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당신? 우리 당이 만만한가"(류호정 정의당 의원),"야! 어디라고 감히···"(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 ☞ "애먼 감정 싸움, 민주당-정의당 오십보백보" (국민의힘)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진 문 의원과 류 의원의 설전에 대해 국민의힘이 "민주당과 정의당의 애먼 감정 싸움에 국민들이 짜증이 나기는 매한가지"라며 15일 양 당을 모두 비판했다. 특히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향해 "또다시 오만과 독선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았다"고 맹비난했다. 황규환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민주당과 정의당은 애먼 감정싸움으로 국민들의 한숨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국회의 품격을 스스로 추락시키며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1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정복 민주당 의원은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 자리를 찾아가 '외교 행낭을 통한 도자기 밀수'라는 배 원내대표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문 의원과 류 의원은 "당신?", "야 어디서 감히"라는 말을 주고 받으며 말싸움을 벌여 파장이 커졌다. 황 부대변인은 이를 두고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또다시 오만과 독선으로 협치와 타협의 의회민주주의를 짓밟았다"고 일갈했다. 이어 "다른 당 의원의 발언에 대해 반론이 있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치면 될 일"이라며 "회의 도중 다른 당 의석을 찾아 대뜸 항의하는 문 의원의 모습 역시 오만함의 단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문 의원을 향해 "나이 어린 다른 당 의원을 얕잡아 보며 “야”, “감히”라며 속내를 드러낸 것은 더욱 옳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황 부대변인은 정의당을 향해서도 "상대 의원의 발언에 대한 전후 맥락도 파악하지 않은 채, 애먼 자격지심으로 다른 당까지 언급하며 발끈한 쪽 역시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고 비판했다. 문 의원이 "아니, 당신이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될까봐"라는 취지로 말한 것에 대해, 류 의원이 전후 맥락은 파악하지 않은 채 "당신"이라는 말에 발끈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 의원은 "당신"은 제 3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박준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국민의힘은 "설령 두 의원의 감정이 상했다 한들, 지금이 국민들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며 삿대질을 할 때인가"라며 "스스로 입법부이기를 포기한 민주당은 부끄러워하고 야당인 정의당은 분연히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국민들 눈살 찌푸리게 하는 감정싸움만 이어가고 있다"고 힐난했다. 그러면서 "이 정권은 또다시 청문보고서 채택도 없이 의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기만하며 단독으로 31번째 장관임명을 밀어붙였다"며 "앞으로도 국민의힘은 모두가 방기하는 입법부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dearname@fnnews.com 김나경 기자
2021-05-15 14:02:12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을 향해 “야”, “감히 어디서” 등의 발언을 한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장 의원은 14일 페이스북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정복 의원님, 동료 국회의원을 ‘야’라고 부르시면 안 된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는 “동료 의원에게 '감히 어디서'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부적절하다”며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당적이 달라도 그렇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 본회의장에서 류호정 의원에게 언성 높인 이후 곧바로 사과하실 줄 알았더니 아직도 묵묵부답이셔서 참으로 놀랍다”며 “상식 밖의 언사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런 것까지 일일이 요구해야 하는 우리 국회의 수준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품격 지키며 하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날 국회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청문보고서가 더불어민주당의 단독 채택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류 의원과 문 의원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당시 문 의원이 "아니 그걸 당신이"라고 말하자 류 의원은 "당신?"이라고 따졌다. 그러자 문 의원은 "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어디서 지금 감히!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라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에 류 의원은 "우리 당이 만만해요? 저기(국민의힘)에다가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여기 와서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맞섰다. solidkjy@fnnews.com 구자윤 기자
2021-05-14 13:35:25[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장손황후가 임신한 지 10개월이 넘었는데도 출산을 하지 못해 중병으로 앓아누웠다. 황후는 의식도 명료하지 않았다. 여러 명의 태의(太醫)들이 진료를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태종은 매일매일 안절부절못했다. 어느 날, 당 태종은 국정을 처리한 후에 대신 중 서무공에게 “황후가 중병을 앓고 있는데 태의들이 계속해서 치료하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하오. 경은 어디에 명의가 있는지 아시오?”라고 물었다. 서무공은 그 말을 듣고 곧 이어서 손사막(孫思邈)을 태종에게 추천하였다. “신은 일찍이 듣기로 화원현(華原縣) 민간 의사로 손사막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종종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약을 수집하는데, 특히 부인과와 소아과에 능숙하다고 합니다. 난치병은 일단 그가 손을 대면 묘수를 되찾을 수 있고 약으로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인의 견해로는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황후를 치료해 주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라고 했다. 서무공의 말을 들은 당 태종은 수긍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밤을 새워 화원현으로 보내 손사막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당 태종은 손사막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그를 불러 “손 선생의 의술이 뛰어나 만인을 회생시키는 공이 있다고 들었소. 황후가 중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특별히 선생을 부른 것이니 호전되면 반드시 큰 상을 내리겠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봉건사회로 남녀가 친(親)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례와 가르침에 따라 어의라도 궁내 부녀자를 진찰할 때 대부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구술에 따라 처방을 받아야 했다. 손사막은 게다가 민간 의사로 무명베 옷차림으로 옷을 평범하게 입고 있었다. 그래서 황후의 봉체(鳳體)에는 더더욱 접근할 수 없다. 손사막은 제대로 진료가 안 될 것을 미리 간파하고서는 황후를 모시는 궁녀를 불러냈다. 그래서 궁녀에게 황후의 병세를 자세하게 물었다. 더불어서 담당 어의가 지금까지 작성해 놓은 병력과 처방전을 받아서 꼼꼼히 검토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여 이미 황후의 병세를 거의 파악하였다. 손사막은 황후의 내실에 들어왔다. 그러나 짐작대로 황후를 마주할 수 없었다. 황후의 내실에는 큰 발이 쳐져 있었고, 손사막은 발과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야 했다. 그러니 진맥을 할 수 없었다. 황후는 의식도 명료하지 않아 물음에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지 진찰을 해야했다. 손사막은 붉은 실을 꺼냈다. 그리고 궁녀에게 실의 한쪽 끝을 쥐여 주고 황후의 오른쪽 손목에 매라고 부탁했다. 그러고서는 나머지 한쪽을 발에 통과시켜 자신의 앞쪽까지 당겼다. 손사막은 실을 팽팽하게 당긴 후 손가락을 실에 대고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아무도 보지 못했던 진맥법이었다. 이것을 인선진맥(引線診脈) 혹은 현사진맥(懸絲診脈)이라고 한다. 손사막은 실 끝에 손가락을 대고 마치 사람의 손목에 진맥하듯이 정신을 집중했다. 황후의 요골동맥이 뛸 때마다 실을 통해서 느껴지는 진동을 파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황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서 “손사막은 신의(神醫)로다.”라고 놀라워했다. 손사막은 진맥을 마친 후 “이것은 난산(難産)입니다. 황후의 태실 속의 태아의 심장이 약하고 위치가 불순(不順)한 것이 원인으로 그래서 10개월이 넘도록 태아가 나오지 않으니 중병에 해당합니다.”라고 했다. 당 태종은 “그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손사막은 “궁녀에게 대나무 발 가까이에 왕비의 손을 잡도록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침을 찌르면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손사막은 궁녀를 시켜서 황후의 왼손을 발 가까이 대게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발 사이로 내밀게 했다. 손사막은 침으로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 끝에 있는 중충혈(中衝穴)을 강하게 찔렀다. 황후는 아파서 비병을 지르면서 온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그러자 잠시 후 갓난아이 소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궁녀가 급하게 뛰쳐 나왔다. “황제 폐하, 황후께서 손사막에게 침을 맞은 후 황자(皇子)도 무사히 태어났고 황후 의식도 되돌아왔습니다.”라고 했다. 훗날의 당 고종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당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손사막에게 “손 선생은 과연 의술이 심오하고 회춘(回春)케 하는 묘수가 있으니 확실히 당대의 명의로소이다! 오늘의 치료는 대단하오.”