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김장욱기자】"미 투(Me Too) 운동을 지지합니다!" (사)대구미래인여성은 회원들이 지난 19일 오후 7시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회의실에서 성폭력·성희롱 범죄가 근절돼 밝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 투'(Me too) 지지 의사를 선언했다고 21일 밝혔다. 대구미래인여성은 평소 각 분야에서 리더 역할 뿐만 아니라 재능·재정기부를 통한 자원봉사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날 회원들은 신기숙 (사)행복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부터 '변화의 시작, 성평등!'이라는 주제 강의를 듣고 'Me too, With you'에 동참했다. 이 행사는 성폭력·성희롱 범죄가 근절돼 좀 더 살기 좋은 밝은 사회로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또 내달 여수에서도 캠페인을 이어갈 계획이다. 한편 대구의 미래는 여성들에게 달려 있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좀 더 체계적인 활동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지난 2015년 7월 8일 설립된 대구미래인여성은 각 분야에서 리더역할을 하고 있는 대구미래여성아카데미 수료생들로서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활발히 추진 중이다. 각 분야의 전문여성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양성평등 사회 및 가족이 행복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gimju@fnnews.com 김장욱 기자
2018-03-21 10:17:02우리 사회는 지금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인한 충격과 분노 속에 살고 있다. 성폭력 고발 캠페인인 미투운동은 법조계를 시작으로 연예계, 교육계, 정치계 등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우려가 끊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은 지금도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하루하루 힘겨운 숨을 내쉬고 있을지 모른다.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지애 교수는 6일 "성 관련 문제에 대한 트라우마는 일상생활 중에는 떠올리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지낼 지라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관련 뉴스를 접하는 등 당시 기억을 떠올릴 만한 상황이 닥치면 다시금 그때의 상황이나 감정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되살아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호전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릴 뿐더러 완벽히 치유되기도 어렵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해결을 위해 나서야한다는 것이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수도 성 관련 문제를 겪은 사람들의 경우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보통은 트라우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회복이 되지 않고 증상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 개인이 스트레스 상황을 이겨낼 힘이 약화되어 있는 경우라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특히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다른 기억과는 달리 온전하게 남아있기 보다는 왜곡, 축소 혹은 확대된 단편의 기억으로 조각조각 남아있게 된다. 잘 소화되지 않은 트라우마 기억에 갇혀 있을 경우 감정 회피, 분노와 피해의식, 수치심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만약 이런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우울증뿐만 아니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개 성 관련 트라우마는 한 개인에게 엄청난 고통이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되기 보다는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윤 교수는 "심하게는 공황발작이나 환청 등의 지각 이상이나 공격성 및 충동조절 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약물을 복용하는 등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가족과 전문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치료와 예방, 마음가짐이 최우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성 관련 문제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발단된 것 자체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을 하거나, 피해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혼자 앓고 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시적인 안정을 찾기 위한 이러한 회피는 결국 회복을 막게 되고,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의 가장 큰 방해요인이다.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알려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 교수는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회피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할 것"이라며 "미투운동 등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동조, 공감 등의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본인 스스로가 긴 터널을 헤쳐 나오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당사자가 경험한 사건과 그 여파에 대해 어떤 부분에서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 하는지를 파악하고, 어떤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또 해당 기억에 대해 공포를 덜 느낄 수 있도록 부정적인 느낌과 생각을 조절해나가고 문제 행동을 바꿔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당사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공감해주고,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취미활동이나 신체활동을 함께 즐김으로서 조금씩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18-03-06 16:45:36[안산=강근주 기자] 안산시 단원구는 2월28일 단원구청 2층 대강당에서 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했다. 이번 교육은 성범죄 피해사실을 밝히는 ‘#ME TOO’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자체적으로 실시한 교육으로. 이번 교육에는 공무직, 기간제 근로자 등 320여명의 단원구 전체 직원이 참석했다. 