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어머니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40대 아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7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진재경)는 존속상해치사 혐의로 구속기소된 A씨(41)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5월 17일 서귀포시 동홍동 아파트에서 함께 살던 친모 B씨(60대)를 수차례 때려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이튿날 112에 “어머니가 의식을 잃었다”고 직접 신고했지만, 경찰이 현장에 출동할 당시 B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부검 결과 B씨의 사인은 ‘두부 손상’으로 나타났다. 당일 긴급체포된 A씨는 “집에서 술을 마시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평소 술안주로 해주던 계란 후라이를 안 해줘서 몇 차례 때린 적은 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법정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는 “당시 어머니의 멱살을 잡고 슬쩍 민 뒤 앉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을 뿐 어머니를 넘어뜨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지럼증으로 쓰러져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주변 폐쇄회로(CC)TV, 부검 결과 등을 토대로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부검 결과 피해자의 사인이 ‘후두부 좌상’으로 확인됐는데 이는 방어기제를 발동할 겨를도 없이 매우 빠른 속력으로 뒤로 넘어지면서 뇌까지 손상됐다는 것”이라며 “당시 누군가가 피해자의 머리나 상체를 강하게 밀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당시 같이 있었던 사람은 피고인 한 명뿐이고 외부 침입이 있었다고 볼만한 정황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의 몸에서 다수의 멍이 발견됐다. 당시 CCTV 영상을 보면 피해자가 실수로 넘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직접 증거가 없음에도 이 사건 간접 증거를 종합하며 피고인이 우발적으로 피해자에게 상해를 가했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한 사실이 확신에 이를 정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3-12-08 06:25:14[파이낸셜뉴스] 생후 40일 된 아들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도 수일간 방치해 숨지게 한 20대 친모가 고의성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천경찰청 여성청소년수사대는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A씨(24)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29일 밝혔다. 중증 지적장애인 A씨는 이달 중하순께 인천시 서구 아파트에서 생후 40일 된 아들 B군을 방바닥에 떨어뜨려 다치게 하고도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경찰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안고 있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다.괜찮을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B군 시신을 부검한 뒤 "오른쪽 귀 위쪽 머리뼈 골절과 약간의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1차 구두 소견을 경찰에 전달했다. 다만 B군 시신에서 머리뼈 골절 외에 멍 자국과 같은 외상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B군이 사망하기 전 건강에 이상 징후가 있었으나 친모가 이를 방치하다가 숨지게 한 것으로 판단해 아동학대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2023-04-29 16:03:43[파이낸셜뉴스] 대학시절 선배의 여자친구 A씨와 술김에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남성이 10년 뒤 A씨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로 살자고 동의했지만 다시 10년이 흐른 뒤 이혼을 한 A씨가 "키우던 아이는 네 아이"라며 양육비를 청구했다는 사연이 전해졌다. 15일 YTN라디오 '조인섭 변호사의 상담소(조담소)'에는 과거 대학생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의 전 부인에게서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는 B씨의 고민이 소개됐다. B씨는 "약 20년 전 대학생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고 선배의 여자친구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선배의 여자친구와 술김에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됐고 당황스러웠지만 실수라 생각하고 서로 잊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B씨는 이후 선배와 여자친구는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10년 만에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런데 선배의 전 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자기 아이가 선배가 아닌 제 아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B씨는 너무 놀랐고 믿을 수 없었지만 실제 아이를 직접 만나보고 자신의 아이가 맞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A씨는 B씨에게 모르는 사이로 살자고 했고 B씨도 이에 동의했다. 이후 B씨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장이 됐다. 그렇게 A씨와의 일을 잊고 살던 B씨에게 최근 갑자기 '인지 청구 및 과거 양육비 청구' 소장이 왔다. A씨는 자신의 아이를 친자로 받아줄 것과 과거 양육비 1억원을 요구해왔다. B씨는 "이대로 그 애를 제 호적에 올려야 하는지, 양육비를 요구하는 대로 줘야 하는지 궁금하다"며 조언을 구했다. 류현주 변호사는 "이 사연처럼 혼외자가 인지청구를 해서 사후적으로 친자로 등록이 되는 경우에도 이혼하는 경우에 준해서 양육비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류 변호사는 "일단 양육비를 청구하는 쪽과 양육비를 지급하는 쪽 모두 아이에 대해 양육의무를 가지는 친부모여야 하기 때문에 혼외자와 친부 간에 유전자 검사를 먼저 하게 된다"면서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면 친자가 맞기 때문에 가족관계등록부(호적)에 등록되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과거 양육비'라는 것은 과거에 지급되지 않은 양육비를 현재 한꺼번에 달라고 하는 것이다. 