하고 말했다. 태종은 손사막에게 좋은 말 한 필과 비단 백 척, 천 냥의 황금을 선물했고, 벼슬을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사막은 금은 보화는 물론이고 벼슬 또한 사양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손사막의 현사진맥은 의사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이후로 궁의 어의들은 왕비와 후궁을 진찰할 때는 현사진맥을 시도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 때 일이다. 건륭제의 공주가 병에 걸렸다. 그런데 건륭제는 어의들이 현사진맥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공주를 진찰하기 전에 어의를 시험해 보고자 했다. 우선 발을 몇 겹을 쳐 놓고 어의가 안쪽을 보지 못하게 했다. 어의는 단지 얼마 전 혼례를 올린 공주를 진찰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의는 길게 늘어뜨려진 실을 통해서 진맥을 하고 나서는 황제를 기쁘게 하려고 웃으면서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이것은 분명 희맥(喜脈)입니다.”라고 했다. 희맥은 임신맥을 뜻한다. 건륭제는 어의의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가는 실로 진맥을 했다는 것인가? 지금 희맥이라고 했는가? 짐은 이를 믿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어의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지금껏 진맥을 했지만 한 번도 착오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건륭제는 내시를 시켜서 발을 걷어 올리고 어의를 이끌고 안을 살펴보도록 했다. 그런데 명주실은 공주의 손목이 아니라 걸상다리에 매어져 있었다. 어의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이것은 황제를 속인 것으로 필경 죽임을 면치 못할 불경죄였다. 어의는 당황해하면서 바닥에 황급히 엎드렸다. 엎드려서 보니 걸상 다리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어의는 노련했기에 침착하게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황제 폐하, 이 걸상 다리를 쪼개면 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건륭제는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서도 즉시 내시에게 명하여 날카로운 도끼를 꺼내 걸상다리를 쪼갰다. 그랬더니 곁에서 봤던 구멍이 있는 곳 안쪽에 애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의는 다시 급히 무릎을 고쳐 꿇고서는 “이것 보십시오. 이것은 목(木)의 임신이기에 제가 희맥(喜脈)이라고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서야 황제는 어의에게 비로소 병든 공주를 진찰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어의는 땀을 뻘뻘 흘려 옷자락까지 흠뻑 젖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어의는 공주를 현사진맥을 통해서 진맥했고 진맥 결과를 황제께 고했다. 어의의 진단은 거의 들어맞았다. 어의는 역시나 평소에 내시와 궁녀들을 통해서 후비나 공주의 생활습관, 식습관, 대소변 상태, 수면상태 등을 파악해 왔기 때문에 현사진맥을 통해서 병세를 알아낸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어의는 이렇게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당나라 때 약왕(藥王)으로 칭송받던 손사막이 실제로 손목에 실을 매달아 진맥했는지를 알 수 없다. 설령 실제로 시도를 했던 진맥법이라 할지라도 병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의문이다. 그의 저서인 <천금방>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손사막 시대의 옛날의 의사들은 진맥하는 능력이 요즘보다 탁월했을 것은 분명하다. 촉각과 집중력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사진맥(縣絲診脈)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불가능한 진맥법으로 봉건적 남녀유별(男女有別)한 시대가 만들어 낸 웃지못할 촌극(寸劇)에 불과하다. * 제목의 ○은 ‘실’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중국고사> ○ 長孫皇後與懸絲診脈. 唐貞觀年間太宗李世民的長孫皇後懷孕已十多個月不能分娩, 反而患了重病, 臥床不起. 雖經不少太醫醫治, 但病情一直不見好轉. 太宗每日愁鎖眉頭, 坐臥不寧. 有一日, 唐太宗理完朝政以後, 留大臣徐茂公問道:“皇後身患重病, 經太醫不斷診治, 百藥全無效果. 卿可知哪裏有名醫? 請來爲她繼續治療才是” 徐茂功聞言, 便將孫思邈推薦給太宗說道:“臣早聽說華原縣(今耀縣) 有位民間醫生孫思邈, 常到各地采藥爲群眾治病, 對婦兒科尤其擅長. 疑難之症一經他手, 都能夠妙手回春, 藥到病除. 以臣之見, 還是將他召進宮來, 爲皇後治療才好!” 唐太宗聽過徐茂功的一番話後, 表示同意. 便派遣使臣馬不停蹄, 星夜奔赴華原縣, 將孫思邈召進了皇宮. 唐太宗見孫思邈已經來到, 便立即召見了他, 說道:“孫先生醫術超群, 有起死回生之功, 皇後身患重病, 昏迷不醒, 特請先生前來治療, 若能好轉, 寡人定有重賞.” 但是, 在封建社會, 由於有男女授受不親的禮教束縛, 醫生給宮內婦女看病, 大都不能夠接近身邊, 只能根據旁人的口述, 診治處方. 孫思邈是一位民間醫生, 穿著粗布衣衫, 皇後的鳳體他更是不能接近的. 於是他一面叫來了皇後身邊的宮娥采女細問病情, 一面要來了太醫的病曆處方認真審閱. 他根據這些情況, 作了詳細的分析研究, 已基本掌握了皇後的病情. 然後, 他取出一條紅線, 叫采女把線系在皇後右手腕上, 一端從竹簾拉出來, 孫思邈捏著線的一端, 在皇後房外開始 ‘引線診脈’了. 沒有多大工夫, 孫思邈便診完了皇後的脈. 原來, 孫思邈醫術神奇, 靠著一根細線的傳動, 竟能診斷清人體脈搏的跳動. 這就是他被群眾稱爲神醫的原因. “萬歲! 民醫已對病症經過了查問診脈, 診斷其爲胎位不順, 民間叫做小兒扳心, 故而難產十多個月不生, 致使皇後身患重病.” 孫思邈診斷完畢, 向太宗稟告了病因. 唐太宗聽完以後, 問道:“孫先生言之有理, 但不知你打算怎樣治療?” 孫思邈答道:“只需吩咐采女, 將皇後的手扶近竹簾, 民醫在其中指紮上一針即見效果.” 於是采女將皇後左手扶近竹簾, 孫思邈看准穴位猛紮了一針, 皇後疼痛, 渾身一顫抖. 不一會兒, 只聽得嬰兒呱呱啼哭之聲, 緊接著采女急急忙忙跑出來說道:“啟稟萬歲, 皇後被孫醫師紮過一針後,產下了皇子, 人也蘇醒了!” 唐太宗聞言大喜, 對孫思邈說道:“孫先生果真醫理精深, 妙手回春, 確實是當代名醫!” (장손황후을 현사진맥하다. 당나라 정관 연간에 태종 이세민의 장손황후가 임신한 지 10개월이 넘었는데도 출산을 못하고 중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많은 태의의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태종은 매일 미간을 찌푸리고 안절부절못했다. 어느 날 당 태종이 조정의 일을 마치고 나서 대신 서무공에게 물었다. “약은 효과가 없다. 유명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계속 치료하도록 하라.” 서무공은 이 말을 듣고 손사막을 당 태종에게 추천하면서 말했다. “화원현에 민간의사 손사막이라는 의사가 있다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는 종종 여러 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수집했고, 특히 산부인과와 소아과에 능숙합니다. 그 사람은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소인의 생각에는 그를 궁궐로 불러내어 왕비를 치료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서무공의 말을 듣고 당 태종은 이에 동의하여 별이 빛나는 밤에 화원현에 쉬지 않고 사신을 보내 손사막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손사막 당신은 의술이 뛰어나고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들었다. 왕비가 중병에 걸렸고 의식도 없어서 특별히 당신을 불러 치료를 받고자 한다. 만약 능히 호전이 되면 과인이 큰 상을 내리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친밀해서는 안 된다는 예법 때문에 궁궐에서 여자를 진료하는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들과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타인의 설명과 진료기록 등을 보고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손사막는 민간의사로서 거친 옷을 입고 있어서 왕비의 봉황 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왕비 옆에 있는 궁녀에게 연락해서 상태를 자세히 알아보고 동시에 어의의 진료기록부와 처방전을 면밀히 검토하기 위해 이를 바탕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구를 진행한 결과 왕비의 상태를 기본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붉은 실을 꺼내서 채녀에게 왕비의 오른쪽 손목에 실을 묶고 대나무 커튼에서 한쪽 끝을 당겨달라고 요청했다. 손사막은 실의 한쪽 끝을 잡고 실을 잡고 맥을 잡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사막은 진단을 시작했다. 손사막의 의술은 너무나 신기해서 실의 파동을 통해 사람의 맥박을 진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중들에게 기적의 의사로 불렸다. “황제 폐하, 민간인 의사인 제가 병을 살펴보니 맥박을 진단한 결과 태아의 위치가 이상하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태아의 심장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 결과 왕비는 1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손사막은 진단을 마친 후 당 태종에게 병의 원인을 알렸고, 이 말을 들은 당 태종은 “손 선생의 말씀은 일리가 있지만 어떻게 치료할 생각인 지 모르겠다.”라고 물었다. 손사막은 “채녀에게 대나무 발 가까이에 왕비의 손을 잡도록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침을 찌르면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채녀가 왕비의 왼손을 대나무 발 가까이에 대고 손사막은 혈점을 찾아 침을 놓자 왕비는 온몸을 아파하며 떨었다. 잠시 후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채녀가 급히 달려가서 말하기를 “황제께 아뢰옵니다. 황후가 손사막에게 침을 맞은 후 황자를 낳고 의식도 깨어났습니다.”라고 했다. 당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손사막에게 “손 선생은 과연 의술이 심오하고 묘수가 회춘하니 확실히 당대의 명의다.”고 말했다.) ○ 乾隆皇帝與懸絲診脈. 一日乾隆皇帝宣禦醫看病, 禦醫不知那位妃子染恙, 心想先討吉利再說. 於是就在懸絲上診了一會兒脈後, 喜形於色地說 : “啟稟萬歲, 喜脈!” 乾隆一聽, 暗地笑了, 說道“憑這根細絲診脈看病?朕不信!” 禦醫忙磕頭道:“臣診脈, 從未有過差錯.” 乾隆命太監帶禦醫去看懸絲另一頭. 原來, 皇帝想試試禦醫的本領, 絲線的另一端並未系上病人的手腕, 而是系在凳腿上. 禦醫看了大吃一驚, 險些嚇暈——這可欺君之罪啊! 但他不愧有經驗的老禦醫, 稍定了一下神, 他搬起凳子細細查看一遍後, 說:“敢請劈開凳腿, 便知微臣講的真假.” 乾隆立即命太監取出利斧劈開凳腿, 只見凳腿中有一小蛀洞洞內有只小蟲正蠕動, 禦醫忙跪奏:“萬歲請看此爲木之孕也, 叫喜脈.” 皇上一聽, 面露喜色點頭表示認同, 這才命其給正生病的格格診治. 此這位禦醫已嚇得大汗淋漓, 連衣襟都濕透了. (건륭황제와 현사진맥. 어느 날 건륭제가 어의에게 진찰을 부탁했는데, 어의는 후비가 아픈 것을 모르고 먼저 행운을 빌고 싶어서 현사진맥을 통해 확인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오. 임신맥입니다!”라고 했다. 건륭은 이 말을 듣고 몰래 웃으며 “이 얇은 실로 맥박을 진단할 수 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자 어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맥박을 통해 판단하는 데에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사옵니다.” 