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12일 오전 10시경 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 수원IC 인근에서 경찰버스 등 차량 3대가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고 당시 버스전용차로에서 차선을 변경하던 SUV 차량의 후미를 광주지방경찰청 북부경찰서 소속 의경버스가 추돌했다. 이어 뒤따르던 경찰버스 1대가 후미를 또 들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로 경찰버스에 탑승하고 있던 의경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해당 버스에 타고 있던 의경들은 서울 집회현장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에 있다. #경찰버스 #의경 #집회 sunset@fnnews.com 이혜진 기자
2019-10-12 12:40:5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때는 조선 1800년(정조 24년) 음력 6월 10일. 정조의 머리와 등에 종기가 생겼다. 정조는 7년 전에도 종기가 났었는데, 그때도 내의원 어의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을 피재길이라는 지방 의원이 고약을 올려 고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잠잠하던 종기가 다시 재발한 것이다. 정조의 종기에는 열감도 심했다. 두통과 함께 등쪽에서 열감이 오르는 것을 정조는 스스로 가슴 속의 화기(火氣)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대체로 나에게 생긴 열은 전적으로 가슴 속 화기가 오래 머물러 있어서 생긴 지병인데, 요즘 더 심해진 것은 과거의 억울함을 풀어 버리지 못한 것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가미소요산(加減逍遙散)을 복용하기를 청했다. 가미소요산은 간화(肝火)로 인한 분노를 잠재우는 처방이다. 정조는 일찍이 있었던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은 일 때문에 화가 쌓인 것이다. 사실 발열은 종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평소에 화기가 치받쳐 오르는 증상이 있었기에 열감은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음력 6월 21일, 발병 11일째. 정조의 증상은 날로 악화되었다. 정조는 정신까지 오락가락했다. 종기가 난 곳이 당기고 통증은 고통스러웠으며 오한발열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신이 흐릿해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6월 23일, 발병 13일째. 정조의 종기는 터진 곳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고 척추와 등에서부터 후두부 머리카락 난 부위까지 여러 개의 종기가 부어올랐다. 큰 것은 연적(硯滴)만 했다. 이것을 보면 종기가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조의 열은 더욱 심해졌다. 종기에 있어 발열 증상은 세균감염에 의한 증상이 분명했다. 내의원에서는 기력이 쇠하기 때문에 경옥고(瓊玉膏)를 처방하고자 했지만, 정조는 경옥고에 들어간 인삼을 걱정했다. 일전에도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복용하고 열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력 6월 24일, 발병 14일째. 정조는 밤에 열이 너무 심하게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양력으로 치면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니 날이 습하고 더워서도 힘들었겠지만 열까지 나니 설상가상이었다. 정조는 일어나 앉아 신하들을 소접(召接)할 수도 없어 계속 누워만 있었다. 정조의 열은 수면 중에 특히 심했다. 정조는 열은 났다가 다시 낮아졌다가 하면서 다시 발열이 반복되는 이완열과 간헐열의 특징을 보였다. 종기에 의해서 흔하게 감염되는 흔한 균은 황색포도상구균인데, 이러한 열형은 세균에 의한 혈액감염인 패혈증을 의심할 수 있는 열형이다. 정조는 증세가 악화되자 연훈방(煙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연훈방은 심환지가 추천한 자신의 친척인 심인에 의해서 고안된 처방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연훈방 처방은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고 성전고는 파두(巴豆) 등의 독약을 사용하므로 섣불리 시도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렸다. 그러나 정조는 내의원들의 실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래서 연훈방조차도 어의들의 여러 약이 효과가 없자 마침내 써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훈방을 사용하고 나서 종기에서 흘러 내린 피고름이 몇 되가 되었다. 신하들은 피고름을 많이 쏟은 것은 종기의 근(根)이 녹은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른 증상들은 여전했다. 음력 6월 25일, 발병 15일째. 정조는 이상하게 배가 부풀어 오르는 창만감을 느끼면서 갑자기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피고름도 많이 쏟고 기력이 쇠해있는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함을 의아하게 생각해서 내의원 신하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조의 급격한 식욕부진은 아마도 연훈방에 의한 수은중독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수은중독은 식욕부진, 두통, 전신권태, 떨림, 불안 등의 정신이상 등이 나타난다. 