교육은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상담위원인 우명순 강사를 초빙해 미투 운동의 의미와 실제 직장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를 공유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18-03-05 13:00:20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국민연금의 한 간부의 성추행을 지탄하는 글이 올라와 이목을 끌고 있다. 최근 문화계, 기업 등 전방위적으로 붐인 미투 여파가 공기업에도 불어닥칠지 주목된다. 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2일 국민연금(NPS) 내부 블라인드에는 성추행을 한 현직 부장급 인사의 행동을 문제 삼은 글이 올라왔다. 이 회사의 직원은 "부장이 승진이 늦은 직원을 대상으로 근평권(근무 평가 권한)으로 회유협박하면서 성추행해도 정직 1개월 뿐"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어 "이 정도면 1개월 일 쉬고 싶으면 그냥 부하직원 성추행 하라는 배려아닐까"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같은 회사의 다른 아이디를 가진 직원은 "회사 내부에서 저 쓰레기를 커버치는 글도 있었다. '그 지사 여직원 기가 쌔서 문제다. 그 부장은 내가 그 사람 잘 아는데 분명 상대가 유도한 것이고 그 부장은 억울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썼다. 기막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미투(me too) 운동은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으로 연예계를 시작으로 금융업권에도 퍼지고 있다. 증권사, 회계법인 간부의 '미투' 고백을 시작으로 퍼지고 있다. 다만 공기업에 해당하는 국민연금 내부에서는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번지기엔 아직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에 익명게시판 '미투'게시판에 내부 불만이 올라오고 있는 것. 업계 관계자는 "공기업이다보니 문화가 보수적이어서 미투 운동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며 “국민연금 측도 뒤늦게 사태를 인지하고 경위 파악에 나선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같은 의혹에 대해 국민연금 측은 "현재 진행중인 사항이라 조심스럽지만, 경영진이 1심 결과(정직 1개월)를 보고받고 재심을 요구하여 과반수 외부전문가가 포함된 재심절차가 진행중"이라면서 "향후 이런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예방교육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kakim@fnnews.com 김경아 김현정 기자
2018-03-05 11:42:27#1. “학교동창 (여자)친구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직업이나 직장이 좋고 나쁘고를 막론하고 성추행이나 성폭행 시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더라구요! 평생 같이 살 배우자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인격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난감한 것 같습니다” 항공사 승무원인 L씨(32)는 결혼정보회사에서 상담을 하면서 털어놓는 걱정거리이다. #2.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평생 믿고 같이 살만한 인품을 가진 남성이 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지 회의가 들 때가 참 많습니다. 평소 멀쩡한 상사가 회식시간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음담패설만 늘어놓고, 노래방에라도 가면 성추행범으로 돌변하니...” 대기업에 다니는 K씨(30)는 ‘곁눈질 안할 남성을 소개해 달라’면서 한탄조로 부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에 대한 미투(Me Too)운동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실제 미혼여성들 10명 중 9명 이상이 직장이나 대중교통 수단 등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 등의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결혼정보업체 온리-유와 공동으로 미혼남녀 476명을 대상으로 전자메일과 인터넷을 통해 ‘본인은 성추행이나 성폭행 등의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22일 발표했다. 이 질문에 대해 ‘전혀 없다’는 대답은 남성이 66.4%, 여성은 8.0%를 차지했고, 그 외 남성 33.6%와 여성 92.0%는 ‘한두 번 있다’(남 21.8%, 여 13.5%)와 ‘가끔 있다’(남 8.0%, 여 57.1%), ‘자주 있다’(남 3.8%), 여 21.4%) 등과 같이 대답한 것. 남녀별 응답 순위를 보면 남성은 전혀 없다 - 한두 번 있다 - 가끔 있다 - 자주 있다 등의 순이고, 여성은 가끔 있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자주 있다 - 한두 번 있다 - 전혀 없다 등의 순을 나타내 남녀간에 대조를 보였다. ‘본인이 경험한 성폭력의 가해자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혹은 어떤 관계)였습니까?(2개까지 중복 가능)’에서는 남성의 경우 ‘(직장의) 고객’(34.2%)과 ‘직장’(27.4%), 여성은 ‘직장’(66.7%)과 ‘대중교통 수단’(61.6%) 등을 가장 많이 지적했다. 손동규 비에나래 대표는 “성폭력은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라며 “남성들은 주로 직장이나 고객 등과 같이 생업과 관련하여 성폭력을 경험하고, 여성은 여기에 더하여 대중교통 수단에서도 빈발한다”라고 설명했다. ‘성폭력이 본인에게 발생할 때 어떻게 대처합니까?’에 대해서는 남녀의 대답이 비슷했다. 남성의 60.3%와 여성의 38.0%가 ‘적당히 모면했다’고 답해 첫손에 꼽혔고, ‘무언의 불쾌감 표시’(남 20.5%, 여 25.3%) - ‘싫다는 의사 표시’(남 11.5%, 20.8%) - ‘제3자에게 도움 요청’(남 6.4%, 여 10.9%) - ‘신고, 고발’(남 1.3%, 여 5.0%)등과 같은 대답이 뒤를 이었다. 남성의 80.8%와 여성의 63.3%는 성폭력이 발생할 때 적당히 모면하거나 무언의 불쾌감 표시 등과 같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신고/고발을 하거나 제 3자에게 도움 요청, 싫다는 의사 표시 등과 같이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비중은 남성 19.2%, 여성 36.7%에 불과했다. ‘성폭력이 발생할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이유’로는 남성, 여성 공히 ‘불이익 우려’(남38.4%, 여 45.7%)를 단연 높게 꼽았다. 그 다음으로는 남성의 경우 ‘어색한 분위기 만들지 않기 위해’(26.0%), ‘악의는 아니라서’(21.9%) 및 ‘화제의 중심에 서지 않기 위해’(13.7%) 등의 순이고, 여성은 불이익 우려에 이어 ‘화제의 중심에 서지 않기 위해’(31.8%), ‘어색한 분위기 만들지 않기 위해’(13.9%), 그리고 ‘악의는 아니라서’(8.6%) 등의 순을 보였다. 이경 온리-유 총괄실장은 “성폭력 가해자는 직장 상사 등과 같이 본인의 직장생활이나 생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많고, 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경우 ‘문제인물’로 부각되기 쉽다”라며 “이런 성폭력의 특성 상 아직까지는 문제가 발생해도 그 순간만 적당히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였으나 최근 일고 있는 미투 운동을 통해 근본적으로 성폭력이 근절되고 또 문제가 발생하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는 계기로 작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