건륭제는 내시에게 명령하여 어의를 데리고 실의 묶인 반대쪽 끝을 보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비단실의 반대쪽 끝은 환자의 손목이 아닌 의자 다리에 묶여 있었다. 어의는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거의 기절할 뻔했다. 이것은 황제를 속인 범죄다. 그러나 그는 노련한 황실 어의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진정한 후 의자를 들어 올려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감히 의자 다리를 쪼개면 신이 말씀드린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건륭은 즉시 내시에게 명령하여 날카로운 도끼를 꺼내 의자 다리를 쪼개어 보니 의자 다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 속에서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의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제 폐하, 이것은 나무의 임신이기에 이 또한 임신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에게 병든 공주를 진단하고 치료하라고 명했다. 어의는 너무 겁에 질려 땀을 많이 흘리고 옷까지 흠뻑 젖었다.) * 상기 관련 고사 출처 : 중국 <백도백과(百度百科)> 사이트의 ‘懸絲診脈’ 관련 내용임.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3-08 10:41:4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 제후국 중에는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 고죽국을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3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인 백이(伯夷)와 둘째 아빙(亞凭), 그리고 막내 동생인 숙제(叔齊)였다. 그런데 고주국 군주는 막내인 숙제를 영주로 세우고자 했다. 숙제는 맏형을 대신해서 자신을 군주로 앉히려는 아버지가 못마땅했지만 아버지 면전에서는 거역하지 못했다. 숙제는 아버지가 죽고 나자 맏형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형님이 모름지기 장손이니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형은 이미 왕위에 뜻이 없었고, 아버지의 유지에 마음이 상한 터라 거절했다. 백이는 “이미 아버지의 명이고 유언이다.”하고 말하고서는 궁을 떠나 버렸다. 사실 신하들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숙제 또한 왕위에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형인 백이를 찾아 궁을 떠났다. 결국 둘째인 아빙이 군주가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왕위를 이을 왕자들이었지만 궁과 자국을 등진 떠돌이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당시 인접국으로 주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주문왕(周文王)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의탁하고자 백의와 숙제는 주문왕을 알현하고자 했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궁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며칠 전 주문왕이 서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주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 무왕(武王)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무왕은 나무로 만든 위패를 실어 문왕으로 추존하고 동쪽에 있는 종속관계의 상(商)나라의 주(紂)왕을 칠 요량으로 말을 타고 출정 채비를 했다. 당시 주나라는 상나라에게 공을 바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는 반역과 다름없었다. 상나라는 은(殷)나라라고도 불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지내지 않고 창칼을 들다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로써 주국의 왕을 치는 것을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무왕은 어이가 없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버지인 문왕의 유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문왕은 죽기 전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상나라를 쳐서 멸망시켜라.”라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를 몰랐던 백이와 숙제는 곁으로 보기에 반역이라 여긴 것이다. 무왕 옆의 신하들은 감히 왕에게 건방진 소리를 한다고 칼을 꺼내 백이와 숙제의 목을 치려고 했다. 그때 무왕의 공신인 강태공이 나셨다. “멈추거라. 이분들은 의로운 분들이시다.”라고 하면서 백이와 숙제를 피신시켰다. 무왕은 이러한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나라를 쳐서 어지러움을 평정했다. 결국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게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강태공 때문에 목숨을 건사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서 한탄했다. 이들은 신하로서 군주에 대한 신의(信義)를 져버린 것을 개탄하고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지키고자 “배신자 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하고서는 수양산의 작은 움막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봄철이긴 했지만 수양산에는 먹을 것들이 없었다. 산에는 단지 생고사리들만 빼곡하게 나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쩔 수 없이 고사리를 캐서 먹었다. 많이 뜯어서 훗날 먹으려고 말려 놓기도 했다. 봄철의 생고사리는 연해서 먹기에 부드러웠다. 끈적거리면서 맛도 좋았다.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뿐만 아니라 고비도 뜯어 먹었다. 고사리와 고비는 비슷하게 생겼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고사리인지 고비인지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사리를 먹으면 먹을수록 다리에 힘이 빠졌다. 게다가 양기가 떨어지면서 양위(陽痿)가 생겼다. 양위는 남성의 발기불능을 말한다. 눈은 점차 침침해지고 머리카락이 줄었으며 배가 불러 복창(腹脹)이 생겼다. 그러나 얼굴만은 축나지 않았다. 궁에서 주나라 무왕이 신하에게 물었다. “그때 그 무엄한 자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느냐?” 그러자 신하는 “수양산에 숨어 들어가 고사린지 고빈지를 뜯어 먹으면서 산다고 합니다.” 무왕은 “수양산의 고사리라. 배신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고서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수양산의 고사리를 먹는다? 수양산에 난 풀도 주나라 것이 아니더냐?”하고 반문했다. 사람들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다고 수군거렸다. “백이와 숙제는 이율배반적이다.”라는 말이 산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백이와 숙제는 억울한 마음에 고사리마저 끊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전쟁과 복수로 얼룩진 세태를 원망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바로 채미가(采薇歌)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不知其非矣]. 신농(神農)과 우(虞), 하(夏)의 시대가 몰망하니[神農虞夏 忽然沒兮],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我安適歸矣] 아! 이제는 죽음 뿐이니[于嗟徂兮],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命之衰矣]!”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마저 끊고서 굶어 죽었다. 그래서 후세에서는 백이와 숙제를 청절지사(淸節之士)로 불렀다. 훗날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부정과 불의를 혐오하고 일을 미워했지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또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고, 원망을 품은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랴?”라고 평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 때문에 죽은 것일까 아니면 굶어 죽은 것일까. 그러나 백이와 숙제가 요절한 것이 어찌 고사리 때문이었겠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흉년으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 고사리에 힘입어 살아나기도 했으니 또한 고사리에 세상을 구제하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백이와 숙제 고사로 인해 사람들은 고사리를 생으로 먹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의서에서조차 <수신기>에 기록된 ‘어떤 사냥꾼이 고사리 한 줄기를 꺾어 먹었는데 가슴 속이 좋지 못하더니 병이 났다. 후에 작은 뱀 같은 것을 토했고 이것을 처마에 걸어두자 점차 마르더니 고사리가 되었다. 마침내 이것은 고사리를 생으로 먹을 수 없음이 밝혀졌다.’라는 이야기 등이 덧붙여지면서 생고사리 섭취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시켜왔다. 의서에서는 ‘고사리는 그 줄기가 여릴 때는 채취하여 잿물에 삶아 끈적이는 즙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려 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안전하다.’하고 기록해 놓고 있다. 생고사리로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생고사리는 각기병을 유발한다. 생고사리에는 티아민(비타민B1) 분해효소가 있어서 생으로 오랫동안 많은 양을 먹으면 티아민 결핍증으로 각기병이 생긴다. 그래서 생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활력이 떨어진다. 특히 옛말에 어린아이들의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다리가 약해져 걸을 수 없다고 했다. 항간에 고사리를 먹으면 정력이 약해진다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니다. 다만, 역시 고사리는 생으로 먹으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생고사리는 요절하게 하지만 익힌 고사리는 연명하게 한다. * 제목의 ○○○○는 ‘생고사리’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사기열전(史記列傳)> 伯夷列傳. 전략. 孔子曰 “伯夷, 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乎?” 余悲伯夷之意, 睹軼詩可異焉. 