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1일 서울 마포구 MBC에서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첫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요약
·이재명은 "우리도 기축통화국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국힘은 집권당 후보가 경제학 기본 지식조차 없다고 비꼬았다
·차제에 장학퀴즈식 토론 대신 대통령다운 토론으로 바꿔보자
[파이낸셜뉴스] 2003년 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해 12월 미군 특수부대는 토굴에 숨어 있던 후세인을 생포했다. 은신처 초록색 상자에선 100달러짜리 지폐로 75만달러(약 90억원)가 나왔다. 후세인마저 자기 나라 돈 대신 철천지원수인 미국의 화폐를 숨겼다. 긴 말 필요없다. 이게 바로 기축통화다.
◇스페인·영국도 한때 기축통화국
기축통화(Key Currency)는 강대국의 역사와 일치한다.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 로마의 데나리우스, 비잔틴제국의 솔리두스는 각각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근대 들어선 스페인 달러(Spanish Dollar)가 그 역할을 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은화인 스페인 달러는 16~19세기 유럽, 아시아, 미주대륙에서 널리 통용됐다. 미국 '달러'도 스페인 '달러'에서 온 말이다. 달러화 심볼($)은 스페인 달러에 새겨진 문양을 본땄다는 말이 있다.
대영제국이 들어서자 화폐 패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19세기 후반 세계 교역의 60%는 파운드화로 이뤄졌다. 런던은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파운드에 대한 영국인의 애정은 극진하다. 유럽연합(EU)에 가입했지만(2021년 탈퇴) 유로존에는 일체 발을 들이지 않았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파운드는 지금도 건재하다. 1파운드는 1.36달러에 교환된다(23일 기준).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더니 파운드가 꼭 그렇다.
◇전후 달러 전성시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 1944년 뉴햄프셔주 휴양지 브레튼우즈에서 만난 44개국 대표들은 전후 국제 금융 질서를 총괄할 기구로 IMF를 만들었다. 본부는 워싱턴DC에 두기로 했다. 영국이 누리던 기축통화국의 지위는 미국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하는 금본위제를 택했다.
1971년 금 태환 정지라는 날벼락이 터졌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화를 가져와도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변동환율제의 시작이다.
◇특별인출권(SDR) 변천사
IMF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1969년 특별인출권(SDR·Special Drawing Right)이라는 묘안을 냈다. 환율 변동에 휘둘리지 않는 안정된 통화가 필요해서다. SDR는 화폐 아닌 화폐다. 회원국 통화와 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선 화폐다. 그러나 개인, 기업 간 거래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후세인은 은신처에 절대로 SDR를 보관하지 않는다.
IMF는 SDR를 구성할 화폐를 바구니에 담았다. 처음엔 16개국 통화를 담았다. 16개국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호주,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그러다 1981년에 5개국으로 왕창 줄였다. 5개국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이다.
SDR 16개국은 주요 20개국(G20) 명단과 비슷하다. 대륙별로 안배했다. 반면 SDR 5개국은 G5와 일치한다. 알짜만 모았다. 1999년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이 빠지고 대신 유로가 들어갔다. 유로화 출범에 따른 자연스런 멤버 교체였다.
◇아직 갈 길 먼 위안화
IMF 특별인출권(SDR) 구성통화별 가중치 비교(2016년 10월1일 기준). 자료=IMF
SDR 변천사에서 2016년은 특기할 만하다. 이때부터 중국 위안화가 바스켓 통화에 추가됐다. 드디어 위안이 달러, 유로, 파운드, 엔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선 감개무량할 만하다.
하지만 SDR 바구니에 담겼다고 곧장 기축통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성통화라도 가중치는 제각각이다. IMF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0월 기준 통화별 가중치는 달러가 41.73%, 유로 30.93%, 위안화 10.92%, 엔 8.33%, 8.09%로 정해졌다. 달러가 위안보다 4배나 높다.
