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우여곡절 끝에 100년 만에 복원한 광화문 월대를 다녀왔다. 월대를 복원하면서 전통 바닥돌인 박석을 깔지 않고, 황토를 발라놓은 게 마음에 걸렸다. 월대 안팎이 황토 일색이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황토는 주로 공원에 시공하는 범용 바닥재가 아닌가. 황토 포장의 품격과 격조가 문제다. 박석은 얇고 편평한 화강암 재질의 돌판이다. 두께는 보통 12㎝이고, 넓이는 구들장이나 빨래판의 두 배 정도다. 박석은 5대 궁의 월대와 안뜰, 종묘의 진입로와 정전의 월대 등에 쓰였다. 박석은 삐뚤빼뚤하고 울퉁불퉁하지만 불규칙적인 아름다움과 기능성이 뛰어난 우리 고유의 바닥돌이다. 강화도산이 유명하다. 우리는 광화문광장의 조성과 재구조화를 놓고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었다. 반대론자들도 광장은 수용하되 월대 복원의 필요성은 의심했다. 월대 복원은 그만큼 논쟁적 사안이었다. 이제 찬반을 떠나 복원의 가치와 완전성에 의문이 생길 판이다.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 월대의 권위와 전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심의 중추 교통로인 세종대로와 율곡로~사직로를 틀어막은 뒤 월대 놓을 자리를 마련하느라 그 난리를 친 지금까지의 사회적 비용과 공사 과정의 불편이 심사를 뒤틀리게 한다. 경복궁과 광화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맛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에 올라갔다. 역시나 주변 아스팔트 도로와 황토 콘크리트 속에서 월대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20년 가까이 수천억원을 쏟아부어 '난리 블루스'를 쳤는가 싶을 정도다. 세계적인 건축가와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사가가 인정한 월대와 박석의 미학은 이번 광화문 월대 복원 과정에서 철저하게 거부됐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어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세계문화유산 종묘를 찾은 그는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우주의 기운과 영감을 느낀 곳은 정전과 박석이 촘촘하게 깔린 월대였다. 파르테논 신전과 비견된 종묘의 장엄함이 바로 월대와 박석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박석에 대한 찬사를 읊었다. 일찍이 유 전 청장은 "그동안 박석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기능과 미학을 폄하해왔는데, 이것을 복권시키고 싶었어요. 수소문한 결과 강화에 박석광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걸 채취해 2010년 8월 15일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에 사용하게 됐답니다. 박석의 부활이었지요"라고 말했었다. 박석이 다시 사망한 꼴이다. 15세기 세종실록에도 "돌을 채취하여 쌓고, 양쪽 곁에 난간석을 둘러야 하며, 강화도산 전돌로 바닥을 포장해야 한다"고 광화문 앞 월대 조성과 박석 사용을 요청하는 상소문이 등장한다. 광화문 월대를 복원한다기에 박석이 바닥돌로 쓰일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월대와 박석에서 전통미를 느끼듯 경복궁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한국미를 느낄 것이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이런 건축물이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프랭크 게리가 말했듯.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한양도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고 서울시 조직에 한양도성도감과를 만들 정도로 열성적이었지만 서두르다가 등재에 실패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광장의 화룡점정인 광화문 월대를 제대로 복원할 기회를 잡았지만 조악한 불량품을 만드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 고유 전통미를 나타내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란 여덟 글자가 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재의 광화문 월대는 누추하고, 광화문광장은 미완성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고문
2023-10-25 18:28:48【 원주=김기섭 기자】 강원도 영서내륙의 교통 중심지 원주. 큰 축에서 동서로 서울과 강릉을 잇고 횡성과 홍천, 평창, 영월, 여주, 제천, 충주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전형적인 사통팔달의 도시다. 오랜 시간 이어져온 교역의 중심 도시답게 도심 한가운데 중앙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사고파는 상품의 종류와 규모도 여느 전통시장보다 큰 편이다. 12일 찾은 원주 중앙시장은 서울로부터 공산품이, 강릉으로부터 해산물이, 인근 지역으로부터 농산물이 집결하다보니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만물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먹을거리도 다양하다. 시장이 개설된 지 70년이 넘으면서 서민들은 물론 관광객, 입소문을 타고 온 MZ세대들도 찾는 맛집들이 하나둘씩 늘어 점심시간과 주말에는 웨이팅이 기본인 식당들이 꽤 늘었다. 시장골목에 자리잡은 맛집들 이름도 '강릉집', '횡성집', '이천기름집', '여주집' 등 고향 지명을 넣거나 '신혼부부', '일호집', '푸른초원' 등 시골장터다운 센스(?) 있는 간판이 정겹다. 원주 중앙시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동인구가 줄었지만 여전히 시장을 찾는 연령층도 다양하고 상인들도 젊은층이 조금씩 유입되면서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원주 중앙시장은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해왔다. 원주 옛 B도로인 중앙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앙시장과 옛 A도로 사이에 위치한 자유시장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고 미로예술시장, 도래미시장, 중원시장 등이 붙어있다. 크고 작은 시장이 붙어 있다보니 파는 품목에 따라 붙여진 골목도 다양하다. 한우골목, 돈가스골목, 순대골목, 만두칼국수골목 등이 대표적이다. ■70년 애환 쌓인 중앙시장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시장은 대부분 그 도시의 중심가에 있다. 그래서 인근에서 관공서, 대학, 은행, 병원, 극장 등 도시의 중추 기능을 담당하는 공공 인프라가 잘 발달돼 있다. 원주 중앙시장도 마찬가지다. 