법원은 과거 양육비 액수를 결정할 때 부모의 경제력 외에도 부모 중 한 쪽이 자녀를 양육하게 된 경위, 그리고 상대방이 자녀에 대한 부양의무를 인식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한다"며 "해당 사연의 경우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상당 기간 전혀 몰랐고, 알게 된 이후에도 친모가 '남처럼 살자'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사연자가 부양의 의무를 져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송이 들어오기 전에는 부양 의무를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청구금 1억원을 상당부분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판단했다. 류 변호사는 "이제 와서 인지청구를 하고 과거양육비를 달라고 하는 그 배경은 결국 친모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라며 "이런 경우 상대방과 합의 조건을 조율해보면서 소송을 취하하고 원만하게 합의를 시도해 볼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3-02-15 18:35:328살 딸을 굶기고 때리는 등 가혹 행위를 한 끝에 숨지게 만든 20대 계부와 친모에게 징역 30년의 중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11일 아동복지법위반(상습아동학대) 및 살인 혐의로 기소된 계부 A씨(28)와 친모 B씨(29)에게 각각 징역 30년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와 B씨는 딸이 대소변 실수를 한다는 이유로 장기간 주먹이나 옷걸이로 때리고 몸에 멍이 드는 등 상처가 나고 심각한 영양결핍상태를 보이는 데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는다. 사망 당일에는 때린 뒤 30분 동안 찬물로 샤워시키고 쓰러진 딸을 화장실에 약 2시간 동안 방치했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모바일 게임을 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1, 2심은 "자신을 보호·양육할 의무가 있는 피고인들로부터 3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학대·유기·방임을 당하고 끝내 사망에 이를 때까지 겪었을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했을 것"이라며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건 의료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예견이 가능했다"며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200시간 아동학대치료프로그램 이수 및 아동관련기관 10년 취업제한 명령도 내렸다. 대법원은 "기록에 나타난 양형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살펴보면, 원심이 피고인들에 대해 각 징역 30년을 선고한 판결을 유지한 것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상고기각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2022-02-11 11:03:28[파이낸셜뉴스] 8살 딸에게 밥을 제대로 주지 않고 옷걸이로 때리는 등 학대해 결국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계부와 친모에게 항소심도 징역 30년이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6-2부(정총령·조은래·김용하 부장판사)는 8일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계부 A씨(27)와 친모 B씨(28)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각각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아동학대 치료프로그램 이수 및 10년간 아동관련기관 취업 제한 명령도 내렸다. 재판부는 "피해자 C양은 8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로, 사망 당시까지 하루 1끼만 제공 받는 등 심각한 영양 불균형 상태에 있어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며 "A씨와 B씨는 C양에게 음식과 물을 전혀 주지 않았고, 온몸을 옷걸이로 때렸다"고 지적했다. 이어 "극심한 영양 불균형 상태에서 온몸에 찬물을 끼얹고 알몸으로 방치할 경우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은 의료전문가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며 "이런 사정들을 모두 종합해보면 C양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어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2018년 1월 말부터 지난 3월 2일까지 인천 중구 운남동 주거지에서 C양이 대소변 실수 등을 한다는 이유로 온몸을 옷걸이 등으로 때리고,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 결핍 등으로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대소변 실수를 하면 이를 먹게 하는 등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하고, 아동학대 치료프로그램 이수 및 10년 간 아동관련기관 취업제한 명령을 내렸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
2021-12-08 16:13:09[파이낸셜뉴스] 검찰이 인천에서 동거녀의 5살 아들을 폭행해 뇌출혈로 중태에 빠뜨린 남성 A(28)씨에게 중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또 아동복지법상 아동학대 등 혐의로 함께 기소한 피해 아동의 친모이자 A씨의 동거녀인 B(28)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10일 인천지법 형사13부(부장판사 호성호) 심리로 열린 결심 공판에서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아동학대 중상해 등 혐의로 기소한 A씨에게 징역 14년을 구형했다. 이와 함께 아동학대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아동관련기관 취업제한 7년을 청구했다. 