은 이전 회기보다 1건 줄어든 52건이 됐다. ‘군함도’(하시마)‘로 알려진 일본의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의 보존현황보고 결정문에서는 ‘조선인 강제노동을 포함한 유산의 전체 역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데 대한 강한 유감’이라는, 매우 이례적이고 강도 높은 권고가 제시됐다. 위원회는 자문기구의 의견을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등재 당시 위원회가 일본에 권고한 후속조치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1-08-01 09:23:153D 입체영상 전문기업인 오버다임은 최근 서울 강남 사옥에서 이탈리아 국립문화재복원대학(ICR)과 국내외 인류문화유산을 복원.보존하는 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업무협약으로 ICR은 훼손된 국가문화재를 비롯한 인류문화유산을 실질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요구되는 차별화된 기술을 제공한다. 오버다임은 복원 과정과 결과를 3D,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첨단 IT융합기술을 적용해 전시 또는 공표한다. 오버다임은 무안경 3D 디스플레이 분야의 원천기술을 기반으로 디스플레이 패널을 생산.유통하는 한편 3D 콘텐츠를 제작.개발.유통하고 있다. ICR은 문화재 복원.보존 처리 연구 및 복원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유네스코와 함께 국보급 문화재 및 세계문화유산을 복원.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다. 최영희 중소기업전문기자
2017-04-18 19:44:17"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음악은 의미가 없어. 시대에 맞게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민속악은 많이 연주하고 많이 듣는 반면 정악(正樂)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정악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재미있다,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변화를 준 겁니다."60년 넘게 정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새 길을 모색한 이유는 결국 계속 그 길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최근 정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정재국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73) 얘기다. 중요무형문화재 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그는 "관객이 들어주지 않는 음악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전통의 보전으로서 대한제국 이후 100여년간 원형만 유지해온 정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게 된 이유다. 정악은 민속악과 함께 국악의 큰 줄기를 이룬다. 판소리, 민요 등 민속악은 당시의 대중음악으로 민중들이 즐겼지만 정악은 주로 궁중의 연례나 제례 등 의식음악으로 쓰여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음악이었다. '고상하고 바른음악'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느리고 절제된 탓에 현대에 와서도 감상용으로 지루한 면이 있다.그러나 지난달 25~26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악, 새로움을 더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무대는 달랐다. 정악이 기능적 목적을 넘어 현대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음악으로 재탄생했다. 피리 소리가 지배하던 합주곡은 악기 편성을 바꿔 소리의 균형을 맞췄고 현악기와 타악기의 비중을 높여 현대적인 합주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양금, 생황, 향비파 등 전승이 끊길 위기에 처한 선율 악기도 도입해 조화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정 감독은 이 공연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격인 집박(執拍)으로 나섰다. 기존의 집박이 박을 쳐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면 정 감독은 장구 연주까지 더해 60명 규모의 정악단을 힘있게 이끌었다. 오는 5월 퇴임을 앞둔 예술감독으로서 마지막 무대이자 정악의 미래를 그린 청사진이었다.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정 감독은 "100년 동안 근근이 명맥만 이어오며 정악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첫째였다면 이제는 예술음악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현대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바꿔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감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다. 떠나는 마당에 그가 굳이 일을 벌인 이유다. 정 감독은 "처음 제안했을 때 반대하는 단원들도 꽤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내가 남들이 인정하는 인간문화재이고 정악을 가장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나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그는 명실공히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국악인이다. 1966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해 1998~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한 10년을 제외하고 국립국악원 소속이었으니 인생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악단 예술감독도 1996~1998년에 이어 두번째 맡고 있다. 그는 "한 우물만 파다보니 실력이 쌓이고 경력이 쌓이고 명예를 얻게 됐다"고 했다. "퇴임을 앞둔 지금 아주 행복하다"는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꿈만 같다. 그를 국악으로 이끈 건 가난이었다. 전쟁과 광복을 거치며 일찍 부모를 여읜 삼남매는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정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돈화문을 지나는데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국비 장학생을 모집하는 공고문을 봤다. 모든 학비 일체 지원에 매달 생활비도 준다는 말에 국악이 뭔지도 모르고 시험을 봤다. 필기시험도 봤지만 실기시험을 잘 봐서 합격했던 것 같다. 다들 동요를 부르는데 이탈리아 가곡 '산타루치아'를 불렀다. 그래야 튈 것 같았다.―왜 피리였나.▲선생님이 세면장에서 피리 연습곡을 부시면 그 소리가 교실까지 들렸다. 소리가 크고 강약이 춤추니 마음이 움직였다. 어린 나이에 고생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자유자재로 드러나는 피리에 매료됐다. ―무엇을 배웠나.