시장 인근에 지금은 무실동으로 이전했지만 원주시청사가 있었고 연세세브란스 기독병원,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원주시보건소, 각종 은행과 병원들이 지금도 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해 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원주시청과 경찰서, 원주역, 군부대 등이 외곽으로 이전했지만 예전에는 인근 도시를 포함해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꼽혔다. 지금도 중앙시장과 자유시장을 잇는 도로는 평일에도 도로가 붐빌 정도로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난장에는 봄 냄새를 담은 달래 바구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부정한 허리에 뽀글파마를 하고 달래를 담아내는 할머니의 무뎌진 손 끝에서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인근 떡집에서는 떡을 익히기 위해 내뿜는 희뿌연 수증기가 장 보러 나온 할머니들을 반긴다. 중앙시장은 콘크리트 건물 2개동을 아케이드(햇빛가리개)로 연결시킨 1층 상점(가,나,다,라 동)들을 말한다. 이곳 2층은 미로예술중앙시장이다. 1층 중앙통로 좌우측은 대부분 의류 상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대형 쇼핑몰에서 옷을 구입하지만 옛날에는 시장통에서나 옷을 살 수 있었다. 지금도 어르신들은 값싸고 질 좋은 옷을 구입하기 위해 중앙시장을 찾는다. 의류 상가들과 함께 생필품을 파는 상가와 상인들과 서민들의 배를 채워주는 음식점들이 중앙시장을 구성하고 있다. 자유시장에서 중앙시장을 정면으로 보고 오른쪽 일부 상가(나 동)들은 화재로 문을 닫은 상태다. 화마가 휩쓴 지 4년이 지났지만 40여개 점포는 아직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복구비와 보상 문제로 지연되다 최근 원주시가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다. ■젊은 창업가들 진출한 미로(迷路)예술중앙시장 미로예술시장은 중앙시장 2층을 말한다. 중앙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 2층 미로예술중앙시장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장은 2007년 원주시청사가 무실동으로 이전한 후 원도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중앙시장이 쇠퇴기를 맞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14년 청년상인 점포 52곳이 2층에 문을 열면서 미로예술중앙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년 상인들이 점포를 오픈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당시 창작 레지던스 사업을 통해 작가들이 2층 미로예술중앙시장을 밝고 젊은 느낌으로 꾸몄고 다양한 청년 사업가들이 공방과 카페, 문화공간 등을 열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 시장을 조성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라는 기능에 예술을 접목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그 명성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침체기를 맞고 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지만 칼국수 집만 유명세가 이어지고 있다. 침체되고 있는 이유는 4년 전 화재로 '나 동'이 영업을 하지 못하는 탓도 있고 유동인구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청년사업가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큰 듯하다. 40여년 전 중앙시장 2층에 점포를 얻어 '명양복점'을 연 명효성 대표(85)는 "10여년 전 중앙시장 2층을 젊은 공간으로 꾸미고 청년사업가들이 대거 들어와 점포를 열었지만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며 "문제는 청년사업가들이 갖고 있는 기술이 변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명양복점 인근에는 세공방과 가죽, 자수 등 신생 공방이 명맥을 유지할 뿐 미로(迷路)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하기까지 했다. 무조건 청년들을 들여보내면 활성화될 것이란 직관(直觀)적인 계획 보다는 청년들이 기술을 갖고 업력을 쌓아가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전략이 필요하다.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자유시장 포털사이트 지도 서비스에서 '자유시장'을 검색하면 전국에 10곳이 넘는다. '평화시장'은 2~3곳 된다. 6·25전쟁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작명이 아닌가 추정된다. 원주에는 1군사령부, 1군지사 등이 주둔, 군사도시로 불렸던 적이 있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원주 자유시장은 1986년 지하 2층, 지상 10층의 주상 복합 상가 가운데 지하 1층과 지상 1~2층에 들어섰다. 주상복합건물 1~2층에는 중앙시장과 마찬가지로 옷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외에도 액세서리와 주방용품, 수선집, 공방, 인테리어 소품, 미용실, 사진관 등이 영업을 하고 있다. 지하 1층은 의류와 식당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특히 지하 1층 식당코너에는 원주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음식점들이 있고 이들 덕분에 자유시장 자체에 활기가 돌 정도다. 의류코너 나머지 공간에는 각종 튀김을 파는 튀김집, 순댓국을 파는 국밥집, 돈가스와 같은 분식을 파는 분식집들이 구역을 형성하고 있고 몇몇 식당들은 웨이팅이 기본일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원주 자유시장 순대국밥집들은 일반적인 국밥집하고는 조금 다르다. 이곳 국밥집들은 한 집당 3평 남짓한 공간에서 국밥에 들어갈 고기를 직접 손질하고 구석 한쪽에서 끓고 있는 국물에 밥과 고기를 토렴해 손님들에게 내어준다. 직접 고기를 손질하면서 비계나 질이 좋지 않은 부위는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도려내 버리고 사태 살코기와 오소리감투와 같은 부속물, 순대를 썰어서 넣어준다. 맛도 맵고 달고 짜지 않고 깔끔한 옛날 맛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20~30년 단골들도 많고 입소문에 요즘은 '국밥러'들의 순례지로 통한다. ■도래미 시장과 중원시장, 소고기 골목 원주 자유시장과 평원로 사이에 아케이드(빛가림 시설)로 연결된 시장이 도래미(道來美) 시장이다. 시설 개선 사업을 해서인지 바닥과 상점 모두 깨끗하게 조성돼 있고 먹거리를 팔거나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일명 중앙시장 만두칼국수 골목으로 불리는 이곳도 유명 음식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만두와 칼국수, 옹심이, 부침개 등 먹거리 식당 안을 비집고 들어가면 안쪽에 식당칸이 있어 저렴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부침개에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정겹다. 