2018-02-22 13:36:48추수감사절을 맞아 장보기 목록을 만들면서 오빠를 생각했다. 필 오빠를 떠올리는 일은 내게 지울 수 없는 명절의 일부분이었다. 존 필립 제이콥은 태어날 때부터 요리를 사랑했다. 수중에 무엇이 있든지 맛있는 요리를 잽싸게 만들어 내는 기쁨을 찾았다. 50년도 더 지났지만 오클라호마의 농장 가옥 주방에서 덩실거리면서 소매를 휘날리던 오빠를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린다. 어머니가 우리를 떠난 후 홀로 네 아이를 키우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부엌에 남자가 있을 자리는 없다고 믿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퇴근했다. 필 오빠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콩과 비엔나소시지에 관한 짤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부엌 문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는 오빠의 어깨를 잡아챘다. 오빠가 아버지를 수납장으로 밀어붙이고 방충망 문으로 급히 달아날 때까지 두 사람은 드잡이를 벌였다. "나는 곧 열일곱이야. 공군에 입대할 거야. 아버지는 내가 강인해지길 바라니까 분명 그러라고 서명해 주겠지." 오빠가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찢어졌다. "편지해." "약속할게." 오빠가 입대했다. 편지가 올 때까지 6주를 기다렸다. "동생아, 신병 훈련소는 힘들었고 지금까지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 다행스러운 점은 입대하기 전에 훈련 교관 같은 아버지를 뒀다는 거야. 군대는 잘 먹여줘."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줄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 즈음 나는 이혼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콜로라도에서 지냈다. 필 오빠도 이혼하고 기체(機體) 정비사로 전국에서 일했다. 내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나 외에 다른 분이 오빠를 사랑하고 지켜 주신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할 때마다 오빠를 위해 매일 기도 드린다고 썼다. 필 오빠는 하나님 얘기보다는 레시피를 공유했다. 1982년에 아버지가 트랙터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오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 중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목장에서 만났다. 나는 오빠의 외모에 충격을 받았다. 지나치게 말랐고 한때 준수했던 얼굴은 술집에서 벌인 싸움들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묘지에서 우리는 끌어안고 울었다. 산산조각 난 우리 가족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알았다. "나한테 편지 써." 다음 날 헤어지면서 속삭였다. 오빠는 아이다호에 있는 스네이크강의 강둑에서 편지를 썼다. "수중 펌프로 작업을 하고 있어. 스네이크강에서 물을 빼서 감자 농부의 밭에 물을 대고 있지. 방금 끝내 주는 감자 요리 레시피를 떠올렸어." 어느 해 추수감사절에는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반송됐다. 오빠가 살던 아이다호 작은 마을의 술집마다 전화했다.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빠가 얼마나 지쳐 보였는지가 계속 떠올랐다. "주님, 저희 남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요. 아빠는 애정을 보여 주지 못했고요. 그래서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걸 믿기 어려워요. 부디 필 오빠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 경찰서장인 친구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2주가 걸려 친구는 워싱턴의 감옥에서 오빠를 찾아냈다. 나는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오빠는 자신의 독특한 필기체로 여섯 장을 꽉 채워서 답장을 보냈다. 그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수감된 사정을 또다시 늘어놓는 대신, 감방 창밖에 보이는 모든 걸 자세히 묘사했다. 소나무, 가문비나무, 미루나무. 멀찌감치 붉은색 헛간도 있는데 우리가 농장의 헛간 다락에서 놀면서 느끼던 재미가 다시 생각난다고 했다. 오빠는 주방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기뻐하면서 알려왔다. "두 달이 지나고 드디어 재료를 마음대로 쓸 여지가 약간 생겼어. 사람들이 말하는 걸 네가 들었어야 하는데. 무척 단순한 재료였지만, 여기서는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으니까 조금만 달라져도 즐거워져." 그해 가을에 내가 물었다. "추수감사절 저녁에도 거기 있어?"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명절을 감옥에서 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렇겠지. 그래도 내가 여기 있으면서 요리하면 분명 사람들이 기뻐할 거야." 추수감사절 아침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동생아, 깜짝 선물이야!" "행복한 추수감사절 보내길. 오빠 목소리를 듣다니, 정말 근사한 선물이야! 출소했어?" "아니.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오늘은 동료들을 위해 요리해. 콘브레드 드레싱(미국 남부에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자주 먹는 전통 음식)을 만드는 근사한 레시피가 있거든." "맛있겠다. 오늘 친구들이 오빠를 무척 좋아할 거야." "있잖아. 나는 레시피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언제나 레시피를 생각하니까." "아니야. 이건 달라." "무슨 뜻이야?" "인생 레시피를 말하는 거야. 여기서는 생각할 시간이 무척 많아. 우리는 모두 살면서 좋은 일, 나쁜 일, 약간의 기쁨, 얼마간의 어려움을 겪어. 성경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잖아. 동생아, 사랑한다." 두 달 후 오빠가 편지를 보냈다. "집에 왔어. 내 작은 트레일러로 돌아왔고 마당의 잔디를 깎으면서 시간제로 일해. 날 받아 주겠다는 제안은 고맙지만, 너도 키워야 할 아들이 있잖아. 비틀거리는 나는 네게 필요 없으니까. 추신. 부엌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은 구미가 당겼어.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생명줄이 돼줘서 고마워." 그 다음 4월에 워싱턴 파스코의 어느 바텐더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술집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바텐더 얘기로는 오빠의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에 구멍이 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는 걸 거부했단다. "오빠는 못살게 구는 남자한테서 어떤 여성을 지키려 했어요." 마침내 필 오빠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전해졌다. 오빠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장보기 목록 가장 위에 오빠가 어림짐작으로 알려준 콘브레드 드레싱 재료를 적었다. 우리는 평생 편지로 이어져 있었다. 