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석굴암의 불상을 본떠 만든 일명 ‘부처빵’이 “불교를 모욕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빵 쇼핑백에 성경 구절로 추정된 문구가 적혔기 때문이다. 판매자측은 “그런 의도가 아니며 앞으론 성경 구절을 지우고 판매하겠다”고 해명했다. 18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경주 황리단길 명물로 알려진 부처빵의 포장지가 도마에 올랐다. 석굴암 불상을 본뜬 빵을 ‘ACTS 19:26’이라는 성경 구절을 적은 쇼핑백에 담아 판매한 것이 문제가 됐다. 부처빵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 제24호인 석굴암의 본존불 문화재를 모티브로 만든 빵이다. ‘꼭 가봐야 할 경주 3대 빵집’ ‘경주 여행 필수코스’ 등 으로 꼽히며 SNS에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불교 모욕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ACTS 19:26’은 성경 신약성서 사도행전 19장 26절로,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본존불을 형상화한 빵을 팔면서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성경 구절을 넣은 것이 불교를 모욕한 것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논란이 확산하자 부처빵 판매자는 SNS에 “부처빵은 빵일 뿐 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구절을 넣은 것이지 숨겨진 비밀 같은 건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나는 무교다. 불교는 불교라서 못 먹겠다 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라서 못 먹겠다고 해서 ‘사람이 만든 건 신이 아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있길래 포인트로 넣어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빵은 석굴암 본존불상을 형상화한 빵일 뿐 부처님을 모욕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전달하려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며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을 간과하고 너무 쉽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점 죄송하다는 말씀드린다”고 부연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1-18 05:38:32[파이낸셜뉴스] 승려 복장을 하고 DJ 뉴진 스님으로 활동하는 개그맨 윤성호의 싱가포르 클럽 공연이 결국 취소됐다. 19∼20일 뉴진 스님 공연을 열 예정이었던 싱가포르 클럽 업주는 "DJ(뉴진 스님)와 공연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취소 사실을 전했다. 그는 "DJ가 불교 요소가 포함된 2곡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며 종교적인 가사가 없는 곡으로 바꾸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공연을 취소하고 환불 처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윤성호는 삭발 머리에 장삼과 염주를 착용하고 승려 같은 모습으로 일렉트로닉 댄스 공연을 펼쳐 주목받았다. 국내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열린 연등놀이의 마지막 무대에 서는 등 불교계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해외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으나 그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지에서는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혔다. 말레이시아 클럽에서 공연한 이후 불교계 비판이 나와 추가 공연이 취소됐다. 싱가포르에서도 불교도연맹이 공연 불허를 촉구했고, 경찰도 클럽 측에 강력 조치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카시비스와나딴 샨무감 싱가포르 내무부 장관은 뉴진스님 공연과 관련해 "싱가포르 불교계에 모욕적인 것이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당국의 강경 대응에 클럽은 앞서 "종교 관련 요소가 전혀 포함되지 않도록 하고 공연을 열겠다"고 밝혔으나 윤성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됐다. wschoi@fnnews.com 최우석 변호사·법조전문기자
2024-06-01 16:23:02[파이낸셜뉴스] 'DJ뉴진스님'의 불교 모독 논란으로 싱가포르 공연이 무산될 뻔한 코미디언 윤성호가 종교적 언급 없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2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매체 스트레이츠타임스에 따르면 공연을 주최하는 '클럽 리치 싱가포르'는 내달 19일과 20일 예정되어 있던 윤 씨의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한다. 다만 종교적 내용을 포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클럽 측은 "이번 공연에서 복장이나 손짓, 노래, 가사, 물품 등 종교와 관련된 어떤 요소도 포함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종교 공연은 없지만, 여전히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경찰은 "클럽은 제공하는 모든 오락이 인종이나 종교, 민족 또는 국적에 불쾌감을 주거나 집단 간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없도록 보장해야 한다"며 "모든 위반 사항은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최근 싱가포르 불교 연맹의 요청에 따라 당국이 클럽에 조치를 요구한 이후에 나왔다. 앞서 싱가포르 불교연맹(SBF)은 싱가포르 당국에 뉴진스님의 클럽 공연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SBF는 "뉴진스님은 승려가 아니므로 승복을 입고 공연해서는 안 된다"며 "관계 당국은 불교 신자들에게 당혹감을 주지 않기 위해 공연을 허가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한 바 있다. K.