수은이 중추신경계, 특히 시상하부의 식욕중추의 활성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도 연훈방을 의심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전날 연훈방을 시술하는 동안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연훈방을 시술한 다음 날 정조는 “지금 이렇게 방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으니 도리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하기도 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서 연훈방을 시술했기에 호흡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은이 흡입되었을 것이다. 열은 더더욱 심해졌다. “열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다. 지금은 열을 다스릴 약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약을 의논하는 의관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어의 이시수가 몇 명을 언급하자, “탕제(湯劑)를 의논하여 정할 때 약성(藥性)을 잘 아는 의관이 전혀 없으니, 나라의 체모로 볼 때 또한 어찌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어찌 자신의 열을 잡을 수 있는 의관이 없음을 탄식했다. 정조는 여전히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갈증조차 느끼지 못해서 찻물 또한 마시지 않게 되는 증상을 괴이하게 생각했다. 열이 나면 탈수에 빠지면서 갈증을 느껴야 하는데, 발열증상이 있으면서도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갈증중추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한의학에서는 열사(熱邪)가 기분(氣分)을 침범했을 때는 갈증을 느끼지만 영분(營分)을 침범하면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영분을 침범했다는 의미는 사기가 몸속 깊이 들어와 심해졌다는 의미다. 음력 6월 26일, 발병 16일째. 심환지와 심인 등이 다시 진찰에 나섰다. 이들은 증상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다시 연훈방을 사용하고자 했다. 이시수와 같은 어의들도 연훈방을 사용하면서 종기가 현저하게 효과를 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연훈방을 처방했다. 음력 6월 27일, 발병 17일째. 정조는 고통스럽게 하룻밤을 넘겼고 간간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신하들이 보기에 자는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했으면 정신이 흐릿해 보였다. 진맥을 해 보면 맥은 너무 약했고 정신과 기운이 모두 미약해져 있었다. 정조는 간간이 신하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몽롱하게 잠이 들려고 했다. 이시수는 정조의 정신이 흐릿한 것이 혹시 연훈방 때문이 아닐까 우려했다.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져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심인 등은 연훈방은 우선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의들은 정조가 기력이 너무 쇠약해져서 결국 인삼을 적극적으로 처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삼 5돈을 넣은 속미음(粟米飮)과 1냥을 넣은 속미음을 두차례나 올렸다. 인삼을 극히 꺼렸던 정조에게 과량의 인삼을 처방한 것은 의아하지만 그것을 허락한 정조의 판단력 또한 정신이 흐릿해진 결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음력 6월 28일, 발병 18일째. 신하들은 궁궐 밖에서 의원들이 진찰을 청하자 가까스로 진료 마치고, 다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신하들은 자리에 누워 있는 정조의 앞에 엎드렸다. 신하들이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수정전(壽靜殿)......”이라고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있는 곳이다. 정조는 왕대비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자 했을까. 신하들은 다시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정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의들이 풍병(風病)을 의심해서 성향정기산을 숟가락으로 해서 입에 집어 넣었지만 토해했다. 인삼차와 청심원을 갈아서 넣었으나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만 머물고 있었다. 강명길이 진맥을 마치고 “맥의 상태로 보아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곡(哭)을 했다. 이날 유시(酉時, 17~19시), 정조는 종기를 앓은 지 18일 만에 승하했다. 정조가 승하한 후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바로 수은과 인삼이다. 