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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2) 한국 발레 대중화 이끄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아홉살에 처음 신은 토슈즈
문화수준 높은 일본서 태어나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마주한 재일동포라는 벽 韓 국립발레단 문을 두드렸다
아이 둘 낳고 복귀한 무대
발레단 입단후 결혼과 출산 춤추고 싶은 에너지가 쏟아졌다 그리고 오른 최연소 국립발레단장 토슈즈를 벗고 후배를 키웠다
예술감독으로 새롭게 찾은 목표
발레가 슈퍼 상품이냐고도 했지만 더 많은 공연 올리고 싶었다 도시 밖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2) 한국 발레 대중화 이끄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37세) 국립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은 "지금 나에게 가장 행복한 일은 발레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과 발레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아이 둘을 낳은 국내 최초 현역 엄마 발레리나, '해설이 있는 발레'와 '찾아가는 발레' 첫 시도, 발레 무용수 '스타마케팅'의 선구자,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37세) 국립단체장 기록까지. 그에게는 발레계의 수많은 '최초' 수식어가 붙는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56) 얘기다. 젊은 나이에 한국 발레를 대표하는 국립발레단의 수장을 맡아 발레 대중화를 몰고온 명장으로 꼽힌다. 유리 그리가로비치, 롤랑 프티 등 전설적인 안무가의 작품을 받아 세계적인 레퍼토리를 구축한 것도 최 전 단장의 업적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고 느낀다. 재일동포로 살며 느낀 서러움, 한국에서조차 차가운 시선에 가슴 아팠던 시간, 새로운 시도에 대한 비난, 엄마로서 넘어야 했던 출산과 육아의 장벽, 최근 평생의 반려자를 영영 떠나보낸 슬픔까지. 지난 2013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임기를 마친 뒤엔 그저 쉬고 싶었다.

"발레 근처에도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그가 다시 무대에 섰다. 그의 장기인 '해설이 있는 발레'를 들고 경기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였다. 이달부터는 성남아트센터에서 '앙트레 콘서트'로 관객과 만난다. '발레리나의 성장 과정과 삶'을 얘기하는 토크 콘서트다.

"발레의 신이 널 사랑하게 되면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널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을 거야." 지난 11일 서울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 전 단장은 이 말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발레를 사사했던 가이타니 야오코 선생님이 한 말씀이었다.

"발레를 그만두려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저를 현장으로, 무대로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인연이란 게 참 무섭더라고요." 딱 1년 쉬고 나니 예술계 지인들의 러브콜이 왔다. 최 전 단장은 "내일만 바라보며 살아온 삶이 이만큼 온 건 '사람'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10년 후, 20년 후 미래를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살아가라고 조언하잖아요. 저는 정반대로 살았어요. 다만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다시 발레와 마주하게 된 것도 다 좋은 인연들 덕분이죠. 저보고 '발레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도 단원들을 위해 벌인 일이 대중화로 이어진 것뿐이었어요." 그를 처음 발레로 인도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궁금해졌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2) 한국 발레 대중화 이끄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1983년 국립발레단 객원수석 시절 출연한 발레 '해적'


―발레를 시작한 것도 누구 때문이었나

▲아홉살 때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는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주목받았는데 발레만큼은 내가 더 소질을 보였다. 도쿄에서 온 발레선생님한테 반했던 게 두번째 이유였다. 영화 '로마의 휴일'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과 비비안 리를 동경했는데 자유분방하고 자기 주장이 분명한 여성의 모습이 그 선생님과 꼭 닮아 있었다. 발레를 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당시 일본 발레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이미 발레 대중화가 돼있는 상태였다. 내가 태어난 교토 북부의 마이즈루는 인구 10만명이 채 안되는 조그만 도시였는데 발레연구소와 아카데미가 있었다. 마이즈루는 한자로 무학(舞鶴)이라고 쓴다. '춤추는 학'이란 뜻이다. 거기서 내가 태어난 게 춤출 운명이었던 것 같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2) 한국 발레 대중화 이끄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오른쪽)이 발레단 산하 발레아카데미에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발레 교육은 어떻게 받았나.

▲방학 때면 도쿄에서 열리는 발레캠프에서 배웠고 볼쇼이, 슈투트가르트 같은 세계적인 발레단이 온다고 하면 기차표를 끊어 왕복 10시간을 왔다갔다 했다. 부모님도 교육열이 높으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 그만둬도 발레는 안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전폭적으로 밀어주셨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의 문화예술 수준이 한국을 훨씬 앞질렀다. 특히 발레가 그랬다. 각 지역마다 발레연구소와 아카데미, 발레단이 있었고 발레 관객층도 넓었다. 최 전 단장은 그런 일본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재일동포라는 꼬리표가 앞길을 막았다. 한번은 문화청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의 최종후보로 올라갔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소됐다. 결국 사비로 프랑스 유학을 갔다왔지만 그 이후에도 딱히 돌파구가 없었다. 일본 발레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본발레협회의 회장이 한국에 가보라고 권유하며 임성남 당시 국립발레단장을 소개해줬다. 일본에도 없는 국립발레단이 한국에는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혈혈단신 한국에 건너왔다.