샨무감 싱가포르 내무부 장관도 뉴진스님이 불교 구절과 도구를 이용해 공연이 진행될 경우 경찰이 조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샨무감 장관은 페이스북에 "우리 불교계에 모욕적인 일"이라며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불교는 싱가포르의 주요 종교 중 하나다. 2020년 싱가포르 인구 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의 싱가포르 주민 중 31.1%가 자신을 불교도라고 밝혔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5-23 20:31:57[파이낸셜뉴스] 대한불교조계종이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의 "과거 범죄를 저지르고 군대나 절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라는 발언에 대해 불교 폄훼라고 반발하며 공개 참회를 촉구했다. 19일 조계종은 의견문을 통해 "박태균 교수가 검증되지 않은 내용으로 불교를 폄훼했다"며 "승가를 모독한 사안에 대해 당사자의 공개 참회와 서울대학교 차원의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앞서 박 교수는 지난 16일 공개된 유튜브 채널 '3 PRO TV- 경제의 신'에 출연해 "1950년대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군대나 절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이곳은 경찰의 행정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조계종 측은 "1950년대에 출가한 스님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확인되지 않는다"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전혀 없이 하더라 식의 사실관계가 결여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박 교수의 발언은) 이 시기에 출가하신 조계종단의 여러 대덕 큰스님을 모욕하는 것임과 동시에 한국불교 전체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으로 많은 불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박태균 교수는 지성인의 발언은 철저한 자기검열과 책임 속에서 이뤄질 때만 가치가 있음을 다시 한번 성찰하고 본인의 불교 폄훼 발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참회해야 할 것"이라며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대학 구성원들의 반복되는 불교 폄훼에 대해 학교 차원의 입장과 재발 방지 대책을 공개적으로 발표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3-07-20 09:36:07[파이낸셜뉴스] "궁예 말년에 기병장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한 후 밤중에 함께 태조(왕건)의 집에 찾아와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이에 태조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가지고 와서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擁衛)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드디어 왕공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셨다'라고 소리를 외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뒤질세라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환호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 명을 넘었다. 궁예가 그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며 '왕공이 나라를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허사로다'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미복 차림으로 북문(北門)을 빠져나와 달아나니 나인들이 궁궐을 청소하고 새 왕을 맞이했다.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머물렀고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 먹다가 곧 백성들에 의해 맞아서 세상을 떠났다" -고려사 中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의 하나는 바로 '궁예'(弓裔)다. 드라마 등을 통해 애꾸눈과 미륵 관심법(觀心法)을 쓰는 궁예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돼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궁예만큼 말기와 최후가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폭군'(暴君)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완벽하게 덧씌워져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동안 왕건(王建)의 정변은 궁예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혁명'(革命)으로 받아 들여졌다. 왕건은 고려 '태조'(太祖)라는 위대한 역사의 승자가 됐고,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 일개 도적보다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맞는 역사의 패자가 됐다.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소위 '정사'(正史)는 이 점을 한없이 부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정사'만을 고집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것이 '승자'들의 관점 만을 기초로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기록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역사의 전후 맥락과 일부 근거들을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추정'해보고, 항간에서 기록한 역사인 야사(野史)와 민담(民譚) 등을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나가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이러한 측면에서 궁예의 석연치 않은 말기와 최후 행적, 그리고 궁예라는 인물과 왕건 정변의 본질 등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고 필요한 일이다. 