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문화체육관광부가 옛 조선총독 관저로 쓰인 청와대 구 본관의 모형 제작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논란이 일자 국민의힘이 "검토되고 있는 모형물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조선 총독 관저 모형이 아니다"라며 "오해에서 비롯된 비판을 자제해달라"고 밝혔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당 간사인 이용호 국민의힘 의원은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체부의 청와대 구 본관 모형물 제작 검토에 대한 오해와 비판이 과도한 것 같아 문체위 여당 간사로서 입장을 밝힌다"며 "우선 청와대 구본관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형 모형물(미니어처)을 제작하려는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검토되고 있는 모형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철거한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조선총독 관저 모형이 아니다"라며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 이래 43년간 사용한 우리 대통령 집무실의 모형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참고로 지금 본관은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건립된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청와대 관람객 중 특히 2030 세대로부터 1993년 철거된 옛 본관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 업무보고에서 청와대 활용 방안 등을 담은 5대 핵심과제를 밝혔다. 이 가운데 구 본관 터를 복원해 모형 설립을 추진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1939년 준공된 구 본관은 조선총독 관저, 미군 사령관 관저로 쓰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경무대로 활용됐으며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철거됐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조선총독 관저로 쓰이다 1993년에 철거된 옛 본관 모형을 복원하겠다니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인지 의문"이라며 "이러다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모형도 복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청와대를 제대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망치려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문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실제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30년 전 모습을 관람객에게 안내하기 위해 작은 모형(미니어처)의 제작을 검토한 것임을 알려드린다"라고 해명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2-07-24 22:30:30기억과 기록으로 다시 짓는 한국의 집 / 오일환 외 / 한국문화재재단 조선 전기 사육신 중 하나인 박팽년의 집터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 해방 후 미8군사령관 관저로 사용된 후 '한국의집'이 되기까지 역사의 질곡을 함께하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지켜본 '한국의 집'에 대한 책이 나왔다. '한국의 집'은 박팽년의 집터 위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의 관저로 사용된 공간이자 해방의 소식을 처음 맞이한 뜻깊은 공간이다. 1945년 8월 15일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 선생을 관저로 불러 치안과 질서 유지를 담보로 협상을 진행했다. '한국의 집'은 해방의 역사를 내딛는 첫 번째 장소가 됐다. 해방 후 '한국의 집'은 주한미군정청이 관리하며 숙소 겸 미군의 위락시설로 활용됐고, 이 무렵부터 '코리아 하우스'로 불렸다. 이 책에는 지난 1980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한국의 집'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가 담겼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3-07-26 11:30:42[파이낸셜뉴스] 청와대 개방을 통해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물론 일반인들에 단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관저까지 모두 시민에 공개됐다. 시민에게 공개된 청와대는 곳곳에 한국적인 미가 녹아있으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멋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건축과 자연풍경을 전시한 박람회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외국의 유명 궁전이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가볍게 방문해도 충분히 좋지만, 알고 가면 더 재밌고 흥미로운 곳이 청와대다. 청와대가 자리한 북악산 남쪽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104년 고려 숙종 때는 북악산 아래 별궁을 짓고 남경으로 삼았다. 고려 남경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의 청와대 인근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됐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폐허가 되면서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말 고종 때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의 후원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다가 1991년 지금의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집무실을 옮기게 됐다. 이처럼 1104년 고려부터 시작해서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지금까지 청와대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권력자의 땅이었다. 그랬던 청와대가 이제 시민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서울관광재단은 지난 10일 국민에게 74년 만에 개방된 청와대의 건물들과 그 안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청와대 본관은 조선총독부의 관사를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1991년에 만들었다. 