오빠가 마침내 나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주신 그분께서 쓰신 가장 위대한 레시피를 이해했다는 점에 감사드리며 추수감사절에 콘브레드 드레싱을 만들려고 한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Letters From Phil Making my thanksgiving shopping list, I thought of my older brother, Phil, his memory an indelible part of the holiday for me. John Phillip Jacobs was born with a love for cooking. He took joy in whipping up simple, tasty dishes with whatever we had on hand. More than 50 years later, I can still picture him, sleeves flopping as he danced around our Oklahoma farmhouse kitchen. Too bad my father, raising the four of us children on his own after my mother had left us, believed boys had no place in the kitchen. One day, Dad came home unexpectedly from work. He appeared in the kitchen doorway just as Phil glided across the floor, singing a ditty about beans and wieners. Dad grabbed Phil by the shoulder. They tussled until Phil shoved Dad against a cabinet and bolted out the screen door. "I'll soon be 17," he said. "I'm gonna join the Air Force. Since Dad wants me to be tough, I'm sure he'll sign for me to do that." The thought of my older brother leaving ripped at my heart. "Write to me," I blurted. "I promise." He enlisted. I waited six weeks before a letter arrived. "Boot camp was hard, Sissy. I couldn't write until now. Good thing I had Dad as a drill sergeant before I joined up." We wrote less frequently as adulthood caught up with us. By the late 1970s, I was divorced and living in Colorado with my young son. Phil was divorced and working jobs across the country as an airframe mechanic. As my faith grew, I would mention in my letters that Someone besides me loved him and was looking out for him. At the end of every letter, I told him I said a daily prayer for him. Rather than talking about God, Phil would share a recipe. When Dad died in a tractor accident in 1982, Phil was working in Saudi Arabia. We met at Dad's ranch. Phil's appearance shocked me. He was too thin, his once handsome face scarred by bar fights. At the cemetery, we held each other and cried, knowing that our fractured family would never heal. "Write to me," I whispered when we parted the next day. From the banks of the Snake River in Idaho, Phil wrote, "I'm working on these submersible pumps, pulling water out of the Snake to irrigate the potato farmers''fields. I just came up with a killer recipe for taters." One Thanksgiving, I couldn't find Phil. I panicked. My latest letter to him had been returned. I called every bar in his small Idaho town. No one had seen him. "Lord," I prayed, "we kids didn't get much love from Mama. Dad wasn't able to show affection. That makes it hard for us to trust that you love us. Please allow Phil to know your love." I went to a friend who was a police chief for help. Within two weeks, he located Phil in a Washington prison. I wrote my brother. He wrote back, filling six pages with his distinctive cursive. He was lonesome. Instead of rehashing how he'd landed in prison, he described everything outside his cell window in detail. The pine, spruce and cottonwood trees. The red barn in the distance that reminded him of all the fun we'd had playing in the barn loft on the farm. He happily declared that he had become head cook. "After two months, they have finally given me a little leeway on ingredients, Sis. You should have heard the guys. Such a simple ingredient, but everything is so much the same day to day in here that any little change brings a bit of joy." Later that year, in the fall, I asked, "Will you be there for Thanksgiving dinner?" It made my heart ache to think of Phil spending his favorite holiday in prison. "Probably," he said. "But the guys are sure glad I'll be here to cook." Thanksgiving morning, my phone rang. "Hey, Sis, surprise!" "Happy Thanksgiving," I said. "Such a wonderful gift to hear your voice! Have you been released?" "No, but soon. Today I'm cooking for my guys. I have this amazing recipe for cornbread dressing," he said. "Sounds delicious," I said. "Your guys are going to love you today." "You know, Sis," he said, "I've been thinkin' about a recipe." I laughed. "You've been thinking about recipes forever." "No, this is different." "What do you mean?" "Sis, I'm talking about a kind of recipe for life. I've had a lot of time to think in here. We all get some good, some bad, a sprinkle of joy and a cup of trouble in life until we're…well. There's a scripture that says,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I love you, Sis." Two months later, Phil wrote: "I'm home, Sis. Back in my little trailer, working part-time mowing yards. Thanks for your offer to take me in, but you have your son to raise. You don't need me stumbling around. P.S.: The offer to take over your kitchen was tempting. Thanks for being my