其傳曰 伯夷, 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 “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 叔齊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 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為文王, 東伐紂. 伯夷, 叔齊叩馬而諫曰 “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仁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此義人也.” 扶而去之.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 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作歌. 其辭曰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虞, 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백이열전. 전략. 공자가 말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지난날의 과오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적었다.” “어짊을 구하면 어짊을 얻어지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나는 백이의 뜻을 슬퍼하며, 그의 시, 채미가를 보면 정말로 이상했다. 그들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가 숙제를 영주로 세우려 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다.”하고는 곧 달아나 버렸다. 숙제 또한 자리에 오르려하지 않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둘째 아들을 영주로 세웠다. 이 무렵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서백창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서 의탁하지 않는가’ 하였다. 주나라에 이르자 서백은 죽고 아들 무왕이 나무로 만든 위패를 실어 문왕으로 추존하고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지내지 않고 창칼을 들다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을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좌우 신하들이 죽이려 하였다. 강태공이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의인이니라.”하고 모시고 갔다. 무왕이 이미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았으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굶어서 죽기에 앞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랫말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으로서 폭력을 바꿈이여,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도다. 신농, 우. 하가 이미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까나? 아,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간다. 우리의 목숨이 쇠하였도다!”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렇게 볼 때 원망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본초강목> 蕨. ○ 藏器曰多食消陽氣, 故令人睡, 弱人脚. 四皓食芝而壽, 夷齊食蕨而夭, 固非良物. 干寶搜神記云, 郗鑑鎭丹徒, 二月出獵. 有甲士折蕨一枝, 食之, 覺心中淡淡成疾. 後吐一小蛇, 懸屋前, 漸乾成蕨. 遂明此物不可生食也. (고사리. 진장기는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양기를 소모시키므로 잠이 오게 하거나 다리가 약해지게 한다. 상산사호는 영지를 먹고 오래 살았고,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먹고 요절하였으니, 참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간보의 수신기에서는 희감이 단도를 진압하고 2월에 사냥을 나갔다. 어떤 갑사가 고사리 한 줄기를 꺾어 먹었는데 가슴 속이 좋지 못하더니 병이 났다. 후에 작은 뱀 하나를 토해냈고 이것을 처마에 걸어두자 점차 마르더니 고사리가 되었다. 마침내 이것은 생으로 먹을 수 없음이 밝혀졌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 時珍曰蕨之無益, 爲其性冷而滑, 能利水道, 泄陽氣, 降而不升, 耗人眞元也. 四皓采芝而心逸, 夷齊采蕨而心憂, 其壽其夭, 於蕨何與焉? 陳公之言, 可謂迂哉. 然飢人瀕死, 賴蕨延活, 又不無濟世之功. (이시진은 ‘고사리가 무익한 것은 그 성질이 차면서 매끄러워 소변을 잘 빠져 나가게 하거나 양기를 빠져나가게 하거나, 기가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거나, 사람의 진원을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상산사호는 영지를 채취해 먹을 때 마음이 편안하였고,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채취해 먹을 때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였으니, 사호는 장수하고 백이숙제는 요절한 것이 어찌 고사리 때문이겠는가. 진장기의 말은 물정 모르고 한 소리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굶주린 사람들이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 고사리에 힘입어 살아나니 또한 세상을 구제하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 薇. 生水旁, 葉似萍, 蒸食利人. 三秦記云, 夷齊食之三年, 顔多不異. 武王誡之, 不食而死. (고비. 물가에서 나고 잎은 개구리밥과 유사한데, 쪄 먹으면 사람에게 이롭다. 삼진기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이것을 3년 동안 먹었는데, 얼굴이 전혀 축나지 않았다. 무왕이 의아해 여기자 급기야 이마저 끓고 죽었다고 하였다. <향약집성방> 蕨. 食療云 寒. 補五臟不足, 氣壅經絡, 筋骨間毒氣, 令人脚弱, 不能行. 消陽事, 令眼暗, 鼻中塞, 髮落, 不可食. 又冷氣人食之多腹脹. 詩云 陟彼南山, 言釆其蕨. 又曰 言采其薇. 是蕨薇俱可食. 伯夷叔齊採薇而食, 恐蕨非薇也. 蕨處處山中多有之. 今永康道江居民多以醋淹而食之. (고사리. 식료본초에서 이르길, ‘고사리는 약성이 차갑다. 오장의 부족함을 보한다. 기가 경락을 막고 근골 사이 독기로 사람의 종아리가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한다. 성관계가 적어지고 눈이 어두워지며 콧 속이 막히고 머리털이 떨어지므로 먹으면 안 된다. 또 기가 차가운 사람이 먹으면 배가 많이 차오른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저 남산에 올라서 고사리를 채취한다고 말했고 또 고비를 채취한다고 하였다. 고사리와 고비는 다 먹을 수 있다. 백이와 숙제가 고비를 채취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아마 고사리지 고비가 아닐 것이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10-11 15:28:1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효장세자(孝章世子)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는 효장세자가 어릴 적 요절하고서 7년 이후에 태어난 이복동생이다. 효장세자가 모름지기 장자이자 종묘사직을 이을 후사였다. 효장세자는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서 난 다음 해 음력 2월에 7세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해 음력 8월 심한 열감기를 앓게 되었다. 의관들의 탕약을 처방하면서 열은 잡히는 것 같았지만 몸의 상태는 쉽게 회복을 보이지 않았다. 음력 5월에는 두창(痘瘡)을 가볍게 앓은 적이 있고, 이후 감기에 걸려 회복되자마자 또다시 감기에 걸린 것이다. 효장세자는 몸이 마르고 병약했으며 평소 잦은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영조는 “논어에 ‘부모(父母) 유기질지우(唯其疾之憂)'라고 하였으니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만을 우려한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되는구나”라고 하면서 항상 세자의 건강을 걱정했다. 음력 9월의 어느 날, 효장세자는 감기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동궁(東宮) 뜰을 거닐 정도가 되었다. 당시 동궁에는 대추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동궁 정원을 산책하다가 붉게 물든 대추를 한 개 따 보려다가 그만 큰 가시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아얏~!”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신하들이 “저하~ 무슨 일이시옵니까?”하며 놀랐다. 신하들이 보기에 분명 대추나무 가시에 찔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효장세자는 “아무 일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하면서 오늘 일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렸다. 효장세자는 어린아이임에도 항상 의젓했고 참을성 또한 강했다. 왕세자의 손가락이 대추나무 가시에 찔렸다면 분명 신하들도 문책을 받을 것이고, 아바마마에게도 전해져 또다시 걱정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견디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였다. 대추나무의 가시는 무척 크다. 대추를 원래 한자로 대조(大棗)라고 하는데, 대추나무 조(棗) 자는 가시 자(朿) 자 두 개가 붙여진 것으로 그만큼 가시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추나무를 가시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대추나무의 가시는 크고 굵어서 어른들도 한번 찔리면 그 통증이 대단하고 상처가 남기 때문에 대부분 심한 염증으로 곪기 일쑤였다. 효장세자는 그날 밤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시에 찔린 손가락은 잘 익은 대추마냥 붉게 부어올랐으며 후끈거리는 열감이 느껴졌다. 효장세자는 소위 말하는 생인손에 걸린 것이다. 생인손은 바로 조갑주위염으로 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함부로 떼거나 가시 등에 찔려 상처가 생긴 상태에서 세균이 감염되면서 생기는 화농성, 염증성 질환이다. 의서에는 대지(代指)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손톱이 문드러져 빠지기도 하고, 면역력에 따라서 패혈증이 합병되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다. 효장세자의 손가락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북채처럼 퉁퉁 부어올랐고 가시에 찔린 부위는 마치 삶아 놓은 대두콩 같았다. 벌써 고름이 차는 듯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박동에 맞춰서 욱신욱신거렸다. 하룻밤 자고 나면 좋아질 줄 알고 참았건만, 증상이 날로 심해지자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왕세자를 모시는 내시가 어디서 들었는지, 찹쌀밥을 구해와서 종창부위에 붙어 주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가시에 찔린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어느 날 영조가 효장세자를 불렀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글공부를 잘해 오고 있는지 시험해 보고자 간혹 경연장으로 불러 왔던 것이다. 효장세자는 지금껏 암송했던 사서삼경의 일부를 외우고 질문에 답했다. 