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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필리버스터' 무용론…'취지 살리자'는 개정안 논의는 1년째 0회

국민의힘 '방송3법' 저지 위한 필리버스터 예고
범여권, '180석 표결'·'회기 쪼개기'로 무력화 가능
'표결 중단' 180→200석, '회기 변경' 150→180석
필리버스터 개정안 나왔지만 1년간 논의 없어
野 "거부권 잃은 만큼 필리버스터 중요성 커져"
"필리버스터 취지 살리기 위한 논의 재개돼야"

해묵은 '필리버스터' 무용론…'취지 살리자'는 개정안 논의는 1년째 0회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이 2024년 8월 1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이 단독 의결한 '전국민 25만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 특별조치법) 상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시작하자 민주당 의원들이 이석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입법 드라이브를 막아내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여당 시절 윤석열 전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해 단독 처리 법안을 수성했지만 소수야당으로 전락하면서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유일한 '최후의 저지선'이 됐다. 그러나 민주당이 '회기 쪼개기'를 통해 편법으로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할 수 있는 만큼, 제도 취지를 살리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번 국회에서는 단 한 차례도 테이블에 오르지 못했다.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내달 4~5일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준비하고 있다. 거부권을 상실한 국민의힘으로서는 최후의 저지 수단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소속 의원 전원에 필리버스터를 위한 비상대기령을 내린 바 있다.

필리버스터는 토론에 나설 의원이 더 이상 없거나, 회기가 종료될 때까지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회법에 따라 보장된 제도다.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소수당의 유일한 저항책으로서 도입됐다. 헌정사상 최초의 필리버스터에 나선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1964년 야당 의원 시절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 19분간의 토론에 나선 바 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다수의 의석으로 우리의 의사를 유린하고 우리는 소수로서 말이라도 입 벌려 놓고 하자는 것을 봉쇄하면 차라리 우리를 전부 몰아내고 여러분끼리 총회를 하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필리버스터는 재적의원 5분의 3(180석) 이상이 토론 종결을 요구할 경우 즉각 중단되도록 설계돼 있다. 민주당(167석)과 조국혁신당(12석), 진보당(4석), 기본소득당(1석), 사회민주당(1석) 등 범여권이 총동원되면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할 수 있는 셈이다.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이후 14번의 필리버스터가 있었지만 8차례 표결을 통해 종료됐다. 이번 국회(22대)에서만 6회다.

문제는 의원 과반(150석)으로도 필리버스터를 종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기를 여러 번으로 쪼개는 소위 '살라미 전술'은 150석 만으로도 가능하다. 국회 운영위원회에 따르면, 실제로 민주당은 20대 국회 이후 4차례 '회기 쪼개기'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2020년 12월 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이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3시간 1분만에 종료됐다.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의힘에서는 소수당의 의견 제시 기회를 강화하기 위해 필리버스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6월 필리버스터 강제 종료 요건을 180석에서 200석으로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은 같은 해 8월 '필리버스터 요구가 제출된 이후 회기를 결정·변경하려면 180석 이상의 찬성 의결'을 필요로 하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운영위는 검토보고서에 주 의원의 법안에 대해 "무제한토론이 당초 도입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과반 의석을 차지한 다수당이 종결동의를 우회해 일방적으로 무제한토론을 종결시키는 것을 방지하고 소수파의 의견제시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법안은 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단 한번도 논의되지 못한 상태로 계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운영위원장을 독점하고 운영위 과반을 차지해 해당 법안이 테이블 위에 놓이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원내 관계자는 "다수결도 중요하지만 소수의 발언권을 존중하자는 취지로 필리버스터를 만들었지만 예전에 상상도 못했던 '회기 쪼개기'라는 꼼수로 무력화하고 있다"며 "편법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만들자는 취지로 법안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거부권까지 상실해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최후의 보루가 된 만큼, 필리버스터의 기존 취지를 살리기 위한 입법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다른 관계자는 "법안 발의 당시에도 '의회독재'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야가 뒤바뀌어 (필리버스터가) 더 중요한 수단이 됐다"며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haeram@fnnews.com 이해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