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영국 BBC는 지난 3일(현지시간) 한국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을 보도하며 'kwarosa'라는 단어를 썼다. 과잉업무로 인한 사망(death from overwork)이라고 풀어쓰는 대신 한국어 소리를 그대로 고유명사처럼 표기한 것이다. 13일 외신 등에 따르면 최근 영어권 나라 등에서 한국 사회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영미식 해석으로 바뀌지 않고 한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되며 사전에 등재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갑질(gapjil)', '과로사(kwarosa)', '먹방(Mukbang)', '반찬(banchan)', '재벌(chaebol)', '홧병(hwa-byung)'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 단어들은 다소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사회·문화상과 독특한 뉘앙스를 잘 담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 드러내는 단어 많아 BBC는 우리나라에서 14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한 사례를 거론, 유족들이 사망원인을 과로사(kwarosa)로 지목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과로사에 대해 "과로사 - 극심하고 고된 노동의 결과 심부전이나 뇌졸중에 의해 급사한 것을 지칭하는 한국어 용어"라고 설명했다. 외신들이 주목한 단어 중에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는 단어가 여러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갑질(gapjil)과 재벌(chaebol)이다. 2년 전, 뉴욕타임스(NYT)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논란을 설명하며 ' 갑질(gapji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NYT는 갑질에 대해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직원 또는 하도급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후 경비노동자에 대한 입주민의 갑질, 매니저를 향한 연예인 갑질 등 우리사회 갑질 사례가 잇따르면서 외신에서는 한국의 병폐적 위계질서 문화를 설명할 때 갑질이라는 단어를 함께 소개한다. 영어권에서 가장 큰 사전으로 꼽히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 등재된 단어도 있다. 재벌(chaebol)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재벌을 "한국 대기업의 형태, 특히 가족 소유의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재벌과 같은 기업 형태는 때때로 'conglomerate'라고 번역될 때도 있지만 한국 특유의 '재벌' 기업이나 문화를 지칭할 때는 'chaebol'로 쓰인다. ■언어의 기원 밝히고 한국 사회만의 '특징적 현상' 반영 과로사와 갑질·재벌이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1차적 이유는 이를 대체할 적확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과잉 업무로 인한 사망'이라고 하면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해야 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담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로사'라는 단어는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일자리 보전을 위해 과로해서라도 일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며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진 선진국에서는 'death from overwork'라고 하면 자발적으로 과잉 노동을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벌이나 학원의 경우에도 한국 사회의 특수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소리 그대로 표기한다. 특히 '갑질'은 직장 내 괴롭힘을 뜻하는 'workplace harassment'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인격적으로 모욕한다는 뉘앙스까지 담아내지 못해 'gapjil'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사회 병리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의 기원을 밝히려는 차원에서 고유명사처럼 쓴다는 분석도 있다.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과로사, 갑질은 부정적 사회현상이기 때문에 해당 언어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리나라 현상이 아니다'라는 회피 전략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단어의 원형을 밝힘으로써 '다른 나라의 문제'라고 선을 긋는다는 의미다. 생소한 언어를 통해 대중의 주목도를 높이는 측면도 있다. 자국의 일반적인 단어로 풀어쓰기보다 외국 언어의 이국적 어감을 그대로 살려 한 번 더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먹방(mukbang)이나 반찬(banchan)처럼 한국 문화가 소리대로 표기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경제력·문화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 공공언어과장은 "아무리 사회 병리현상이 있어도 우리나라가 주목받지 않으면 화제로 삼기 어려울 텐데, K-pop 등을 통해 우리 문화 요소들이 많이 소개되면서 우리 어휘도 흥하게 된 것"이라며 "긍정적 의미를 담은 단어가 퍼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만 고유명사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dearname@fnnews.com 김나경 인턴기자