한옥에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15만여 개의 청기와를 얹었으며, 본관 앞으로는 대정원이라고 이름 붙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청기와는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어 조선 전기까지 궁궐 지붕에 쓰였던 기록이 남아있다. 청기와를 만들기 위해선 전략자산이자 화약의 핵심 원료 염초(질산칼륨)가 다량으로 필요했다. 자연적인 초석 광산이 없던 한반도에서 염초는 그 생산이 매우 어려웠으며 군사용으로도 늘 재고가 부족했다. 그만큼 청기와는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청기와는 창덕궁에 있는 선정전이 유일하다. 본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햇빛에 반짝이는 청기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현관 통로 지붕과 본관 건물의 지붕이 계단처럼 연결된 듯 보여 거대한 파도의 푸른 물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본관의 지붕에는 잡상 11개가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잡상이 9개가 있는데 청와대가 근정전보다 격이 더 높은 셈이다.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궁궐의 목조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한국적인 미가 담겨 있으면서도 팔작지붕이 중후한 느낌을 가미한다. 본관에서 소정원을 통해 관저로 향할 수 있다. 대정원이 넓은 잔디밭이었다면 소정원부터는 아늑한 숲이다. 정원 사이로 난 숲길이 아기자기하다. 숲의 나무들도 꽤 울창하여 햇빛이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숲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청와대 부속 건물 곳곳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되어준다. 자연을 통해 막힘없이 공간이 연결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방식인 차경(借景, 자연을 빌려 정원으로 삼는다)을 떠올리게 한다. 관저로 넘어가는 길에는 수궁(守宮)터가 있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는데, 조선총독부가 전각을 허물고 총독관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에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총독관사는 철거했고, 현재는 총독관사 현관 지붕 위에 장식으로 놓여있던 절병통만 옛 자리에 놓아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수궁터에는 수령이 700년이 넘는 주목이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고려 시대부터 이 땅을 지키며 격동의 대한민국을 바라봤을 나무인 셈이다. 절병통은 주목 뒤쪽으로 이어진 잔디밭 위에 놓여있으므로 주목을 먼저 찾는다면 절병통도 발견하기 쉽다. 수궁터를 지나 오르막길을 약간만 오르면 관저에 도착한다. 관저는 본관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ㄱ’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으로 마당이 있다. 마당 한쪽에는 사랑채인 청안당이 있으며, 관저 바로 앞에는 의무실이 있다. 청안당은 사랑채로 '청와대에서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관저와 마당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잠시나마 근심과 걱정을 잊고 마당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관저 뒤로 이어진 숲길로 난 데크를 통해 언덕으로 올라가면 청와대 내의 역사문화유산인 오운정과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오운정은 조선 고종 시대에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던 오운각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오운(五雲)은 ‘다섯 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드리운 풍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과 같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판은 어린 시절부터 붓글씨에 능통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자이다. 오운정 아래로는 짙은 숲이 펼쳐지고, 초록빛 나무 틈 사이로 청와대 관저와 종로 일대의 풍경이 얼굴을 내민다. 오운정을 지나 보물로 지정된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로 가는 길에는 시야가 트여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있으니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다.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여 9세기에 조각된 것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띤 부처님의 얼굴과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교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생김새가 멋스러워 ‘미남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본래 경주에 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서울 남산의 총독관사에 놓였다가 청와대 자리로 총독관사를 옮기면서 함께 이곳으로 왔다. 상춘재는 외국 귀빈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이다. 과거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이 있었던 장소였으나, 청와대 내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외국 손님에게 소개할 장소가 없었기에 1983년에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해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우리의 전통 가옥을 지었다. 상춘재 앞에는 120여 종의 나무가 심어진 녹지원으로 연결된다. 한옥과 숲을 동시에 감상하기 좋은 공간으로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상춘재에서 만찬을 진행했었다. 상춘재 위로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침류각이 있다. 침류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왔다고 한다.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 최고의 녹지 공간이다. 