영조는 “대견스럽구나”라고 하면서 강론을 담당한 관원에게도 칭찬을 했다. 그러고서는 “그럼 내가 말하는 문구를 써 보거라. 대학에 나오는 문구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하는 것이다. 효장세자는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으로 붓을 잡았다. 그러나 손가락의 통증으로 인해서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나무 목(木) 자의 한 획을 그어 내리다가 눈물을 흘렸다. 7살 어린 나이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나타난 것이다. 영조는 붓글씨 쓰는 것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효장세자를 보고서는 멈칫했다. 곧바로 그것이 퉁퉁 부은 손가락 때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조는 효장세자에게 호통을 쳤다. “왜 그때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하면서 큰소리로 나무랐다. 그러자 효장세자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 육신 손가락 종창의 고통보다 아바마마께서 평소 하시는 소자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더 괴롭기 때문이었사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속으로 ‘너의 효심이 갸륵하구나.’라고 여겼다. 이에 다행스럽게도 왕세자를 모시던 신하들의 문책도 피할 수 있었다. 영조의 부름을 받고 도제조 민진원이 대령했다. 민진원은 의관들과 함께 경연장으로 들어왔다. 민진원은 왕세자의 손가락 상태를 의관들과 함께 살펴보고 고하기를 “송구하게도 왕세자 손가락의 종창(腫脹)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의관들의 말을 들으니 악종(惡腫)이 대단해서 의관들이 조금이라도 만져 보려고 하면 고통스러워하시면서 손도 못 대게 하신다고 합니다. 너무도 놀랍고 걱정됩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그럼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치료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민진원은 “의관들과 논의를 해 보니 첫째, 침으로 곪은 부위를 찔러 농을 빼내는 것이 가장 효과가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세자 저하의 나이가 어려서 두려움과 통증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어 적합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탕을 다려서 먹는 것입니다. 적절한 처방으로는 선방활명음(仙方活命飮)이 있다고 합니다. 선방활명음은 일체의 옹저(癰疽)와 독종(毒腫)에 효과적이며 열독(熱毒)을 푸는데 특효라고 합니다. 그러나 먹어서 치료하는 경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민진원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보다 자신있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세 번째, 바로 생민들레를 으깨서 그 즙을 먹고 찌꺼기를 손가락에 대고 싸매 주는 방법입니다. 민들레는 포공영(蒲公英)이라고 해서 의서에도 대지(代指)에 사용하는 처방이 나와 있으니 지금 바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의관 김필우 또한 일전에 손가락에 상처가 있어 20여 일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민들레를 바르니 바로 효험이 있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영조는 “지금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인데, 생민들레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하고 의아해했다. 그러자 민진원은 “지금도 궁밖에는 가을 민들레가 지천에 깔려 있사옵니다. 가을에도 민들레는 파릇파릇하게 잎을 펼치고 노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솜 같은 씨앗뭉치를 가지고 노는 학동들을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의관들을 내보내 준비를 한다면 저녁 입진 때면 사용이 가능하겠습니다.” 영조는 “민들레가 바로 효과가 있겠는가? 탕보다 빠르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민진원은 “왕세자의 증세가 가볍지 않으니, 우선 오늘 저녁 민들레를 붙이고 며칠 지켜본 뒤라야 효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날 저녁 의관들은 생민들레를 짓찧어 그 즙은 마시게 하고 찌꺼기를 모아서 종창이 생긴 부위에 감싸 놓았다. 저녁 무렵 민들레를 붙이고 난 뒤에 왕세자의 손가락 종창에서는 고름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붓기도 조금씩 가라앉았으며 욱씩거리는 통증도 줄어들었다. 다음 날에는 손가락 종창의 고름이 스며 나오는 것이 확연히 줄었고 그날 밤에는 통증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민들레 처방은 이렇게 해서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3일간 적용했다. 영조는 3일 후 다시 효장세자를 불렀다. “지난번 경연장에서 세자의 손가락에 난 악창(惡瘡)이 매우 심해서 처음에는 내가 차마 눈뜨고 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나아진 다음에야 비로소 보는데도 이렇게 깜짝 놀랄 정도니 어찌 이와 같이 쉽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이는 바로 포공영(蒲公英)의 효과로다. 도제조와 의관들에게도 마땅히 포상을 해야겠지만, 공을 세움의 으뜸은 바로 포공영이니 마치 벼슬의 이름이로다.”라고 하면서 껄껄껄 웃었다. 효장세자는 민들레 처방으로 생인손이 깔끔하게 낫게 되었다. 지천(至賤)의 민들레가 손가락의 종창을 치료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만약 민들레가 아니었다면 병약했던 효장세자는 어떤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을런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효장세자는 또다시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 1728년 음력 11월 16일 추운 겨울밤, 안타깝게도 병은 회복되지 않아 밤 11시경에 훙서(薨逝)하였다. 효장세자는 무엇보다 아비에게 끝까지 건강에 대한 걱정만을 끼치고 죽는 것에 대해 불효함을 안타까워했다. 아들을 잃은 영조는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며 탄식하고서는 한참 만에 곡(哭)을 그쳤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효장세자의 곁에는 마른 민들레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 제목의 〇〇〇은 ‘민들레’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승정원일기> 〇 英祖 1年 乙巳(1725年) 9月 27日. 鎭遠曰, 王世子手指傷處, 茫然不知矣。聞醫官之言, 則所傷大段云, 不勝驚慮, 今有向差之漸乎? 上曰, 非望向差, 恐有肆毒之慮耳. (영조 1년 을사년. 1725년 9월 27일. 민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손가락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의관의 말을 들으니 상처가 대단하다고 하니, 너무도 놀랍고 걱정됩니다. 지금은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아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독이 기승을 부릴까 우려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〇 閔鎭遠曰, 王世子手指傷處, 極爲可慮矣. 伏聞醫官金弼佑, 曾有手指傷處, 苦痛二十餘日矣, 以蒲公英草, 塗之則卽有效云, 厥草, 覓來試用, 未知, 何如. 上曰, 依爲之。醫官曰, 厥草性味無毒, 女人乳腫, 塗之則有效矣, 可將及用於夕間入診時矣. 吳重卨曰, 手指傷處, 最近掌心, 而外邊則無毒氣, 然傍人欲見之, 則使不得接手, 今日則不然, 其小差, 可知矣, 而第以蒲公草, 塗之似宜矣. 權聖徵曰, 掌心外邊毒氣, 猶未消滅, 誠爲可憫, 而中指本節, 不無差漸, 以蒲公塗之, 則可知有效矣. 閔鎭遠曰, 其症候不輕, 姑觀數日, 然後可知差效矣. (민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손가락 상처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듣건대 의관 김필우가 전에 손가락 상처가 있어 20여 일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민들레를 바르니 바로 효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풀을 찾아서 와 써 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하였다. 의관이 아뢰기를, “그 풀은 성미가 독성이 없어 여인의 유종에 바르면 효과가 있습니다. 저녁 입진 때가 되면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오중설이 아뢰기를, “손가락의 상처 난 데가 손바닥과 가장 가까운데 외변엔 독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옆 사람이 보려고 하면 손도 못 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상처가 조금 나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민들레를 바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권성징이 아뢰기를, “장심 외변의 독기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참으로 걱정됩니다만 중지의 관절에 차도가 없지 않으니, 민들레를 바르면 효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하니, 민진원이 아뢰기를, “그 증세가 가볍지 않으니, 우선 며칠 지켜본 뒤라야 효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〇 9月 29日. 藥房都提調閔鎭遠, 提調申思喆, 副提調柳復明啓曰, 중략. 王世子手指瘡腫, 蒲公草貼付之後, 瘡汁渗出云, 夜間卽有消減之勢, 而痛候亦已止歇乎? 臣等不勝區區憂慮, 敢來問安. 答曰, 중략. 世子手指瘡處腫汁滲出之後, 夜間更不作痛矣. (9월 29일. 약방 도제조 민진원, 제조 신사철, 부제조 유복명이 아뢰기를, “중략. 왕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민들레를 붙이고 난 뒤에 고름이 스며 나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밤사이 바로 증세가 완화되었고 통증도 그쳤습니까? 신들은 구구한 우려를 금할 수 없어 감히 와서 문안을 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 “중략. 세자의 손가락 종기는 고름이 스며 나온 뒤로 밤사이 다시 통증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壬戌. 夜三更一點, 王世子薨逝于昌慶宮之進修堂. 是日, 再行祈禱于宗廟社稷, 夜, 疾益㞃, 亥時薨. 上對領議政李光佐、兵曹判書趙文命等, 哭之慟曰: “將奈宗廟、社稷何?” 良久哭已. (임술년. 영조 4년 1728년 11월 16일. 밤 3경 1점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하였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홍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 판서 조문명 등을 대하여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본초강목> 蒲公英. 甘, 平, 無毒. 婦人乳癰水, 腫煮汁飮及封之, 立消. 解食毒, 散滯氣, 化熱毒, 消惡腫, 結核, 丁腫. 摻牙, 烏鬚髮, 壯筋骨. 白汁, 塗惡刺, 狐尿刺瘡, 卽愈. (포공영. 