▲정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 무용, 성악, 판소리 등 거의 모든 전통예술 장르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정악만 해야 했다. 우리는 그러라고 뽑힌 학생들이었다. 정악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돈벌이가 되는 민속악에 쏠렸기 때문이다. 이론도 열심히 배웠다. 선생님이 실기만 해서는 잘못하다간 '딴따라'가 된다고 했다.―정악의 매력은.▲느림의 예술이다. 궁중음악의 화려함, 웅장함, 무게감이 있다. 정악을 하는 사람의 정신도 음악을 따라간다.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고 1966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졸업 직후인 1962년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해 놓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더 큰 세상에 나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가 미국으로 파견한 민속예술단의 단원으로 6개월간 미국 서부 순회공연을 했다.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UCLA에서 연주한 뒤 종족음악학과에 강사로 와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뻔 했었죠. 당시 한국은 살기 어려웠으니까 마음이 동했지.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몰래 숨어볼까 했는데 강제 소환령이 내려왔죠. 하하."귀국 직후 군입대는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군악병이 된 그는 사회자 정주일(예명 이주일)과 대금주자 이생강을 만나 환상의 트리오를 이룬다. 정주일과 이생강은 각각 훗날 한국 코미디계의 거성, 민속악의 대가가 된다. "정주일이 '피리의 왕자들'을 소개하면 이생강 선생과 내가 뛰어나와 듀엣으로 연주했어요. 팝송, 가요 가리지 않고 불 수 있는 건 다 불었어."제대 후 들어간 국립국악원에서 그는 순식간에 정악단의 중심이 된다. 오케스트라로 치면 제1바이올린에 해당하는 '목(目)피리'에 그만한 재목이 없었다. 그의 스승, 피리의 귀재였던 김준현 명인은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그 바람에 한 세대를 뛰어넘고 20대에 덜컥 악단의 리더가 됐어요. 일제강점기 정악의 맥을 이어온 '이왕직 아악부' 출신 스승들과 함께 연주를 한 거지. 그때부터 32년간 정악단을 이끌며 선생님들의 음악 정신을 이어왔어요." ―어린 나이에 리더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았나.▲피리가 워낙 중요한 자리이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많이 키워주셨다. 국악사는 전부 비정규직이었는데 입단 1년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정규직 국악사가 됐다. 쉽게 자리가 나지 않았던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내 위치를 탄탄하게 닦아가고 싶었다.―야망이 있었던 것 같다.▲실기인은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지 않는) '청기와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후진들에게 내가 터득한 것을 전수하는 것이 중요해졌지만 당시엔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1인자가 되는 게 먼저였다. 음악적으로 빨리 출세한 편이다.정악은 기본적으로 합주 음악이기 때문에 연주자 한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렵다. 정악으로 입신양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는 1972년 피리 연주자로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건 '정재국류(流) 피리산조'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피리독주회를 열며 주목받았다."민속악에는 산조(기악독주곡)가 활성화돼 있었지만 정악은 아니었어요. 창작곡도 없었죠. 김기수, 김용진, 서우석, 황병기, 이상규 선생님 등 창작국악의 대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했어요. 다양한 피리 음악을 무대에서 펼쳐놨지." 이후 꾸준히 독주회를 개최하며 피리음악의 외연을 넓히고 활성화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업적 중 하나다. 1993년에는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받아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리정악과 대취타라는 별개의 분야를 아우르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그는 "40대부터 인간문화재로 거론됐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의견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며 웃었다.한예종 교수 재직 당시 피리를 개량해 고급화·다양화한 것도 높이 평가받는다. 두 옥타브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피리의 음역대를 넓힌 향피리, 저음을 극대화한 대피리를 만들어 창작음악에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외형과 색깔을 세련되게 바꾸는 데도 신경썼다. 그가 가장 뿌듯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많은 후진들을 양성한 것이다. 무형문화재로서 가르친 전수생, 교수로서 가르친 학생을 모두 합해 180명에 달한다. 그가 처음 정악을 시작할 때만해도 정악 연주자를 통틀어 10명이 채 안됐다. "한국 땅에서 피리 좀 분다하는 연주자들은 거의 다 내 제자들이에요. 10년간 교수직을 하면서 가르친 학생도 40명이 넘는데 그 중에 30명이 현재 활약하고 있지."가르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인간성이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악 정신은 고고한 선비 정신과 같습니다. 음악이 곧 수양(修養)이지. 합주 음악이라 튀어서도 안돼요. 조화를 이뤄야죠.""전통을 지키되 시대와 호흡하라"는 것이 그 다음이다. 졸업할 때 학생들이 무조건 창작곡 한곡씩 내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예술감독직은 곧 끝나지만 전수, 연주회 등을 통해 그의 예술은 이어진다. 보통 피리 연주자는 50세가 되면 수명이 다 한다고 하는데 그는 "신기하리만치 호흡이 여유롭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피리정악을 이렇게 오래 연주하는 사람이 없다더라고요. 이상하게 부는 힘이 좋고 손가락도 잘 돌아가. 하하. 비결이라봐야 매일 헬스장에 가는 것, 일주일에 한번 등산 가는 정도."마지막으로 그에게 국악의 미래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는 국악의 발전에 대한 오해를 지적했다. '퓨전'이라는 미명 아래 국악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서양음악화 되는 것을 국악의 발전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크로스오버도 우리 음악의 원리를 지키며 다른 것과 만나야 의미가 있는 거에요. 악기만 국악기를 사용한다고 국악이 아니거든. 