넓은 공간으로 구성 돼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들이 곳곳에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녹지원에는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는데 그 수령이 170년을 넘었다.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이자 출입 기자들이 상주하던 춘추관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 기록 기관이던 춘추관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춘추관 앞 잔디밭(헬기장)에는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청와대 개방 기간 중에는 간이 텐트와 빈백이 놓여있다. 알록달록한 간이 텐트가 찾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펼쳐져 풍경도 제법 좋다. 청와대 본관 쪽으로 돌아가 왼쪽으로 가면 영빈관이 있다.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 행사를 열었던 건물이다. 우리나라를 알리는 각종 민속공연과 만찬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쓰이거나 회의와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며 특히 앞의 돌기둥 4개는 화강암을 통째로 이음새 없이 만들어 2층까지 뻗어 있다. 정면에서 보는 영빈관은 웅장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빈관 앞쪽의 영빈문을 통해 나가면 청와대 담장 옆에 붙어 있는 칠궁으로 갈 수 있다. 칠궁은 조선의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의 신위를 모신 장소다. 조선의 왕과 왕비는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왕을 낳은 후궁 신주는 따로 모시는 공간을 만들어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며 효를 다했다. 1908년에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후궁의 사당들을 이곳으로 합치면서 모두 7개가 모였다고 하여 칠궁이라 이름 붙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의 신주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처럼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검소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지는 장소이다. 1.21사태 후 폐쇄됐던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고 북악산을 오르는 등산로 2개 코스도 공개됐다. 하나는 칠궁에서 출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 춘추관 뒤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두 코스는 중간 거점 장소인 백악정에서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 칠궁 방향 코스는 전체적인 길이는 좀 더 짧지만 가파른 계단 구간이라 다소 힘에 부치고, 춘추관 방향은 오르막길이지만 계단이 없이 경사가 급하지 않아 비교적 순탄한 편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백악정까지는 약 20분 남짓이면 다다르고, 백악정에서 다시 청와대 전망대까지 약 10분이 소요된다. 백악정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뒤쪽으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올라가는 코스를 지나면 어느 순간 광화문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직선 구간이 나온다. 청와대 아래로 자리한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의 탁 트인 풍경이 반긴다. 올라오는 길이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이 풍경을 보기 위해 1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서울의 새로운 조망 명소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2-05-18 08:48:19청와대. 890년 전 고려시대 국왕이 정사를 보던 남경의 이궁(離宮) 터였던 청와대는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장으로,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총독 관사로 사용됐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 사령부가 이용하다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을 바꿔 달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쓰이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옛 청와대 건물은 철거되고, 현재의 본관은 1991년 신축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근세기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들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해온 이곳이 '용산 시대'를 맞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후보지로 '광화문 외교부 청사'와 '용산 국방부'를 놓고 검토를 거듭한 끝에 국방부로 최종 확정했다. 윤 당선인은 '광화문 시대' 공약을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최소한의 경호조치에 수반되는 광화문 인근 시민들의 불편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반면 "용산 국방부와 합참 구역은 국가안보 지휘시설 등이 구비돼 있어 청와대를 시민들께 돌려드릴 수 있고 경호조치에 따른 시민들의 불편도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국방부 이전을 놓고 일부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윤 당선인이 청와대를 이전하려던 당초 취지가 '국민과의 소통'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감도 큰 게 사실이다. 윤 당선인은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 "일단 청와대로 들어가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벗어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도 '광화문 시대'를 공약했지만 청와대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결국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국민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1층에 프레스센터를 설치하고 미군부대 이전으로 남는 부지를 공원화해 국민과 소통을 강화할 계획이다. 