검찰 측은 A씨가 피해 아동 C군을 별다른 이유 없이 반복해서 학대했으며 "A씨는 마지막 범행 때 피해 아동을 바닥에 집어 던져 뇌손상을 일으켰다"면서 "피해 아동이 아직 의식이 없고 회복 가능성도 희박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A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18살 때 작성된 장애 진단서에는 지능 지수와 사회 성숙도가 현저히 낮다고 돼 있다"며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만이 교화가 아니다"라고 선처를 부탁했다. B씨의 변호인도 "피고인도 지적장애가 있었고 A씨의 폭행에 공포를 느껴 확대를 말릴 수 없었다"고 호소했다. A씨는 6월 10일 오후 1시쯤 인천시 남동구 한 빌라에서 C군을 학대해 머리 등을 크게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C군은 같은 날 오후 1시 34분쯤 A씨가 "아이가 호흡을 하지 않는다"며 119에 신고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병원 의료진은 C군이 뇌출혈 증상을 보이고, 머리에서 1㎝가량 상처가 발견되자 학대를 의심해 경찰에 신고했다. A씨는 경찰에 긴급체포된 후 "목마를 태워주며 놀다가 실수로 떨어트려서 다쳤다"면서 "멍은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쳐서 들어왔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B씨도 평소 공부를 못 한다며 아들이 중태에 빠지기 전 뺨이나 등을 때리는 등 상습적으로 학대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주 운다거나 말을 안 들어서 때렸다"고 범행을 자백했다. 앞서 A씨는 지난 4월 27일에도 울고 있던 C군을 화장실로 끌고 가 양손으로 목을 잡아 들어 올린 뒤 세면대에 집어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친모인 B씨도 평소 공부를 못 한다며 아들이 중태에 빠지기 전 뺨이나 등을 때리는 등 상습적으로 학대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B씨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C군을 낳았고, A씨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동거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와 B씨는 최후 진술에서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수습기자
2021-11-10 15:05:59【파이낸셜뉴스 군산=강인 기자】 고의로 자녀 몸에 상처를 내고 보험금을 타낸 부모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북 전주지법 군산지원은 특수상해와 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친부 A씨(40)와 친모 B씨(41)에게 각각 징역 6년, 4년을 선고했다고 8일 밝혔다. 이어 100시간의 아동학대 치료프로그램 이수도 명했다. 이들 부부는 2019년 11월20일부터 지난해 7월21일까지 8차례에 걸쳐 자녀들 몸에 상처를 내고 보험사로부터 보험금 1130여만 원을 타낸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B씨가 자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틈에 흉기로 자녀의 정강이를 베고 뜨거운 냄비에 팔을 갖다 대는 등 고의로 상처를 냈다. 이후 자녀가 실수로 병에 베었다거나 실수로 다쳤다며 거짓말을 해 보험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일정한 수입이 없어 채무가 늘고 자녀 7명에 대한 양육비 감당이 힘들어지자 30여 개 보험상품에 가입한 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미성년 자녀에게 상해를 가했고 지속해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했다"면서 "그런데도 범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자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고 이에 대한 엄벌이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kang1231@fnnews.com 강인 기자
2021-11-08 14:38:32[파이낸셜뉴스] 웨이브를 통해 국내 최초 공개된 피콕 오리지널 시리즈 ‘닥터 데스’(DR. DEATH)를 비롯해 ‘디 액트’, ‘프로젝트 블루 북’까지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실화 모티브의 시리즈가 OTT 플랫폼에서 화제다. 먼저 웨이브가 공개한 피콕 오리지널 시리즈 ‘닥터 데스’는 수많은 환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의사 ‘크리스토퍼 던치’의 실화를 고발한 팟캐스트를 기반으로 제작된 8부작 시리즈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위험천만하게 수술실을 누빈 소시오패스 의사 ‘크리스토퍼 던치’. 그가 2년간 집도한 수술로 인해 무려 33명의 환자가 반신 마비, 뇌사 등의 심각한 후유증과 사망까지 이르렀다. 현재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지금도 자신의 실수를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 전역을 충격으로 빠뜨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메디컬 스릴러 ‘닥터 데스’는 죽음의 의사 ‘크리스토퍼 던치’(조슈아 잭슨)와 그를 막기 위해 나선 동료 의사 ‘로버트 헨더슨’(알렉 볼드윈), ‘랜들 커비’(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는 한편 이를 묵인한 의료 시스템의 허점을 고발하며 시청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웨이브 독점. 왓챠가 독점으로 선보인 ‘디 액트’는 2015년 미국 전역을 뒤흔든 ‘집시 로즈 블랜처드’ 친모 살해 교사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범죄 실화 드라마다. 어렸을 때부터 하반신 장애와 희귀병을 앓던 주인공 ‘집시’가 인터넷에서 사귄 남자친구에게 어머니 ‘디디’를 죽여 달라고 사주한 범죄를 그린다. 패륜범죄인줄 알았던 이 사건은, 이후 ‘집시’는 환자가 아니었고 오랜 시간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보이후드’의 패트리샤 아퀘트가 어머니 ‘디디’로, ‘키싱 부스’ 시리즈의 조이 킹이 딸 ‘집시’로 분해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프로젝트 블루 북’은 미 공군에서 1950년대 작성된 UFO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실화 기반의 드라마. 1940년대 천재 물리학자 ‘앨렌 하이넥’과 공군 대위가 UFO가 발견된 곳을 직접 찾아가 실존 가능성을 조사한 기록 ‘프로젝트 블루 북’을 고증해 제작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포레스트 검프’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UFO의 존재를 둘러싼 미국 정부와 천재 박사의 갈등을 압도적인 스케일로 그려내 방영 당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1-09-24 13:55:00[파이낸셜뉴스] 스페인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이 뒤바뀐 사실이 20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7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 외신에 따르면 2002년 스페인 빌바오 남쪽 로그로뇨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두 아기가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저체중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가 병원측의 실수로 서로 다른 가족의 품으로 보내진 것으로 밝혀졌다. 