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1988년으로 거슬러간다. 서울 역삼동 자동차정비센터 건물 2층 진수인 선생의 무용학원에 구정초 5학년 김지영이 렛슨을 받고 있다. 진 선생을 잘 아는 국립발레단 무용수 최태지는 우연히 그곳을 들러 김지영을 봤다. 정말 예쁜 아이구나, 최태지는 한동안 눈을 못뗐다. 3년 뒤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 공연에서 최태지는 키트리 역을 맡았다. 그때 예원중 2학년 김지영이 큐피드로 나왔다. 이 무대가 김지영의 생애 첫 발레 데뷔였다. 훌쩍 세월이 흐른 1997년. 30대 최연소 단장으로 국립발레단을 2년째 이끌던 최태지 앞에 러시아 명문 발레학교 바가노바 졸업생 열여덟살 김지영이 서 있다. 당시 다들 대학을 가라고 권했건만 김지영은 과감히 프로무대를 택했다. 그해 국립발레단에 입단, 바야흐로 한국 발레계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마스크를 쓰고 두 사람을 만났다. 지금 최태지(61)는 광주시립발레단장, 김지영(42)은 경희대 무용과 교수이자 여전히 무대를 누비는 현역 발레리나다. 최 단장과 김 교수는 18∼20일 광주시립발레단이 20년만에 올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을 앞두고 주말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김 교수는 오로라 역으로 4회 공연 중 2회차에 특별캐스팅됐다. 지난해 국립발레단을 퇴단한 이후 대극장 전막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는 이들에게 힐링의 장소인 모양이었다. "광주 가는 기차에 앉아있으면 그저 편안합니다." 최 단장의 말에 김 교수는 적극 공감했다. 광주시립발레단에 타지 출신 수장은 최 단장이 최초다. 2017년 단원들 투표 결과 높은 지지로 영입됐다. "정말 아무것도 안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몇번이나 도망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보면 그래도 할 일이 남았던 건가 봅니다."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을 12년 이끌었고 여기 광주까지 합치면 발레단장만 16년째다. 중간에 정동극장장으로 있었던 4년의 시간까지 보태면 20년을 예술계 수장으로 산 셈이다. 이런 관록의 단장을 만난 광주시립발레단은 지금 비약적인 성장을 일구는 중이다. 예산은 두 배로 늘었고 최 단장 목표대로 연간 대작 한 편은 너끈히 올리면서 체력을 더 키우고 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최근 3년간 올린 차이콥스키 3대 대표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출연진이 많아 엄두가 안났던 것도 사실이다. 광주시립발레단으로선 지난해 단원 10명이 충원되면서 비로소 올릴 수 있게 된 공연이다. 하지만 마지막 무대 막이 오를 때까지 모두가 살얼음이다. 코로나19로 치른 홍역이 수차례다. 당초 5월 예정됐던 공연은 재유행이 번지면서 7월로, 다시 10월, 그리고 지금 12월로 연거푸 미뤄졌다. 혹여 거리두기 3단계 격상 조치가 이번 공연 직전 내려진다면, 내년에라도 기필코 무대에 올리겠다며 최 단장은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공연은 프랑스 안무가 출신 마리우스 프티파 버전을 130분 분량으로 줄이고 애니메이션을 가미한 형태다. 김 교수가 맡은 오로라는 고전발레 정석같은 존재다. "기본기가 정말 중요한 역할이에요. '백조의 호수'를 할 때보다 더 어려워요. 화려한 테크닉은 없지만 손가락 세세한 움직임까지 디테일이 굉장합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최 단장은 "40대 오로라는 그 자체로 신화다. 튀튀 의상 아래로 하반신 라인이 다 드러난다. 극한의 훈련없이는 무대에 설 수가 없다"고 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광주발레단의 '파키타'에도 같이했다. 그의 캐스팅은 단원들에게 충만한 활력소였다. 지도를 병행했던 그는 "1년 전과 비교해 단원들 기량이 놀라보게 좋아졌다"고 평했다. 호랑이 선생님 최 단장이 등장하면 단원들은 긴장한다. 김 교수는 "잘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한국 발레계 상징적인 인물이다. '관계자'만으로 채웠던 그들만의 객석에 광범위한 일반 대중을 유료관객으로 불러들여 결국에는 전석 매진 신화를 이뤄낸 주역이다. 김지영 입단 이듬해 또다른 러시아 발레학교 졸업생 김주원까지 가세하면서 탄력은 더 붙었다. 10대 발레리나들을 과감히 주역으로 밀어부친 이는 역시 최 단장이다. 발레계 팬덤 문화는 그때 생겨났다. 수많은 '김지영 키즈'가 세계 무용 콩쿠르를 휩쓸며 해외 발레단으로 뻗어나갔다. 최태지·김지영의 삶은 지칠 줄 모르는 발레 인생이다. 김 교수는 최 단장을 두고 "직감, 예감 이런 감들이 압도적이다.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힘이 있다. 지금의 나도 그래서 있는 것"이라고 했다. 최 단장은 "지영이는 부상이 많아 안아픈 데가 없다. 재활을 달고 산다. 그런데도 항상 일어선다. 경이롭기 그지없다"고 했다. 30년 동행길 두 사람은 그렇게 하루하루 맹렬히 뛴다. 공연은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마스크 쓰고 두 좌석 띄어앉기 등 방역수칙에 맞춰 진행된다. jins@fnnews.com 최진숙 문화전문기자