lifeline while I was in the joint." The following April, I got a call from a bartender in Pasco, Washington. Phil was gone. There had been a bar fight. The bartender said Phil likely broke some ribs and punctured a lung but refused to go to a doctor. "Your brother was defending a girl from her bully boyfriend." Phil was finally safe in God's arms, where he was meant to be. I put the ingredients for Phil's by-guess-and-by-gosh cornbread dressing, at the top of my shopping list. I would make it on Thanksgiving, grateful that we'd stayed connected through a lifetime of letters and that, in the end, my brother understood the greatest recipe was written by Someone who loved him even more than I did.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11-12 18:26:209년 전, 나는 40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회복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버지니아비치의 한 중독치료센터에서 하는 알코올 중독자 재활협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그룹은 모임 후 종종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거기서 샘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해군에서 기상장교로서 24년간 복무한 뒤 이제 막 퇴직한 상태였다. 그 또한 오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 나는 샘이 모임에서 그의 경험을 공유하는 솔직한 모습에 감동 받았다. 그는 중독 치료 중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처음 2년 동안은 진지하게 만난 건 아니었다. 우리 둘 다 결혼 생활 중의 상처로 인해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관계를 천천히 진전시켰다. 우리는 같이 교회를 다녔고, 우리 관계에서 하나님이 최우선임에도, 여전히 둘 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확신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샘과 내가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드렸다. 샘과 1년 반을 만났을 때, 막내딸이 텍사스로 이사와 그녀와 손녀들과 가까운 데서 살자고 말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 내가 당신 발목을 잡게 하지 말고." 샘이 내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놀랐고, 그것은 상처 그 이상이었다. 여전히 이사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파트 목록을 만들어 텍사스로 향했다. 샘과 나는 서로 몹시 그리워하며 매일 밤 통화했다. 그는 사실 내가 떠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내가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샘이 비행기로 텍사스까지 날아와 청혼을 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노퍽 해군부대에서 계약직 기상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텍사스에서 나와 함께 살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버지니아비치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줄 중독치료센터의 모든 친구를 초대했다. 며칠 후, 샘은 나를 자신이 복무했던 해군부대로 데려갔다. 강 건너 조선소를 차로 지나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인접한 두 표지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쪽 표지판에는 나의 결혼 전 성인 윌리엄스 애비뉴가 적혀 있었고, 다른쪽 표지판에는 샘의 성인 펜녹이 쓰여 있었다.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들이었다. ■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You’re My DestinyNine years ago, I was at the end of my 40-year marriage and the beginning of my recovery journey. I started attending AA meetings at a recovery center where I lived in Virginia Beach. A group of us would go out for coffee afterward, and that's how I got to know Sam P. After 24 years of service in the Navy as a meteorologist, he had just retired. He too was going through a divorce after a long marriage. I was moved by the honest way Sam shared in meetings. It was clear he was passionate about helping others in their sobriety. We became good friends but didn't start dating for two years. We had both been hurt in our marriages and didn't want to ever go through that pain again. We took things slow. We went to church together and put God first in our relationship―yet we both still felt very guarded and unsure. I asked God to show me if Sam and I were meant to be together. A year and half into my relationship with Sam, my youngest daughter asked me to move to Texas to be closer to her and my granddaughters. "You've got to do what you think is right for you," Sam told me. "Don't let me hold you back." I was surprised―and more than a little hurt―by his response. Although I still wasn't sure about the move, I listed my condo and headed to Texas. Sam and I missed each other so much that we were on the phone every night. He admitted that he hadn't wanted me to leave but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do what God wanted me to do. Only two months after my move, Sam flew down to Texas and proposed. Although he'd been working as a contract meteorologist at the naval station in Norfolk, Virginia, he left that job and made plans to join me in Texas. We held the wedding ceremony in Virginia Beach, the place where we'd met, so we could invite all our friends from the recovery center to celebrate with us. A few days later, Sam took me to visit the Navy base where he used to work. As we were driving by the shipyard across the river, we came to an intersection with adjoining street signs that made us gasp. One sign read Williams Avenue―my former last name―and the other street was Pennock, Sam's last name. Clearly, we were meant to be together.