정사에 나온 기록들과 몇 가지 단서들에 기반한 합리적 추정 등을 아우르며 해당 역사를 되돌아봤다. ■군웅 할거, 후삼국 정립 9세기 말, 통일 신라는 쇠퇴하고 있었다. 50년 가까이 지속된 지배층 간의 내란(內亂)으로 왕권이 크게 약화됐고, 전국 각지에서 군웅(群雄)들이 할거(割據)하며 독자 세력화를 진행했다. 다양한 군웅들 사이에서 단연 두드러진 인물은 궁예와 견훤이었다. 특히, 궁예는 (정사에 따르면) 신라의 왕자(서자) 출신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누구의 자식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어린 나이에 죽을 위기를 맞았고, 한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한 쪽 눈을 잃고 말았다. 이후 궁예는 10살이 될 무렵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했고, 자신의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했다. 이 시기 궁예는 불교 신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기초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즉, 추후 '미륵 부처'를 자처하며 세력을 다져나가는 정치적 방향성이 이 때 '태동'(胎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891년, 궁예는 마침내 세달사를 떠나 반(反) 신라 기치를 내세우는 죽주(竹州, 현재 안성시 죽산면)의 호족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만한 기훤은 궁예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궁예는 이듬해 기훤 곁을 떠나 북원(北原, 현재 원주)의 호족 양길 밑으로 들어갔다. 기훤과 달리 궁예의 능력을 알아본 양길은 궁예를 후하게 대접해줬다. 더욱이 별도 군사들까지 내줘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3000명이 넘는 군사들을 확보한 궁예는 병사 한 명 한 명을 자비롭게 대하며 큰 신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장군으로 추대가 되며 명주(溟州, 현재 강원도 강릉)에서 완전히 자립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부대 편제를 완료한 궁예는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우선 895년에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군현을 차지했고, 패서(浿西, 현재 예성강 이서 황해도) 지역의 호족들을 복속시켰다. 이 때 송악(松嶽, 현재 개성)의 유력한 호족인 왕건 가문이 궁예에게 귀부했다. 궁예는 이들에게 별도로 군사를 내줘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고, 왕건 가문은 출중한 능력 및 인지도 등을 바탕으로 여러 성들을 점령해 궁예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했다. 자신감이 높아진 궁예는 898년에 수도를 기존 철원(鐵原)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비로소 궁예 세력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한편, 궁예의 세력 확장을 우려스럽게 지켜보던 양길은 궁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길의 공격을 이미 예측했던 궁예는 이를 여유롭게 막아냈고, 오히려 역공을 가해 양길을 패배시켰다. 이에 따라 궁예는 양길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까지 장악했고, 그 세력 범위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까지 미치게 됐다. 통일 신라의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궁예는 마침내 901년 '고려'(高麗)를 건국했다. 이 때의 국가 명칭은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도 부른다. 이에 앞서 900년에는 신라의 하급무관 출신이었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비로소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궁예의 고려 건국은 무엇보다 고구려 계승을 명확히 표방한 것이었고, 반 신라 기치를 드높인 것이었다. 견훤의 후백제 역시 백제 계승을 표방했고,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신정(神政), 반감의 증폭 고려를 건국 한 이후 궁예는 한동안 눈부신 성과들을 달성해나갔다. 정사에 따르면, 우선 903년에 궁예는 왕건을 시켜 금성(錦城, 현재 나주)을 공격, 점령했다. 나주는 후백제의 배후에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듬해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신라의 제도를 모방해 '광평성'(廣評省) 등을 설치하며 관제를 정비했다. 광평성은 내정을 통괄하는 최고중앙관서였고, 그 밑에 병부(兵部), 대룡부(大龍部), 수춘부(壽春部) 등을 둬 각각 사무를 분담했다. 특히, 광평성이 신라 시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귀족들의 회의체인 '화백'(和白)을 모방한 것이라고 봤을 때 이를 통해 국정에 호족 세력들의 입김이 만만치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즈음 후삼국 통일 전쟁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공주의 장군 홍기가 투항하기도 했다. 이후 905년에 궁예는 다시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고, 죽령의 동북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패서의 지배 구역에 대한 구체적인 조정을 통해 지배권을 확립한 결과 그 주변부에 있는 대동강 유역 호족들도 귀부하게 됐다. 이듬해인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沙火鎭, 현재 상주)을 점령함으로서 신라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909년에는 수군(水軍)을 통해 후백제 지역에 있던 진도 등을 점령했고, 3년 후에는 나주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후백제보다 우위에 서게 됐다. 