2020-12-17 10:44:11[의정부=강근주 기자]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 ‘백조의 호수’가 7월21일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관객과 만난다. ‘백조의 호수’는 141년 이상 공연됐으나 1969년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안무로 새롭게 탄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의정부 공연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발레단으로 입지를 확고히 다진 광주시립발레단과 함께한다. 최태지 예술감독이 이끄는 광주시립발레단이 선보일 전막(전2막4장) 발레 ‘백조의 호수’는 궁중무대 다채로운 춤으로 매혹적인 ‘백조의 호수’를 선보인다. 특히 1막 호숫가 백조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순백의 튀튀를 입은 백조들과 푸른 조명, 무대의 조화가 절정을 이루는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강은혜, 보그단 플로피뉴 커플은 안정적이고 환상적인 호흡으로 강렬한 카리스마와 안정감 있는 테크닉을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1969년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안무한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이나 영국 로얄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와 비교해 볼 때 내용이나 안무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발레가 단순한 동화 수준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삶의 철학을 나타내는 소설이기를 바랐던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악마 ‘로드발트’에 대한 해석, 즉 악마가 지그프리트 왕자의 또 다른 내면으로 표현되는 등 안무가의 예술철학이 드러나 있다. 한편 공연 예매는 의정부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또는 인터파크티켓에서 가능하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18-07-17 23:52:24\r아홉살에 처음 신은 토슈즈문화수준 높은 일본서 태어나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마주한 재일동포라는 벽 韓 국립발레단 문을 두드렸다아이 둘 낳고 복귀한 무대발레단 입단후 결혼과 출산 춤추고 싶은 에너지가 쏟아졌다 그리고 오른 최연소 국립발레단장 토슈즈를 벗고 후배를 키웠다예술감독으로 새롭게 찾은 목표발레가 슈퍼 상품이냐고도 했지만 더 많은 공연 올리고 싶었다 도시 밖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다\r\r\r\r\r\r\r\r\r\r\r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37세) 국립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은 "지금 나에게 가장 행복한 일은 발레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과 발레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r\r\r\r\r\r\r\r아이 둘을 낳은 국내 최초 현역 엄마 발레리나, '해설이 있는 발레'와 '찾아가는 발레' 첫 시도, 발레 무용수 '스타마케팅'의 선구자,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37세) 국립단체장 기록까지. 그에게는 발레계의 수많은 '최초' 수식어가 붙는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56) 얘기다. 젊은 나이에 한국 발레를 대표하는 국립발레단의 수장을 맡아 발레 대중화를 몰고온 명장으로 꼽힌다. 유리 그리가로비치, 롤랑 프티 등 전설적인 안무가의 작품을 받아 세계적인 레퍼토리를 구축한 것도 최 전 단장의 업적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고 느낀다. 재일동포로 살며 느낀 서러움, 한국에서조차 차가운 시선에 가슴 아팠던 시간, 새로운 시도에 대한 비난, 엄마로서 넘어야 했던 출산과 육아의 장벽, 최근 평생의 반려자를 영영 떠나보낸 슬픔까지. 지난 2013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임기를 마친 뒤엔 그저 쉬고 싶었다. "발레 근처에도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그가 다시 무대에 섰다. 그의 장기인 '해설이 있는 발레'를 들고 경기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였다. 이달부터는 성남아트센터에서 '앙트레 콘서트'로 관객과 만난다. '발레리나의 성장 과정과 삶'을 얘기하는 토크 콘서트다."발레의 신이 널 사랑하게 되면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널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을 거야." 지난 11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 전 단장은 이 말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발레를 사사했던 가이타니 야오코 선생님이 한 말씀이었다. "발레를 그만두려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저를 현장으로, 무대로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인연이란 게 참 무섭더라고요." 딱 1년 쉬고 나니 예술계 지인들의 러브콜이 왔다. 최 전 단장은 "내일만 바라보며 살아온 삶이 이만큼 온 건 '사람'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10년 후, 20년 후 미래를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살아가라고 조언하잖아요. 저는 정반대로 살았어요. 다만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다시 발레와 마주하게 된 것도 다 좋은 인연들 덕분이죠. 저보고 '발레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도 단원들을 위해 벌인 일이 대중화로 이어진 것뿐이었어요." 그를 처음 발레로 인도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궁금해졌다.\r\r\r\r\r\r\r\r\r\r\r1983년 국립발레단 객원수석 시절 출연한 발레 '해적'\r\r\r\r\r\r\r\r―발레를 시작한 것도 누구 때문이었나▲아홉살 때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는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주목받았는데 발레만큼은 내가 더 소질을 보였다. 