특히 연훈방의 수은으로 독살했다는 주장을 보면 연훈방으로 치료하자고 했던 이들이 이시수의 중간에 연훈방 치료를 잠시 중지하자고 한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수은 독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령 단시간에 수은에 중독되거나 다량의 인삼을 복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왕이 어의들의 치료를 받다가 죽었으니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독살설은 정치적인 주장일 뿐으로 정조는 의학적으로 병사한 것이 맞다. 정조는 종기에 의한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제목의 ○○○은 패혈증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승정원일기> 正祖 24年 庚申 6月 14日 乙丑/上, 自是月旬前, 有癤候, 連進傅貼之劑, 久未奏效, 召見內醫院提調徐龍輔于便殿. 龍輔問候, 上曰: “夜來寢睡, 全未穩着, 而日前傅藥處, 今旣膿潰矣.” 6月 23日. 召見藥院諸臣. 時秀曰: “午後則熱候之升降, 果若何?” 上曰: “今亦方有熱候矣.” 6月 24日. 命進沈鏔所製烟熏方聖傳膏. 其方用鏡面朱砂, 聖傳膏, 用巴豆等藥, 諸臣言不可輕試, 至是, 諸藥罔效, 上, 欲一試烟熏, 遂至進用. 6月 25日. 上曰: “今曉以後, 尙未進食, 而神氣則惺惺, 口味則終不開者何也?” 鏔曰: “神氣旣勝, 則口味自當漸開矣.” 上曰: “烟熏方, 今日亦當試用乎?” 鏔曰: “今日則姑爲停止, 更觀夜來動靜而試之似好矣.” 6月 27日. 時秀曰: “烟熏方, 雖是癤候當劑, 而聖候昏沈之時, 烟氣若或發散於房闥之內, 則恐或有妨神氣矣.” 柳光翼, 沈鏔等 奏曰: “烟熏方, 姑爲時時間斷, 徐觀動靜試用, 亦無妨矣.” 進人蔘五錢重粟米飮。召見藥院諸臣. 命煎入人蔘一兩重粟米飮. 6月 28日. 時秀又令命吉診候, 命吉診候訖, 退伏曰: “脈度已無可望矣.” 諸臣竝遑遑罔措, 環坐號泣. 是日酉時, 上, 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是日日光相盪, 三角山鳴. (정조 24년 경신(1800) 음력 6월 14일.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터졌다.”라고 하였다. 6울 23일.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오후 들어 열이 오르내리는 증세가 어떠합니까?”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지금도 열이 나고 있다.”라고 하였다. 6월 24일. 심연이 조제한 연훈방과 성전고를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처방은 경면 주사를 사용하였고 성전고는 파두 등 약을 사용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섣불리 시험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든 약이 효과가 없어 상이 연훈법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하므로 마침내 가져다가 써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25일.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 새벽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정신은 말짱한데 입맛은 끝내 돌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 것인가?”라고 하자 심인이 아뢰기를 “정신이 좋아지셨으니 입맛도 저절로 점점 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도 연훈방(煙熏方)을 써 볼 것인가?”하니 심인이 아뢰기를 “오늘은 우선 정지하고, 밤에 병세가 어떠한지 다시 살펴보고 나서 써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6월 27일. 이시수는 아뢰기를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지기라도 하면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유광익과 심인 등은 아뢰기를 “연훈방은 우선 수시로 중단했다가 천천히 경과를 살펴 가며 써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삼 5돈쭝을 넣은 속미음을 들였다. 상은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인삼 1냥쭝을 넣은 속미음을 끓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6-02 17:25:40현대.기아차가 이달 중 전 세계 누적 판매대수 1억대를 돌파한다. 1962년 기아차가 삼륜차인 '기아마스타 K-360'를 제작한 이래 54년 만의 대기록이다.현대.기아차는 지난 1962년부터 올해 3월까지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 6402만대, 기아차 3568만대 등 총 9970만대를 판매했고, 이달 중 1억대 누적판매 돌파가 예상된다고 11일 밝혔다.차종별로는 현대차 아반떼(엘란트라 포함)가 1990년 출시 이후 1119만대로 가장 많이 팔렸다. 뒤이어 엑센트 824만대, 쏘나타 783만대 순이다. 기아차는 1986년 출시된 프라이드가 422만대, 1993년 세계 최초 승용형 SUV로 탄생한 스포티지가 403만대 판매됐다. ■'과감한 투자·엄격한 품질관리'빛 발해현대.기아차는 지난 1993년에 처음으로 1000만대 고지를 넘었고, 2008년 5000만대, 작년 1월 9000만대를 돌파했다. 이후 1년 3개월 만에 1억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대.기아차가 판매한 1억대는 현대차 '아반떼'를 한 줄로 세울 경우 지구를 11.4바퀴 돌 수 있고, 면적으로는 약 823㎢에 달해 서울시 전체(605㎢)를 덮고도 남는다.이는 지난 2000년 현대차그룹으로 출범한 이후에 대부분 일궈냈다. 1억대의 79%에 달하는 7854만대가 2000년 이후에 판매한 물량이다. 여기에는 단연 정몽구 회장의 집념이 주효했다. 1999년 기아차 인수 이후 2000년에 현대차그룹의 진용을 갖추면서 세계 시장을 겨냥한 제조사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품질관리에 엄격한 경영자로 유명하다. 