―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 기분은.

▲국립발레단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명예로울 수가 없었다. 딸이 한국에서 춤을 춘다니 부모님도 엄청 기뻐하셨다.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향하던 언덕에서 그 설렘과 긴장을 잊지 못한다. 반일감정이 클 때였고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재일동포가 수석무용수로 왔다. 시선이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때 생각을 한다. 초심을 기억하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더라.

―그런데 국립발레단에 들어온 후 거의 바로 결혼했다.

▲말했다시피 먼 미래를 도모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순간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발레는 외로운 길이었다. 항상 좋은 역할을 맡아 시기를 받았고 무조건 겸손해야 했다. 그래도 발레가 좋으니 결혼하기 전까지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었다.

―국립발레단에 어떻게 다시 오게 됐나.

▲동네에 발레 아카데미가 있었다. 30분씩 발레 클래스를 들으며 몸의 밸런스를 찾아갔다. 6개월 만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춤추고 싶은 에너지가 솟았다. 전보다 잘 출 자신도 있었다. 임 단장님께 다시 춤추고 싶다고 하니 단번에 오케이했다. 당시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임신을 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출산을 하면 무용수로서의 삶도 끝이라는 공식이 적용됐다. 최 전 단장은 이를 깨고 두 딸을 낳았다. 발레단을 떠나려고 했지만 임 단장이 붙잡았다. 이후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37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립발레단장이 됐다.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10년 이상 국립발레단에 있으면서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던 그였다. 가장 먼저 토슈즈를 버렸다. "내가 춤을 추고 싶으면 어떻게 단원들을 키워줄 수 있겠어요. 사진기자들이 발레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면 거절했어요. 나는 무용수가 아니라 국립발레단장이라고요."

―단장직을 맡고 가장 먼저 뭘 했나.

▲공연을 많이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연간 20~40회 수준이었다. 많은 단원들이 의욕상실 상태였고 무대가 필요했다. 매달 공연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다. 실제로 3일에 한번 꼴로 했다.

―6년간 전회매진이라고 들었다.

▲국립극장 소극장이 미어터져서 문을 잠가야 할 정도였다. 고전발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해설과 함께 보여주는 식이었다. 무료공연이었다. 새로운 의상도 세트도 없이 최소한의 예산으로 진행했다. 점차 3000원, 5000원씩 받았다. '해설이 있는 발레'에 맛을 들인 관객들이 대극장 발레 공연으로 연결됐다. '발레가 슈퍼마켓 상품이냐'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예술이란 돈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 대중과 만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공연 수가 늘어나니 단원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세대 교체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김주원, 김지영, 김용걸, 이원국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들이 '해설이 있는 발레'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국립발레단 '스타 마케팅'의 시초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스타 마케팅'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인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제가 한 모든 건 오로지 단원들을 위해서였어요."

―이제 한국도 안무가 육성에 신경 쓸 때라고들 한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무용수로서 은퇴하니까 안무가로 전환하는 식은 아니다. 세계적인 안무가들은 다 20대부터 안무 활동을 했다. 일찌감치 발굴해서 키워야 한다. 종합발레학교가 필요한 이유다. 발레뿐만 아니라 음악, 연기, 필요하다면 노래까지 가르쳐서 두각을 나타내는 쪽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전 세계 예술가들을 다 만나봤다. 한국인이 최고다. 세계적인 안무가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직접 발레학교를 세우고 가르칠 생각은 없냐고 물으니 최 전 단장은 손사래를 쳤다. "저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한 후배들이 해내리라고 믿어요. 손 놓고 있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이제 좀 여유롭게 일하고 싶어요. 20~30대 때 너무 불태웠어요." 그렇게 활활 타오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한참 뒤에 "부모님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매운 김치를 담그시던 분이에요. 아버지는 제가 한국을 위해 일한다고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고요." 지금 최 전 단장이 가장 행복한 일은 "발레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다. "'앙트레 콘서트'가 끝나면 평창에 내려갈 예정이에요. 이게 지금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 도시에서의 발레 대중화를 넘어 진짜 한국 발레의 대중화죠. 시골 마을에서 노인분들이 '지젤'을 보며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발레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최태지 프로필
△56세 △일본 교토 출생 △일본 가이타니 발레단 단원 △일본 분카가쿠인대학 불문학과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 △1983년 국립발레단 객원 수석무용수 △3대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해설이 있는 발레' 국내 최초 시작 △로잔느 국제 발레콩쿠르 심사위원 △자서전 '나는 인생의 프리마로 춤춘다' 출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정동극장 극장장 △브누아 드 라당스 심사위원 △5대 국립발레단 단장 및 예술감독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러시아 페름 아라베스크 콩쿠르 최고지도자상, 러시아 문화부 장관 감사장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승급콩쿠르 외부 심사위원 △서울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석좌교수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 △한국춤평론가협회 특별상, 한국발레협회 대상 △아시아문화개발원 이사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현) △세종문화회관 이사회 선임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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