맛은 달고 성질은 평하고 독이 없다. 부인의 유종에는 물에 달여 낸 즙을 마시고 달여 낸 찌꺼기를 붙이면 즉시 사그라든다. 음식의 독을 풀어주고 막힌 기를 흩어 내며 열독을 변화시키고, 악성 종기, 멍울, 정종을 삭인다. 이를 닦거나 머리를 검게 하며, 근골을 튼튼하게 한다. 흰 즙은 가시가 박혔거나 호뇨자창에 바르면 즉시 낫는다.) <동의보감> 代指者, 指頭先腫, 焮熱掣痛, 然後於爪甲邊結膿潰破, 甚者, 爪甲俱脫. 代指, 亦謂之天蛇頭瘡. 治代指, 蒲公英, 與蒼耳草等分爲末, 好醋濃煎, 浸洗卽愈. 蒲公英擣細, 水和去滓服之, 滓𨠭患處, 累效. 手足觸木惡刺, 及狐尿刺腫痛, 蒲公英摘取白汁, 多塗, 立差. (대지는 손가락 끝이 먼저 붓고 화끈거리며, 당기면서 아프다가 손톱 주위가 곪았다가 터지는 것이다. 심하면 손톱이 모두 빠진다. 대지를 천사두창이라고도 한다. 대지를 치료하려면 포공영과 도꼬마리를 같은 양으로 가루내어 좋은 식초에 진하게 달이고, 여기에 담그고 씻는다. 그러면 낫는다. 포공영을 곱게 찧어 물에 타서 찌꺼기를 걸러낸 뒤 마시고, 찌꺼기는 아픈 곳에 덮는다. 자주 효과를 보았다. 손발이 나무에 닿아 생긴 악자나 호뇨자로 붓고 아플 경우 포공영을 따서 흰 즙을 내어 많이 바르면 곧 낫는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8-23 18:01:5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먼 옛날, 한 마을의 대감집 부인이 열병을 앓았다. 부인은 열이 오르면서 동시에 변비가 심해지고 배에 가스가 많이 차면서 부풀어 올랐다. 복창이 심해서 숨을 쉬기 힘들어 가쁘게 숨을 쉬었고 고열이 오를 때는 정신까지 혼미하면서 간혹 헛소리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하품을 하다가 턱까지 빠져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물도 삼키기 어려웠다. 여러 의원들이 약을 썼지만 조금도 효험이 없었다. 대감은 수소문에서 한 의원을 불러 진찰을 청했다. 점심경에 이르러 의원이 도착했다. 대감은 “부인을 살려주시게나.”라고 의원에게 부탁했다. 의원은 부인이 누워있는 침실에 들어 진맥을 해 보더니 “육맥이 침활(沈滑)하고 장대(長大)하며 힘이 있으니 이것은 지독한 완담(頑痰)이 열독(熱毒)을 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은 담적(痰積)이 화(火)에 상한 것입니다. 이에 열병으로 생긴 열독(熱毒)을 얻어 담(痰)이 온갖 곳에 횡행하고 있으니, 쉽게 공격해서 씻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대감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게 공격할 수 없다면 처방이 없단 말인가?”하고 물었다. 의원은 “이런 경우에는 마땅히 대승기탕(大承氣湯) 4~5첩을 2시간마다 나누어서 달여 계속 써야만 겨우 삿된 독기를 꺾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대감은 “아니, 대승기탕이라면 아주 독한 약이 아닌가. 대승기탕을 잘못 사용하면 없던 병이 생기고 있던 병은 오래 간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병증인가?”라고 걱정스레 물었다. 대승기탕은 상한병(傷寒病)으로 인해서 장의 기운이 막혔을 때 사용하는 처방으로 비슷한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들 중에서도 가장 독한 처방이다. 의원은 “의서에는 오한이 없고 도리어 열을 싫어하며 갈증이 생기고 헛소리하며 배가 더부룩하고 숨이 차며 손발에 축축하게 계속하여 땀이 나면 급히 설사시켜야 하니 대승기탕을 쓴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지금 상한 이열증(裏熱症)이 심해서 마치 아궁이 불이 몸을 훈증하는 것과 같아서 안으로부터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와야 하는데, 이는 오로지 하법(下法)만이 살길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하법(下法)은 설사를 시키는 방법으로 아주 공격적인 치료법 중에 하나다. 그러면서 “하법에 쓰는 처방으로는 대승기탕이 제일 세고 소승기탕(小承氣湯)이 다음이며,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이 그 다음이고 대시호탕(大柴胡湯)이 그 다음입니다. 지금 부인은 위(胃)가 실하여 조열이 있고 헛소리까지 하고 변폐(便閉)까지 있으니 가장 쎈 약인 대승기탕이 적방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의원의 설명을 듣고서 의원이 약재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는데, 대감집에서는 약재를 어디서 구했는지, 벌써 대승기탕 3첩을 약탕기 3개를 이용해 한첩 분량씩 다리기 시작했다. 대감집에서는 그만큼 촌각을 다투는 상황으로 여긴 것이다. 약탕기 옆에는 다리지 않은 첩약이 온전하게 두 첩이 더 있는 것을 보면 모두 5첩을 조제한 듯 했다. 의원은 자신이 약재를 준비하지 않아 수고로움을 덜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탕약이 다려지면 서둘러서 식혀서 먹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재촉했다. 탕약이 모두 다려지자 우선 약탕 한 개에서 다려진 탕약을 사발에 부어 조금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나 부인의 턱이 빠져 있어서 탕약은 그냥 흘러내렸다. 의원은 하인을 시켜서 표주박에 대나무를 박아서 깔대기처럼 만든 다음 대나무 아래쪽을 부인의 목구멍 쪽에 넣고 표주박에 탕약을 부어 천천히 삼키게 했다. 다행스럽게 부인은 약을 흘리지 않고 꿀꺽꿀꺽 삼켰다. 그런데 약을 다 삼키자마자 바로 ‘우웩~~~’하고 토해버렸다. 목구멍으로 들어갔던 탕약이 들어간 만큼 모두 한꺼번에 분수처럼 뿜어졌다. 대승기탕은 탕약 처방 중에서도 맛이 가장 안 좋다. 대황이 한 첩에 4돈이나 들어가 있고 후박, 지실, 망초도 2돈이나 들어가 있어서 맛이 아주 쓰고 짜기 때문에 비위가 약한 경우 토하지 않아도 흔하게 구역감이 난다. 환자의 병증에 맞지 않으면 구역감과 구토가 흔하게 나지만 적방이라 할지라도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복용하면 토하기도 한다. 그래서 원래 한 숟가락씩 천천히 복용하는 처방이다. 부인은 약을 토하자 눈이 뒤집히면서 잠시 후 또다시 열이 났다. 의원은 부인이 약을 모두 토해서 효과를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또 다시 서둘러 먹인 2첩과 3첩째 탕약도 모두 토해 버렸다. 부인은 고통스러운지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몸부림치더니 혼절하는 듯 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과 하인들은 부인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모두들 차마 눈뜨고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의원은 당황스러웠다. 대감이 당황스러워하는 의원을 돌아 보더니 “자네가 적방이라고 자신하던 대승기탕을 3첩이나 먹였는데도 모두 토하고 차도가 없네. 내 보기에 독한 약 때문에 더 괴로워하며 경각(頃刻)이라도 몸을 보존할 수 없으니 차라니 약을 끊고서 차라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네.”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인의 침실을 나가버렸다. 의원은 비통해하는 대감의 말을 담담하게 듣더니 대감을 따라서 마당까지 나갔다. 그런데 의원은 대감이 담 모퉁이를 돌아서 나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냥 마당에 서 있었다. 부인의 병시중은 대감의 이종사촌 동생이 들고 있었다. 이종사촌은 대감이 죽기만을 기다리자고 하는 통에, 슬퍼하며 부인의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의원이 부인의 처소로 들어와 병시중하는 사내의 어깨를 툭툭치더니 “방금 대감께서 가시면서 남은 약재를 급히 다려서 먹인 후 병세를 살펴보라고 하셨네. 그러니 어서 서두르게나.”라고 했다. 사내는 다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탕제를 다릴 준비를 했다. 의원이 마당에 나가보니 대감은 집안사람들에게 초상 치를 준비를 시켰다. 대감은 온갖 기물을 준비하고 나서 친척들에게도 부고를 돌리기 위해 부고장을 썼다. 집안사람들은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이렇게 몇 식경(食頃)이 흘러 저녁 무렵이 되어 어둑어둑해졌다. 이종사촌 사내가 이제야 부인의 침소에서 나왔다. 사내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영문을 몰라 대청마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감이 사내를 보더니 “너는 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냐? 누님은 숨을 거뒀느냐?”하고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 해 하면서 “형님께서 문 밖으로 출타하실 때 의원을 통해서 남은 약을 반드시 쓰라고 하셔서 바로 1첩을 다려서 한 숟가락씩 천천히 입속에 넣어드렸습니다. 그 약은 다행히 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두 한 사발을 모두 먹이자 한참 후에 검은 진흙 같은 변이 한참을 빠져나오더니 부풀었던 배가 곧 가라앉고 호흡이 평상시처럼 되었으며 빠졌던 턱도 들어갔습니다. 누님께서 미음을 찾으셔서 미음을 끓이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대감은 깜짝 놀라며 마당에서 대청마루로 뛰어올라 부인의 침소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대감이 나오더니 의원에게 웃으면서 “나는 원래 특별한 효험을 거두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네. 그런데 자네의 고집으로 남은 약을 몰래 복용시켜 효과를 냈으니 자네의 재주는 명의(名醫)를 뛰어넘는 것 같네.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스스로를 믿는 것을 보면 그 의술(醫術)을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고맙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의원은 “본디 의원은 병증을 살펴 두세 번 미루어보아도 확신이 서고 의심이 없게 된 연후에야 약을 쓸 수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마님이 쾌차하게 되었지만, 중병(重病)과 험증(險症)에는 한 첩의 약이라도 잘못 쓰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게 되기 때문에 경솔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저는 단지 마님을 진찰하면서 대승기탕증 임을 확신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겸손해 했다. 의원은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확신이 선다면 자신있게 치료를 시도해야 한다. 불안해 하는 환자나 보호자를 안심시키고 치료방법을 설득하는 것도 의원의 역할이다. 요즘 보면 환자를 치료하는 도중에 악화되거나 심지어 사망할 것이 두려워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떻게든지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의원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옛 의서에 ‘의자(醫者)는 의야(意也).’라고 한 것을 보면 의원이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 심사숙고하고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환자의 보호자에게 책잡힐 것이 두려워 치료를 머뭇거리다가 그래서 결국 환자가 처방을 복용하지 못해서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거나 심지어 제명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을 수 있단 말인가. * 제목의 ○○○○은 대승기탕(大承氣湯)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상한경험방> 脫頷腹脹. 