도쿄에서 온 발레선생님한테 반했던 게 두번째 이유였다. 영화 '로마의 휴일'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과 비비안 리를 동경했는데 자유분방하고 자기 주장이 분명한 여성의 모습이 그 선생님과 꼭 닮아 있었다. 발레를 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 싶었다.―당시 일본 발레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이미 발레 대중화가 돼있는 상태였다. 내가 태어난 교토 북부의 마이즈루는 인구 10만명이 채 안되는 조그만 도시였는데 발레연구소와 아카데미가 있었다. 마이즈루는 한자로 무학(舞鶴)이라고 쓴다. '춤추는 학'이란 뜻이다. 거기서 내가 태어난 게 춤출 운명이었던 것 같다.\r\r\r\r\r\r\r\r\r\r\r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오른쪽)이 발레단 산하 발레아카데미에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r\r\r\r\r\r\r\r―발레 교육은 어떻게 받았나.▲방학 때면 도쿄에서 열리는 발레캠프에서 배웠고 볼쇼이, 슈투트가르트 같은 세계적인 발레단이 온다고 하면 기차표를 끊어 왕복 10시간을 왔다갔다 했다. 부모님도 교육열이 높으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 그만둬도 발레는 안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전폭적으로 밀어주셨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의 문화예술 수준이 한국을 훨씬 앞질렀다. 특히 발레가 그랬다. 각 지역마다 발레연구소와 아카데미, 발레단이 있었고 발레 관객층도 넓었다. 최 전 단장은 그런 일본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재일동포라는 꼬리표가 앞길을 막았다. 한번은 문화청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의 최종후보로 올라갔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소됐다. 결국 사비로 프랑스 유학을 갔다왔지만 그 이후에도 딱히 돌파구가 없었다. 일본 발레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본발레협회의 회장이 한국에 가보라고 권유하며 임성남 당시 국립발레단장을 소개해줬다. 일본에도 없는 국립발레단이 한국에는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혈혈단신 한국에 건너왔다.―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 기분은.▲국립발레단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명예로울 수가 없었다. 딸이 한국에서 춤을 춘다니 부모님도 엄청 기뻐하셨다.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향하던 언덕에서 그 설렘과 긴장을 잊지 못한다. 반일감정이 클 때였고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재일동포가 수석무용수로 왔다. 시선이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때 생각을 한다. 초심을 기억하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더라. ―그런데 국립발레단에 들어온 후 거의 바로 결혼했다.▲말했다시피 먼 미래를 도모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순간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발레는 외로운 길이었다. 항상 좋은 역할을 맡아 시기를 받았고 무조건 겸손해야 했다. 그래도 발레가 좋으니 결혼하기 전까지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었다.―국립발레단에 어떻게 다시 오게 됐나.▲동네에 발레 아카데미가 있었다. 30분씩 발레 클래스를 들으며 몸의 밸런스를 찾아갔다. 6개월 만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춤추고 싶은 에너지가 솟았다. 전보다 잘 출 자신도 있었다. 임 단장님께 다시 춤추고 싶다고 하니 단번에 오케이했다. 당시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임신을 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출산을 하면 무용수로서의 삶도 끝이라는 공식이 적용됐다. 최 전 단장은 이를 깨고 두 딸을 낳았다. 발레단을 떠나려고 했지만 임 단장이 붙잡았다. 이후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37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립발레단장이 됐다.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10년 이상 국립발레단에 있으면서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던 그였다. 가장 먼저 토슈즈를 버렸다. "내가 춤을 추고 싶으면 어떻게 단원들을 키워줄 수 있겠어요. 사진기자들이 발레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면 거절했어요. 나는 무용수가 아니라 국립발레단장이라고요."―단장직을 맡고 가장 먼저 뭘 했나.▲공연을 많이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연간 20~40회 수준이었다. 많은 단원들이 의욕상실 상태였고 무대가 필요했다. 매달 공연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다. 실제로 3일에 한번 꼴로 했다.―6년간 전회매진이라고 들었다.▲국립극장 소극장이 미어터져서 문을 잠가야 할 정도였다. 고전발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해설과 함께 보여주는 식이었다. 무료공연이었다. 새로운 의상도 세트도 없이 최소한의 예산으로 진행했다. 