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10-29 18:07:29남편 루크와 나는 우리의 첫 집에서 오래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젊었고 꿈은 컸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집은 생애 처음으로 마련한 것으로 흠잡을 데 없었고, 가능한 시기에 더 큰 집으로 옮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아들 버나드와 딸 사만다였다. 이사할 여유가 생겼을 무렵에는 너무 늦었다. 작은 집은 우리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수리를 하면서 저축한 돈을 다시 그 집에 썼다. 가장 최근에 한 작업은 아들 방 천장이다. 천장은 침수 피해로 거무스름해지고 금이 갔다. 한동안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오래된 공장이나 산업 공간에서 영감을 받은 인테리어 디자인)의 콘크리트 천장을 눈여겨보다가 집 전체에 적용하기 전에 버나드의 방에 새로운 스타일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작업자들은 금속 뼈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를 매끄럽게 발랐다. 나는 콘크리트가 마무리되었는지 꼼꼼히 살핀 뒤 말했다. "다 마르면 더 근사해 보일 거예요." "그러면 좋겠네요. 지금은 다소 불안정해 보여요." 남편이 말하더니 버나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들, 정말 여기서 자고 싶은 거 맞니? 오늘 밤은 동생 방에서 자도 되는데." "싫어요! 내 방에서 자고 싶다고요!" 아들은 열두 살짜리의 고집스러움을 끌어모아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작업자들이 잘 알아서 했겠죠."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각자 방으로 데려다주고 자러 갔다. 쾅! 움찔하면서 깼다.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알람 시계에서 반짝이는 숫자들이었다. 오전 4시 57분. 다음으로 보인 건 침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남편이었다. "버나드!" 남편이 외쳤다.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오, 안 돼. 천장이 무너졌어!' 서둘러 아들 방으로 갔다. 남편은 아들의 침대를 뒤덮은 잔해를 뒤적이며 울부짖었다. "버나드! 아빠 말 들리니?" "엄마?" 몸을 휙 돌렸다. 아들은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복도에 서 있었다.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어디 있었니?" "새미 방에요." "거기서 뭐 했는데?" "내 방 모기들이 괴롭혀대서요. 모기 때문에 깼어요." 모기라고? 전에는 모기가 버나드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버나드를 깨워서 동생 방으로 도망가게 할 정도는 결단코 아니었다. 그날 밤 아들의 목숨을 구한 건 모기뿐이 아니었다. 모기를 보내신 그분도 계셨다. Save through MosquitoesMy husband, Luke, and I didn't expect to stay in our first house long. We were young, with big dreams and small pockets. It was the perfect starter home, one we planned to trade in for something bigger when we could. But life had other plans: our son, Bernard, and our daughter, Samantha. By the time we could afford to move, it was too late. Our little house had worked its way into our hearts. So we put our savings back into the home for some much-needed renovations. Our latest project was our son's bedroom ceiling. It had darkened and cracked with water damage. We'd been eyeing industrial-chic concrete ceilings for a while and decided to test out the new style in Bernard's room before using it in the rest of the house. Workers installed a metal framework, then smoothed wet concrete over it. I inspected the concrete finish. "It'll look better when it dries," I said. "I hope so," said Luke. "It looks a bit unstable." He turned to Bernard. "Are you sure you want to sleep here, buddy? You could sleep in your sister's room tonight." "No!" said Bernard, with all the stubbornness of a 12-year-old. "I want to sleep in my own room!" "Don't worry. The installers knew what they were doing," I told Luke. We put the kids to bed, each in their own room, and turned in. Crash! I jerked awake. The first thing I saw were the glowing numbers on my alarm clock. 4:57. The second was Luke, racing out of our bedroom. "Bernard!" he yelled. My body tensed. Oh, no. The ceiling collapsed! I hurried to Bernard's room. Luke was scrabbling through the debris that covered our son's bed. "Bernard!" he cried. "Can you hear me?" "Mom?" I spun around. Bernard stood in the hallway, clutching his sister's hand. I gathered both kids into my arms. "Where were you?" I asked. "Sammy's room." "What were you doing there?" "The mosquitoes in my room were bothering me. They woke me up." Mosquitoes? They'd never troubled Bernard before, certainly not enough to wake him and make him flee to his sister's room. It was more than mosquitoes that saved my son that night. It was the One who sent them.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09-10 18:34:13'맡은 일을 잘하자.' 이것은 해군 시절 나의 좌우명이었고, 지금은 내가 이끄는 소규모 화물운송 사업의 모토다. 나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와이오밍주 캐스퍼 지점의 운전사가 사고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 우리 회사 트랙터 트레일러가 완파되었다. 캐스퍼 지점의 업무는 중단되었다. 나는 워싱턴의 우리 집 책상에 앉아 속수무책으로 엑셀 화면만 뚫어져라 보았다. "보험이 트럭을 완전히 커버해주지는 못할 거야." 