모든 음악적 재료를 우리 것으로 활용해야 진짜 국악인 거에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정악(正樂)은 과거 궁중음악의 일부를 포함해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음악으로, 판소리·민요·잡가 등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음악을 통칭하는 '민속악'과 대칭된다. 거문고, 가야금 등 줄로 된 현악기가 중심이 되며 여기에 피리, 비파, 양금, 생황, 대금 등을 곁들여 합주하는 형식을 취한다. 정재국 명인 프로필△75세 △1942년 충청북도 진천 출생 △1956~1962년 국립국악원부설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 △1966~1995년 국립국악원 국악사연주원 및 악장 △1972년 한국 최초 피리독주회 '정재국류 피리산조' 개최 △1989년 문화포장 △199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지정 △1996~1998년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1998~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 △2006~2007년 제3대 한국예술종학학교 전통예술원 원장 △2008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2008년 보관문화훈장 △2011년 제18회 방일영국악상 △2011년~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2014년~현재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2016-04-17 17:01:39▲ 사진=서동일기자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헤리티지 채널'을 만들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양한 스토리와 함께 고품질 영상에 담아 전 세계에 보급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지난해 우리 문화유산계는 소중한 성과를 여러 개 이루어냈다. 조선왕릉, 동의보감 등 세계유산이 연이어 탄생했고 고종 황제어새 등 국외 유물 환수도 의미가 작지 않다. 숭례문 화재 당시 복구 임무를 띠고 부임한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오는 8일로 취임 2주년을 맞는다. 이 청장은 문화유산에 스민 갖가지 사연과 역사적 배경을 꿰뚫고 있는 고고학자이면서 문화재 활용 산업(헤리티지 인더스트리)에 있어서는 '아이디어 맨'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이 청장을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만났다. ―조선왕릉 40기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등 성과가 많은데 취임 2주년을 맞는 소감은. ▲지난 2년 바쁘면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숭례문 화재 직후 취임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문화재방재 대책에 우선 순위를 뒀다. 숭례문 화재 전인 2007년 15억원에 그쳤던 방재 예산이 2008년 215억, 2009년 689억원으로 늘어났다. 일부 부진한 면이 없지 않지만 시설과 경비 인력을 크게 늘렸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와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 그리고 강강술래 등이 인류무형유산 목록에 오른 것이었다. 문화유산의 발굴, 조사에서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와 함께 불사리가 담긴 사리함을 포함한 사리장엄구 일괄을 발견하여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됐다. 백제 금석문으로 본다면 무령왕 지석 발견 이래 최대의 성과였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다는데. ▲최근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와 심사과정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요구하는 보존관리 수준도 매우 높다. 여기에다 국제협력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지난해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현장은 가히 문화전쟁터였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중국, 캄보디아 등 각국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도 외교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평상시에 유네스코의 각종 회의에 적극 참여, 친목을 돈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유네스코 등재여부가 올해 결정될 것이라는데 지금 분위기는. 지난해 1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거쳐 9월에 있었던 전문가 현지 실사와 서류 평가 등을 통해 두 마을의 세계유산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진행 중에 있지만 그 등재 여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세계 각국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경쟁이 치열한 데다 유네스코가 향후 관리계획, 주변 토지나 완충구역에 대한 소유권, 보호방법 등에 대한 정보 제공 등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 및 세계유산에 대한 해외 전문가의 관심과 평가는 어느 정도인지. ▲한국은 현재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고구려벽화고분군까지 더하면 10건, 중국이 관리하고 있는 고구려벽화고분군까지 포함하면 11건이다. 이탈리아가 43건, 스페인 41건, 중국이 37건을 보유하고 있는데 중국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에 땅도 넓다. 서양의 전문가들은 동양의 신비로움이 기저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한국의 문화재에 대해 매우 특이하고 놀라운 과학적 구도, 종교에 바탕을 둔 정신세계, 제례나 의식과 같은 무형 유산과의 결합(조선왕릉, 석굴암,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등에 경탄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지 못한 유네스코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관계자들 대부분이 우리의 문화·자연유산을 꼭 보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한국의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한 나라의 특성이 배어있는 문화 내용이야 말로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릉만 하더라도 단순히 능의 외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에 순응한 입지, 철학적 사상이 가미된 건축 배치, 효를 바탕으로 한 제례 등 한국만이 지닌 유·무형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의 미를 단적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시대별, 작품별 그리고 작품이 지닌 색, 선, 형태별로 미에 대한 가치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자연적인 미'(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들보로 사용하고, 인공담장이 나무를 피해 조성되도록 한 자연에 대한 배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배치), 과장하지 않는 '겸손의 미'(선을 무리하게 강조하거나 강한 색조사용 등이 보이지 않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 편안함과 적당함을 느끼게 해주는 '중용의 미', 세부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균형을 따르는 형평과 '조화의 미'(기계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고 대충 어림짐작으로 손질하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적절히 잘 들어맞는)가 아닐까 한다. 