점차 3000원, 5000원씩 받았다. '해설이 있는 발레'에 맛을 들인 관객들이 대극장 발레 공연으로 연결됐다. '발레가 슈퍼마켓 상품이냐'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예술이란 돈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 대중과 만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공연 수가 늘어나니 단원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세대 교체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김주원, 김지영, 김용걸, 이원국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들이 '해설이 있는 발레'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국립발레단 '스타 마케팅'의 시초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스타 마케팅'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인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제가 한 모든 건 오로지 단원들을 위해서였어요."―이제 한국도 안무가 육성에 신경 쓸 때라고들 한다.▲맞는 얘기다. 그런데 무용수로서 은퇴하니까 안무가로 전환하는 식은 아니다. 세계적인 안무가들은 다 20대부터 안무 활동을 했다. 일찌감치 발굴해서 키워야 한다. 종합발레학교가 필요한 이유다. 발레뿐만 아니라 음악, 연기, 필요하다면 노래까지 가르쳐서 두각을 나타내는 쪽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전 세계 예술가들을 다 만나봤다. 한국인이 최고다. 세계적인 안무가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직접 발레학교를 세우고 가르칠 생각은 없냐고 물으니 최 전 단장은 손사래를 쳤다. "저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한 후배들이 해내리라고 믿어요. 손 놓고 있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이제 좀 여유롭게 일하고 싶어요. 20~30대 때 너무 불태웠어요." 그렇게 활활 타오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한참 뒤에 "부모님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매운 김치를 담그시던 분이에요. 아버지는 제가 한국을 위해 일한다고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고요." 지금 최 전 단장이 가장 행복한 일은 "발레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다. "'앙트레 콘서트'가 끝나면 평창에 내려갈 예정이에요. 이게 지금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 도시에서의 발레 대중화를 넘어 진짜 한국 발레의 대중화죠. 시골 마을에서 노인분들이 '지젤'을 보며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발레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최태지 프로필△56세 △일본 교토 출생 △일본 가이타니 발레단 단원 △일본 분카가쿠인대학 불문학과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 △1983년 국립발레단 객원 수석무용수 △3대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해설이 있는 발레' 국내 최초 시작 △로잔느 국제 발레콩쿠르 심사위원 △자서전 '나는 인생의 프리마로 춤춘다' 출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정동극장 극장장 △브누아 드 라당스 심사위원 △5대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러시아 페름 아라베스크 콩쿠르 최고지도자상, 러시아 문화부 장관 감사장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승급콩쿠르 외부 심사위원 △서울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석좌교수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한국춤평론가협회 특별상, 한국발레협회 대상 △아시아문화개발원 이사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현) △세종문화회관 이사회 선임이사(현)\r
2015-09-13 17:43:12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55)이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으로 27일 임명됐다. 최 전 단장은 1996년부터 2001년,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2년간 국립발레단장 겸 예술감독을 지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발레의 위상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 등을 인정한 인사라고 밝혔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2014-01-27 17:18:17문화체육관광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최태지 현 감독을 유임키로 결정하였다. 최태지 감독은 2008년 재임부터 국립발레단을 이끌면서 발레의 대중화, 명품화, 세계화를 기치로 발레∨관중을 확보하기 위한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으며, 전국 곳곳의 문화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많은 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세계 유수 발레단 작품의 소개와 창작발레의 제작으로 국내 발레계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공연을 볼쇼이발레단과 성공적으로 치러 한국 발레의 수준을 널리 알리는 외교적 가교 역할을 하였다. /mskang@fnnews.com강문순기자