나는 아내 캐서린에게 말했다. "수익이 벌써 떨어지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공중의 새를 보라." 캐서린이 마태복음을 읊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나는 그 구절을 잘 알았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리라 믿는 새라고 상상해 보았다. 해군 출신인 나는 참새나 제비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해군의 상징인 매나 독수리와 동일시했다. 맹금류같이 활동하는 새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새는 그런 종류가 아닌 듯 보였다. '주님, 당신의 보살핌 속에서 쉬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일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캐서린과 외식을 하러 나갔다. 집을 나설 즈음 폭풍이 점점 가까워졌다. 식사를 마쳤을 즈음에는 바람이 거세졌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운전해야 했다. 폭풍이 도로에 나뭇가지를 내리꽂고 우리 차에 빗물을 연달아 쏟아부었다. 겨우 진입로에 도착해서 간이차고에 세워진 캠핑카 뒤에 우리 차를 세웠다. "저게 뭐지?" 캐서린이 물었다. 앞유리를 통해 쳐다봤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무언가가 간이차고 바로 아래, 캠핑카 견인장치 부분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건 쿠퍼매야!" 내가 말했다. "강풍에 겁먹었나 봐." 캐서린이 말했다. 나는 더 자세히 보았다. "전혀 겁먹지 않았어. 곤히 자고 있네!" 바람, 비, 헤드라이트, 이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 매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저 맹금류가 하나님께서 이런 폭풍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주실 줄로 믿을 수 있다면, 이 나이 든 새, 나도 그럴 수 있다! ■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WINGED MESSENGERTaking care of business. That was my motto as a Marine; now it was the motto of my small trucking business. I'm a man of action. But there wasn't a thing I could do about my current situation. A driver at my company's Casper, Wyoming, location had gotten into an accident that totaled one of our tractor trailers. Business in Casper had come to a halt. I sat at my desk at home in Washington, helplessly studying an Excel spreadsheet. "The insurance won't pay out the full value of that truck," I said to my wife, Catherine. "Profits were already down. How are we going to keep going?"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Catherine said, quoting from Matthew. "'They neither reap nor sow…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I knew the verse well. I'd tried to imagine myself as a bird trusting God to protect me. As an ex-Marine, I didn't identify with sparrows or swallows. Maybe a hawk or an eagle, like on the Marine Corps emblem. A bird of prey, of action. But those didn't seem to be the kinds of birds Matthew was talking about. Lord, please show me how to rest in your care, I thought. Right now it feels impossible. To take my mind off business, I took Catherine out to dinner. A storm was coming as we left the house. By the time we finished eating, the wind had become a gale. We drove home in a downpour. The storm flung branches across the road and pummeled our car with sheets of rain. Finally we pulled into our driveway. I parked behind the camper, which was tucked away beneath a carport. "What's that?" Catherine asked. I peered through the windshield. The headlights showed something perched on the camper hitch, just under the carport. "It's a Cooper's hawk!" I said. "He must be scared in all this wind," said Catherine. I looked closer. "He's not scared at all," I said. "He's fast asleep!" The wind, the rain, the headlights-despite all the chaos, the Cooper's hawk was unruffled. If that bird of prey could trust God to protect him in a storm like this, maybe this old bird could too!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07-16 18:14:14옆집 부부가 우리 집 현관에 서 있었다. "두 분의 흰색 플라스틱 울타리에 저희 철조망 울타리를 붙이고 싶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남편 로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집 울타리는 경계선 안쪽에 있어요. 그래서 두 울타리 사이의 잔디를 모두 깎고 다듬어야 한다고요." "정말 말도 안 돼."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경계선에 울타리를 설치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 부부는 화가 나서 떠났다. "여기 서서 저 남자랑 당신이 얼마나 많이 정치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로저에게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저 집 남편이 출장 간 동안 작년에 내가 마당 정리를 도와줬잖아." 로저가 말했다. 그러고부터 그들은 우리 부부가 손을 흔들며 인사해도 받아 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언쟁을 잊어 보려 했지만, 뻔뻔하게 자기가 일을 보는 동안 자신의 개가 담장이 없는 우리 집 앞마당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 좋은 이웃이 된다." 몇 주 후, 나는 버터 접시가 깨져 하나 사러 갔다가 진열대에 놓인 파이 접시를 보았다. 제일 위쪽에 놓인 아이보리색 접시에는 파란색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씌어 있었다. "네, 주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나는 그 접시를 사고 그래니스미스 사과(사과 품종 중 하나)도 잔뜩 담았다. 그날 오후, 파이 반죽을 밀면서 반죽이 찢어지지 않고 크러스트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사과의 의미를 담은 그 파이가 완벽하길 바랐다. "옆집 부부가 내 마음을 받아 주면 좋겠어." 