작년 4월 한국은행은 '2020년 결제통화별 수출입'이란 자료를 냈다. 우리나라 교역에서 주요 통화가 쓰이는 비중을 파악했다. 수출을 보면 달러가 83.6%으로 압도적이다. 이어 유로(6.2%), 엔(2.9%), 원(2.5%), 위안(2%) 순이다. 수입 역시 달러가 78.1%로 월등히 높고, 원(7%), 유로(6.5%), 엔(5.9%), 위안(1.5%) 순으로 이어진다. 누가 뭐래도 이 시대 기축통화는 달러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주요 통화별 국제결제 비중은 달러가 40.5%로 1위를 차지했다. 유로가 36.6%로 2위에 올랐고, 파운드(5.9%)-위안(2.7%)-엔(2.6%) 순으로 나타났다. 위안 비중은 꾸준히 오르는 추세다. 그러나 달러를 위협하기엔 역부족이다.
◇기축통화는 특권 중의 특권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뒤 중국은 달러 헤게모니에 도전할 틈을 엿보았다. 그러나 위기는 되레 미국의 힘을 입증하는 역설을 낳았다. 미국은 위기의 진앙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흔들려도 열 번은 흔들려야 마땅하다.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을 보라. 외환위기 때 한 방에 갔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닥치자 오히려 각국이 미국에 SOS를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우리도 2008년 10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그제서야 금융·외환시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기축통화의 힘은 이렇게 무섭다. 미국이 이 지위를 순순히 내놓을 가능성은? 단언컨대 제로다.
그 중에서도 시뇨리지는 특권 중의 특권이다. 시뇨리지는 화폐 액면가에서 제조·유통 비용을 뺀 차익을 말한다. 예컨대 100달러 지폐의 제조·유통 비용이 10달러라면 나머지 90달러가 시뇨리지다. 미국은 수십년 간 천문학적인 차익을 날로 먹고 있다.
◇한국도 기축통화국?
전경련이 13일 발표한 '원화의 기축통화 편입 추진 검토 필요' 보도자료. 5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자료=전경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1일 중앙선관위가 주관한 대선 토론회에서 "우리도 기축통화국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논란이 일자 민주당 선대위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지난 13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인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민주당 대선 후보가 전경련 자료를 인용한 게 눈길을 끈다. 전경련은 친기업 보수의 본산이다.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태 와중에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정치권에선 전경련을 해체하라는 주장도 서슴없이 나왔다. 문재인정부는 전경련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 후보가 왜 하필 전경련 자료를 인용했는지 궁금하다.
전경련이 낸 보도자료엔 '원화의 기축통화 편입 추진 검토 필요'라는 제목이 붙었다.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 통화바스켓에 포함될 수 있는 5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추광호 경제본부장은 "IMF가 제시한 SDR 통화바스켓 편입 조건과 한국의 경제적 위상 등을 고려했을 때 원화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이 후보의 주장과 결이 같다.
문제는 SDR 바스켓에 포함된 통화를 모두 기축통화로 볼 것이냐다. 전경련은 달러·유로·엔·파운드·위안을 기축통화로 봤다. 다만 찜찜했던지 '기축통화'에 'IMF 특별인출권 통화바스켓 기준'이란 단서를 붙였다.
5개 통화를 모두 기축통화로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국제결제 비중과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액 비중 등을 고려하면 달러 외에 다른 4개 통화는 차이가 크다. 유로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로존 19개국이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특수성이 있다. 엔·파운드·위안은 잘해야 준 기축통화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해 보인다.
이재명 후보는 SDR 바스켓 통화와 기축통화를 동일시했다. 전경련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거나 "집권당 후보가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조차 없이 '곧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망언을 내뱉는다"(박민영 국힘 청년보좌역)고 비꼰 건 심했다.
◇장학퀴즈식 대선 토론은 이제 그만
20대 대선 후보들이 21일 서울 마포구 MBC에서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첫 토론회 시작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사진=뉴시스
차제에 대선 토론 방식에 대해서도 개선을 제안한다. 후보가 특정 주제를 전문가 수준으로 아는 건 불가능한 데다 꼭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통령이 다 안다고 착각하면 되레 정책을 망치기 십상이다. 군인 출신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 문외한이라 결정권을 관료에 위임했다. 이게 오히려 효과를 봤다.
대통령은 큰 흐름을 잡는 사람이다. RE100을 안다고 자랑할 것도, 기축통화와 SDR 구성통화의 차이를 모른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그런 건 장·차관에게 맡기면 된다. 대신 대통령은 탄소중립 시대에 한국이 가야 할 방향, 눈덩이 재정적자 시대에 재정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그게 대통령답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