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인천에서 초·중학교 교사 2명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이름으로 주는 정부 훈장을 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30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내년 2월 28일 퇴임하는 인천의 한 초등학교 A교사(61)가 대통령 훈장을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다. 30여년간 교직에 몸 담은 A교사는 최근 인천시교육청의 훈·포장 수요조사에서 "윤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취지로 훈장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A 교사에 앞서 지난 8월 정년 퇴임한 인천의 모 중학교 B교사(62) 역시 “현 정부에서 주는 포상은 받지 않겠다”라며 훈장을 거부했다. 이는 김철홍(66) 인천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가 훈장을 거부한 것과 유사한 사례다. 앞서 김 교수는 정년 퇴임을 앞두고 대통령 이름으로 주는 정부 훈장을 이례적으로 거부했다. 김 교수는 일부 언론사에 보낸 '이 훈장 자네나 가지게!'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정상적으로 나라를 대표할 가치와 자격이 없는 대통령에게 받고 싶지 않다"면서 "무릇 훈장이나 포상을 함에는 받는 사람도 자격이 있어야 하지만, 그 상을 수여하는 사람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라고 거부 이유를 밝힌 바 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2024-10-31 06:56:19[파이낸셜뉴스] 정년 퇴임을 앞둔 국립대학교 교수가 대통령 이름으로 주는 정부 훈장을 거부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28일 국립 인천대 등에 따르면 김철홍 인천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66)는 지난 22일 '퇴직 교원 정부포상 미신청자 확인서'를 학교 측에 제출했다. 김 교수는 이 확인서에서 "내년 2월 말 퇴직자인 본인은 소속기관(인천대)으로부터 퇴직 교원 정부포상 후보자라고 안내받았지만 포상 신청을 하지 않는다"라며 이에 대해 "향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라고 썼다. 김 교수는 연합뉴스를 통해 "교수도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인데 개근상과 같은 근정훈장을 받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가 제가 생각하는 상식과 너무 달라 훈장을 거부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가 일부 언론사에 보낸 '이 훈장 자네나 가지게!'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정부 훈장을 거부한 이유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윤 대통령을 비판하며 "무릇 훈장이나 포상을 할 때는 받는 사람도 자격이 있어야 하지만 상을 주는 사람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양극단으로 나눠 진영 간 정치적 이득만 챙기고 사람 세상을 동물의 왕국으로 만들어 놨다"라며 "민중의 삶은 외면한 채 자신의 가족과 일부 지지층만 챙기는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이 우리 집 거실에 놓인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친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윤 대통령은 선출된 5년짜리 정무직 공무원"이라며 "(내가) 만약에 훈·포장을 받더라도 조국 대한민국의 명의로 받고 싶지, 정상적으로 나라를 대표할 가치와 자격이 없는 대통령에게 받고 싶지 않다"라고도 적었다. 김 교수는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민주노총 산하 교수노조 국공립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인천대에서 30년 넘게 근무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2024-10-29 06:55:14[파이낸셜뉴스] 북한이 우리나라는 물론 러시아의 수해지원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상반됐다. 러시아에는 사의를 표하며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겠다고 밝힌 반면, 우리나라에는 적대감을 드러냈다. 4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날 주북한러시아대사관을 통해 수해지원 의사가 담긴 위문을 전달했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사의를 표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가장 어려울 때 진정한 벗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며 “현 단계에서 큰물(홍수) 피해를 시급히 가시기 위한 국가적인 대책들이 강구됐으므로 이미 세워진 계획에 따라 피해 복구 사업이 진척될 것”이라고 수해지원을 거부했다. 다만 “만약 그 과정에 앞으로 반드시 도움이 필요할 때는 가장 진실한 벗들, 모스크바(러시아 수도)에 도움을 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와 올해 정상이 오가며 양자회담을 거쳐 군사협력을 단단히 했다. 지난 6월에는 군사동맹에 준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키도 했다. 김 위원장의 사의 표명은 이 같은 북러 밀착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의 수해지원 제안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핵 기반 한미동맹을 빌미로 적대감만 드러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이재민 긴급 물자 지원 의사를 표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2번째 대북지원 제안이다. 하지만 매일 2차례 시도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통화에 여전히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매체를 통해서는 수해지원 제안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우리 언론의 인명 피해 추산보도와 한미동맹에 대한 비난만 쏟아냈다. 