이처럼 잘 나가던 궁예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은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바꾼 이후였다. 정사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궁예는 자신을 '미륵 부처'로 자처하며 본격적으로 '신정(神政)적인 전제주의(專制主義)' 정치를 행한다. 자신은 물론 아들들까지 신격화했고, 강론이나 행차할 때 그리고 복장 등에 있어서 미륵 부처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심법'(觀心法)이라는 전지(全知)적 수단을 동원해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고 공포를 유발했다고 전해진다. 관심법은 상대방의 몸가짐이나 얼굴 표정, 얼굴 근육의 움직임 따위로 속마음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궁예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위기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 대표적인 승려였던 석총은 궁예의 강설을 괴담(怪談)이라고 비난했다가 철퇴에 맞아 죽었고, 심지어 궁예의 부인인 강씨와 두 아들들도 관심법에 걸려 처참하게 살해됐다. 왕건 역시 반역의 혐의를 받았지만, 책사인 최응의 기지로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더욱이 전쟁 수행 등을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민생이 어려움에 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거병(擧兵)한 후 상당 기간 자애로운 지도자의 이미지를 가졌던 궁예가 어느새 정신적으로 미친 '폭군'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호족, 교단 승려들, 유학자들, 그리고 백성들이 궁예에게서 등을 돌렸고, 궁예 정권은 종간, 이흔암 등 특정 소수 세력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의 대안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의 영웅이자 호족 세력의 '거두'(巨頭)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이 급부상하게 된다. 실제로 궁예 정권 말기에는 궁예의 쇠퇴와 왕건의 부상을 예언하는 '도참'(圖讖) 사상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왕건 정변 마침내 궁예의 폭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일단의 장수들을 중심으로 정변에 대한 모의가 시작됐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다. 사실상 왕건의 최측근들이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궁예를 폐위(廢位)하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한 후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들의 뜻을 전달했다. 때는 918년 6월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처음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이를 왕에 대한 배신으로 봤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의 부인 유씨(추후 신혜왕후)가 밖에서 엿들은 후 손수 갑옷을 챙겨와 왕건에게 말했다.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 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義憤)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에 설득된 왕건은 갑옷을 입고 장군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정변을 단행했다. 정사에 따르면, 정변이 일어났을 때 왕건의 군사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들도 궁궐 문 앞에 모여 북을 두드리며 궁예를 끌어내자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어 정변 소식을 전해 들은 궁예는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않고 미복 차림으로 궁궐 북문(北門)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궁예는 얼마 안 가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됐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궁예는 비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왕건은 고려의 '태조'(太祖)로 등극하게 된다. ■궁예 진위 논란 그런데 궁예의 말기와 최후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의 핵심은 궁예가 정말 미쳐버린 폭군이었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사에 따르면 궁예는 초·중기에는 어진 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다가,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해 민심을 잃었고 신하와 백성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 세력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그 세력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전임자와 그 추종 세력을 왜곡하거나 격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 역사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 사람들은 이 기록을 '정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 할 때 고려 왕조 및 왕족들에게 이 같은 공격을 가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궁예에게도 적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임자였던 궁예를 '인격 말살'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같은 추정에 기반해 궁예에게 유리한 주장 및 근거들이 적지 않게 제기된다. 