一宰相靑孀婦人, 年過三十, 患時令, 脫頷腹脹, 呼吸促急, 精神皆憒. 諸醫試藥, 少無效驗. 召余診之, 六脈沈滑長大有力, 此頑痰挾熱毒. 仍曰 “此痰積傷於火, 又得熱疾毒痰橫亘, 決難容易攻滌. 宜大承氣湯四五貼, 一時分煎繼用, 庶挫邪毒.” 主家初則信聽, 四貼承氣幷煎置之, 先用一貼入口卽吐, 目反身熱, 二貼三貼如前吐出, 傍人不忍見其狀, 病人以不忍其苦, 若得窒塞. 主人宰相顧余: “用藥二貼皆吐, 病勢倍添, 難保頃刻, 寧止藥待盡.” 仍揮淚出去. 余亦隨去下軒. 此時救病者, 卽主人異姓從, 余稍俟宰相繞出曲墻, 卽回身佯告於救病之人曰: “大監敎以更進餘藥一貼, 以觀變動.” 其人默頭. 余卽出坐外軒, 宰相令人備初喪諸具, 人皆遑遑數食頃矣. 救病人出來, 宰相回問: “已死乎?” 對曰: “兄主出來時, 敎以餘藥必用, 故卽灌一貼, 則始不吐, 少頃大放黑滑泥便, 腹脹卽平, 呼吸如常, 脫頷亦收, 卽索粥飮, 故始進飮米飮也.” 宰相跳起入內, 俄而出笑曰: “吾不喜如病之收效奇, 君之有的見, 用權術, 使盡用餘藥, 君才奚特名醫而止.” 用藥脫頷難服, 故以竹竿上頭穿瓢而下頭入喉灌之.(턱이 빠지고 배가 부풀어 오름. 젊어서 과부가 된 어떤 대감집의 부인이 나이가 30이 넘었는데 유행병을 앓아 턱이 빠지고 배가 부풀어 올랐으며 숨이 몹시 가쁘고 정신이 온통 혼미했다. 여러 의원들이 약을 썼지만 조금도 효험이 없었다. 나를 부르기에 진맥을 해보니, 육맥이 침활하고 장대하며 힘이 있었으니, 이는 지독한 담이 열독을 끼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병은 담적이 화에 상한 것입니다. 열병으로 생긴 열독을 얻어 담이 온갖 곳에 횡행하고 있으니, 쉽게 공격해서 씻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땅히 대승기탕 4~5첩을 2시간마다 나누어서 달여 계속 써야만 겨우 삿된 독기를 꺾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주인집에서는 처음에 이 말을 믿고 대승기탕 4첩을 함께 달여 놓았다. 우선 1첩을 입에 넣어주었더니 즉시 토하고 눈이 뒤집히며 몸에서 열이 났고, 2첩과 3첩도 여전히 토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병자도 차마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혼절하려는 듯하였다. 주인 대감이 나를 돌아보며 “약 3첩을 썼는데 모두 토해내고 병세마저 더해져 경각도 보전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약을 끊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네.”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나가버렸다. 나도 하헌(下軒)으로 따라 나갔다. 이 때 병수발 들던 사람은 주인의 이종사촌이었다. 나는 대감이 담 모퉁이를 돌아 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곧 몸을 돌려 병수발 들던 이에게 거짓으로 “대감께서 남은 약 1첩을 다시 올린 뒤에 변화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하니,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외헌으로 나오니, 대감은 사람들에게 초상 치를 온갖 기물을 준비하라 하였고 사람들은 몇 식경 동안이나 황황히 움직였다. 병 수발 들던 사람이 나오자 대감이 고개를 돌려 “이미 죽었느냐?” 묻자, “형님께서 나가실 때, 남은 약을 반드시 쓰라고 하셔서 바로 1첩을 입속에 부어넣었더니 비로소 토하지 않았고, 잠시 있다 검고 매끄러우면서 진흙 같은 변을 많이 누고서는 부풀었던 배가 곧 가라앉고 호흡이 평상시처럼 되었으며 빠졌던 턱도 들어갔습니다. 곧 미음을 찾기에 비로소 미음을 올려 먹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대감이 뛸 듯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웃으며 나에게 “내가 병에 특이한 효험을 거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자네가 명확한 견해로 권술을 써서 남은 약을 모두 쓰게 하였으니, 자네의 재주가 어찌 명의에만 그치겠나?”하고 말하였다. 약을 사용할 때는 턱이 빠져 복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나무 막대의 윗부분 끝은 표주박에 박고 아랫부분 끝은 환자 목구멍에 넣어 약을 부어주었다.) < 동의보감> 傷寒裏證. 傷寒裏熱者, 若火熏蒸, 自內達表. 惟下之一法而已. 發熱汗出, 不惡寒反惡熱, 乃陽明裏證也. 宜下之. 下藥, 大承氣最緊, 小承氣次之, 調胃承氣又次之, 大柴胡湯又次之. 已上三法, 不可差. 差則無者生之, 有者遺之. 假令調胃承氣證, 用大承氣, 則愈後元氣不復, 以其氣藥犯之. 若大承氣證, 用調胃承氣, 則愈後神痴不淸, 以其無氣藥也. 小承氣湯證, 用大承氣, 則下利不止, 變而成虛.(상한이증. 상한에 이열이 있는 경우는 마치 불로 찌는 것 같이 속으로부터 겉으로 나온다. 오직 하법 한 가지만 쓸 수 있다. 발열로 땀이 나고 오한이 없으며, 도리어 열을 싫어하는 것은 양명이증이다. 하법을 써야 한다. 하법에 쓰는 약으로는 대승기탕이 제일 세고 소승기탕이 다음이며, 조위승기탕이 그 다음이고 대시호탕이 그 다음이다. 이상의 3가지 방법은 잘못 사용하면 안 된다. 잘못 사용하면 없던 병이 생기고, 있던 병은 오래 간다. 가령 조위승기탕을 써야 할 증상에 대승기탕을 쓰면 나은 후 원기가 회복되지 않는데, 이것은 기약이 원기를 범했기 때문이다. 대승기탕을 써야 할 증상에 조위승기탕을 쓰면 나은 후 정신이 맑지 못한데, 이것은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승기탕을 써야 할 증상에 대승기탕을 쓰면 나은 후 설사가 멎지 않고 전변되어 허하게 된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2-14 16:08:29[파이낸셜뉴스] "당신? 우리 당이 만만한가"(류호정 정의당 의원), "야! 어디라고 감히···"(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난 13일 김부겸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과정,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진 짧은 설전이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정의당은 문 의원과 민주당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지만, 문 의원은 "해프닝"이라며 "사과해야 할 쪽은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 관련 틀린 내용을 말한 정의당"이라고 맞섰다. 14일 문 의원은 파이낸셜뉴스와의 통화에서 "정의당이 사과를 요구하는데, 발단은 류호정 의원"이라며 "당신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문 의원에 따르면 사건은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의 "외교 행낭을 이용한 부인의 (도자기) 밀수 행위"라는 발언에서 비롯됐다. 배 원내대표는 13일 본회의장에서 박준영 당시 장관 후보자에 대해 "외교 행낭을 이용한 부인의 (도자기) 밀수 행위는 명백한 범죄"라고 했다. 문 의원과 홍기원 민주당 의원은 배 원내대표에게 가서 "외교 행낭을 이용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항의했다. 이를 두고 문 의원은 "외교관 출신 홍 의원이 외교 행낭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배 원내대표에게 설명한 것"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렇다면 박 후보자가 왜 자진 사퇴한 것인가'하는 질문이 있었고 문 의원은 "아니, 당신이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될까봐"라는 취지로 답했다. 문제는 여기서 더 커졌다. '당신'이라는 말을 들은 류 의원이 "당신?"이라고 반문하자 문 의원은 "야, 어디라고 감히··"라고 말했다. 이에 류 의원은 "우리당이 만만해요? 저기(국민의힘)다가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여기 와서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따졌다. 이에 대해 문 의원은 "당신"은 제 3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박준영 당시 후보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요즘 세대에서는 '당신'이라는 표현을 안 쓰다 보니까 류 의원이 오해한 것 같다"며 "발단은 류 의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문 의원은 정의당과 류 의원에 사과할 생각이 없다며, 오히려 '외교 행낭'이라는 잘못된 사실을 말한 정의당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문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에게 류 의원과의 설전에 대해 이야기했고, 심 의원이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의당은 브리핑을 통해 "문 의원이 '어디서 감히'라는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 나이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민의를 대표하는 한 명의 의원으로서 류 의원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별도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했다. 같은 당 강민진 의원 또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문 의원의 언사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소수야당의 동료의원을 ‘야’ 라고 부르고 먼저 삿대질을 할 만큼 오만한 태도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며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다만 문 의원은 류 의원이나 정의당 측의 연락을 받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dearname@fnnews.com 김나경 기자
2021-05-14 18:21:13"택시 몰 때는 승객들한테 '기사님' 소리를 꼬박 듣고 살았는데 이쪽 와 보니 아주 딴 세상입니다. 다짜고짜 반말에다 '야!'는 기본이더군요." 5년 전쯤 어느 여름날 저녁. 필자의 차 운전대를 잡았던 대리기사 이모씨의 하소연에는 한숨과 체념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택시 하면서 못 겪었던 별일을 이 일한 지 석 달 조금 넘는 동안 수없이 당해 봤습니다. 돈이 몇 푼 더 되니 그저 참고 견딜 뿐이지요." 그의 푸념은 죽자 사자 마셔댄 술로 인해 망가진 우리 사회의 예의범절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대리기사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연 그들이 대하는 고객은 술에 취한 사람이다. 취한 상태에서의 언어와 의식, 변별력이 정상과 같을 리는 없다. 폭언, 실언에다 순간적 실수까지 더해질 가능성이 크다. 예의와 염치,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찾기 힘든 위험지대가 약자 중 약자인 이들의 생업 현장인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현 국회의원과 세월호 일부 유족이 연루된 대리기사 집단폭행 사건의 파문이 만만치 않다. 유족들은 자신들도 맞았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세상 민심은 싸늘하다. 경제적 약자 한 사람을, 의원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들겨 팬 것도 그렇거니와 그들이 쏟아낸 말이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기 충분해서다. "야! 거기 안 서? 내가 누군지 알아?"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전한 (김 의원으로 보이는)여성의 고함 소리는 집단폭행을 촉발시킨 방아쇠나 다름없다. '의원님을 몰라보고 감히 네가 의원님을 화나게 만드느냐'는 주위 유족들의 생각이 주먹질을 불렀으니 말이다. 