전날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일 침수지역 주민들을 구출한 공군 부대에 훈장을 수여하며 내놓은 연설에서 “적들의 쓰레기 언론들은 우리 피해 지역의 인명 피해가 1000명 또는 15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구조 임무 수행 중 여러 대의 직승기(헬기)들이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날조된 여론을 전파하고 있다”며 “이러한 모략 선전에 집착하는 서울 것들의 음흉한 목적은 뻔하다.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서 북한 외무성 대외정책실은 이날 통신을 통해 발표한 공보문에서 한미 핵·재래식 통합(CNI) 도상연습(TTX) ‘아이언 메이스(철퇴) 24’ 시행을 두고 “미국과 한국의 핵 전쟁 계획이 실제적이고 구체화한 범행 단계에 진입했다”며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한 안전 환경으로부터 국가의 주권과 영토 완정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무력에 부여된 헌법적 의무”라면서 핵무기 고도화의 명분으로 삼았다. uknow@fnnews.com 김윤호 기자
2024-08-04 16:34:07국가보훈부는 6·25전쟁 중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했던 윤길병 육군 소령(당시 대위·사진)을 2024년 5월의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4월 30일 밝혔다. 보훈부에 따르면 윤 소령은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1951년 1월 20일 소위로 임관했고, 이후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대장으로 배속돼 사창리전투(강원 화천군), 용문산전투(경기 양평군)에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윤 소령은 1953년 6월 5일 강원 인제 중동부전선 812고지 우측 무명고지에서 적에게 포위돼 적의 항복 강요를 거부하고 동굴 진지 내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전사했다. 1931년 경북 경주시에서 태어난 윤 소령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건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전쟁 발발 후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953년 1월 국군 제12사단 제3대대 제10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정전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같은 해 6월까지 강원 인제군에 펼쳐진 중동부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사단의 방어선은 인제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인 서화리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고, 윤 소령은 가장 중요한 지점인 812고지를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53년 6월 1일 북한군 제45사단이 812고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제10중대 진지에 집중돼 윤 소령은 중대원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제10중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812고지를 사수하던 국군의 상황은 점차 불리해졌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다 결국 윤 소령은 전사했다. 윤 소령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으며 2006년 6월 윤 소령의 모교인 경주 건천초등학교 교내에는 '육군 소령 윤길병 상'이 건립됐다. 정부는 윤 소령의 공적을 기려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켰고, 1953년엔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4-04-30 19:43:08[파이낸셜뉴스] 국가보훈부는 6·25전쟁 중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했던 윤길병 육군 소령(당시 대위)을 2024년 5월의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4월 30일 밝혔다. 보훈부에 따르면 윤 소령은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1951년 1월 20일 소위로 임관했고, 이후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대장으로 배속돼 사창리전투(강원도 화천군), 용문산전투(경기도 양평군)에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윤 소령은 1953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중동부전선 812고지 우측 무명고지에서 적에게 포위돼 적의 항복 강요를 거부하고 동굴 진지 내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전사했다. 1931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난 윤 소령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건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전쟁 발발 후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953년 1월 국군 제12사단 제3대대 제10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정전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같은 해 6월까지 강원도 인제군에 펼쳐진 중동부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사단의 방어선은 인제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인 서화리 계곡을 내려다보이는 곳이었고, 윤 소령은 가장 중요한 지점인 812고지를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6월 1일 북한군 제45사단이 812고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제10중대 진지에 집중돼 윤 소령은 중대원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제10중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812고지를 사수하던 국군의 상황은 점차 불리해졌고, 고지 정상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다 결국 윤 소령은 전사했다. 