우선 궁예가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폭정을 일삼았고, 이에 신하들이 정당한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부터가 의문이다. 한 때 살아있는 부처로까지 추앙받던 인물이 일순간 미치광이 폭군이 되는, 극과 극을 오가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에 따라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예의 왕권 강화 노력 및 호족 세력 등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고, 여기에서 궁예가 패배해 왕위에서 쫓겨남에 따라 역사에서 평가절하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궁예가 901년에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호와 수도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궁예는 한강 하구와 인접한 요충지인 송악을 버리고, 굳이 물길이 희박하고 내륙 깊숙이 위치해있는 철원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송악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입지를 갖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면에는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원 천도 직전에 설치했던 '광평성'에서도 이와 관련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적'(政敵)인 호족 세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 벗어나 궁예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 기반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해 이른바 '새판 짜기'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반면, 궁예와 달리 기득권 세력인 황해도 호족 등에게는 철원 천도가 크게 불리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근거지가 수도에서 멀어지면서 이전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권이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궁예가 철원에 왕궁을 지으면서 호족 세력이 소유한 자금과 노동력 등을 대거 징발함에 따라 궁예에 대한 호족 세력의 반감은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강하게 표방했던 고구려 계승 및 '북진'(北進) 정책 기조도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호족들에게는 부담이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궁예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호족 세력의 기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관심법'도 왕권 강화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자 전략으로 동원된 측면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호족 세력은 궁예의 정책 기조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왕건을 앞세워 '찬탈'(簒奪)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잠재적 대권 주자였던 왕건은 황해도 송악에 기반해 있는 호족이었고, 궁예가 죽였다고 하는 왕비 강씨 역시 황해도 신천의 호족 딸이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호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취한다. 궁예의 최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앞서 언급한 정사에는 궁예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양길 휘하에 있는 평장군일 때는 '맹장'(猛將)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줬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던 궁예가 그렇게 맥 없이 무너졌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더욱이 궁예의 추종 세력이 남아있었던 만큼, 여차하면 그쪽으로 몸을 피해 반격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는 정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담겨있다. 바로 궁예가 왕건에게 크게 '항전'(抗戰)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와가 발견되기도 한 포천의 보개산성(寶蓋山城)은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결전을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또한 철원의 명성산은 '울음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궁예의 친위부대가 왕건군에 밀려 최후의 보루로 삼고 항전하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궁예가 친위부대를 해산하면서 슬피 울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先覺大師碑)는 지금까지의 추정들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선각대사비는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 꼽히는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을 기록해 둔 비석이다. 이 비석은 궁예와 왕건이 죽은 후인 946년(정종 1년)에 건립됐다. 다시 말해 고려 초에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후삼국 통일 과정과 고려 건국 비화도 담겨져 있는데, 왕을 뜻하는 의미인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금상'은 '왕건'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도대체 '대왕'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 지가 논란이었다. 