도래미 시장은 1960년대 새벽시장, 1992년 중앙농수산물시장을 거쳐 2006년 중앙시민전통시장으로 등록했다. 그러다 2020년 도래미 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홍보하면서 생기가 넘치는 전통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다. 40년 전통의 소고기골목은 중앙시장 1층 '다 동'과 '라 동' 골목에 위치해 있는 로컬들만 알고 찾아간다는 노포 한우구이 골목이다. 원주시청사가 인근에 있을 때는 저렴한 가격에 한우를 먹을 수 있는 이곳으로 퇴근하는 시청 직원과 직장인들이 많았다. 때문에 소고기 골목은 저녁이면 숯불 연기가 그득했고 비좁은 점포 안에서 다닥다닥 붙은 불판을 둘러싸고 차돌박이, 부챗살, 치맛살, 업진살을 구워가며 술 한잔 기울이는 맛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안된다. 이런 전통시장이야말로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을 보듬고 풀어내는 삶의 현장이다. kees26@fnnews.com
2023-03-12 16:41:16봄철 수요가 많은 어린이제품 및 전기·생활용품 상당수가 유해물질 초과, 온도상승 과다, 내구성 미달 등 안전기준에 부적합한 것으로 확인됐다. 30일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지난 2월부터 약 3개월간 백화점·대형마트·온라인 등 시중에서 유통 중인 어린이제품 및 전기·생활용품 1236개를 조사한 결과, 안전기준에 부적합한 86개(7.0%) 제품에 대해 리콜명령을 했다고 밝혔다. 이들 제품은 5월 가정의 달 및 봄나들이 계절을 맞이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품목들이다. △완구, 유모차, 인라인스케이트 등 안전에 취약한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20개 품목(698개) △전기찜질기, 전동킥보드, 고령자용 보행차 등 전기·생활용품 32개품목(538개)이다. 이번 조사결과에 따르면, 어린이 완구는 태성상사 '도리스돌(DORIS DOLL)' 등 15개 제품에서 기준치보다 최소 1.3배에서 최대 2473.3배나 높은 납, 카드뮴, 프탈레이트계 가소제 등 유해물질이 검출됐다. 특히 태성상사가 중국에서 제조 수입한 인형완구 '도리스돌' 제품의 경우, 플라스틱 머리띠 진주에서 검출된 총 납 함유량은 기준치의 1.8∼610.3배, 금속목걸이와 리본에서 검출된 총 카드뮴 함유량은 1.1∼2473.3배를 초과했다. 카드뮴에 노출될 경우 신장, 호흡기계 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는 간·신장 등의 손상 유발 가능성이 있다. 납에 노출될 경우 피부염·각막염·중추신경장애 등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매몬스튜디오가 중국에서 제조 수입한 '최현우의 마술교실' 완구에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DBP, DEHP)가 11.8배나 초과 검출됐다. 삼우힐링라이프가 판매한 중국산 게임완구 '에디슨컵쌓기(모델명)'는 카드뮴 함유량 5.4배, 프탈레이트계 가소제(DEHP) 49배 초과 검출됐다. 코니아이엔씨가 베트남에서 제조 수입한 봉제완구(모델명 꼼에스타꼬마곰베베)에선 인형의 플라스틱 흰색 단추에서 납 함유량이 6.9배 초과 검출됐다. 유모차는 3개 제품이 내구성(불규칙한 표면) 시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태건씨앤에스(모델명 BS001) 등 2개 제품은 차양막 부위에서 프탈레이트 가소제가 최대 207배나 초과 검출됐다. 어린이용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는 스키드온코리아(모델명 NS COMBO), 퍼니스포츠(모델명 YH-002) ,에스디스피드(모델명 MATRIX-S)등 3개 제품의 표면 인조가죽 부위에서 프탈레이트 가소제가 최대 137~352배나 초과 검출됐다. 자석나라가 국내에서 제조 판매한 자석완구(모델명 NEW MAGNET FUNNY PUZZLE FRUIT&VEGETABLE)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DBP, DEHP)가 8배 초과로 검출됐다. 아이엠제이에스가 중국에서 제조 수입한 운동완구 '라켓볼'에선 총 카드뮴 함유량이 1.3 배 초과 검출됐다. 어린이들이 쓰는 '중국산' 학용품 지우개에도 유해물질에 대량 검출됐다. 점프가 중국에서 제조 수입한 학용품 '지우개(모델명 500네온칼라지우개)'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 DEHP가 187.0~208.6배나 초과로 검출됐다. 크리스탈팬시도 국내에서 판매한 중국산 지우개(4B네온지우개)가 프탈레이트계 가소제 DEHP 199.9~ 214.9배 초과 검출됐다. 카라멜팝콘의 지우개(모델명 몰랑 네온컬러 지우개)도 DEHP 201.9 ~ 228.6배나 초과됐다. 아동용 섬유제품의 경우, 에스씨코리아(모델명 72BG04911-1)의 가방류 등 8개 제품에서 단추, 큐빅, 고무장식 등 부속품 부위에서 납, 카드뮴 등 유해물질이 최대 39.6배나 초과 검출됐다. 2개 제품은 끼임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코드 및 조임끈이 불량했다. 전기찜질기는 온열벨트, 발열조끼 등 12개 제품이 사용 중 화상이 우려되는 부적합 제품이었다. 선일전기(모델명 SI-2017-1) 등 전기찜질기는 온도상승 폭이 기준치 대비 최대 65K 초과했다. 전기오븐기기의 경우, 홈니즈(모델명 HNZ-QK2000MAF) 등의 에어프라이어를 포함한 4개 제품에서 전원코드 등의 온도상승 폭이 최대 37.9K 초과하는 등 화재가 우려됐다. 고령자용 보행차는 2개 제품이 안정성시험에서 부적합했다. 기준 기울기 미달로 고령자가 사용시 넘어짐 등으로 인한 상해 위험이 있었다. 특히 보성메디케어(모델명 BS-301) 제품은 측방 안정성시험에서 0.1도의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운동용 안전모는 2개 제품이 내관통성, 충격흡수력 부적합 등 내구성 미달로 사용 중 충격 시 머리 부상 가능성이 있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이번에 리콜명령을 받은 86개 제품의 판매를 원천 차단조치하기 위해 5월1일자로 제품안전정보센터 및 행복드림에 공개한다. 아울러 전국 유통매장과 온라인 쇼핑몰과 연계된 위해상품판매차단시스템에 등록할 계획이다. 수거되지 않은 리콜제품이 발견되면 국민신문고 또는 한국제품안전관리원으로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또 리콜제품을 사용 중인 소비자는 제조·수입·판매사업자로부터 수리·교환·환불 등의 조치를 받을 것을 주문했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