윤 소령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으며 2006년 6월 윤 소령의 모교인 경주 건천초등학교 교내에는 '육군 소령 윤길병 상'이 건립됐다. 정부는 윤 소령의 공적을 기려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켰고, 1953년엔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4-04-30 10:20:39[파이낸셜뉴스] 국가보훈부는 17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 내 순국선열 추념탑 앞에서 제84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거행된다고 16일 전했다. 이날 보훈부에 따르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기념식엔 독립유공자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미래 세대 등 약 300명이 참석할 예정된다.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희생·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법정 기념일이다. 올해 기념식은 여는 공연, 국민의례, 순국선열 추념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 기념사, 헌정 공연, 기념곡 제창 순으로 약 45분간 진행된다. 올해 기념식은 이육사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를 주제로 한다. 광복이라는 저버릴 수 없는 약속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선정됐다. 특히 행사에서는 생존 애국지사인 오성규·강태선·이석규 지사와 인공지능(AI)으로 구현된 백범 김구 선생이 함께 추념문을 낭독하고, 뮤지컬배우 임강성과 이영태 명창이 '장부가'를 공연한다. 이어 독립유공자 67명에게 정부포상을 한다. 1943년 3월 일본 동부신학교 재학 중 동지들과 독립 실현 방법을 협의하다 체포된 고(故) 강재은 지사(건국훈장 애족장), 1940년 5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된 고 최인규 지사(건국훈장 애족장), 1939년 일본에서 일제통치를 비판하다 체포된 고 민병구 지사(건국포장), 1919년 4월 충남 예산에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한 고 전혁규 지사(대통령표창), 1924년 4월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어 교사 배척 등 동맹휴학에 참여한 고 정사섭 지사(대통령표창)의 유족에게 포상이 전달된다. 헌정 공연에서는 성악가 길병민이 '지금 이 순간'을 노래하며, 참석자 300여명 전원이 '순국선열의 노래'를 제창하며 기념식을 마무리한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순국선열들의 강인한 독립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번영의 근간이자 미래 대한민국을 견인하는 나침반"이라며 "이번 기념식이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미래 세대들에게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3-11-16 10:42:34박정희 대통령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한국 조선업의 산증인 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의 사무실은 서류 더미와 흑백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빛바랜 액자엔 박정희 전 대통령 등 낯익은 인물과 제철소 현장, 과학기술 연구소, 조선소 부지를 누빈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아흔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신 회장은 최신 산업 트렌드를 살펴보고 직접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한다. 신 회장은 최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동력으로 우리 국민의 집념과 도전정신을 꼽았다. 그는 한국 경제가 성장의 기로에 섰다고 안타까워하면서 미래 초강국으로 다시 도약하려면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담=손성진 논설실장 ■절망을 딛고 희망을 보다 신 회장이 초강대국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조선업에 몸담을 꿈을 꾼건 한국전쟁 시절이다. 피란 갔던 부산의 항만에서 하역일을 하며 도넛으로 허기를 때우는데 미국의 수송선과 군함이 눈에 확 띄었다. "어마어마한 선박의 위용에 눈이 번쩍 뜨였고, 구호물자와 탱크의 수에 압도당했습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을 만큼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인데 미국의 위용을 보며 부러웠고, 우리도 저런 국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조선공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아버지가 지방법원장을 지낸 법조 집안에서 자란 신 회장은 서울대 조선학과에 입학한 뒤 집에서 한동안 쫓겨났다. 조선공학 이론체계도 잡혀 있지 않던 시절이라 학업환경은 열악했고 졸업을 했어도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잠시 여고 교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 등 당시의 제자들을 지금도 만난다고 한다. 신 회장은 무작정 외국의 유명한 조선회사에 100여통의 편지를 쓴 끝에 마침내 당시엔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스웨덴 말뫼의 조선소에 취업할 수 있었다. 밤잠을 자지 않으며 한국에서 못한 공부와 실습을 하며 실력을 닦았다. 그런 다음 조선강국 영국으로 건너갔다. 