처음에는 이 역시 왕건을 지칭하는 것이란 주장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궁예를 지칭한다는 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금상과 대왕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적어도 고려 초까지는 궁예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대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대왕에서 폭군으로 변질된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더욱이 이 비석에는 912년 대왕(궁예)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성(나주)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나주는 영산포 뱃길을 통하는 서남해안 지역의 물류 중심지였다. 이 곳을 손에 넣는 것은 후삼국 통일 전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그동안 나주 정벌은 왕건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알려졌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 등에는 궁예가 직접 참전한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선각대사비의 내용을 기초로 하면, 나주 정벌은 왕건이 아닌 궁예의 업적이고, 기실 '정복군주'로서 궁예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결국 후대 사람들이 궁예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인멸'(湮滅)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언급한 주요 내용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몇 가지 단서들에 기반해 도출한 '추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전후 맥락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추정들이다. ■포용·통합 리더십, 후삼국 통일 918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궁예의 고구려 부흥 및 북방 진출 의지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왕건은 잔존하고 있던 김순식, 이흔암 등 궁예 추종 세력을 척결하고, 조세 경감과 토지 제도 개선, 빈민 구제 등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한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호족들을 궁예처럼 적대하는 것이 아닌 회유,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호족 세력과의 '정략 결혼'이었는데, 이에 따라 왕건은 무려 29명이나 되는 후궁들을 거느렸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왕건은 이듬해 1월 다시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고, 후삼국 통일을 놓고 후백제의 견훤과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한다. 당시 후삼국 통일전쟁 과정에 있어 왕건이 남다르게 표방했던 정책은 호족 세력에게 사용했던 '포용' 정책이다. 우선 왕건은 신라를 대하는데 있어 전임자였던 궁예 및 후백제의 견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궁예는 신라를 이른바 '멸도'(멸망해야 할 도시)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왕자였던 자신을 버렸으니 개인적인 원한도 상당했을 것이다. 신라의 하급무관 출신이었던 견훤 역시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왕건은 기본적으로 신라라는 나라를 인정했고, 일부 신라 관제 차용과 포로 반환 등 유화적인 노선을 택했다. 특히, 927년에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경주)을 공격했을 때에도 왕건은 신라의 도움 요청에 적극 화답하며 대규모의 지원군을 신라로 파견했다. 하지만 강력한 견훤의 군대는 서라벌을 마음대로 유린했고,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경애왕(景哀王, 제 55대 왕)을 살해했다. 이어 왕비를 모욕하고 허수아비 왕인 경순왕(敬順王, 제 56대 왕)을 세웠다. 더 나아가 견훤의 군대는 공산(公山, 현재 대구 달성군 팔공산)의 동수(桐藪)에서 왕건의 지원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왕건의 충신이었던 신숭겸, 김락 등이 전사했고, 왕건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비록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완패했지만, 신라와 경순왕의 확고한 지지 및 신뢰를 보장받게 된다. 이것이 발판이 돼 추후 935년에 경순왕은 고려에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왕건은 심지어 견훤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산 전투 이후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을 '상부'(上府)로 우대할 것을 요구하는 등 기고만장했다. 한동안 통일 전쟁의 주도권은 견훤의 후백제에게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의 고려군은 930년에 벌어진 고창(古昌, 현재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왕건은 운주(運州) 전투에서도 승리해 이북 30여 성을 차지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즈음 전세가 기울고 노쇠해진 견훤은 자신의 막내아들인 금강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해 첫째 아들인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이 들고 일어나 금강을 살해했고,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켰다. 아들들에게 버림을 받은 견훤은 어쩔 수 없는 자구책으로서 몰래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왕건은 견훤이 투항해오자 과거에 견훤이 요구했던 존칭인 '상부'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견훤을 환대해줬다. 