2019-04-30 10:56:23사고 난 차량에 앉아있다 뒤이은 차량에 부딪힌 동승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7단독 서봉조 판사는 A씨가 B보험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A씨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고 7일 밝혔다. 2013년 12월 한 지방 소도시 장례식장 부근에서 차량 4중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한 차량이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방음벽을 들이박았고 이어오는 차들도 피하지 못해 잇달아 부딪혔다. A씨는 딸이 운전하던 차량에 함께 앉아 있다 앞 차량을 부딪쳤고 이어오는 차량에 뒷부분을 충격받았다. A씨는 경추의 염좌와 긴장 등의 상해를 입었다. 특히 A씨는 차 사고 이후 시력이 감퇴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사고로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B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A씨의 책임도 20%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의 딸도 앞서 선행 사고를 야기했고 뒤이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사고 당시 A씨 차량이 위험한 상태로 정차됐다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등 스스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A씨가 주장한 사고로 인한 시력감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고 이후인 2014년 2월 안과 진료기록을 보면 시력이 회복돼 사고와 관계없이 안과 질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한의학회의 진료감정에서도 사고 기여도를 5%이하로 판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재판부는 상해로 인한 병원비와 위자료를 포함해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18-01-05 16:35:18한국공인회계사회가 60돌을 맞이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는 11일 서울시 여의도 63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에서 700여 공인회계사 회원과 정관계 인사 등 내외 귀빈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강성원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은 창립 60주년 기념사를 통해 "1954년 36명이었던 공인회계사들이 1만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며 "기업경영과 국민경제생활 전반으로 공인회계사의 업무분야도 확대·심화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앞으로 60년은 회계산업 선진화, 투명한 경제사회, 건강한 대한민국을 꿈꾸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의 전신인 한국계리사회는 지난 1952년 12월11일 계리사 36명이 발족했다. 지난 60년 간 36명이던 회원은 1만8000명으로 500배가 늘었고, 직무분야도 단순한 회계처리 및 세무상담에서 기업경영과 국민경제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분야로 확대·심화됐다. 양적·질적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이날 60주년 기념식에는 키미타카 모리 일본공인회계사회 회장이 축사를 전해 눈길을 끌었다. 모리 회장은 "한국공인회계사회의 활발한 국제활동에 경의를 표한다"며 "내년 10월 아시아·태평양지역 회계전문가들의 모임인 CAPA 총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전 세계 회계전문가들이 총집결하는 CAPA서울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은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데 공인회계사들이 더욱 기여해달라고 당부했다. 정 정무위원장은 "올해 사회가 공정하고 투명하려면 공인회계사회들은 이를 이끄는 핵심 주체"라며 "부실기업에 대해 지정감사를 받게 된 만큼 앞으로 공인회계사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공인회계사에 '공인'이 붙는 것은 3가지 이유 때문으로 먼저 공인된 사람, 우리사회의 리더, 마지막으로는 윤리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며 "공인이라는 단어에 맞게 회계투명성을 높여야 하는 책무를 다해달라. 그것이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과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축사에 나선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자본시장의 파수꾼이란 자부심을 바탕으로 신뢰성을 확보해달라고 당부했다. 신 위원장은 "공인회계사는 한국 경제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며 "다만 최근 발생한 이면의 회계부정 사건이나 부실 감사 탓에 일부 부정적 시선도 있다. 신뢰받는 전문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해달라. 정부도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선 창립 60주년 홍보영상 상영, 회원과 외부인사에 대한 감사패 수여, 60주년 기념 특별 세리머니에 이어 만찬과 축하공연, 행운권 추첨 등으로 화합을 다졌다. 이날 진웅섭 금융감독원 원장,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 정희수 기획재정위원장 등 정관계 인사가 함께 했으며, 조익순 한국공인회계사회 명예회장, 신찬수, 서태식 고문을 비롯한 국내 회계법인 대표들이 참석했다. 더불어 국회의원 김기식, 김관영, 서영교, 서태종 의원과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 정구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이 자리를 빛냈다. 한편, 같은 날 열린 특별 심포지엄에선 '공인회계사의 당면과제 및 미래상'을 주제로 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김일섭 총장의 주제발표에 이어 국제회계사연맹(IFAC) 차기회장 라첼 그림즈(Rachel Grimes)가 '공인회계사 전문직의 위기와 도전'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fact0514@fnnews.com 김용훈 기자