윤 당선인은 "미군기지 반환시기가 6월쯤으로 예정돼 있다"며 "반환이 되면 즉시 시민공원으로 개방,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사 범위를 최소화하고 백악관처럼 낮은 펜스를 설치해 시민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겠다"고 설명했다. 공원화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반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기고, 대통령 출퇴근 시 기자들이 주요 현안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백악관 모델도 기대해 본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윤 당선인이 청와대 이전에 대해 국민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제다. 윤 당선인이 오는 5월 10일 취임식을 마치고 바로 입주해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안보, 예산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국민에게 청와대 이전의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아울러 청와대 이전 문제가 새 정부의 모든 정책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최근 한 경제단체가 발표한 국민이 새 정부에 원하는 최우선 과제가 '코로나19 극복'이었다는 것은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대목이다. hjkim@fnnews.com 김홍재 산업부장·부국장
2022-03-20 18:51:15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를 새 대통령 집무실로 정했다. 윤 당선인은 20일 기자회견에서 "5월 10일 취임식 마치고 바로 입주해서 근무를 시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새 집무실 명칭은 국민 공모로 정하겠다"며 "청와대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원래 광화문 대통령을 공약했다. 하지만 당선인 신분으로 보고를 받아보니 "광화문 이전은 시민들에게 재앙 수준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경호, 보안, 시민불편 등 여러 측면에서 광화문보다는 용산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광화문 정부청사로 이전할 경우 청와대 완전개방이 어렵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사실 청와대 이전공약은 '구중궁궐' 청와대를 나오는 게 핵심이다. 여러 면에서 용산이 낫다면 굳이 광화문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 청와대는 영욕의 역사를 뒤로한 채 머잖아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된다. 청와대 자리는 조선시대 초기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이곳에 일제가 총독관저를 지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이곳을 경무대로 사용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해방 이후 청와대는 70년 넘게 권부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서둔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 들어가서 근무하면 바쁜 일 때문에 진행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파기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취임사에서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윤 당선인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단"이라며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하는 제 의지를 헤아려 달라"고 말했다. '용산 대통령 시대' 개막을 앞두고 몇 가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청와대를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소통 강화다. 그런데 소통은 경호·보안과 반비례한다. 청와대를 나왔지만 소통에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당장 국방부 주변 재개발지역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윤 당선인과 인수위의 몫이다. 대통령실이 국방부 청사로 들어가면 연쇄이동이 불가피하다. 국방부는 옆 합참 건물로, 합참은 또 남태령 수도방위사령부 등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인원만 수천명에 달한다. 이 과정에서 안보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북한은 언제든 정권교체기 빈틈을 노릴 수 있다. 단 1초도 안보공백이 빚어져선 안 된다. 이전비용을 두고도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 최고 1조원까지 당선인 측과 민주당 간 편차가 크다. 윤 당선인은 '현 정부와 상의가 됐는가'라는 질문에 "예비비 문제는 협조 요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이전은 큰 틀에서 보수·진보정부 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신구 정부가 긴밀히 협조하기 바란다.
2022-03-20 18:51:06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 이전이라는 비장의 어퍼컷을 작렬시켰다. 권투선수에게 어퍼컷이란 결정타다. 청와대엔 아예 입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청와대라는 이름도 버릴 참이다. 입문 8개월의 정치 새내기가 휘두르는 쾌검이다. 왜 청와대 옮기기이고, 청와대 지우기인가. 묵은 정치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암덩어리이기도 하다. 백악산(북악산) 아래 청와대 터는 길과 흉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풍수지리학상 천하제일복지설과 천하제일흉지설이 엇갈린다. 고려는 이곳을 수도를 천도할 남경 왕궁 터로 정했지만, 조선은 궁궐로 쓰지 않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무학대사는 "백악산은 흙이 적고 뼈가 드러난 골산"이라면서 "이곳에 궁을 잡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왕위찬탈의 화가 일어나고, 200년 내외에 나라가 망할 위험이 있다"고 예언했다. 7대 세조의 왕위찬탈과 200년 후 임진왜란이 실제 일어났다. 청와대의 흉사는 건드리면 안되는 땅에 총독 관저가 들어오면서 비롯됐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를 짓고, 뒤에서 총독이 굽어보는 모양새를 노렸다. 해방 직후 군정장관 관사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경무대로 썼다.