한양대 공대 출신으로, 현대차에서 부품담당 과장으로 일을 시작하며, 소위 기름냄새와 땀내나는 현장에서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그룹 출범 이후 공격적인 해외네트워크 개척과 현지화 전략과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단행했다. 2003년에는 오늘날 현대.기아차 기술의 중추 역할을 하는 남양기술연구소도 통합 출범했다. 2000년 당시 연간 243만대를 판매하면서 글로벌 탑10에 첫 진입한 현대.기이차는 지난 2014년, 2015년에는 2년 연속으로 연간 800만대 이상을 판매했다. 14년만에 세배 넘게 성장했다. 현대.기아차는 해외판매 비중이 70% 이상이다. 지난달까지 국내판매는 2982만대, 수출 및 해외공장 판매는 6988만대다. 1998년부터 이미 해외판매가 국내판매를 넘어섰으며, 작년에는 생산한 차의 84%를 해외에 팔았다. 이는 국내 내수시장 규모가 183만대로 세계 10위권에 불과한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 ■'퍼스트 무버'로 미래 자동차 산업 주도 현대.기아자동차는 '제네시스' 브랜드를 통해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제네시스 브랜드를 달고 판매하는 차량들이 올해 1분기 국내에서만 1만6477대가 팔렸다. 현대차 전체 내수 판매량의 10.24%를 차지하는 물량이다. 올해 3분기 EQ900(현지명 G90) 출시를 앞둔 미국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구형 제네시스 역시 지난해 3월 대비 32.4% 증가한 3197대가 판매되며 현대차가 세운 미국 내 월간 최대 판매량 기록에 일조했다. 현대.기아차는 미래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기 위한 준비에도 매진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연비, 안전 등 기본 성능을 더욱 강화하고, 연구 개발 투자 확대를 통해 미래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등 글로벌 자동차업계 내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한다는 전략이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세계 최고 수준의 럭셔리 브랜드로 전 세계 시장에 조기에 안착시키는데 주력할 것"이라며 "기아차 멕시코공장 가동을 앞두고 글로벌 생산.판매 체계를 효율적으로 정비하는 노력을 통해 질적 성장을 위한 기반 구축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
2016-04-11 18:42:28한화건설이 지난달 준공한 이라크 PC(Precast Concrete)플랜트 전경. PC플랜트는 한화건설이 현재 이라크에서 수행하고 있는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모든 콘크리트 건축부재를 생산한다. PC플랜트에서는 매일 80가구, 연간 2만가구를 지을 수 있는 슬래브와 벽체를 동시에 생산하게 된다. 한화건설이 지난 2012년 5월 수주한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이라크에 '건설 한국'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는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비스마야 지역에 분당신도시(서울 여의도 면적의 6배) 규모인 1830㏊ 부지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대역사다.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가 발주한 이 공사는 도로와 상·하수관로를 포함한 신도시 조성공사 및 10만가구 국민주택 건설공사로 구성된다. 한화건설이 설계·조달·시공을 모두 진행하는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방식으로 진행되며 공사기간은 오는 2019년까지다. ■여의도 면적 6배 규모 현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는 부지 조성을 비롯해 정수·하수처리시설 등 도시 인프라 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한화건설의 설명이다. 한화건설은 PC(Precast Concrete)플랜트를 비롯한 14개의 자재 생산공장을 완공,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각종 건설자재를 생산해 본격적인 하우징(주택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한화건설은 내년부터 연평균 2만가구씩, 5년에 걸쳐 10만가구를 비스마야 신도시에 공급할 예정이다. 총 8개 지구, 58개 단지에 10층 아파트 839개 동을 공급하는 것이다. 한화건설은 단기간 내에 10만가구 주택 건설과 단지 조성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며 이를 위해 PC공법을 통한 통합수행방식으로 공사를 수행한다. PC공법은 건축물의 기둥, 보, 벽과 같은 부자재를 공장에서 제작해 공사현장으로 운반·설치해 완성하는 건설공법으로, 비스마야 신도시에 단기간에 공급될 아파트 건설을 위해 필수적인 공장이다. PC플랜트에서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모든 콘크리트 건축부재를 생산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PC공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PC플랜트에서는 매일 80가구, 연간 2만가구에 해당하는 슬래브와 벽체를 동시에 생산한다. 이를 위해 하루 사용되는 콘크리트 양만 6400t에 달하고 이는 레미콘 트럭 430대에 이르는 양이다. 또 7년에 걸쳐 생산하게 될 벽체와 슬래브 전체 길이의 합은 1만3000㎞에 달하며 이는 바그다드에서 서울까지의 왕복거리다. 