2014-12-11 18:57:32한화건설이 지난달 준공한 이라크 PC(Precast Concrete)플랜트 전경. PC플랜트는 한화건설이 현재 이라크에서 수행하고 있는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모든 콘크리트 건축부재를 생산한다. PC플랜트에서는 매일 80가구, 연간 2만가구를 지을 수 있는 슬래브와 벽체를 동시에 생산하게 된다. 한화건설이 지난 2012년 5월 수주한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이라크에 '건설 한국'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는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비스마야 지역에 분당신도시(서울 여의도 면적의 6배) 규모인 1830㏊ 부지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대역사다.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가 발주한 이 공사는 도로와 상·하수관로를 포함한 신도시 조성공사 및 10만가구 국민주택 건설공사로 구성된다. 한화건설이 설계·조달·시공을 모두 진행하는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방식으로 진행되며 공사기간은 오는 2019년까지다. ■여의도 면적 6배 규모 현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는 부지 조성을 비롯해 정수·하수처리시설 등 도시 인프라 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한화건설의 설명이다. 한화건설은 PC(Precast Concrete)플랜트를 비롯한 14개의 자재 생산공장을 완공,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각종 건설자재를 생산해 본격적인 하우징(주택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한화건설은 내년부터 연평균 2만가구씩, 5년에 걸쳐 10만가구를 비스마야 신도시에 공급할 예정이다. 총 8개 지구, 58개 단지에 10층 아파트 839개 동을 공급하는 것이다. 한화건설은 단기간 내에 10만가구 주택 건설과 단지 조성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며 이를 위해 PC공법을 통한 통합수행방식으로 공사를 수행한다. PC공법은 건축물의 기둥, 보, 벽과 같은 부자재를 공장에서 제작해 공사현장으로 운반·설치해 완성하는 건설공법으로, 비스마야 신도시에 단기간에 공급될 아파트 건설을 위해 필수적인 공장이다. PC플랜트에서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모든 콘크리트 건축부재를 생산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PC공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PC플랜트에서는 매일 80가구, 연간 2만가구에 해당하는 슬래브와 벽체를 동시에 생산한다. 이를 위해 하루 사용되는 콘크리트 양만 6400t에 달하고 이는 레미콘 트럭 430대에 이르는 양이다. 또 7년에 걸쳐 생산하게 될 벽체와 슬래브 전체 길이의 합은 1만3000㎞에 달하며 이는 바그다드에서 서울까지의 왕복거리다. 한화건설은 공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면 PC공법을 통해 2개월에 한 번씩 잠실 3단지(4000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건설, 공급하게 된다. 또 PC플랜트는 이라크 정부가 발표한 100만가구 주택건설사업에도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화건설 측은 설명한다. PC공법 적용을 위한 PC플랜트 준공식도 지난달 열렸다. 한화건설 최광호 본부장은 "PC플랜트 준공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서 "PC플랜트 준공식을 당초 계획보다 2개월여 앞당겨 진행할 정도로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능력중심 인재채용·동반성장 이역만리 떨어진 열사의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김승연 회장이 강조하는 능력중심의 인재채용 이념 실천이 밑바탕이라는 게 한화건설의 전언이다. 실제 한화건설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현장 투입인력 중 10%는 경험과 노하우를 보유한 50대 후반의 중동건설을 경험한 실버인력으로 채용했다. 또 나머지 90%는 열정과 패기를 지닌 청년층을 선발해 청·장년층 일자리를 고루 창출했다는 평가다. 아울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현장 현지에 동반 진출한 100여개 국내외 중소 자재 및 하도급 업체와 1000여명에 달하는 협력사 직원과의 협력도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순항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한화건설은 건자재와 중장비, 정보기술(IT)·통신, 물류, 항만, 플랜트 등 부대산업과 연관산업 역시 동반 진출해 창조경제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며 이라크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들의 문의가 계속되는 등 중소기업들과 동반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공적인 동반성장 사례가 되고 연인원 55만명이 넘는 일자리가 창출돼 경제위기 극복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외매출 비중 65% 글로벌 건설사 도약" 한화건설의 해외수주 실적은 김승연 회장의 글로벌 경영 전략에 힘입어 지난 2007년부터 꾸준히 증가해 2007년 3000억원에서 지난해에는 3조5000억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한화건설은 이 같은 탄력적인 성장을 이어가 내년에는 해외매출 비중을 한화건설 전체 매출의 65%까지 끌어올려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한화건설은 2012년 김승연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수주한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공사 수행에 집중해 글로벌 종합건설사로 도약하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한화건설은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건설 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은 한화건설이 이라크 내에서 한화건설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이라크 정부가 추가 발주할 발전 및 정유시설, 학교·병원, 군시설 현대화, 태양광 등과 같은 재건사업을 추가로 수주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화건설 관계자는 "한화건설은 이라크 정부와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 외에 인프라 시설에 대한 15억달러 규모의 추가공사를 협의하고 있어 곧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김승연 회장과 한화그룹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신뢰와 한화건설의 사업추진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프로젝트가 해외건설 사상 최대 규모이자 대한민국 신도시 건설 노하우 수출 1호로 기록된 의미 있는 공사인 데다 수주금액도 총 80억달러로 지난 2012년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수주한 공사금액(649억달러)의 12%에 이른다는 상징성도 있는 만큼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한화건설의 전언이다. 