2020-11-10 15:35:32[파이낸셜뉴스] 한국 정부가 추진한 ‘주 69시간제’ 근무를 조명한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22일(현지시간) 미국 NBC 방송은 “한국에서 주당 노동시간 상한을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리는 방안이 젊은 노동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렀다”고 보도했다. NBC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짧은 근무시간이나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많은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에 지배되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의향이 있는지 재고하고 있다“면서 “한국의 경우 과도한 노동과 관련한 우려가 특히나 심각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 191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많다.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많은 나라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로 모두 중남미 국가 뿐이다. 미국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각각 1791시간과 1490시간이다. NBC는 “한국에는 초과근무가 일상적이며, 일을 끝내도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기 힘든 데다 퇴근 후엔 회식까지 참석해야 해 과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라며 “최근 직장인을 위한 ‘낮잠카페’가 한국에서 성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짚었다. 앞서 미국 CNN방송·워싱턴포스트, 영국 가디언, 스페인 엘파이스, 호주 ABC방송 등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도 한국의 노동시간 연장 문제를 보도한 바 있다. CNN 방송은 지난 20일 “노동자의 정신 건강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적어도 한 국가는 이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며 한국의 노동시간 연장 문제를 전했다. CNN은 한국 노동자들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과로사’로 매년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노동시간 상한 확대에 반대하는 이유를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69시간제 정책 재고가 분노의 촉발제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장시간 노동은 저출생 극복 방향과 맞지 않고, 자랑이 아니다”라는 전문가의 비판도 전했다. 영국 가디언은 15일 “친기업성향으로 여겨지는 윤석열 대통령이 고용주에게 더 많은 노동유연성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시간 연장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호주 ABC 방송도 14일 이와 관련한 논란을 집중 조명하면서 과로사를 한국어 발음 그대로 ‘kwarosa’로 표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3-23 19:22:5519세기 초 영국 가내수공업 근로자들은 하루에 보통 13~14시간씩 일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사회에 관한 새 견해'라는 책을 쓴 로버트 오언이 스코틀랜드 뉴래너크라는 마을에서 방직공장을 인수하면서다. 그는 근로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줄이고도 상당한 이익을 냈다. 이후 영국은 1848년 하루 10시간 근무를 법으로 못 박았다. 미국은 1886년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 40시간 근로제가 확산됐다.과로사를 뜻하는 가로시(karoshi)가 영어사전에 등재될 만큼 일본인들은 오래 일한다. karoshi가 'kwarosa'(과로사)로 바뀔 날이 멀지 않았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길다. 연평균 2069시간으로, 35개 회원국 평균보다 305시간 더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쉼표 있는 삶'과 근로시간 단축을 공약했다. 우리나라 법정근로시간은 40시간이다. 여기에 연장근무(12시간)와 휴일근무(8+8시간)를 합쳐 주 68시간까지 가능한데 이를 주 52시간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기업 규모에 따라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근로시간을 줄이고, 휴일수당을 1.5배 지급하는 내용의 3당 합의안이 올라와 있다. 중소기업들은 최저임금에 이어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까지 밀어붙이려 하자 아우성이다. 중소기업중앙회 등 중기단체들은 12일 "근로시간을 한번에 24% 줄이면 공장을 돌리지 말라는 얘기다"라며 반발했다. 중기중앙회는 현재 중소기업 인력 부족은 27만명 수준인데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추가로 44만명이 모자랄 것이라고 우려한다. 8조6000억원의 추가 비용부담이 생긴다는 보고서도 있다. 이들은 보완책으로 특별연장근로제를 제시했다. 노사가 동의하면 주 8시간의 추가 근로를 허용하는 이 제도는 2015년 노.사.정 합의사항이기도 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주 근로시간은 60시간(40+12+8)까지 늘어 중소기업은 여유가 생긴다. 24%를 한 번에 줄이지 말고 12%씩 나눠서 줄이자는 얘기다. 하지만 3당 합의안에는 빠졌다. 근로시간을 줄이자는 취지는 물론 옳다. 하지만 속도가 문제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과 같다. mskang@fnnews.com 강문순 논설위원
2017-12-13 17: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