한국 정치인들처럼 싹싹하고 민심을 천심으로 받든다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유권자 앞에서 이들의 인사법은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수준이다. 말씨도 부드럽다. 그러나 그건 선거철 한때뿐이다. 금배지를 달고 난 후 이들의 언행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경험해 본 이들은 훤히 다 안다. 말엔 힘이 들어가고 어깨는 올라간다. 업무와 관련 있는 공무원이나 기업인에게는 '슈퍼 갑'이다. 사정이 이렇고, 선·후배들로부터 보고 배운 게 이러니 '야' 따위의 막말이 안 나올 리 없다. 밤이슬 맞아가며 뛰어다니는 약자를 30분씩 기다리게 해놓고도 사과는커녕 폭행사태까지 부른 걸 생각하면 기가 차 말문이 막힐 정도다. 국가 원수에게 '귀태' '원수'라는 폭언을 퍼붓더니 이도 모자라 온갖 교묘한 화법으로 조롱까지 해댄 야당 국회의원들의 막말 특권이 심야 대리기사에게도 발동한 셈이다. 막말과 갑(甲)질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자신의 흉은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을 내리 깔보거나 등치려는 비뚤어진 우월감이 말과 행동으로 마구 이어져서다. 수신과 절제를 강조한 동양고전 속의 공통된 메시지 중 하나는 '말을 아끼라'는 것이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多言數窮'(다언삭궁·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의 가르침을 남겼다. 명심보감은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의 글로 말조심을 당부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1661~1722년 재위)는 늘 마음과 지혜를 함께 닦으며 자신을 단속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다는 '鞠躬盡力'(국궁진력), 다시 말해 섬김의 리더십이었다. 선·후진국을 가르는 잣대는 쌓아둔 재물이나 과학기술 등이 전부가 아니다. 예의 범절이 살아 있고, 배려와 존중이 중시되는 나라를 세계는 선진국으로 부른다. 하지만 막말과 갑질이 판치고 약자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만 다섯 달 가까이 세비만 축내고도 내가 누군 줄 아느냐고 위세를 부리는 여의도 정치인들이 누구보다 먼저 답해야 할 문제다. tanuki2656@fnnews.com
2014-09-22 17:17:37[파이낸셜뉴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책임자였던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자신의 회고록인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를 출간한 가운데, 회고록을 두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격화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안하무인 검사왕국에 분개한다”고 비판했고, 국민의힘은 이 대표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이재명 “고인의 명예 또 한 번 짓밟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책 출판이 알려진 다음 날인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글을 통해 “검찰출신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검사아빠’가 계급이 되어버린 ‘검사왕국’이 되자 부정한 정치검사가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개를 내민다”며 “반성하고 자숙해도 모자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회고록을 내더니 고인의 명예를 또 한 번 짓밟았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이어 “우리는 허망하게 노무현 대통령님을 보내야 했던 논두렁 시계 공작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검찰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언론에 유출하며 전직 대통령을 범죄자로 낙인찍었다”며 “공작수사를 벌이고 정치보복 여론재판과 망신주기에 몰두한 책임자가 바로 이인규이다. 어디 감히 함부로 고인을 입에 올린단 말이냐. 검찰은 안하무인 막 나가도 되는 프리패스라도 된다고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저들의 오만에 단호히 분개한다. 제 아무리 '유검무죄 무검유죄', '만사검통'의 시대가 되었다지만 궤변이 진실로 둔갑할 순 없다”며 “인륜과 도리를 저버린 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역사의 심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국힘 “노무현 前 대통령까지 방탄에 활용해야 하나” 이에 국민의힘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당시 검찰 수사 상황을 자신의 사법리스크 상황에 빗대는 글을 통해 검찰 수사에 핍박 받는 듯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대표를 직격했다. 국민의힘 윤희석 대변인은 19일 논평을 내고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지역 토착비리 방탄에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일”이라며 “지난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페이크 영상을 만들었다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서조차 비난 세례를 받았던 장본인이 이재명 대표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윤 대변인은 “(이 대표가) ‘공작수사를 벌이고 정치보복 여론재판과 망신 주기에 몰두한 책임자가 바로 이인규’라고 했던가”라며 “불체포특권 뒤에 숨어 여론을 호도하며 온 나라를 개인 비리 뉴스로 흔들고 있는 이재명 대표가 할 말은 아닐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 전 부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논두렁 시계’ 논란에 대해 세세하게 언급하면서 이를 ‘다툼없는 사실’로 규정하고,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책임을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상당 부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문 전 대통령은 현재(20일)까지 이 전 부장의 책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기자
2023-03-20 10:06:15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극비리에 추진했다는 의혹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진실공방이 연일 격화되고 있다. 보수야권이 "충격적 이적행위"라고 맹공을 퍼붓자 여권이 "북풍공작", "적반하장식 막장 시나리오"라고 정면 반박하는 등 양쪽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설전까지 주고받으며 정면 충돌했다. 또 청와대까지 일찌감치 법적 책임을 이유로 제1야당 대표와 정면 충돌 모드로 접어들면서 이번 사태가 단순히 검찰 수사를 넘어 정국을 집어삼킬 블랙홀로 떠오른게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는 상황이다. 두 달여 남은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민심 향방을 가를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모양새다. 1월31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주말인 이날 '원전 의혹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북한 원전 의혹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등 여권을 향한 총공세에 나섰다. 국민의힘은 당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외교통일위원회·국방위원회 등 관련 상임위원들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꾸려 국회 차원의 진상규명에 앞장서겠다는 방침이다. 앞서 검찰은 월성 원전 1호기 폐쇄와 관련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관련 문건을 삭제하는 등 감사원 감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530개 자료 중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방안이 담긴 문건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북한 원전 추진은 그 자체로 '경천동지' 할 중대한 사안"이라며 "UN과 국제사회 제재 대상인 핵보유국 북한에 원전을 지어준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세컨더리 보이콧' 등 엄청난 제재를 감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해 원전을 지을 수 없고 한미 원자력 협정에도 어긋나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의혹 해명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문 대통령이 이를 거부할 경우 국정조사와 특검을 추진해서라도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국회 산자위·외교안보특위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날 일제히 성명을 발표했고, 나경원 전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장 예비후보들도 철저한 진실 규명을 한목소리로 촉구했다. 그러나 청와대·여당은 국민의힘의 의혹 제기를 "색깔론"으로 규정지으며, 반박에 나섰다. 민주당은 북한 원전 건설 구상은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시절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이 첫 언급했고, 월성1호기 조기폐쇄 감사 방해를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문서 대부분은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생산된 문서라는 주장을 폈다. 신영대 민주당 대변인은 "현실 판단력을 상실한 제1야당에 깊은 유감"이라면서 "민주당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망국적 색깔론과 북풍공작 정치를 뿌리 뽑겠다"고 말했고, 4선 중진 우원식 의원도 "국민의힘 주특기가 선거철만 되면 색깔론 소재를 찾아 눈에 불을 켜는 것임을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다. 감히 어디서 이적행위를 운운하느냐"고 맹비난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출신 윤건영 의원도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교류 협력사업 어디에서도 북한의 원전 건설을 추진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 원전 건설 추진 의혹을 두고, '이적행위'라고 비판한 김종인 위원장에 대한 법적 조치까지 거론한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4·27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했다고 알려진 이른바 '원전 USB'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경제협력 등을 담은 파일을 전달한 것은 맞지만 원전 내용은 전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mkchang@fnnews.com 장민권 김호연 기자
2021-01-31 17:5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