특히 한화건설은 여천NCC와 한화케미칼 등 국내 플랜트 공사에서 축적된 화공발전 플랜트 공사 기술력과 신도시 개발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신규시장을 개척한다는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현재 신도시 건설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라크를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알제리, 필리핀 등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인 진출국 및 인접국을 중심으로 해외사업 거점을 확장하겠다는 것. 다만 한화건설은 국가별 리스크 등을 고려해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해외 신규시장 진출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계획을 위해 단계별로 지역거점을 운영, 이를 통해 수주 기회를 더욱 확대하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한다는 설명이다. 한화건설 이근포 사장은 "올 한 해 전 임직원이 중석몰시(中石沒矢·쏜 화살이 돌에 박혔다는 뜻으로 역량을 집중해 전력을 다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의미)의 정신으로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ck7024@fnnews.com 홍창기 기자
2014-05-12 17:26:55쿠르르릉…." 선탄장에 석탄 덩어리들이 쏟아지면 산 중턱에 돌 구르는 소리가 육중하다. 지하 수천m에서 캐 모은 탄 덩어리들이 수직갱을 통해 굴 밖으로 실려 나오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검은 산 하나가 또 만들어진다. 이곳은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살아 있는' 탄광, 한국석탄공사 산하 철암역두 선탄장(등록문화재 제21호)이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공사가 직영하는 이 장성광업소를 '석공'이라고 불렀다. 탄광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야트막한 산 중턱을 온통 석탄 가루가 뒤덮고 있다. 무연탄과 잡석을 분리하고 석탄의 질과 종류를 구분하는 선탄작업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선탄장과 마주보고 있는 건너편 산 중턱엔 삼방동 마을이 있다.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집터를 만들고 이곳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 산봉우리를 사이에 둔 골짜기에는 철암천이 조용히 흐르고 기차역과 상가 밀집지역, 시장이 들어서 철암 마을이 됐다. '철암 탄광역사촌', 태백시가 이름 붙인 이곳엔 역사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아직 생업에 열심인 주민들이 있고, 탄광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만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 왔다.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철암역에 도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등산복을 차려입은 도회지 사람들이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탄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삼삼오오 역을 빠져나와 100m가량 떨어진 옛날 철암역이 있던 자리에 다다랐다. 철암역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8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했던 매우 큰 역이었으나 석탄산업합리화에 따른 석탄생산 감소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탄광촌이 활황기였던 1970년대엔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떠난 한양다방, 봉화식당 같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산업의 중추였던 1960~1970년대 탄광촌의 그 옛날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에 석탄이 없었다면 여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태백시 인구는 5만명이 채 못되는데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탄광촌에 발을 들인 이들을 '막장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대구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여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영등포나 동대문에 비견될 만한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10여동이 남아 있어 시는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로 했다. 철도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이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들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봉화식당, 호남수퍼…." 최근까지도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전시물 중에 탄광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고향에 있는 형이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돈이 궁했던 형이 동생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급전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릴 돈 십만원이 그날이 기한이니 동생이 난처하지만 몇 달만 좀 보아 주었으면…(중략)…5월 25일날 돈을 못 구하게 되면 큰 변이 있을 것 같군.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집에 있기도 싫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군"(철자 교정·원문 사진 참고) 까치발 건물 뒤로 흐르는 철암천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오르게 된다. 여기가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 마을이다.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다. 지금은 거의 빈집으로 지역 화가들이 그려 놓은 벽화만 낯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골목을 산책 삼아 걷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고개를 내민다. "탄광마을을 좋게 꾸며 놓아 구경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해서 찾아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라며 믹스커피 한 잔을 권했다. 