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한양대 물리학과 정문석 교수팀
메모리 동작 범위 58.5V… 정보 저장 특성 확인
인공지능 숫자 분류·체온 조절 모사 실험도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빛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고 인공 시냅스 반응을 일으키는 차세대 반도체 소자의 동작 개념도. 자외선 자극에 반응해 전류 상태가 변하면서 인공지능 학습과 뉴로모픽 연산이 동시에 이뤄진다. (그래픽=제미나이 생성)
[파이낸셜뉴스] 한양대 정문석 교수팀이 정보를 저장하고 빛을 감지하며, 빛을 이용해 학습 기능까지 갖춘 반도체 소자를 개발했다. 연구팀은 이 반도체가 정보를 저장하는 범위가 최대 58.5V에 이르는 것을 확인했으며, 빛에 반응해 신경세포처럼 신호를 주고받는 기능도 확인했다. 연구팀은 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에 활용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보를 저장하고 빛에 반응하는 반도체
이번 연구는 AI 연산에 필요한 전력을 줄이는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메모리는 정보를 저장하고, 연산 장치는 정보를 처리한다. 연구팀이 개발한 소자는 정보를 저장하는 동시에 빛과 전기 신호에 반응해 상태를 바꾼다.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과 처리하는 기능을 한데 묶는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반도체를 연구하는 분야가 뉴로모픽 반도체다. 뉴로모픽 반도체는 인간의 뇌가 정보를 기억하고 학습하는 방식을 모방한 반도체를 말한다. 뇌에서는 신경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자극에 따라 연결 강도를 바꾼다. 연구팀은 빛과 전기 신호로 반도체 소자의 상태를 여러 단계로 바꾸는 방식을 써서 이와 비슷한 작동 원리를 만들어냈다.
빛에 반응하는 성질은 빛으로 정보를 기록하거나 빛을 감지하는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이번 연구에서 실제 AI 제품을 만들거나 전력 절감량을 측정한 것은 아니다. 여러 기능을 하나의 소자에 구현하고, 앞으로 다른 반도체 기술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단계다.
■얇은 텔루륨을 산화해 소자 제작
연구팀은 비정질 텔루륨 산화물(a-TeO₃)을 반도체 소재로 사용했다. 텔루륨은 화학 원소의 하나다. 비정질은 원자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연구팀은 얇은 텔루륨에 자외선과 오존을 쬐어 산소 반응을 일으켰다. 이 과정을 거쳐 만든 텔루륨 산화물을 전류가 흐르는 통로인 채널로 사용해 반도체 소자를 제작했다. 이 소자는 p형 산화물 반도체에 해당한다.
반도체에서 전류를 운반하는 역할은 전자나 정공이 맡는다. 전자가 전류를 운반하는 반도체를 n형, 정공이 전류를 운반하는 반도체를 p형이라고 한다. 정공은 전자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하나의 입자처럼 다루는 개념이다.
산화물 반도체 연구는 그동안 n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p형 산화물 반도체는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관련 연구가 제한적이었다. 연구팀은 텔루륨을 산화해 만든 소재로 p형 반도체 소자를 제작하고, 이 소자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과 빛에 반응하는 기능을 함께 확인했다.
■정보를 얼마나 오래 기억할까
연구팀은 먼저 소자에 전기 신호를 가해 메모리 기능을 시험했다. 그 결과 메모리 동작 범위가 최대 58.5V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모리 동작 범위는 전압을 바꿨을 때 소자가 서로 다른 상태를 얼마나 뚜렷하게 나타내는지 보여준다.
소자의 상태가 뚜렷하게 구분되면 저장된 정보를 읽기 쉽다. 상태를 여러 단계로 나누면 한 소자에 여러 단계의 정보를 저장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번 소자에서 이런 방식의 정보 저장이 가능하다는 점도 확인했다.