한화건설은 공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면 PC공법을 통해 2개월에 한 번씩 잠실 3단지(4000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건설, 공급하게 된다. 또 PC플랜트는 이라크 정부가 발표한 100만가구 주택건설사업에도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화건설 측은 설명한다. PC공법 적용을 위한 PC플랜트 준공식도 지난달 열렸다. 한화건설 최광호 본부장은 "PC플랜트 준공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서 "PC플랜트 준공식을 당초 계획보다 2개월여 앞당겨 진행할 정도로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능력중심 인재채용·동반성장 이역만리 떨어진 열사의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김승연 회장이 강조하는 능력중심의 인재채용 이념 실천이 밑바탕이라는 게 한화건설의 전언이다. 실제 한화건설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현장 투입인력 중 10%는 경험과 노하우를 보유한 50대 후반의 중동건설을 경험한 실버인력으로 채용했다. 또 나머지 90%는 열정과 패기를 지닌 청년층을 선발해 청·장년층 일자리를 고루 창출했다는 평가다. 아울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현장 현지에 동반 진출한 100여개 국내외 중소 자재 및 하도급 업체와 1000여명에 달하는 협력사 직원과의 협력도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순항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한화건설은 건자재와 중장비, 정보기술(IT)·통신, 물류, 항만, 플랜트 등 부대산업과 연관산업 역시 동반 진출해 창조경제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며 이라크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들의 문의가 계속되는 등 중소기업들과 동반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공적인 동반성장 사례가 되고 연인원 55만명이 넘는 일자리가 창출돼 경제위기 극복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외매출 비중 65% 글로벌 건설사 도약" 한화건설의 해외수주 실적은 김승연 회장의 글로벌 경영 전략에 힘입어 지난 2007년부터 꾸준히 증가해 2007년 3000억원에서 지난해에는 3조5000억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한화건설은 이 같은 탄력적인 성장을 이어가 내년에는 해외매출 비중을 한화건설 전체 매출의 65%까지 끌어올려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한화건설은 2012년 김승연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수주한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공사 수행에 집중해 글로벌 종합건설사로 도약하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한화건설은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건설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은 한화건설이 이라크 내에서 한화건설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이라크 정부가 추가 발주할 발전 및 정유시설, 학교·병원, 군시설 현대화, 태양광 등과 같은 재건사업을 추가로 수주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한화건설은 이라크 정부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 외에 인프라 시설에 대한 15억달러 규모의 추가공사를 협의하고 있어 곧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김승연 회장과 한화그룹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신뢰와 한화건설의 사업추진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프로젝트가 해외건설 사상 최대 규모이자 대한민국 신도시 건설 노하우 수출 1호로 기록된 의미 있는 공사인 데다 수주금액도 총 80억달러로 지난 2012년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수주한 공사금액(649억달러)의 12%에 이른다는 상징성도 있는 만큼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한화건설의 전언이다. 특히 한화건설은 여천NCC와 한화케미칼 등 국내 플랜트 공사에서 축적된 화공발전 플랜트 공사 기술력과 신도시 개발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신규시장을 개척한다는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현재 신도시 건설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라크를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알제리, 필리핀 등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인 진출국 및 인접국을 중심으로 해외사업 거점을 확장하겠다는 것. 다만 한화건설은 국가별 리스크 등을 고려해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해외 신규시장 진출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계획을 위해 단계별로 지역거점을 운영, 이를 통해 수주 기회를 더욱 확대하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한다는 설명이다. 한화건설 이근포 사장은 "올 한 해 전 임직원이 중석몰시(中石沒矢·쏜 화살이 돌에 박혔다는 뜻으로 역량을 집중해 전력을 다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의미)의 정신으로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ck7024@fnnews.com 홍창기 기자