탄광에서 운전직으로 수십년 일했던 고영간씨(66)는 이 마을이 과거에 어땠는지 묻자 금세 얼굴이 밝아지면서 "그땐 참 좋았지요. 탄광에서 보수가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고씨는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도시로 보내고 자신과 부인 둘만 삼방동을 지키고 있었다. 고씨는 "이 마을에서 젊을 때부터 살았고 익숙하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며 "시에서 새롭게 개발해서 좋게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로 탄광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철암은 급속히 쇠퇴했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마을을 떠났지만 당시의 마을 풍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것이 요즘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살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낡은 옛 모습을 쓸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관광객을 받자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탄광촌의 역사가 사라지고 개성도, 사연도 없는 현대식 건물을 보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 전국적으로 탄광촌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붐을 이뤘다. 현대화한답시고 탄가루 묻은 옛 건물과 시설을 모두 걷어낸 뒤 잔디밭 깔고 주차장 짓고, 태양열발전 패널을 세웠던 곳들은 현재 아무도 찾지 않는 박제된 시설로 전락했다. 탄광을 재현한다며 세워둔 플라스틱 모조품과 밀랍인형은 불 꺼진 전시실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그런데 철암은 다행히 이제 개발을 시작했다. 옛 탄광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역사촌 운영을 맡은 태백탄광문화연구소도 옛 모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백탄광문화연구소 김기동 대표는 "탄광촌의 옛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민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관광지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14-03-14 09:42:52관련기사 ☞ 기획연재 [이젠 도시재생이다] 쿠르르릉…." 선탄장에 석탄 덩어리들이 쏟아지면 산 중턱에 돌 구르는 소리가 육중하다. 지하 수천m에서 캐 모은 탄 덩어리들이 수직갱을 통해 굴 밖으로 실려 나오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검은 산 하나가 또 만들어진다. 이곳은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살아 있는' 탄광, 한국석탄공사 산하 철암역두 선탄장(등록문화재 제21호)이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공사가 직영하는 이 장성광업소를 '석공'이라고 불렀다. 탄광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야트막한 산 중턱을 온통 석탄 가루가 뒤덮고 있다. 무연탄과 잡석을 분리하고 석탄의 질과 종류를 구분하는 선탄작업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선탄장과 마주보고 있는 건너편 산 중턱엔 삼방동 마을이 있다.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집터를 만들고 이곳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 산봉우리를 사이에 둔 골짜기에는 철암천이 조용히 흐르고 기차역과 상가 밀집지역, 시장이 들어서 철암 마을이 됐다. '철암 탄광역사촌', 태백시가 이름 붙인 이곳엔 역사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아직 생업에 열심인 주민들이 있고, 탄광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만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 왔다.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철암역에 도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등산복을 차려입은 도회지 사람들이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탄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삼삼오오 역을 빠져나와 100m가량 떨어진 옛날 철암역이 있던 자리에 다다랐다. ▲ 탄광촌의 옛 영화를 상징하는 까치발 건물에서 광부와 아내가 출근길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이제 조형작품으로만 볼 수 있다.철암역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8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했던 매우 큰 역이었으나 석탄산업합리화에 따른 석탄생산 감소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탄광촌이 활황기였던 1970년대엔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떠난 한양다방, 봉화식당 같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산업의 중추였던 1960~1970년대 탄광촌의 그 옛날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에 석탄이 없었다면 여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태백시 인구는 5만명이 채 못되는데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탄광촌에 발을 들인 이들을 '막장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대구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여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영등포나 동대문에 비견될 만한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10여동이 남아 있어 시는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로 했다. ▲ 그 옛날 광부로 일하던 동생에게 급전을 부탁하는 형의 편지.철도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이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들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봉화식당, 호남수퍼…." 