과거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 의해 자신의 충신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왕건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국의 수장이었던 견훤마저 품었다. 이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 정벌에 효과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이 때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이전에 자신들의 왕이자 후백제의 건국자였던 견훤이 고려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내 936년에 벌어진 일리천(一利川, 현재 선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대파하며 후삼국 통일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됐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19년 만에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달성하게 됐다. 한편, 왕건은 불교 뿐만이 아닌 다양한 사상들도 포용했고, 최언위, 최은함, 최승로 등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도 했다. 아울러 후삼국 통일 전인 926년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한 발해(渤海)의 유민들을 대거 흡수했다. 결국, 고려라는 국가는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 과정 등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완전한 포용, 통합의 기반 위에 세워진 최초의 한민족 통일 국가였던 셈이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8-06 19:15:10스님들의 회의 사진에 자유한국당 로고를 합성한 이미지를 SNS에 올려 고소당한 소설가 공지영 씨가 대한불교조계종에 방문해 사과했다. 2일 조계종에 따르면 공씨는 이날 오전 9시 30분께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과 함께 서울 종로구 조계사를 찾았다. 공씨는 인문학 분야 인사들과 잘 아는 금강스님에게 먼저 연락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전해졌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삼배를 올린 공씨는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이동해 중앙종회 종립학교관리위원회(종관위) 위원장 혜일스님 등을 만나 사과했다. 공씨는 "합성사진인지 몰랐고, 생각 없이 퍼온 사진과 가볍게 올린 글로 누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공씨에 대해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작가라는 직업상 영향력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해달라. 이 일을 계기로 불교계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혜일스님과 중앙종회 사무처장 호산스님은 공씨가 문제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자 명예훼손, 모욕 등의 혐의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고소장을 냈다. 공씨는 이날 사과를 했지만 두 스님은 아직 고소를 취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지영 #스님 #한국당 #합성사진 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2019-10-02 19:16:44[파이낸셜뉴스] 대한불교조계종 혜일 스님과 호산 스님이 소설가 공지영을 고소했다. 27일 조계종에 따르면 중앙종회 종립학교관리위원장 혜일 스님과 사무처장 호산 스님은 26일 명예훼손과 모욕,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공지영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 스님들은 고소장에서 "공지영이 지난 20일 SNS에 '잠시 웃고 가시죠'라는 제목으로 2016년 9월 종립학교관리위원회 회의 모습을 변형한 사진을 올렸다"고 밝혔다. 이어 "조계종 최고 권위와 지위를 지닌 종정 예하 사진과 종단 승려와 신도가 지켜야 할 교시가 있던 곳에 자유한국당 로고를 삽입하고, 황교안 대표 사진을 넣어 한국당과 관련된 장면으로 오인하도록 했다"라고 전했다. 또 "저명한 소설가로 글의 파급력이 엄청난 피고소인은 합성사진임을 쉽게 알수 있음에도 모욕적 사진을 그대로 게재했고 조롱과 자극적인 표현으로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라면서 "종립학교관리위원회에는 이에 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고 게시물에 달린 댓글과 관련 반응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덧붙였다. 앞서 공 작가는 지난 20일 자신의 트위터에 '잠시 웃고 가시죠'라는 제목으로 스님들의 회의 사진에 '자유한국당' 문구를 합성한 사진과 한국당 관계자들의 삭발 사진을 나란히 올렸다. 해당 사진이 논란이 되자 공 작가는 26일 "사진이 합성이 아니라 현 조계종 스님들의 회의 장면이라고 한다. 사과드리고 곧 내리겠다. 상처받은 거 사과드린다"라는 트윗을 올리고 문제의 게시물을 삭제했다. #공지영 #조계종 #스님 #고소 sunset@fnnews.com 이혜진 기자
2019-09-27 19:08:06“와~ 이 하얀 단무지 진짜 맛있다. 스미마센 다꾸앙 모또 구다사이(すみません。たくあんもっとください)” 단풍이 아름답게 든 가을, 간단한 점심식사를 위해 일본 도쿄 치요다구에 위치한 뉴오타니 호텔의 일본 정식 식당을 찾았다. 식사에 맞춰 나온 하얀 무절임이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한입에 툴툴 털어 넣었다. 금새 한 접시를 비우고 더 먹고 싶어 열심히 번역기를 돌렸다. “무절임이 뭐지? 아, 다꾸앙!” 옹알거리는 수준의 일본어 덕분에 뭐든 더 시키려면 긴장을 먼저 하게된다. “실례합니다. 여기 단무지 좀 더 주세요.” 그러자 점원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곧 “아, 츠키다시(つきだし)”라고 혼잣말을 되뇌더니 총총 걸음으로 단무지를 가지러 간다. 일행 중 일본 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 넌즈시 조언을 해준다. 