2011-01-03 14:03:39국립발레단의 최태지 예술감독(사진)이 유임돼 2013년까지 발레단을 이끌게 됐다. 30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발레단에 따르면 올해 말로 임기를 마친 최태지 예술감독은 이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새로 임명장을 받았다. 예술감독의 임기는 3년이다. 최 예술감독은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국립발레단을 만들어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며 “특히 2012년은 국립발레단 창립 50주년을 맞는 해여서 발레 역사를 정리하는 등 해야할 일이 많고 앞으로 지방 공연이나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공연을 통해 진정한 ‘국민 발레단’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2010-12-30 18:12:36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이 한·러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러시아 문화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국립발레단은 최태지 감독이 한·러 수교 20주년 문화축제 폐막식 참석차 방한 중인 알렉산드르 아부데예프 러시아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1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에서 감사장을 받았다고 12일 전했다. 최 감독은 1991년 러시아 안무가 마리아 콘드라체바를 초청해 ‘돈키호테’를 국내 무대에 성공적으로 올린 데 이어 보리스 에이프만, 유리 그리가로비치 등 러시아의 세계적 안무가들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한국 발레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킨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2010-11-12 18:57:26까만 투피스에 기다란 진주 목걸이를 걸친 채 볼쇼이 극장 백스테이지로 황급히 뛰어가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지난 8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볼쇼이-국립발레단 첫 합동 무대' 둘째날 공연 직후였다. 공연 전 설렘 가득했던 표정은 어느새 흥분과 기쁨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백스테이지에서 그는 러시아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낸 주역 무용수들을 차례로 껴안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국 발레계 최고경영자(CEO)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51). 공식석상에서 그는 눈에 확 띈다. 재일동포로 일본식 어투가 여전히 남은 한국 말씨. 훤칠한 키에 발레리나 출신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잘록한 허리로 누구를 만나든 몸을 낮춘다. 유쾌한 웃음과 환한 미소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 하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취향은 허를 찌른다. 정갈한 초밥, 아니면 달팽이 요리를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된장찌개를 최고 음식으로 꼽는 한식 마니아다. 정장도 2시간 이상 걸치면 숨이 턱턱 막히는 불편함에 발을 동동 구른다. 청바지에 셔츠 하나 걸치는 게 근무 중 공식 의상이다. 이 활동파 복장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 발레단 사무실과 4층 연습실을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단원들에겐 한 치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송곳같은 선배이자 사무실 직원들에겐 매사가 철저한 CEO다. 빈틈없는 이 CEO가 사석으로 가면 또 한 번 옷을 갈아입는데 이때 모습은 영락없는 수다쟁이 엄마다. 지난 21일 발레단 사무실에서 만난 최태지 단장은 2주 전 맛봤던 ‘볼쇼이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한국 발레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제가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잘 안 믿었어요. 하지만 이번 볼쇼이 공연으로 입증됐잖아요. 그게 무엇보다 기쁩니다.” 최 단장은 아홉살 때 일본 교토 집 근처 발레학원 선생님의 우아한 자태에 반해 발레를 시작했다. 1985년 한국 발레단과 인연이 닿아 이때 한국으로 건너온 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3대 단장직까지 올랐다. 5년 임기를 마치고 정동극장장으로 옮겨갔고 지난 2008년 공모를 통해 다시 5대 단장으로 국립발레단에 복귀했다. 최 단장은 발레 불모지 한국에서 ‘발레 대중화’ ‘국립발레단의 중흥’을 이끈 숨은 공로자로 평가할 만하다. 처음 발레단장직을 맡았을 때가 그의 나이 서른여섯. 이때만 해도 국내서 발레는 소수 취향의 문화 장르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공연 횟수를 늘리고 발레가 대중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1997년 매달 1회 무료로 선보인 국립극장 소극장 발레가 첫 작품이다. 관객은 미어터졌다. 소극장 발레는 3년이나 계속됐다. 야외서도 공간만 있으면 찾아갔다. 