최근까지도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전시물 중에 탄광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고향에 있는 형이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돈이 궁했던 형이 동생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급전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릴 돈 십만원이 그날이 기한이니 동생이 난처하지만 몇 달만 좀 보아 주었으면…(중략)…5월 25일날 돈을 못 구하게 되면 큰 변이 있을 것 같군.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집에 있기도 싫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군"(철자 교정·원문 사진 참고) 까치발 건물 뒤로 흐르는 철암천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오르게 된다. 여기가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 마을이다.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다. 지금은 거의 빈집으로 지역 화가들이 그려 놓은 벽화만 낯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골목을 산책 삼아 걷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고개를 내민다. "탄광마을을 좋게 꾸며 놓아 구경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해서 찾아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라며 믹스커피 한 잔을 권했다. ▲ 지역 화가들의 미술작품도 한자리에 모여 탄광역사촌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이 고장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탄광에서 운전직으로 수십년 일했던 고영간씨(66)는 이 마을이 과거에 어땠는지 묻자 금세 얼굴이 밝아지면서 "그땐 참 좋았지요. 탄광에서 보수가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고씨는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도시로 보내고 자신과 부인 둘만 삼방동을 지키고 있었다. 고씨는 "이 마을에서 젊을 때부터 살았고 익숙하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며 "시에서 새롭게 개발해서 좋게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로 탄광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철암은 급속히 쇠퇴했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마을을 떠났지만 당시의 마을 풍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것이 요즘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살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낡은 옛 모습을 쓸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관광객을 받자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탄광촌의 역사가 사라지고 개성도, 사연도 없는 현대식 건물을 보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 전국적으로 탄광촌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붐을 이뤘다. 현대화한답시고 탄가루 묻은 옛 건물과 시설을 모두 걷어낸 뒤 잔디밭 깔고 주차장 짓고, 태양열발전 패널을 세웠던 곳들은 현재 아무도 찾지 않는 박제된 시설로 전락했다. 탄광을 재현한다며 세워둔 플라스틱 모조품과 밀랍인형은 불 꺼진 전시실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그런데 철암은 다행히 이제 개발을 시작했다. 옛 탄광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역사촌 운영을 맡은 태백탄광문화연구소도 옛 모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백탄광문화연구소 김기동 대표는 "탄광촌의 옛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민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관광지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 최경환 팀장 예병정 기자 채진근 영상기자 박범준 사진기자
2014-03-02 17:25:19외곽순환도로 추돌사고 외곽순환도로 추돌사고, 9중추돌 2명 사명 19명 부상 '참변' 서울 외곽순환도로에서 공항 리무진 버스가 차량 8대를 덮치면서 두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9월 12일 오후 7시 15분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의정부 나들목 인근에서 9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두 명이 숨지고 19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중 중상자가 있어 사망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 사고로 버스 1대와 1t 화물차량 3대, 승용차 5대 등 차량 9대가 잇따라 추돌히면서 화재가 발생해 버스를 포함한 7대가 전소됐다. 화재가 발생한 버스 승객 17명은 가벼운 부상만 입고 대피했다. 하지만 사고로 버스 아래 깔린 승용차에서 2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2명은 완전히 불에 타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를 분석하는 한편 버스 운전자를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on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3-09-13 08:40:36내곡터널 4중추돌 사고내곡터널 4중추돌 사고, 3명 사망 1명 중상 내곡터널에서 4중추돌 사고가 발생해 3명이 사망했다. 12일 오후 8시 20분께 경기 성남시 고등동 내곡터널 인근 3차로에서 4.5톤 화물차가 교통체증으로 정차 중이던 승용차 두 대와 레미콘 차량 3대 등을 잇달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내곡터널 4중추돌 사고로 30세 이 모씨 등 3명이 사망하고 승용차 운전자 31살 김 모씨도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사고 직후 3개 차로가 2시간 가량 통제돼 극심한 교통 체증이 빚어졌다. 경찰은 내곡터널 4중추돌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사 중이다. /on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3-08-13 08: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