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으나 액운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본래 관저에서 100m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새 청와대 건물을 지을 때 옛 총독 관저 터는 조선인 풍수가 일부러 흉지를 찍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관저를 지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피살됐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하와이와 궁정동 안가에서 죽음을 맞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 뒷산에서 투신했다. 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감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청와대 이전 공약이 나온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가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처음 공약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세종시 이전을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과 2017년 대선 때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청사로 옮기겠다고 약속했었다. 왜 못 떠났나. 문 대통령은 취임 1년8개월 뒤 보안과 경호를 이유로 들어 공약파기를 선언했다. 구중궁궐이 주는 실리와 안락함을 택했다. 국민이 청와대 이전이나 해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탈권위와 불통 해소임을 간과했다. 개헌을 하지 않고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쳤다.청와대는 온갖 심리적 불안과 규제의 진앙지다. 백악관의 3배에 이르는 청와대가 경복궁·북촌·서촌·인사동을 잇는 올드타운의 복합문화벨트를 차단하고 있다. 청와대가 떠나고 백악산과 인왕산의 군사시설과 군사보호구역이 풀리면 서울 강북엔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입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제왕적 행태는 그대로 둔 채 공간만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가 요체다. 보안과 경호를 들먹이며 사사건건 반대하던 경호처와 경찰, 군이 바로 꼬리를 내리지 않는가. 이제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온갖 권위주의의 종말을 즐길 때다. P.S. 1. 어퍼컷에 재미가 들린 선수는 한 방을 노리다가 판정패할 확률이 높다. 2. 청와대 이전에 풍수를 논하는 것은 몰지각한 시대착오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
2022-03-16 18:30:55[파이낸셜뉴스] 최초는 언제나 마음을 뜨겁게 달굽니다. 최초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니까요. 역사 속 대통령들은 어떤 '최초' 기록을 남겼을까요? 1. 경무대 시대는 저물었소, 이제 청와대의 시대올시다!-'청와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윤보선 대통령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 '청와대(靑瓦臺)'. 외관과 이름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마치 이름을 먼저 정한 후 건물을 지은 것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사실 청와대라는 이름은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로, 광복 이후 미군 군정 관저로 사용하던 곳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며 새롭게 이름 지었습니다. 이름은 '경무대(景武臺)'. 경복궁의 '경'과 신무문의 '무'를 따온 것이죠. 안타깝게도 경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제2대,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하는 '독재의 산실'로 여겨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조선총독부 협력 인사 처벌을 반대하거나,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3·15 부정선거를 일삼는 등 독재를 마다치 않은 덕입니다. 이에 제4대 대통령에 오른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경무대라는 이름 자체를 삭제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청와대'라는 이름을 붙였죠. 미국 대통령의 관저, 백악관(화이트 하우스, The White House)처럼 건물의 외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직관적인 이름으로요. 그 이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대통령 관저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2. "재인아 그래서 너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 -김정숙 여사 曰-국내 최초, CC 출신 대통령 부부로 거듭난 두 청춘의 이야기 제17대 문재인 대통령은 경희대학교 법학과 72학번,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같은 학교 성악과 74학번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CC(Campus Couple)' 출신 부부인 것이죠. 서로를 향한 애정과 지지를 꾸준하게 드러낸 두 사람은 국민들이 엄마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드라마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를 자랑합니다. 김정숙 여사는 대학 축제에서 소개로 만난 문재인 대통령의 첫인상이 퍽 실망스러웠다고 했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대표 미남 배우 '알랭 드롱'을 닮았다고 들었건만, 후줄근한 모습으로 털레털레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성적 감정이 들지 않아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에 그쳤다고 하죠. 하지만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건을 겪으며 사랑의 싹을 틔우게 됩니다. 1975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던 문재인 대통령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는데요. 눈을 떠보니 김정숙 여사가 자신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던 것이죠. 이후 김정숙 여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강제 징집으로 특전사에 배치될 때,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할 때도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결혼에 골인했죠. 