선박의 국제안전기준을 검증하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이 된 것이다. "선박 설계와 용접, 완공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흡수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경제강국 설계에 몸담다 젊은 조선전문가가 된 신 회장 소식은 박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에 신 회장을 불렀다. 종이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토를 그리더니 손을 붙들고 나라를 위해 같이 일해 보자고 했다. "해외방문 일정은 1분1초가 바쁠 텐데 민족중흥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통령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경제강국 한국 설계자의 일원이 된 순간이었다. 30대 초반이던 1960년대에 그는 대통령 경제수석,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총장(장관급) 3개 요직을 동시에 맡았다. 그리고 조선·철강·석유화학·기계·전자를 아우르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그려나갔다. 자원 없는 가난한 나라가 부국이 되려면 뛰어난 전략이 요구된다. 신 회장이 내세운 국가경쟁력 프로젝트는 세 가지다. 먼저,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The Vision of Korean Techno-Cracy)'을 그렸다. 중화학공업 시대를 거쳐 기술 중심의 혁신강국이 되는 한국의 미래였다. 당시 직접 작성한 서류를 보여줬다. "경제를 구축하려면 철학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미래상을 만들어봤습니다. 현대 국가는 '자유'와 '배부름'을 갖춰야 되는 데 이런 가치를 달성하려면 돈과 과학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산업 개발에 필요한 돈을 구하러 해외로 돌아다녔는 데, '한국 정부의 대표 거지'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한국 조선산업의 초석을 놓다 다음으로 조선산업 마스터플랜에 매달렸다. 당시 조선산업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대한조선공사 현장은 풀밭으로 변해 있었고, 생산장비는 해체되어 팔렸거나 녹이 슬어 쓸 수 없었다. "최고의 선진 기술과 학문을 익혀온 내가 처음 한 일이 낫을 들고 풀을 베는 것일 정도로 조선업은 소생불가 상황이었습니다." 신 회장은 조선산업 부흥을 위한 비전을 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반대만 했다. "세계에 없는 초대형 조선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계획을 보고했는데 모두 말도 안 된다고 했어요. 돈도 없는 나라가 조선소에 돈을 다 넣으면 재정이 거덜 날 수 있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러나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그의 식견을 잘 알던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로 거제를 거점으로 한 조선강국 프로젝트는 드디어 닻을 올렸다. 신 회장의 '최고작'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다. 1969년 KIST 준공식 사진을 보여줬다. 준공식에 참석했던 사진 속 인물 가운데 신 회장이 유일한 실존자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1965년 방한에 맞춰 깜짝 선물을 줄 계획이라고 알려왔는데 무엇이 좋을지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여의도에 존슨타워를 건설하자'는 의견부터 '한강에 존슨브리지를 만들자'는 말까지 나왔지요. 나는 KIST 설립을 주장했고 박 대통령은 내 제안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CCUS라는 새로운 도전 신 회장은 자기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다. 천상 엔지니어인 신 회장은 일신우일신의 신념으로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선박 설계· 감리기업인 한국해사기술(KOMAC)을 설립해 경영하고 있다. 지난 54년간 2000종 넘는 배와 전 세계에 걸쳐 수십개의 대형 조선소를 설계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에 따른 친환경 트렌드를 간파하고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CCUS 관련 세계적 기술을 보유한 노르웨이 기업과 연계해 지난 2021년 카본코리아를 설립했다. 그는 한국이 지금 극심한 성장통 과정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맨주먹으로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다. "지금 상황이 1960년대와 똑같다고 봅니다. 그런데 반도체가 안 팔리고 철강이 어렵다는 등 옛날에 일군 성과를 우려먹는 소리만 하고 있어요. 옛날에 잘하던 것을 똑같이 찍어서 팔아선 안 됩니다." 그는 챗GPT를 예로 들었다. "해외 기조연설을 쓰려다가 챗GPT에 물어보니 10분 만에 무려 25쪽의 답변을 고급 영어 원문으로 떡하니 내놓더군요. 비서가 필요 없는 시대입니다. 과거에 안주한 채 창의력이 없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 ■두려움 없는 변화와 기술격차만이 살길 최근 한화그룹이 대우조선을 인수한 것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고 했다. "중국이 조선업을 장악할 거라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대형 선박 한 척을 완성하는 데 중국은 24∼30개월, 일본은 12∼18개월 걸립니다. 한국은 6개월이면 뚝딱 만들어냅니다. 생산성과 효율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지요." 선박 강대국의 위상을 지키려면 역시 기술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가도 기업도 성장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선 변화와 기술혁신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당장 잘되는 사업에 심취하면 안주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는 각오로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국가 운영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과학기술 발전의 뒷받침 없는 경제발전은 허구이며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과학기술을 확보해야 진정한 경제발전, 국가발전입니다." 