한 명은 부모와 함께 살았고, 또 다른 한 명은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두 여성 모두 서로의 가족이 뒤바뀐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다. 해당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계기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여성의 양육비 소송 과정에서 비롯됐다. 2017년 할머니가 육아 문제로 여성의 아버지를 고소했을 무렵, 법원은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를 명령했다. 검사 과정에서 여성은 본인이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실시된 친모 확인 유전자 검사에서도 모녀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가족이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된 여성은 지역 보건당국을 상대로 300만 유로(한화 약 41억원)의 손해 배상 소송을 낸 상태다. 반면, 다른 여성도 해당 사실을 통보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스페인 현지 매체가 보도했다.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현지 보건당국 책임자인 사라 알바는 "병원측에서 저지른 잘못이지만, 아직 누구의 실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현재 병원은 과거와 달리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way309@fnnews.com 우아영 인턴기자
2021-09-08 14:18:49[파이낸셜뉴스] ...(중략)... 김상헌(주전파) "명길이 칸을 황제 폐하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라 칭했으니, 전하께서는 명길의 문서를 두 손에 받쳐들고 칸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라고 하면 술을 따라 올리시겠습니까." 최명길(주화파) "전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는 것과 같이.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옵니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김상헌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런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신은 차마 그런 임금은 받들 수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최명길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나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선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영화 '남한산성' 中 1636년 병자년에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동안 그저 변방의 오랑캐로 여겨졌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청(淸)나라에게 군사적으로 철저히 공략당한 것은 물론, 임금(인조)이 직접 삼전도(三田渡)에 나와 청 태종인 '홍타이지'(皇太極)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임금(청나라)과 신하(조선)의 관계인 '군신'(君臣) 맹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임금과 대신들은 치욕에 몸서리를 쳤고, 백성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 같은 병자호란 비극의 단초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 서인(西人) 일파가 무력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쫓아내고, 그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했다. 서인들이 반정의 이유로 제시한 것은 바로 광해군의 '중립외교'(中立外交)와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특히 중립외교와 관련, 광해군은 당시 요동치는 국제정세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고,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외교 정책을 선보였다. 그동안 부모의 나라로 여겼던 명(明)나라가 기울고 새롭게 후금이 부상하는 만큼, 그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實利)를 챙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대의명분'(大義名分)에 경도(傾倒)돼 있었던 서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냉정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한 실리 추구를 저버리고 '친명배금'(親明排金, 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한다)이라는 알량한 명분만을 내세우며 단행한 '인조반정'은 당시 조선에 뿌리 깊게 박혀있었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추후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며 나라의 운명은 큰 위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전후 복구와 중립외교 1608년에 즉위한 광해군 앞에 놓인 것은 도탄(塗炭)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이었다. 7년 가까이 계속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전국을 파괴했고, 조선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宣祖)와 함께 임진왜란을 몸소 겪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참사를 뼈저리게 목격했고, 추후 자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깊이 새겼다. 광해군은 우선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했고, 군적 정비를 위한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했다. 또한 토지의 실제 경작 상황을 파악해 탈세를 방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양전(量田)도 시행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광해군의 주된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부담하는 공물을 실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한 근대적 개념의 세제다. 기존 공납은 지역 별로 배정된 품목을 직접 바쳤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이 상당했다. 