일본, 특히 고급 일정식 식당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다꾸앙’이라는 표현이 실례라고. ‘불교풍속고금기’에 따르면 다꾸앙은 일본의 대선사인 다꾸앙 스님이 처음 만들어 스님의 법명대로 불리게 됐다. 일본 전국시대 전쟁에 참여한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고민하던 스님이 무짠지를 만들다 실수를 해서 다꾸앙이 개발 됐다는 유래가 있다. 가난했던 전쟁 통에 주먹밥과 같이 빨리 먹기 위해 후딱 만든 음식이란 것이다. 고급 일정식 식당에서 정성을 다해 만든 무절임을 다꾸앙이라 부르는 것은 그 가게를 모욕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차라리 ‘츠키다시(식당 등에서 먼저 내는 작은 요리)’를 더 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예의바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더욱 친숙해진 단무지. 그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sijeon@fnnews.com 전선익 기자
2017-11-17 17:04:30'조계종을 김정은 집단에 비유했다'는 언론보도를 조계사 앞에서 해명하는 과정에서 신도를 밀어 넘어뜨린 혐의로 기소된 정봉주 전 의원(56)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오윤경 판사는 상해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의원에게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고 1일 밝혔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3월 '바른불교 재가모임' 창립법회에서 자신이 조계종을 김정은 집단에 비유했다는 취지의 언론보도로 논란이 일자 2주 뒤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신도 50여명이 기자회견을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 전 의원은 한 60대 여성 신도 A씨를 밀어 넘어뜨려 허리·손목이 부어오르는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 전 의원은 “A씨가 뒤따라오면서 폭언을 하고 몸을 밀치는 등 폭행을 가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A씨 어깨 부위를 1회 밀었던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당방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상해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다만 “신도들의 요구에 따라 기자회견 장소를 옮기기 위해 이동하던 중 A씨가 피고인을 뒤따라가며 계속해 등을 밀치자 이를 뿌리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며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정 전 의원에게는 조계사 신도 등에 대해 모욕을 한 혐의도 적용됐지만 재판 과정에서 신도들이 고소를 취소해 공소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모욕죄는 친고죄여서 피해자가 고소를 취소하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2016-08-01 08:22:45한나라당 방송개혁특위 위원장인 정병국 의원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부의 ‘민영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 도입방침에 정면 반발하고 있는 종교방송계의 사퇴요구에 직면하면서 정부여당과 종교방송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다. 기독교방송, 평화방송, 불교방송, 원음방송 등 종교방송사 사장단은 19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긴급회동을 갖고 “무분별한 방송광고체제 도입 방침을 철회하라”며 정 의원과 유 장관의 즉각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장단은 특히 정 의원과 유 장관이 최근 ‘종교방송이 그동안 편안하게 살았다’ ‘종교방송은 군사독재의 잔재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각각 말하며 민영 미디어렙 도입의 당위성을 밝힌 것에 모욕감을 느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사장단은 “앞으로 사찰, 성당, 교회 등 각 교단별로 민영 미디어렙 도입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걸고, 대규모 집회,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등 강도 높은 반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경고했다. 사장단은 민영 미디어렙 도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민주당과도 협력해 저지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사장단과 국회 문방위 소속 민주당측 간사인 전병헌 의원과 최문순·서갑원 의원은 이날 회동에 참석해 간담회를 가진 뒤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앞으로 상임위와 정당 활동을 통해 종교방송이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방송의 다양성과 여론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건강한 발전 노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MBC 사장 출신으로 민주당 언론장악음모저지대책위 간사를 맡고 있는 최문순 의원은 이날 불교방송과 인터뷰에서 “광고요금을 방송광고공사로부터 통제받기 때문에 매년 물가 인상만큼 올라가지 못해 방송사들의 경영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시청률에 따라 광고요금이 결정되지 않는 체제가 자리를 잡고 있어 지금은 시간대에 따라 광고 요금이 결정이 된다”며 공익성을 무시한 민영 미디어렙의 도입을 반대했다. 최 의원은 민주당의 대안을 거론하면서 “언론사에 직접 타격을 주지 않는 중간광고를 우선 실시할 수 있다”면서 “중간광고 허용과 KBS 수신료 인상, 5년째 묶여 있는 광고요금의 인상 등 세가지에 대해 조치를 하면 모두 행복한 재원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rock@fnnews.com최승철기자
2008-09-19 13: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