신 회장은 국가와 기업,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만들었듯이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일군 신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리더의 역할과 화합이 관건이지요. 대통령이 지휘자로 나서 오케스트라를 잘 이끌어야 하고 구성원들이 합심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 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은 1932년생으로 만 91세. 한국해사기술 회장 겸 카본코리아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 스웨덴 찰머스공과대학원과 영국 더럼공과대학원에서 조선공학을 공부했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을 지냈다. '한국 조선산업의 아버지'로 불린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지냈다. 1960년대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이라는 국가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KIST를 설립하고 해외의 유명한 한인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일을 주도했다.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고, 엔지니어링 수출 공로로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극지탐사와 해양자원 개발, 해양주권 강화에 기여해 3·1문화상을 받았고 외국인 투자유치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최근에도 인도와 중동, 필리핀 등 세계 여러 나라 국가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에게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다. jjack3@fnnews.com 조창원 기자
2023-06-21 18:38:48[파이낸셜뉴스] “오늘 이 자리는 미국이 영웅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조지아주 출신으로 한국전쟁에서 싸우다 숨진 루터 스토리 미국 육군 상병의 유해가 7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미 육군 제2보병사단 9보병연대 1대대 알파중대 소속이었던 스토리 상병은 1950년 9월 1일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부상을 입었다. 창녕 격전지에서 수습된 유해.. 19세에 전사한 스토리 상병 이후 자신과 중대 동료들이 북한군에 포위될 위기에 처했을 때 스토리 상병은 자신의 부상이 동료들의 철수를 방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다음 위치로 후퇴하기를 거부하고 철수하는 중대를 엄호하다가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그의 전공을 인정해 1951년 6월 21일 스토리 상병의 부친에게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전달했다. 훈장증서에는 “구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발사하고 적의 또 다른 공격을 격퇴하는 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그의 모습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남 창녕 격전지에서 수습된 그의 유해 일부는 오랜 기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 계속된 한미 양국의 유해 발굴 노력 덕분에 73년 만에 스토리 상병의 신원을 확인해 지난 4월 6일 유족에 통보했다. 지난달 워싱턴DC에서 만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스토리 상병의 희생을 기리며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장병들을 끝까지 찾겠다는 의지를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의 영웅" 조지아주 국립묘지 안장식 엄수 이후 미국의 현충일인 29일(현지시간) 스토리 상병의 고향인 조지아주 앤더슨빌 국립묘지에서 스토리 상병의 안장식이 엄수됐다.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표했고, 미군 장례식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인 ‘패트리엇 가드 라이더스’(Patriot Guard Riders)가 성조기를 들고 의장대 역할을 했다. 유족을 대표해 연단에 오른 스토리 상병의 조카 주디 웨이드는 “아무나 루터 삼촌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저 같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아주방위군의 토마스 카르딘 소장은 추도사에서 스토리 상병을 “미국의 영웅”으로 칭하고 “오늘 이 자리는 미국이 영웅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고 밝혔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기자