2014-05-12 17:26:55한국인에게 있어 쌀이 가장 중요한 먹거리이듯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비유되고 있다. 다른 일각에선 ‘마법의 돌’로 불린다. 그만큼 핵심산업이며 중요한 산업임을 표현한 것이다. 반도체는 한국경제의 중추이자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지난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단일품목으로 우리나라 수출 1위를 지켜오고 있다. 연평균 12.9%의 수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정보기술(IT) 강국 코리아’의 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린 대표적 품목이다. 한국산 반도체가 전 세계 휴대폰, PC, 디지털TV, 자동차 등 헤아릴 수 없는 전자기기에 장착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은 매년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기이면서 가장 저장용량이 많은 반도체를 선보이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제 반도체는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한국경제의 성장을 대변하는 ‘신화적 품목’이자 ‘자존심’이 돼 버렸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듯이 한국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던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어 ‘백사장의 모래’를 ‘쌀’로 바꾸는 ‘마법’을 발휘했다. ■반도체란 전기전도도에 따라 물질을 분류하면 크게 도체, 반도체, 부도체로 나뉜다. 반도체는 순수한 상태에서 부도체와 비슷한 특성을 보이지만 불순물의 첨가에 의해 전기전도도가 늘어나기도 하고 빛이나 열에너지에 의해 일시적으로 전기전도성을 갖기도 한다. 주기율표상에 14족에 위치하는 게르마늄(Ge), 실리콘(Si) 등이 대표적인 반도체이다. 초창기에는 게르마늄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실리콘에 13족의 붕소(B)나 15족의 인(P) 등을 첨가하여 사용한다. 최근에는 13족과 15족의 화합물 반도체가 쓰이기도 하며 갈륨비소(GaAs:gallium arsenide)나 인듐인(InP:indium phospide) 등이 있다. 순수한 반도체는 14족 원소로 이루어져 모든 전자가 공유결합을 이룬다. 여기에 15족 원소를 첨가하면 잉여전자가 발생하여 n형 반도체가 되며 13족 원소를 첨가하면 반대로 전자가 부족하게 되어 정공으로 이루어진 p형 반도체가 된다. n형 반도체와 p형 반도체를 붙여 놓으면 p형 반도체에서 n형 반도체 방향으로는 전류가 잘 흐르며 반대방향으로는 거의 흐르지 않는 정류작용이 일어난다. 이러한 소자를 다이오드(diode)라고 하며 이것이 반도체 소자의 기본이 된다. 반도체는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 등으로 이루어진 집적회로소자 이외에도 열전자방출소자, 전자식 카메라의 전하결합소자(CCD:charge coupled device) 등 첨단 전자산업 부문에 넓게 응용되고 있으며 태양전지나 발광소자에도 사용된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들어 있어 생활에 편리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반도체를 ‘마법의 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인이 선택한 발명품 7위 본지가 전국 20세 이상 70세 미만의 성인 남녀 497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건국 60주년 60가지 발명품 선정 조사에서도 반도체는 ‘한국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끼친 전체 발명품’ 중 7위(전체 기준)를 차지했다. 그 중 남성 응답자 84명(2.8%)이 반도체를 한국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 발명품으로 지목했다. 여성의 경우 다소 낮아져 18명(0.9%)이 반도체를 선택했다. 반도체에 대한 연령별 조사결과는 20대가 65명(2.4%), 30대 101명(5.4%), 40∼50대 10명(2.5%) 등이었다. ■반도체는 한국인의 창조적 산물 한국 반도체산업의 역사는 한마디로 한국경제와 함께한 도전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지난 1983년이었다. 당시 일본이 세계 반도체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돌연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반도체 기술인 64KD램 개발을 공식 선언했다. 뜻밖의 일이라 해외에선 “설마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가능하겠어”라고 믿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이른바 ‘도쿄 구상’을 시금석으로 사활을 걸었다. 당시로선 무모한 도전이란 여론이 팽배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경영진의 의지는 확고했다.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꿈은 이뤄지는 것일까. 삼성전자는 결국 64KD램 기술을 개발했다. 1984년에는 256KD램도 개발했다. 역사적 순간이다. 일본과 미국은 놀라다 못해 당황했다. 삼성전자는 이어 1MD램과 4MD램도 개발했다. 삼성전자는 이어 1992년에 무려 1192만달러 매출로 세계 D램 1위를 달성했다. 불과 10여년의 기간에 세계 반도체시장을 정복한 것. 삼성전자는 여세를 몰아 지난 1994년에 세계 최초로 256MD램을 발표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와 플래시 분야에서 세계 1위로 독주체제를 굳혔다. /hwyang@fnnews.com 양형욱기자