한국적 감성과 풍미가 가득한 전통 아래서 생겨난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국외 문화재 환수에 대한 문제가 이슈화되고 있는데. ▲문화재는 한 민족, 나아가 인류 모두가 함께 지키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한 국가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의 정수인 문화재는 원 소유국에서 훼손됨 없이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전승돼야 하며 결코 약탈되거나 불법으로 거래돼서는 안된다.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 환수에 대해서는 신미양요, 병인양요, 일제강점기 등의 시기에 약탈이나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는 우리 국민의 정신적 가치와 민족문화의 정체성 형성을 위하여 적극 환수하고 적법하게 반출된 경우에는 현지에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홍보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동안 정부간 협상이나 기증 협의, 구입 등을 통해 2005년 북관대첩비, 2006년 조선왕조실록·김시민 장군 교서, 2007년 어재연 장군 수자기(帥字旗), 2008년 최남복 문집 목판, 영친왕과 영친왕비 관련 유물, 지난해 고종황제 어새, 진해 망주석 등이 국내로 환수됐다. ―최근 스토리텔링의 힘이 강조되고 있는데 문화유산과 관련된 활용 방안은. ▲지난해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단종 애사(哀史) 등을 비롯한 왕릉 관련 스토리텔링이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청이 추구하는 스토리텔링은 문화유산에 내재된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해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각종 문화 콘텐츠와 융합, 확산시키는 것이다. 2007년부터 매년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을 개최해 일반인들의 이해를 높이고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헤리티지 인터스트리'(Heritage Industry·문화유산 활용산업) 활성화가 문화재청의 과제라고 했는데. ▲문화유산에는 수천년 동안 쌓여온 선조의 지혜가 녹아있어 문화산업 활성화에 있어서는 아이디어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헤리티지 인더스트리는 그동안 문화상품 및 콘텐츠 개발, 관광자원 활용뿐만 아니라 패션디자인 활용이나 국악·판소리·연극·음악회 등 전통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문화유산과 우리의 경제 그리고 기술이 결합되고 또 문화유산이 자연환경과 연계되어 산업화되는 등 보다 다양한 분야로 확대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재의 기록화 및 아카이브 등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 우선돼야 하고 활성화 방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관광에도 문화유산의 볼거리(관람, 공연), 먹을거리(전통음식), 숙박체험(한옥 숙박) 등이 연계되고 문화상품의 브랜드화를 위한 박람회 개최, 세계유산 연계 상품 개발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문화유산의 산업적 접목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연구는 아직 크게 부족하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보강하기 위해 지난해 4월 문화재청에 전담기구(문화재활용국/활용정책과)를 신설하는 등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지원할 계획이다. ―취임 3년째에 역점을 두고 추진할 사업은. ▲올해부터는 '헤리티지 채널'을 구축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양한 스토리와 함께 고품질 영상 콘텐츠로 제작,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보급하는 작업에 주력할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맞는 우리 문화유산의 홍보가 필요하며 새로운 영상매체를 이용해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단계적으로 이동방송(항공기, KTX), 유선방송(케이블, IPTV) 등에도 보급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화마를 입은 숭례문을 하루빨리 원상태로 복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부분까지 제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숭례문이 다시 수도 서울의 관문이자 랜드마크로 그 위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자 한다. /mskang@fnnews.com 강문순기자 ■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고고학자로 전공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다. 한국 고대사의 태두로 꼽히는 이병도 박사(1896∼1989)의 손자이면서 이장무 서울대 총장의 동생이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1973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근무를 시작으로 평생을 '박물관 맨'으로 살았다. 고고학자로서 전국의 발굴 현장을 누볐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국립광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시대를 성공적으로 열면서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검증받았다. 2003년 4월 개방직으로 전환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수장이 된 이래 2006년 8월까지 첫 차관급 관장으로서 박물관 이전을 지휘했다. '문화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박물관대회 2004'를 아시아 최초로 유치해 한국 박물관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2010-03-04 16:2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