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 인권운동에 힘썼던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진행됐다.
유족 및 운구 행렬은 1일 오전 6시 30분께 서울시 마포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할머니가 생전에 머물던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을 거쳐 시청광장에 도착했다. 운구차 앞에는 자주색과 흰색 나비 장식이 붙었다.
정의기억연대와 추모객 1000여 명(주최 측 추산)은 서울광장에 모여 김 할머니를 추모하는 행진을 시작했다. 영정사진을 든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가 앞장서고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만장 94개를 든 대학생, 청소년, 관련 단체가 뒤따랐다. 만장을 들지 않은 시민들은 노란색 나비모양 종이 막대를 들었다.
‘김복동 우리의 영웅, 희망, 마마’, ‘일본은 조선학교 처벌 마라’ 등이 적힌 만장 94개는 할머니의 나이와 같았다. 현수막에는 ‘김복동 님 나비 되어 훨훨 날으소서’라고 적혀있었다.
유족과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위안부 피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외쳤다. 방송차에서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고 이리 싸웠나. 1000억을 준다 해도 받을 수 없다”라며 사죄를 요구하는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울시청 외벽 스크린에도 김복동 할머니의 주장이 담긴 영상이 재생됐다.
광화문광장을 지난 행렬은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멈췄다. 마이크를 쥔 정의연 관계자는 “할머니의 못다 이룬 꿈, 반드시 저희가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참가자들은 함성을 질렀다.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행진의 마지막은 수요집회가 열리는 소녀상 앞이었다.
김 할머니와 함께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에 힘썼던 이용수 할머니는 소녀상 옆 의자에 앉아 “우리는 열다섯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 성노예가 됐다”며 한 많은 세월을 회상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건강을 보살펴온 봉사자,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극단 대표 등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살풀이 공연 및 헌화 등이 이어져 할머니의 넋을 위로했다.
김 할머니의 유해는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후 위안부 피해 할머니 51명이 잠들어 있는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