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 부지. 삼성전자 제공
[파이낸셜뉴스]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세부지침을 두고 한국 기업들과 미국 정부의 치열한 심리전이 예고되고 있다. 미 정부가 보조금 신청 기업들에게 현금 흐름, 수율(양품 비율), 판매 가격 등 민감한 영업 정보 제공을 요구했지만 '제안을 따를 의무가 없다'는 단서 조항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경제사절단으로 참석이 유력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미 정부와 물밑 협상을 진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2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3월 31일(현지시간) 접수가 시작된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 사전의향서 제출을 늦추며 장고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보조금 신청 및 심사 과정에서 기업들의 정보 제출 수위를 협의하기 위해 신청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현지 시설투자에 큰 도움이 될 보조금 신청을 고민하는 건 미국 상무부가 사전신청서 작성 백서에 여지를 뒀기 때문이다. 사전신청서에는 "세부지침은 말 그대로 지침일 뿐, 신청 기업들이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Use of this CHIPS financial model tool is not a requirement for the CHIPS optional pre- application submission"는 단서를 남겼다.
그럼에도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거란 게 중론이다. 2년 전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 때는 업무협조 요청 성격이 강했지만, 이번엔 25억달러가 넘는 보조금이 달려있다. 더욱이 상무부는 세부지침에 "세부 정보가 부족한 신청서는 추가 정보를 요청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보조금 지급) 검토 절차가 지연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선 해외 기업들이 투자를 철회하는 게 최악의 상황"이라며 "이를 잘 아는 삼성이 보조금 신청을 하겠다, 안 하겠다는 입장을 보안에 부치며 심리전을 최대한 펼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장 이달부터 미 정부와 우리 기업간 세부지침과 관련한 협의에 들어가더라도 예상보다 보조금 신청이 늦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세부지침이 나온 이후 삼성전자는 "신청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고, 결정하더라도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을 계획"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에 메모리반도체 첨단 패키징 공장 건립을 계획 중인 SK하이닉스도 보조금 신청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달 주주총회 뒤 "공장 건설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보조금 신청 여부는 더 고민해 보겠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재계는 오는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경제사절단 참가가 유력한 이 회장과 최 회장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방미 일정 중 미중 반도체 갈등과 까다로운 보조금 신청 조건이 물밑에서 심도 있게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가드레일 등 최근 미국의 정책 발표 기조는 과하게 요구한 뒤 협상을 통해 숨통을 트여주는 식이라 보조금 신청도 퇴로를 열어둘 것"이라며 "윤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미국을 방문하면 좋은 방안이 나올 거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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