시내 중심가 백화점 앞에서도 공연을 선보였다. “발레가 슈퍼마켓 상품이냐”는 비판도 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아기를 둘러업고 까치발로 무용수를 지켜보는 관객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했다. 최근 정부의 국공립기관 초대권 폐지 방침에도 불구, 발레단이 별 타격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은 관객 저변이 최근 10년 새 크게 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객석점유율이 시야 장애석이 많은 3층, 4층을 빼면 80%에 육박합니다. 무대가 보이는 좌석은 매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발레가 관객과 가까워진 데는 최 단장의 스타 발굴도 한몫한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국내서 발레리나라고 하면 강수진(슈투트가르트 수석무용수) 외에 알려진 이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최 단장이 이때 키운 이들이 현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 김주원이다. 하지만 국내 무대는 이제 이들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타 무용수들의 발굴도 과제. 최 단장의 고민도 여기에 맞물려 있다. “단장으로서 정부 예산을 따오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무용수들 캐스팅입니다. 작품 캐스팅을 확정짓기 전엔 저도 피가 말라요. 누구를 주역으로 내세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연말 대작들에는 새 얼굴을 많이 기용할 생각이에요. 김리회, 박슬기, 고혜주 이런 무용수들 기량이 보통이 아니에요.”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의 실력을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발레학교가 세워진다면 “세계 5위권에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레학교는 그가 2년 전 단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프로젝트다. 재능 있는 예비 무용수들을 국가가 키우고 최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나이에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발레학교의 핵심이다. “우리 발레계 현실은 일반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뒤 20대 후반에 직업무용수로 들어와 30대 후반 은퇴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무대에 서는 연령을 낮추고 은퇴하는 무용수들에겐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발레학교가 한국 발레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거예요.” 단장직을 맡으며 잊을 수 없는 일은 발레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볼쇼이 발레단 상임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로부터 작품을 건네받은 순간이다. 그때가 2000년 봄.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 지난달 초연된 ‘라이몬다’까지 국립발레단의 5대 클래식 작품이 그리가로비치의 작품이다. 중국, 일본 발레계에선 아직 그리가로비치 작품의 저작권이 없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리가로비치가 아시아에선 한국 국립발레단에만 작품을 허용했다.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의 앞으로의 화두는 ‘세계화’라고 말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들이 세계 쟁쟁한 무대에서 맘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만드는 것이 과제다. 교류 차원에서 세계 대표 무용수들을 국내 무대에 세우는 것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 의욕 많은 단장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 최 단장은 그래서 요즘 더욱 마음이 바쁘다. “로드맵을 착실히 만들고 있어요. 누가 와도 발레단이 흔들리지 않게요. 내년에 이탈리아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지금 열심히 라 스칼라 극장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 약력 △일본 교토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 △일본 분카 가쿠인 대학 불문학과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3대 국립발레단장 △정동극장장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5대 국립발레단장 ■사진설명=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은 "한국 발레가 이제 세계 무대를 향해 뛸 충분한 실력이 됐다"며 자신만만해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최 단장. /사진=박범준 기자
2010-10-27 21:35:19재일동포 2세로 대학 졸업 때까지 일본에서 성장한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에게 현재 한국 발레의 위상과 세계화 추진 방향,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들어봤다(동영상 퍼가기 가능)