2008-08-11 17:00:11지난 2000년 10월3일 국민기업 포스코는 민영화를 통해 새롭게 거듭났다. 민영화 이후 지난 3년간의 포스코의 변신을 살펴보면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지배구조와 전문경영인제도, 과감한 프로세서혁신(PI)를 통해 포스코의 대외경쟁력은 해가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기에 더욱 좋은 것도 있다. ‘산업의 쌀’ 철을 생산하기위해 365일 하루도 쉬지않고 뜨거운 고로 곁을 지키는 포스코맨들의 열정이 바로 그것. 올해로 이땅에 일관제철소 탄생 30년, 민영화주기로는 3돌을 맞이한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와 그속의 산업역군들을 찾아봤다. 【포항=이재만·정세진기자】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에 위치한 포항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중심가를 향해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포항제철소에서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곳은 제3고로 제선공장. 안내를 담당한 제선부 김성연 대리(34)는 거대한 고로를 가리키며 “15년 전 고로 노후화에 따른 보수작업을 진행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난 14년7개월의 세월동안 한번도 쉬지않고 쇳물을 흘려보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쇳물의 양만 하루 9000t에 이른다고 김대리는 말했다. 그는 “비록 30년전 일본의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시작된 제철소지만 이제는 200년 이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럽 제선공장의 엔지니어들도 포스코에서 기술을 배워 가고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내비췄다. 그는 “세계일류 철강기업에 일하는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포스코가 남들이 부러워 하는 직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장근무는 직원들이 국가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없으면 버티지 못할 만큼 어렵다”고 말했다. 제선과정에서 나온 시뻘건 쇳물은 ‘어뢰차’라는 운송용차에 몸을 싣고 곧바로 제강공장으로 이동된다. 이곳에서는 1회당 1t트럭 280대 분량의 쇳물, 고철, 석회석 등을 전로안에 넣은 후, 고온의 산소를 불어 넣어 탄소 등 불순물을 제거해 ‘용강’을 만드는 작업이 이뤄진다. 제강부 황성배 주임(50)은 “하루 2만t, 연간 840만t의 용강을 생산하는 제강 공장은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제선과 제강 공정을 거친 쇳물은 마지작으로 압연공장으로 오게된다. 압연공정은 앞선 제강공정의 용강을 식혀 만든 길고 두꺼운 모양의 새빨간 슬래브가 앞뒤로 움직이면서 눌러져 얇고 길게 모습을 변화하는 과정이다. 압연공정을 모두 거친 슬래브는 길이 2㎞, 두께 1.2∼22㎜의 열연코일로 바뀐다. 압연과정을 안내하던 정봉일 노무안전주임(51)은 “이곳에선 지난 8월 스테인리스 열연코일을 시간당 620t이나 생산해 세계신기록을 세웠다“며 “압연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열연코일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시간당 8000만원에 이른다”고 넌지시 귀띔했다. 압연 공정을 지나가는 동안 얼굴을 때리는 뜨거운 열기에 마치 얼굴을 데일것만 같다. “더운 공장에서 더위를 식히는 특별한 비결이 있냐”는 질문에 정주임은 “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40℃가 넘는 공장의 열기로 여름에는 염분 소모를 방지하기위해 소금을 수시로 먹기도 하지만 효과적인 피서법은 포스코 맨만의 열정과 보람을 가슴에 곰씹는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제철소 방문의 마지막 일정은 포스코가 포항 제철소 1기 설비 준공을 기념해 지난 7월 3일 건립된 ‘포스코 역사관’. 밖에서 바라본 포스코 역사관은 하나의 건축 예술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유리벽면으로 된 원통형 외간이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역사관 입구에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포항 제철소 초창기에 현장 직원들이 근무한 건설사무소를 실물 형태로 재현한 ‘롬멜하우스’였다. 4년을 준비해 연면적 1100평, 전시면적 600평의 지상 3층 규모인 역사관안에는 최초로 고로에 불을 지핀 화입봉에서부터 회사 발전상을 담은 사진자료와 초창기 안전모와 작업복, 초창기 생산제품 표본에서부터 각종 서류양식, 명패까지 600여점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말라’라는 뜻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사장에게 직접 써준 ‘종이 마패’로 불리는 설비구매 재량권 문서가 눈에 띄었다. 포스코의 역사관은 일개 기업의 전시관이라기 보다는 한국 철강사의 족적이 그대로 묻어있는 ‘철강박물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했다.