2023-05-31 10:02:57[파이낸셜뉴스]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물류차질 최소화에 기여한 국토교통부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선정에 관여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업무평가 유공자 30명이 정부 포상을 받는다. 정부는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30명의 유공자에게 포상을 수여했다. '정부업무평가 유공자'는 지난 한 해 동안 국정과제 성과 창출과 정부업무평가제도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훈장 2명, 포장 5명, 대통령표창 11명, 단체 2점을 포함한 국무총리 표창 12명이다.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사태 당시 화물연대 면담과 지난해 11월 업무개시명령 발동 등 범정부적 대응을 주도한 박진홍 국토교통부 과장이 ‘정부업무평가 유공 녹조 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지난해 10월 제1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윤 정부의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하고 향후 5년간 25조원에 이르는 투자전략을 설정한 정희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조정관은 ‘홍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이 밖에도 코로나 사태로 빚어진 글로벌 물류 차질 당시 임시선박 50척을 투입해 우리나라 화물의 적기 운송을 이뤄낸 이민석 해양수산부 과장장과, 농작물 폭염피해 예방에 효과적인 저온성 필름을 개발한 김용일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규제혁신・정책소통 분야의 평가비중을 확대하고 산하 공공기관 혁신노력에 대한 평가항목을 신설한 이용석 국무조정실 과장, 도시침수 예방을 위해 노력한 손옥주 환경부 수자원정책관, 농촌 지방소멸 위기 극복 및 농촌 정주여건개선에 기여한 이상만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정책국장도 근정포장 대상자로 선정했다. 대통령표창과 국무총리표창은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고 노사법치주의를 확립하는 등 실질적 성과 창출에 크게 노력한 공직자 21명에 주어졌다. 건전재정 기조의 기반을 마련한 윤범식 기획재정부 과장, 코로나19 백신 공급 불안 해소에 기여한 정유진 질병관리청 팀장을 비롯해, 노사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한 이창기 고용노동부 사무관, 콘텐츠 지식재산 보유기업 육성에 역대 최대 정책금융을 지원한 최경복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주사 등 직급에 관계없이 성과를 낸 공직자 11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또한, 산업 부문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제1차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에 반영한 김창완 산업통상자원부 서기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규제개선에 기여한 이희영 문화재청 사무관 등 10명의 공직자에게는 국무총리표창을 수여했다. 한 총리는 이날 훈장 수여자 2명 등 총 12명에게 직접 포상을 수여하고, “지난 1년 동안 우리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해주셨다”며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개인 수상자 28명 외에도, 지난 2월 27일 발표된 2022년도 정부업무평가 결과에 따른 2개 기관도 표창 대상에 올랐다. 환경규제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범부처 전주기 탈플라스틱 대책을 마련하는 등 순환경제 사회로의 전환에 앞장서고 있는 환경부와, 배달 등 새로운 식품소비환경에 대응한 먹거리 안전망 및 마약류 관리 체계 구축 등에 기여한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2개 기관이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한 총리는 “앞으로도 윤석열정부 국정과제의 완수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며, “정부업무평가가 부족한 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chlee1@fnnews.com 이창훈 기자
2023-05-24 08:39:29국산 콩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지속적인 국산 콩산업 살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련 토종업체들이 고사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국산 콩 전도사' '우리콩 독립투사'로 일컬어지는 함정희 함씨네토종콩식품 대표마저 최근 도산 위기에 처했다. 지방 향토기업으로, 국산 콩 살리기 노력을 인정받아 각종 정부 표창 등을 받았지만 경영악화로 사업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대기업들이 외면하는 국산 콩산업을 지방 중소 토종기업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산 콩 살리기를 위한 우리 정부의 정책 효과도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수입 콩과 가격경쟁에서 밀리며 국산 콩으로 사업을 하는 토종기업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속화됐다. 파이낸셜뉴스는 '위기의 국산 콩' 산업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통해 활로와 대책을 찾고 토종 콩산업을 살리기 위한 정부, 민간의 관심 및 노력을 제안한다. <편집자주>【 전주=강인 기자】 국산 콩 연구로 노벨상 후보까지 오른 함정희 대표(70)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전주한옥마을에 열었던 식당이 문을 닫으면서 본격화된 경영난에 결국 생산공장까지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지난 21일 만난 함 대표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동안 국산 콩을 고집하며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도 강한 의지를 보여주던 그였다. 수입산 콩을 사용하지 않아 높아진 단가로 대형마트 납품을 포기해야 했을 때도, 국산 콩을 고수하는 함 대표를 나무라는 남편의 핀잔에도, 생업전선에서 뛰며 국산 콩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 감내해야 했던 고난의 시기에도 그는 타인 앞에서 항상 웃음을 보였다.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콩의 꽃말인 '언젠가 올 행복'을 믿으며 여러 풍파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런 그도 지금까지 사투를 벌여온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공장마저 경매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의 인생 역정은 지난 2000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주시청에서 진행한 안학수 고려대 농학박사의 특강을 들은 뒤부터다. 