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서울여대 명예교수·전 행복기금이사장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배드뱅크 방식의 채무자 지원 대책이 반복적으로 제안된다. 배드뱅크(또는 기금)는 금융회사로부터 부실채권을 신속하게 매입할 수 있지만 채무자가 채무조정 수혜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대규모 매입 재원 확보가 어렵다. 또 채권자 정보 변경으로 신용상의 불이익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난다. 본래 배드뱅크 방식은 금융회사의 급격한 위기상황(뱅크런 등)에 대처하는 구조조정 수단으로 건전성 관리가 시급한 금융회사의 부실 대처에는 유용하지만 금융회사 건전성과는 큰 상관이 없는 개인 채무자 지원에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배드뱅크 방식의 '매입형 채무조정'의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제한된 재원으로, 특정 채무자만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어서 반복적으로 정책공약에 활용되면 본래의 순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금융소비자의 정책에 대한 실망, 희망고문의 피로도를 가중시키게 된다. 매입 가격을 둘러싼 채권 금융회사와 기금 간의 갈등 또한 매입형 방식의 고질적인 문제다. 금융회사는 연체 기간이 짧은 채권에 대해서는 낮은 가격에 매각하지 않아 배드뱅크는 해당 채권을 비싸게 매입할 수밖에 없고, 이는 채무조정 여력과 효과를 크게 저하시킨다. 또 매입재원 조달을 위해 발행한 채권 및 증권의 상환리스크를 증가시켜 결국에는 정부 재정 투입을 초래할 수 있다. 여러 우려사항들을 고려할 때 '매입형 채무조정'은 장기연체 채권의 매입 및 채무조정·채권소각 등에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매입형 채무조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신용회복위원회(이하 '신복위')가 운영하는 '협약'·'합의형 채무조정'이다. 합의형 방식은 금융회사 등 채권자와 채무자가 사적 합의에 기반해 채무를 조정하는 구조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금융시장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첫째, 매입형 방식과 달리 초기 연체 채무 및 위기 상황에 대한 선제적 지원이 가능하다. 초기 연체 또는 연체 이전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개입이 가능한 구조로, 채무자의 신용훼손을 사전에 예방한다. 둘째, 정부 재정 지원이 불필요하다.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자율적인 합의를 기반으로 하므로, 매입형처럼 대규모 국가 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없고, 상시 운영이 가능하다. 셋째, 매입형 조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용정보회사 등 외부 추심업자 위탁의 우려가 없다. 신복위가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채무자 입장에서 채무조정 과정을 신뢰할 수 있다. 넷째, 상담 중심의 채무조정을 지원한다. 상담을 통해 채무자의 상환능력과 취약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밀착 지원함으로써, 채무 탕감에 머물지 않고 채무자의 실질적인 경제적 재기와 자활을 돕는다.
물론 합의형 채무조정 역시 지속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상환능력을 보다 정교하게 반영한 감면 체계 마련과 채권 매각시 신용상 불이익 해소, 금융회사의 참여 유도를 위한 자산 건전성 분류 기준 개선 등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궁극적으로 상시적 협약·'합의형 채무조정' 체계의 확립은 채무자에게는 재기의 희망을, 금융기관에는 시장 원리에 기반한 채권 회수와 사회적 책임 이행의 기회를, 그리고 국가에는 재정 부담 경감과 금융시장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해법이다. 정책당국이 이러한 채무조정 정책 방향을 견지하면서 금융업계와 긴밀히 협력해 관련 인프라를 확충해 나갈 때, 우리 사회는 가계부채 위협으로부터 한층 안전해지고 더 강건한 금융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욱 서울여대 명예교수·전 행복기금이사장
이 시간 핫클릭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