김정숙 여사는 문재인 대통령과 결혼한 것을 두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음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칼바람이 아닌 따뜻한 태양이었어요-우리나라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 Nobel)의 유언으로 탄생했습니다. 1901년부터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경제학, 문학, 평화 6개 부문에서 인류 문명 발달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해 상을 수여합니다. 수상자로는 방사능 원소를 발견한 과학자 마리 퀴리, 「노인과 바다」 등 희대의 명작을 남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프리카 원주민 의료 질을 향상한 의사이자 선교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0일, 우리나라에서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및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특히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펼친 햇볕정책은 수상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햇볕정책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드는 것은 강한 바람(강경 정책)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유화 정책)이라는 이솝우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당시 북한은 과도한 군비 지출, 김일성 주석 사망, 식량 위기가 맞물린 상황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상황이 혹한기나 다름없었죠.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개혁을 통해 개방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교류와 협력을 적극 확대했습니다. 포용 정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인데요. 남북한 비료 협상, 정주영 명예회장 북한 방문,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4. 때로는 자랑스러웠고, 때로는 부끄러웠던 최초의 기록 -최초 여성 대통령 박근혜, 최초 탄핵에 이르기까지 2016년 초겨울, 광화문 광장에 심지처럼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촛불을 든 국민이 모였습니다. 국민은 외쳤습니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나라를 이끌겠다는 포부를 품고 제18대 대선에 새누리당 대표로 출마했죠. '부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과 유력한 '여자' 후보라는 사실이 세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결국 그는 문재인 당시 후보를 이기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에 이어 청와대에 입성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기 약 1년을 앞둔 시기, 논란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정유라 씨 특혜 고발 사건이었습니다. 정유라 씨가 대통령 최측근인 최순실 씨의 자녀라는 이유로 부정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국정을 둘러싼 비리가 속속 공개됐죠. 전국은 충격에 휩싸였고, 국민은 각자의 자리에서 화(火)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에 탄핵소추안이 타결됐습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스럽게 장식했던 그, 초라한 기록을 남기며 청와대를 떠나야 했습니다. '최초'를 이루며 나아가는, 욕심 있는 민족 '대한민국'-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앞서 소개한 이야기 외에도 우리나라 역사에는 다양한 '최초'의 사건이 존재합니다. 물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죠. 수많은 최초가 모여 지금이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지난날 이뤄낸 최초의 순간들을 기억하나요? 여러분도 최초의 기록을 가진 단 한 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cyj7110@fnnews.com 조예지 기자
2021-12-16 09:36:47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부산시는 부산 서구에 위치한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6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제546호)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이로써 부산시는 부산 동래 패총, 부산 금정산성, 부산 동삼동패총, 부산 복천동고분군, 부산 연산동고분군을 포함해 총 6개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을 보유하게 됐다.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1926년 8월 건립됐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남 도지사 관사로 주로 사용됐다. 이곳은 한국전쟁 시절 부산이 피란수도로 선정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관사에 기거하면서부터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환도한 이후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하면서 부산시에서 이 건물을 인수했다. 1984년 6월 부산시는 이 건축물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한국전쟁 시절 피란수도 유물을 전시하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단장해 개관했으며, 2002년 5월에는 부산시지정 기념물 53호로 지정해 관리해 왔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관사로서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목조 2층 건물이다. 1920년대 남한지역에 건립됐던 최대 규모의 도지사 관사로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지금까지 부산에 소재한 사적은 선사와 고대의 유적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근대건축물이 사적으로 지정됨으로써 부산 근현대 건축물들의 문화재적 가치를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부산 근현대사의 중요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부산시 관계자는 "시는 한국전쟁 시절 피란수도 부산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번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사적 승격으로 향후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sr52@fnnews.com 강수련 기자