2010-04-08 21:22:21"한국, 한국인들이 가진 열정과 끼, 또 이것을 표현해 낼줄 아는 여성스러움과 내적 표현력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다." 재일동포 2세로 대학 졸업 때까지 일본에서 성장한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1996년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 발레의 대중화에 힘써 왔다. 정동극장 극장장 등 '외도'를 거쳐 2008년 7년 만에 다시 친정에 돌아온 최 감독은 이제는 한국 발레의 대중화와 명품화를 통한 세계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달 1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금융 위기, 신종플루로 공연계가 침체에 빠졌던 지난해 국립발레단은 오히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는데. ▲드라마 발레 '신데렐라' '차이콥스키', 창작 발레 '왕자 호동'까지 발레단 사상 최대인 세 편의 신작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한 해 총 79회의 공연을 펼쳐 83%에 달하는 객석 점유율을 기록할 정도로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찾아가는 발레를 통해 한국의 발레 대중화에 적극적인데. ▲대중들이 쉽게 발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수년 전부터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을 진행했다. 군부대, 초등학교 이외에도 문화적으로 소외된 전남 해남 땅끝마을 등도 찾아 공연을 선보였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어디라도 발레단을 이끌고 갈 것이다. ―클래식 발레의 본고장인 러시아에서 초청공연을 갖는다는데. ▲올해는 국립발레단이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해로 한·러시아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 볼쇼이발레단과 주역 무용수들을 교류해 공연을 갖는다.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 10명이 오는 10월 러시아로 파견돼 볼쇼이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주역으로 출연하고 볼쇼이 측의 무용수는 서울에서 공연되는 '레이몬다'에 참여한다. 이어 11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유럽 진출 등 한국 발레의 세계화를 본격 추진하는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이외의 유럽 공연도 추진 중이다. 그동안 중국, 폴란드 등지에서 공연해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지만 올해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 발레의 본고장에서 승부하며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레단으로 첫발을 뗄 것이다. ―지난해 창작 발레 '왕자 호동'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추가로 작품 계획은 있나. ▲여러 작품을 해서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 보다는 기존 창작 발레인 왕자 호동의 완성도 업그레이드에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만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가 나올 것이고 우리의 발레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다.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지고 좋은 작품들이 많아졌는데 한국 발레의 위상이 높아진 것인가. ▲볼쇼이 예술감독이었던 유리 그리가로비치에게 부탁해 레퍼토리를 얻은 게 2000년이다. 그런데 작년 공연을 좋게 보았는 지 꼭 10년 만에 국립발레단을 볼쇼이 극장으로 초청했다. 볼쇼이발레단의 군무 속에서 솔리스트로 서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국립발레단의 수준을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테크닉이나 실력으로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무용수들이 세계 유수의 발레학원을 졸업하고 콩쿠르를 휩쓰는 것을 보면서 본고장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무용수들과 실력을 겨뤄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작년에 모스크바 콩쿠르, 발레 올림픽이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유명한 콩쿠르에서 이동훈, 김리회가 실버메달을 수상했다. 그때 심사를 맡은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인이 '러시아의 발레가 이제 한국에 있는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1월 말 다보스포럼에서 '한국의 밤 2010 행사'가 외국 명사들의 갈채를 받았다는데.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인 김리회와 박세은, 박슬기가 국악, 타악 반주에 맞춰 '세계와 함께하는 아리랑-아리랑 포 투모로'를 춤췄다. 한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서양 발레 동작으로 벨기에 필립 왕세자 내외와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 도미니크 바튼 매킨지 회장 등 전 세계 유력인사 800여명이 참석해 갈채를 보냈다. ―서양의 발레 동작에 한국적 아름다움을 어떻게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지. ▲다보스포럼에서 공연한 아리랑의 이번 작품은 어깨선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한국의 곡선미를 살린 발레다. 미래 지향적인 아리랑 선율과 한국 고전무용 동작을 결합한 독특한 발레에 외국인들이 감동한 것 같다. 