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호르몬은 생명의 진화와 함께 종에서 종으로 전달되고 발전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존재할 화학물질이 있다면 바로 '호르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르몬은 불멸이다. 안철우 교수가 칼럼을 통해 몸속을 지배하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삶을 좀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가 이미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사춘기 아이는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특히 외모와 키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한창 이성에 눈뜰 나이인 사춘기 소녀에게 외모의 변화는 더욱 예민하게 다가온다. 특히 또래에 비해 성장이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느린 경우 심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너무 빠른 것을 성조숙증이라고 한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여자는 11세, 남자는 12세가 평균이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더 빨리 올 수도 있고 느리게 올 수도 있다. 보통 여자는 813세, 남자는 914세를 정상 범위로 본다.
만약 여자 아이가 8세 이전에 가슴이 커지고 초경을 한다면 성조숙증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남자 아이의 경우는 9세 이전에 고환의 부피가 커지거나 음모가 보이고, 목젖이 튀어나오고 변성기가 시작된다면 성조숙증을 의심해볼 수 있다.
빠른 발달이 일으키는 가장 큰 문제는 이른 나이에 키 성장이 멈출 수 있다는 점이다. 성호르몬의 갑작스러운 분비가 성장을 가속화하여 초기에는 또래보다 키가 크지만 곧 골단의 성장판이 닫혀버려서 그 상태로 성장이 멈출 수 있다.
성조숙증은 보통 아동 1만명 당 1~2명에게 나타나는데 여아가 남아보다 10배 더 많다. 어째서 여아에게 더 많이 발생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지나친 영양공급, 비만, 환경호르몬, 가정환경 등을 꼽는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성조숙증 진단을 받아야 한다. 혈액 테스트를 통해 성호르몬 수치를 확인하고, X레이 촬영으로 골연령을 파악한다. 만약 성호르몬 과다가 원인이라면 여포자극호르몬, 황체호르몬의 수치가 높게 나올 것이고 골연령도 실제 나이보다 2~4년 더 높게 나올 것이다.
성호르몬 과다는 유전적인 요인 때문일 수도 있고 뇌수막염, 뇌염 등 뇌에 질환이 있어 시상하부에 장애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시상하부에서 분비되는 생식샘자극호르몬방출호르몬을 억제하는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여한다. 이 약물을 투여하면 시상하부-뇌하수체-난소 축의 순환을 끊어서 여성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할 수 있다.
만약 여포자극호르몬, 황체호르몬 분비량은 정상인데 성조숙증이 나타난다면 특별한 질환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맥큔 올브라이트 증후군(McCune Albright Syndrome)은 에스트로겐을 생성하는 효소인 아로마타아제가 체내에 급격히 증가해서 사춘기를 앞당긴다.
이런 경우는 아로마타아제 억제제를 투여해서 증상을 완화시킨다. 또 난소에 종양이 생긴 경우에도 종양세포에서 여성호르몬을 과다 생성하여 성조숙증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외과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해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치료법이다.
성조숙증 진단을 받았다면 이제 치료를 받을 차례다. 그런데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과연 정말 키가 클까? 관련 논문을 보면 성조숙증 치료는 초경과 2차 성징의 발달을 늦추고 골연령의 진행을 늦추는 데에 좋은 효과가 있지만 실제로 키를 크게 하는 효과에는 논란이 있다.
치료 덕분에 키가 컸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반대의 결과도 있다. 키가 컸다는 긍정적 연구결과들은 주로 치료 전 예상신장에 비해 최종신장이 더 크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예상신장이란 치료를 받기 시작할 때의 신장과 골연령, 부모의 신장 평균, 아동의 성별을 바탕으로 도출해내는데 최종신장이 예상신장보다 더 크고 부모의 신장 평균에 가까우면 치료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한다.
2014년 한국 연구팀의 논문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성조숙증으로 치료를 받은 82명 소녀들의 사례를 분석했는데 최종 신장이 평균 160.4센티로 치료를 시작할 때의 예상 신장(156.6센티)보다 크고 부모의 신장 평균(159.9센티)에도 가까우므로 치료가 효과적이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부정적 연구결과들은 성조숙증 치료를 받은 그룹과 치료를 받지 않은 그룹 사이에 최종 신장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1999년 보스턴어린이병원 연구팀이 80년대 중반 성조숙증을 진단받고도 치료를 받지 않은 16명의 소녀를 추적 조사해보니 그들 모두 평균 165.5센티의 성인으로 자란 상태였다.
이들의 성조숙증은 대부분 멈추거나 천천히 진행되어 다른 또래 소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2022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Ljubljana 대학 연구팀의 조사에서도 치료를 받은 그룹과 받지 않은 그룹 사이에 신장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를 받은 소녀들의 최종신장이 161.3센티이고 치료를 받지 않은 소녀들은 161센티였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성조숙증 치료가 아예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키 성장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2차 성징의 발달과 골연령의 발달은 확실히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위 류블라냐 대학 연구팀의 조사에서도 치료받은 소녀들은 초경이 11.5세에 일어났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소녀들은 9세에 초경을 했다.
골연령도 치료받은 소녀들은 실제 나이보다 1.97년이 더 많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소녀들은 2.76년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도 가기 전인 5~7세 아이가 가슴이 발달하고 생리를 시작하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너무 이른 사춘기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기므로 의사와 잘 상담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성조숙증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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