정보를 기록한 뒤 상태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도 살펴봤다. 기본 실험에서는 서로 다른 저항 상태가 200초 이상 유지됐다. 추가 실험에서는 약 1만초까지 기록 상태를 관찰했다.
정보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지우는 실험도 진행했다. 기본 실험에서는 250회가 넘는 반복 과정에서도 서로 다른 상태가 구분됐다. 별도의 추가 실험에서는 1000회까지 반복했다. 소자가 반복적인 기록과 삭제 과정에서도 메모리 기능을 보였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소자가 빛을 얼마나 잘 감지하는지도 측정했다. 390㎚ 자외선을 비췄을 때 빛에 대한 반응도는 411A/W, 검출도는 2.6×10¹¹ Jones였다. 반응도는 빛을 받았을 때 전기 신호가 얼마나 크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검출도는 약한 빛을 감지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빛을 끈 뒤에도 전류가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이어지는 현상도 확인했다. 빛을 비추면 소자 안에 전하가 남아 전류가 흐르는 상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성질은 빛으로 소자의 상태를 바꾸거나 정보를 기록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숫자 학습부터 체온 조절 모사까지
연구팀은 빛을 이용한 인공 시냅스 기능도 시험했다. 자외선을 비추거나 전기 신호를 가하면 소자의 상태가 변했다. 자극의 조건을 바꾸자 전류가 흐르는 정도도 여러 단계로 높아지거나 낮아졌다. 전도도는 전류가 얼마나 잘 흐르는지를 나타내는 값이다.
이런 변화는 뇌의 시냅스가 자극에 따라 연결 강도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팀은 빛과 전기 신호를 이용해 소자의 상태를 바꾸면서, 인공 시냅스가 학습에 필요한 변화를 표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소자를 AI에 활용할 수 있는지도 살펴봤다. 연구팀은 손으로 쓴 숫자 이미지를 0부터 9까지 구분하는 AI 모델을 구성했다. 입력 뉴런 484개와 은닉 뉴런 100개, 출력 뉴런 10개를 연결했다. 입력 뉴런은 숫자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은닉 뉴런은 입력 정보를 처리한다. 출력 뉴런은 이미지가 어떤 숫자인지 분류한 결과를 나타낸다.
연구팀은 실제 소자의 작동 특성을 반영한 AI 모델을 만들었다. 이어 소자가 완벽하게 작동한다고 가정한 디지털 모델과 학습 결과를 비교했다. 두 모델은 손으로 쓴 숫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비슷한 흐름으로 학습했다. 실제 소자의 특성을 반영한 모델에서도 숫자를 분류하는 학습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결과다.
연구팀은 또 다른 반도체 소자와 결합해 뇌의 체온 조절 원리를 모사하는 회로도 만들었다. 한양대 연구팀이 개발한 p형 텔루륨 산화물 소자와 n형 이황화몰리브덴 소자를 함께 사용했다. 두 소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회로를 구성해, 한쪽은 냉각에 해당하는 반응을, 다른 쪽은 가열에 해당하는 반응을 맡게 했다.
논문은 섭씨 26도와 20도의 조건을 이용해 각각 냉각과 가열이 필요한 상황을 모사했다. 온도가 높은 조건에서는 냉각에 해당하는 반응을, 낮은 조건에서는 가열에 해당하는 반응을 나타내도록 했다. 이는 실제 사람의 체온을 조절한 실험이 아니라, 뇌가 온도 변화에 대응하는 원리를 전자회로로 흉내 낸 실험이다.
이번 연구는 p형 산화물 반도체 한 소자에서 정보 저장과 빛 감지, 인공 시냅스 기능을 구현했다. 연구팀은 여기에 AI 숫자 분류 실험과 가열·냉각 원리를 모사한 회로 실험을 더해 활용 가능성을 살펴봤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나노·재료 분야 국제학술지 '스몰(Small)' 제22권 53호에 게재됐으며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email protected]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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