특히 '한(恨)'의 정서가 강한 아리랑을 보다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정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국, 한국인들이 가진 열정과 끼, 또 이것을 표현해 낼줄 아는 여성스러움과 내적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점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25억원가량에 머물던 국립발레단 예산이 올해 100억원으로 껑충 뛰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예산을 따내려) 설득하는 건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춤추고 국민에게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올해 토슈즈 예산 1억4000여만원가량을 확보한 것은 단원들의 처우 개선에 의미 있는 변화다. 그동안은 발레의 기본이 되는 토슈즈에 책정된 예산이 적어 단원들이 좋은 토슈즈를 사기 위해서는 사비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부분이지만 토슈즈를 바꾸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티켓가격을 20% 인하할 방침을 세웠다는데. ▲사실 발레 공연료가 일반인에게는 비싼 것이 사실이다. 예산이 늘어난 만큼 티켓 가격을 낮춰야 일반 관람객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5000원, 1만원짜리 티켓 판매 등 전체적으로 티켓가격을 20% 인하할 방침이다. 지난해 공연을 찾은 관객의 대부분이 일반인이었다. 올 한 해 국립발레단의 공연 관객 중 무용관계자는 불과 1, 2%에 불과했다. 95% 이상이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일반관객이었다. ―올해 국립발레단 공연 계획은. ▲국립발레단은 올해 1월 '신데렐라', 2월 '차이콥스키'를 비롯해 '코펠리아'(4월 27일∼5월 6일), '트리플빌'(7월 15∼18일), '레이몬다'(9월 25∼30일), 12월에 올리는 '백조의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모두 7편의 전막 발레를 올릴 계획이다. ―재일동포 그리고 엄마. 한국 발레리나로서 두 가지 '악조건'을 모두 이겨냈다는 평가를 받던데. ▲10세 때 동네 발레 학원 선생님의 모습에 반해 발레를 시작했다. 다이어트 하기 위해 너무너무 어렵지만 '아 결혼할 때까지다'라고 하면서 절대로 결혼할 거다, 결혼하면 토슈즈도 다 던지고 다른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에 그냥 먹고 싶은 것 잘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시기가 그 시기였던 것 같다. 첫딸을 낳고 78㎏까지 체중이 늘었다. 산후 우울증이 생겼고 발레가 간절해졌다. 당장 기초 연습부터 시작해 1987년 프리마 돈나로 무대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 발레의 미래를 평가한다면. ▲돈이 있고, 힘이 있는 나라가 문화도 번성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오는 11월 한국에서 열리듯이 한국 발레도 발레 20국(B20)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럴 만큼 우리의 수준도 높아졌다. 프랑스, 러시아 등 발레의 본고장 무용수들이 한국 발레는 이제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말 뿌듯하고 기쁘지만 왠지 어깨가 무겁다. 그래도 잘할 거다. 한국 발레, 그 미래가 밝다. /mskang@fnnews.com 강문순기자 ■사진설명=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오른쪽 첫번째)이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단원들의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사진=김범석기자 ■최태지 예술감독은.. 2008년 국립발레단 제6대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최태지 예술감독(51)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983년 객원 무용수로 참가한 '세헤라자데' 공연으로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은 최 예술감독은 1987년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 1992년까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했다 . 1993년부터 3년간은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으로 '해설이 있는 발레'와 같은 대중화 프로그램을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유리 그리가로비치, 장크리스토프 마이요 같은 세계적 거장과의 작업을 통해 유리 그리가로비치 3부작 '호두까기인형' '백조의호수' '스파르타쿠스',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등을 레퍼토리로 확립했다. 또 적극적인 단원의 매니지먼트를 통해 국내 무용계 최초 스타마케팅을 정착함으로써 한국 발레가 오늘날 인기 장르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러시아 카잔 국제발레콩쿠르,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 등 유수의 대회에 한국인 최초 심의를 하며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2008년 파라다이스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9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후원하는 '예총예술문화상' 무용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한국방문의해위원회 인터뷰 동영상 tv.fnnews.com
2010-04-08 18:3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