더욱이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특산품이 공물로 배정되는 '방납'(防納)의 폐단도 있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시행되기도 했는데, 이 대공수미법을 보완, 확대한 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부담과 방납의 폐단이 완화됐고, 시전(市廛)과 화폐경제도 발달했다. 이처럼 내정 측면에서 큰 치적(治績)을 일군 광해군은 시야를 넓혀 국제정세를 살폈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기존 중원(中原)의 지배자였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신흥 강자로 누르하치(奴爾哈齊)의 후금이 부상하고 있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연하게 중립을 취하며 조선의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여러 핑계를 대며 지원군 파견을 지체했다. 이후 명나라의 요구가 계속돼 마지못해 강홍립 장군을 통해 1만3000명의 지원군을 보냈지만, 광해군은 출병 전 강홍립에게 은밀하게 명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강홍립은 이 명령에 기반해 후금과의 교전(交戰)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고, 적절한 시점에 후금과 휴전(休戰)을 맺고 귀국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광해군의 중립적인 실리 외교는 성공을 거뒀고,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위기감 고조, 폐모살제 다만, 광해군은 태생적 한계 및 왕위 계승과 관련한 나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우선 광해군은 장자(長子)가 아니었고, 정비 소생의 아들도 아닌 후궁 출신 공빈 김씨의 아들이었다. 원래는 장자였던 임해군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난폭한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가면서 후사(後嗣)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변의 평판이 좋은 광해군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이에 따라 광해군은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권에 안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조와 중전인 인목대비 사이에서 뒤늦게 왕자가 출생했는데, 이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는 늦둥이였던 영창대군을 매우 총애했고, 대신들 앞에서도 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들 사이에서는 후사와 관련해 선조의 정확한 의중(意中)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엇갈린 해석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선조의 병이 깊어졌고, 경황이 없어진 선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에게 선위(禪位)를 했다. 선위를 할 당시에도 영창대군을 염두에 뒀던 영의정 유영경 등이 선조의 선위 교서를 감췄다가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들을 가까스로 넘긴 후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태생적 한계 등에 기반해 왕권에 위협으로 느낄 만한 움직임이 있었고, 위기감이 고조된 광해군과 (당시 집권 여당격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광해군 즉위 초 대북파와 서인 등이 권력을 분점(分占)하는 화목한 모습은 사라졌고,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무리수들이 나오게 됐다. 우선 친형인 임해군은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을 참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광해군의 국정을 비판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대북파는 형제여도 왕법에 위배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할은론'(割恩論)을 내세우며 임해군을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임해군 대신 왕위를 물려받은 경위를 묻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것도 임해군 처단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결국, 임해군은 교동도에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위기감은 급기야 '폐모살제'마저 불러왔다. 이들에게 매 순간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졌던 것은 바로 잠재적 대권 주자인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서자 출신 일곱 명의 도적질을 심문하던 과정에서 서인 박순의 서자 박응서가 "김제남과 몰래 통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면서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결과로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완전히 몰아냈고, 눈엣가시였던 영창대군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했다가 이이첨의 사주로 불에 태워 죽였다. 더 나아가 대북파는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도 폐위(廢位)할 것을 주청했다. 당연하게도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조치에 여과 없는 불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환(後患)을 염려한 광해군은 결국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尊號)를 지우는 등 모든 특권과 대우를 박탈한 후 서궁에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당시 폐모살제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대의명분 등을 중시했던 서인들은 폐모살제 뿐만 아니라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크게 문제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서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620년부터 반정을 모의(謀議)하게 된다. 추후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반정 모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짧지 않은 준비 기간을 가진 후 서인들은 1623년 3월 13일 새벽을 거사일로 확정했다. 그런데 거사에 함께 하기로 했던 일부 사람들의 밀고(密告)로 인해 거사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급해진 서인들은 조정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하기 전에 거사일을 앞당겨 먼저 선수(先手)를 치기로 했다. 