2018-11-06 17:45:57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부산시는 부산 서구에 위치한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6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제546호)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부산시는 부산 동래 패총, 부산 금정산성, 부산 동삼동패총, 부산 복천동고분군, 부산 연산동고분군을 포함해 총 6개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을 보유하게 됐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1926년 8월 건립됐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남 도지사 관사로 주로 사용됐다. 이곳은 한국전쟁 시절 부산이 피란수도로 선정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관사에 기거하면서부터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환도한 이후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이전하면서 부산시에서 이 건물을 인수했다. 1984년 6월 부산시는 이 건축물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한국전쟁 시절 피란수도 유물을 전시하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단장해 개관했으며, 2002년 5월에는 부산시지정 기념물 53호로 지정해 관리해 왔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건립한 관사로서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목조 2층 건물이다. 1920년대 남한지역에 건립됐던 최대 규모의 도지사 관사로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산에 소재한 사적은 선사와 고대의 유적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근대건축물이 사적으로 지정됨으로써 부산 근현대 건축물들의 문화재적 가치를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부산 근현대사의 중요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부산시 관계자는 "시는 한국전쟁 시절 피란수도 부산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번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사적 승격으로 향후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sr52@fnnews.com 강수련 기자
2018-11-06 09:30:46[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지만 지난 114년간 군사기지 등으로 사용되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금단의 땅 '용산미군기지'가 일반에 공개된다.국토교통부는 2일 서울시와 함께 용산미군기지 내 주요 장소를 버스로 둘러볼 수 있는 '용산기지 버스투어'를 시작해 연말까지 총 6차례 진행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용산미군기지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용산 일대를 조선주차군사령부의 주둔지로 사용한 후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왔다. 또 2005년 용산기지의 국가공원 결정 이후에도 미군이 현재 사용중인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로 국민들이 용산기지를 직접 들어가볼 수 없었다.그러나 국토부는 국방부, 서울시, 미군과 협의를 거쳐 미군의 부지반환 이전이라도 일반 시민이 용산기지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용산기지 버스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용산기지 버스투어는 사우스포스트(SP)벙커를 시작으로 121병원(총독관저터), 위수감옥, 둔지산 정상, 주한미군사령부(한미연합사령부), 한미합동군사사업무단, 병기지창, 남단, 드래곤 힐 호텔까지 오는 코스로 구성됐다. 총 9㎞ 거리를 돌면서 주요 거점에 하차해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다. 출발지인 SP 벙커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방공작전실로 사용되던 건물로 광복 이후 미7사단 사령부의 사무실로 이용되다 6.25전쟁때는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상황실로 사용됐다. 121병원은 과거 일제강점기 용산 총독관저 부지였다. 용산 총독관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제2대 조선총독까지 오른 하세가와가 건설한 유럽풍의 초호화 건축물이다. 6.25전쟁 때 상당부분 파괴됐다. 정부는 기존 121병원을 해체하고 총독관저 터 및 그 앞에 위치했던 정원을 복원하는 등 문화시설과 수경시설을 배치할 계획이다. 위수감옥은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군 감옥으로 1909년에 완공돼 감옥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에는 이태원 육군형무소로 사용돼왔다. 정부는 감옥의 역사를 전시하는 용도를 포함해 문화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주한미합동 군사업무지원단 건물은 원래 용산기지 내 일본 육군 장교들이 숙식을 했던 곳으로 1908년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 아래 줄곧 장교관사로 사용되다 해방 직후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덕수궁에서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군 대표단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던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또 병기지창은 일본군의 무기 및 탄약을 보관하던 곳으로 용산역과 연계해 인근이 육군창고와 더불어 일제시기 병참기지의 핵심이었던 곳이다. 남단은 성저십리에서 가장 오래된 제례관련 시설이다. 이곳은 1456년 조선 세조2년에 원구단을 정비하고 1457년 원구서라는 관청을 만들어 제천례를 올렸다. 현재 일부 유구들이 남아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2018-11-02 17: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