남편 로저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 빵에 너무 많은 믿음을 주고 있는지도 몰라." 파이가 식자마자 나는 옆집으로 향했다. 겁이 나서 되돌아올 뻔했지만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 집에서 키우는 테리어 강아지가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남편 말고 부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급하게 내뱉었다. 문이 열렸다. 부인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같이 먹으려고 애플파이 좀 만들었어요." 내가 말했다. 그가 손을 뻗더니 조용히 내 손에 있던 파이를 가져갔다. "접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상하게도,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오히려 그 반대의 느낌이었다. 나는 파이를 자르며 그릇 바닥에 새겨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부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제발, 그 메시지가 잘 전달되길. 며칠 후, 앞마당에 나갔다가 옆집 부인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여자도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남편을 발견하고 말했다. "여자가 나한테 손을 흔들었어!" "당신 애플파이가 별로였던 것 같다고 걱정했잖아." 남편이 말했다. 옆집 남편이 경계선에 철조망을 설치했을 때도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비록 담장 사이에 있는 잔디를 깎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관계를 더 악화시킬 필요가 없어 보였다. 울타리가 별로일 때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옆집 부인은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해 준다. 하지만 그 남편은 여전히 우리를 피한다. 그러나 괜찮다. 우리의 이웃 관계 회복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따를 것이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The Apple Pie SoulutionOur next-door neighbors stood on our front porch. "We want to attach a chain-link fence to your white vinyl one," the wife said. "That's not going to work," my husband, Roger, said, shaking his head. "Our fence is inside the property line. We need to mow and trim between the two fences." "That's ridiculous," the husband said, his voice rising. "We have every right to put our fence on the edge of our property!" Before we could respond, the couple stormed off. "So much for the times you sat out here with him talking politics," I said to Roger. "And to think we helped her with yard work last year when he was out of town," Roger said. From that point on, our neighbors refused to acknowledge our waves hello. I tried to forget about the argument, but then they had the gall to start letting their dog use our unfenced front yard to do his business. I couldn't help but think of what Robert Frost once wrote: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 A few weeks later, I was out shopping for a replacement for my broken butter dish when I noticed a display of pie plates. The ivory one on top of the stack had LOVE THY NEIGHBOR spelled out in blue. "Okay, God," I said. "I get the message." I bought the plate and loaded up on Granny Smith apples. That afternoon, as I rolled out the dough for the pie, I prayed that it wouldn't tear, and that the top and bottom crusts wouldn't separate. I wanted my peace pie to be perfect. "I hope they'll accept my gesture," I told Roger. "Maybe I'm putting too much faith in my baking." Once the pie had cooled, I headed next door. I almost chickened out and turned back, but then forced myself to ring the doorbell. I could hear their terrier start barking like crazy. "Please let it be the wife and not the husband who comes out," I whispered. The door opened. It was the wife. "Hi! I baked this apple pie for you," I said. She reached out and silently took the pie from my hands. "Please keep the plate," I sputtered. She just looked at me for a moment, then slowly closed the door. I walked back to our house. Oddly enough, I didn't feel rejected at all. Quite the opposite, in fact. I envisioned the wife slicing into the pie and discovering LOVE THY NEIGHBOR written across the bottom of the dish. Hopefully, that message would get through. A few days later, I was out in the front yard when the wife passed me in her truck. My hand shot up in greeting. She returned my wave. I ran into our house and found Roger. "She waved back at me!" "And you were worried your apple pie wasn't good," he said. Still, we weren't surprised when the husband put up a chain-link fence right at the property line. Although we can't trim between the fences, we didn't say anything to the neighbors. It just didn't seem worth damaging our relationship further. Maybe even bad fences can make good neighbors. Meanwhile, the wife keeps waving and even says hello. Her husband still shuns us. But that's okay. I'll keep following those heavenly nudges, even though restoring our neighborly relationship might seem like pie in the sky.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07-02 18:5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