반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류와 이중로, 이귀, 최명길 등은 각각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모였고, 능양군은 일부 반정군과 함께 대궐로 직행했다. 반정군의 행보는 생각보다 순탄했다. 그들은 창의문을 가볍게 돌파한 후 창덕궁 앞에 당도했고, 사전에 포섭된 훈련대장 이흥립 등의 도움을 받아 궁궐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해군은 반정에 대한 첫 보고를 받았을 때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신속한 대응을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반정군은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거사 소식을 알렸다.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복권시킨 후 그의 권위를 빌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진입할 무렵 궁궐 밖으로 달아났던 광해군은 얼마 안 가 체포돼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와 무릎을 꿇게 됐고, 서인으로 강등된 후 유배 길에 올랐다.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혹독한 후과(後果) 반정으로 출범한 인조 정권은 즉각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다시금 '친명배금' 기조를 명확히 했고, 후금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후금에서 보낸 사신(使臣)을 내쫓고 국서(國書)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또한 추후 청나라에 간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중원에서는 후금의 위세가 눈에 띄게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인조 정권은 이 같은 국제정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후금을 자극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촉발시켰다. 강력한 후금 군대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했고, 인조 및 대신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급히 피난을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후금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후금은 조선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만큼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 철수했다. 그나마 이 때까지는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호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9년이 지난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단절과 '군신의 의'를 요구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은 것도 치욕적인데, 군신 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결국, 그해 12월에 맹장 용골대(龍骨大)가 이끄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청나라 군의 남하 속도는 정묘호란 때보다 훨씬 빨라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발이 묶이게 됐다. 이 당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들은 고작 1만3000여 명에 불과했고, 식량도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반면, 청나라 군대는 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로 호기롭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가 친히 전장에 왔다. 이는 성문을 밖이 아닌 안에서 스스로 열게 만들려는 일종의 심리전 성격이 짙었다. 시간이 갈수록 추위와 배고픔 등으로 인해 성 안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임금을 구원하기 위해 각 도의 관찰사 등이 이끌고 온 관군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속절 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자 성 안에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의 주장이 힘을 잃기 시작했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하자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결국, 인조는 주화파의 주장을 채택했고,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서를 보낼 것이 아니라 인조가 직접 자신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 선언을 하라고 요구했다. 강도 높은 요구에 당황한 인조와 대신들은 즉각 화답하지 않고 또 다시 망설이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가운데 봉림대군 등 일부 왕자들이 피난을 가있던 강화도가 함락(陷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로서는 더 이상 남한산성에서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제시한 11개의 굴욕적인 항복 조문을 모두 수용한 후 1637년 1월 30일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출성(出城)해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했다. 청나라 황제 앞에 선 인조는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했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섰다. 일설에 따르면, 땅에 머리를 박은 인조의 이마가 피로 흥건했다고 전해진다. 한민족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전쟁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 단절하고 청나라에 철저히 복속(服屬)됐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많은 조선인들을 볼모로 잡아가기도 했다. 청나라와 조선의 군신 관계는 약 260년이 지난 1895년 청일 전쟁 때까지 지속된다. 돌아가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사로잡힌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7-16 23:3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