2003-10-05 10:11:00국내 최대 전기로 제강업체인 INI스틸이 창립 50돌을 맞이했다. INI스틸은 10일 창립기념일을 맞아 유인균회장을 비롯해 안상수 인천광역시장, 윤명중 하이스코 회장 등 내외인사들이 참석한가운데 사내 기념행사를 가진 데 이어 인천 송도비치관광호텔에서 ‘창립50주년 사사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유 회장은 이날 행사에서 기념사를 통해 “지난 50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21세기에는 세계최고의 철강회사로 거듭나겠다”며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53년 출범한 국내 최초철강회사=6.25전쟁 직후인 지난 53년 국내 최초 철강회사인 공기업 대한중공업으로 출발한 INI스틸은 62년 인천중공업이라는 민영화기업으로 탈바꿈했으며 64년 설립된 인천제철에 합병된 뒤 78년 현대그룹으로 편입됐다. 이후 2000년 강원산업을 합병하고 삼미특수강(현재 BNG스틸)을 인수했으며 2001년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된 뒤 INI스틸로 회사이름을 바꿨다. INI스틸은 특히 지난 50년동안 건축, 토목용 자재인 철근을 비롯해 H형강,스테인리스제품 등 기초소재를 생산, 우리나라 산업근대화 기간산업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삼일빌딩, 63빌딩, 무역센터,인천국제공항, 상암월드컵경기장, 도곡동타워팰리스 등 각 시대 대표적건축물의 철골구조에 주력 생산품인 H형강이 사용됐다는 게 이를 입증한다. ◇철강인재 ‘산파역’수행=INI스틸은 철강인재의 산실 역할도 해왔다. 현대그룹 인수 이전 고송요찬(전 국방장관), 이용씨 등이 이 회사 경영진을 맡은 바 있으며 현대그룹에인수된 뒤에는 김정국, 노관호, 박세용, 박재면, 백창기,심현영, 이명박(현 서울시장), 최수일씨 등 현대그룹에서 중추역할을 했던 굵직굵직한 경영진들이 거쳐갔다. INI스틸의 공장 설비는 창립당시 인천에 중유 연료를 사용하는 50�U급 평로공장 1개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인천 13개 공장, 포항 14개 공장 등 모두 27개 생산공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인천공장은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한편, 이번에 발간된 INI스틸 50년 사사는 총 700여 페이지에 INI스틸 50년사 뿐아니라 다양한 화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야기, 한국과 세계 철강사 등을 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 newsleader@fnnews.com 이지용기자
2003-06-10 09:38:39[파이낸셜뉴스] 4일 오전 세종시 금빛노을교와 아람찬교에서 전날 내린 비가 도로에 얼어붙으면서 연쇄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5시 24분께 세종시 세종동 금빛노을교에서 차량 29대가 연쇄 추돌했다. 이 사고로 운전자 5명이 세종충남대병원과 NK세종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있다. 이어 오전 6시 27분쯤에는 금빛노을교 인근에 있는 아람찬교에서도 8중 추돌사고가 발생, 9명이 다쳐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찰은 이날 세종지역에 짙은 안개와 전날 내린 비에 도로가 얼어붙으면서 연쇄추돌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 여파로 사고 지점 인근 도로 양방향 통행이 금지되면서 출근 시간대 도로정체가 빚어졌다. 세종시는 사고 발생 직후 재난문자 발송과 함께 재난 비상1단계를 발령하고 도로과 및 교통과 등 관련부서, 유관기관 직원들을 비상 소집했다. kwj5797@fnnews.com 김원준 기자
2024-01-04 09:40:52【파이낸셜뉴스 부산】 대마초를 피우고 7중 추돌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윤창호법’이 적용됐다. 16일 부산경찰청은 포르쉐 40대 운전자를 상대로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등 4개 법률 위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A씨는 총 네 개 혐의를 받고 있다. 일명 윤창호법으로 불리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같은 법 도주치상(뺑소니), 도로교통법 위반,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이다. 앞서 A씨는 지난 14일 오후 5시 40분쯤 부산 해운대 중동역 인근 교차로에서 차량 2대를 친 뒤 달아나면서 버스, 오토바이 등 차량 7대를 잇따라 들이받았다. 특히 그는 사고 전 대마초를 흡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윤창호법 제5조11(위험운전 치상)에 따르면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운전하여 사고를 내면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현재 경찰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수사하고 있다, demiana@fnnews.com 정용부 기자
2020-09-16 16: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