이전까지 수입 콩으로 두부를 생산해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지만 강의를 들은 뒤 '좋은 먹거리'가 우선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되면서 경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함씨네토종콩식품은 유기농 콩을 사용해 두부와 청국장 환 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2001년 전주 팔복동에서 문을 열었다. 함 대표는 2021년 원광대에서 '한국인의 건강관점에서 콩의 영양, 기원 및 유전자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60대를 넘긴 늦은 나이였지만 국산 콩에 대한 열정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은 먹는 것에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랜 연구 끝에 '쥐눈이콩 마늘 청국장 환'을 만들었고, 새로운 가공방식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20여년 모진 세월을 견디며 '옳은 식품'에 몰두한 결과 농림수산식품부장관 표창(2008), 대통령상(2010), 경찰대 감사장(2013),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표창(2011), 2018년 서울대 명예의 전당 등재, 2018년 전주 세계슬로워드 수상, 2018년 대한민국 동탄산업 훈장 등 다수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2019년에는 노벨생리의학상 한국 후보로 함씨네토종콩식품이 선정돼 기적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노벨재단은 함씨네토종콩식품을 실사한 뒤 함 대표를 노벨상 생리의학상 후보로 추천했다.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면 최종 수상까지 통상 5~20년이 걸린다. 중국에서는 투유유 중의과학원 교수가 개똥쑥을 이용한 말라리아 약을 개발해 노벨상을 수상한 전례가 있다. 우리 땅에서 나오는 쥐눈이콩(약콩)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식품이라는 것이 함 대표의 설명이다. 이런 함 대표는 국산 콩을 고집하며 전주지역 한 대형마트 납품까지 포기했다. 마트 납품을 통해 매출이 증가했으나 국산 콩을 사용, 단가가 맞지 않아 자진해서 대형마트 납품을 포기했다. 통상 식품업체는 판로개척에 기업의 존폐가 달린 일이기 때문에 대형마트 납품 포기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그를 두고 일각에서는 '우리 콩 독립투사'라고 칭송했다. 함 대표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는 다수의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학교와 개인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며 경영환경이 개선되고 있었다. 건강한 음식을 찾는 곳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함 대표는 지역 대표 관광지인 전주한옥마을에 식당을 차린다. 2017년 전주시 시설을 위탁받아 '함씨네밥상' 식당을 열었다. 하지만 가장 건강한 밥상을 차려내면서도 수익은 창출되지 않았다. 역시 높은 단가가 발목을 잡았고, 시장이 바라는 음식은 '건강'보다 '자극적인 맛'이었다. 임대료가 밀리기 시작한 함 대표는 결국 쫓겨나듯이 식당을 비워줘야 했다. 그는 이 시기를 가장 원망하고 있다. 한옥마을 정체성과 가장 어울리는 자신의 식당을 전주시가 좀 더 지켜봐 주거나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외면했다는 아쉬움이다. 이 과정에서 들려온 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함씨네밥상이 사실은 중국산 콩을 사용한다'거나 '싼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음해였다. 이런 소문에 한 전주시의원은 한옥마을에 양심 없는 음식점이 영업 중이라는 생각으로 함씨네밥상을 비판하는 5분 발언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언 준비 과정에서 진실을 알게 됐고, 그 뒤 함 대표의 팬이 됐다. 함 대표는 이 시기부터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밀린 임대료와 과태료 처분은 자금의 흐름을 막았다. 금융기관에서 자금이 융통되지 않았고, 학교급식 납품도 거부됐다. 함 대표의 공장은 결국 경매에 넘어갔고 비워줘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이 같은 상황에도 그는 국산 콩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수입산 콩을 사용해 단가를 낮추고 시장경쟁력을 갖출 생각은 없나"라는 질문에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어 인터뷰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국산 콩과 음식에 대해 말할 때는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현대인들이 건강하지 못한 음식을 접하고 있다고 말할 때는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쥐눈이콩의 효능에 대해 말할 때는 눈이 반짝였다. 곧 공장을 비워줘야 하는 현실을 잊은 듯 했다. 어떤 역경도 그가 가진 장인정신을 훼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함 대표는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서 "지금 이렇게 경영난을 겪고 있는데 국산 콩을 지키고, 좋은 음식을 만드는 정신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면 회사를 내줄 생각도 있다"고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오직 좋은 식품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다. 그런데 음해하는 사람들도 있더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생각은 없다. 건강을 지키는 식품을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kang1231@fnnews.com
2023-04-25 18:2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