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신체에 장애가 있던 영아가 생후 1주일 만에 산후조리원에서 의문사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21일 충북 청주흥덕경찰서는 과실치사 혐의로 30대 A씨 부부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달 10일 청주 흥덕구 소재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생후 1주일 된 영아가 숨졌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는 영아의 아버지 A씨로, A씨 부부는 경찰에 "자고 일어났더니 침대에 바르게 눕혀있던 아이가 엎어진 자세로 숨을 쉬지 않았다"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사 결과 질식사한 것으로 판명된 영아는 팔에 장애가 있었으며, 숨지기 직전까지 부모와 함께 산후조리원 내 모자동실에서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신생아가 홀로 자세를 바꿀 수 없고, 사망 추정 시간 모자동실을 출입한 직원도 없었던 점을 고려해 A씨 부부를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이가 숨진 것에 고의성이 있었는지 등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 중"이라고 전했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4-11-22 06:13:08[파이낸셜뉴스]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의 의문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한 러시아 출신의 유명 셰프가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3일(현지시간) AFP통신과 영국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유명 셰프 알렉세이 지민(52)이 지난 12일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한 호텔 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영국 런던에서 레스토랑 '지마'를 운영하는 그는 영국에 관한 새 책 '앵글로마니아'를 홍보하기 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 중이었다. 지민의 구체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국은 부검 및 독성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베오그라드 검찰은 방이 안에서 잠겨 있었고, 사망에 의심스러운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최근 해외에서 러시아 반푸틴 인사들이 연이어 의문사 하는 있어, 지민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1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여러 레스토랑을 운영한 지민은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뒤 러시아를 떠나 영국에서 지내왔다.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러시아의 인기 요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한 뒤 방송에서 하차했다. 그는 2022년 5월 BBC와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기부했다가, 런던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무더기 예약 취소는 물론 방화 위협까지 받았다"고 전했다. 그가 운영했던 런던 레스토랑 '지마'는 이날 인스타그램에 "알렉세이는 친구이자 많은 경험을 함께 나눈 동반자였다"라며 "알렉세이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여러 대륙에서 러시아인들의 '의문사'가 급증했다고 전했다. 매체는 위키피디아를 인용해 2022년부터 현재까지 사인이 풀리지 않은 채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았던 러시아 사업가는 51명이나 된다고 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전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28)가 스페인의 한 빌딩 주차장에서 최소 여섯 군데에 총을 맞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같은 달 푸틴의 최대 정적으로 불리던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도 의문사 했다. 러시아 당국은 나빌나의 사인이 자연사라는 입장이지만, 그의 부인은 살해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1-14 10:32:48[파이낸셜뉴스] 미국 정부가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의문사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및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미 정부는 러시아 당국이 나발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오는 23일(현지시간)에 “중대한 제재”를 발표한다고 알렸다. 미 AP통신에 따르면 미 백악관의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일 발표에서 “러시아 군수 산업의 다양한 부문에 적용되는 상당한 규모의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경제와 러시아의 군사 장비, 러시아의 적대 행위 및 압제를 지탱하는 돈의 원천 역시 제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지 매체들은 푸틴의 최대 정적으로 불렸던 나발니가 이달 시베리아 감옥에서 사망한 사건을 언급하며 이번 제재가 나발니 사망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발니는 지난 2011년 반(反)부패 재단 창설을 시작으로 푸틴의 비리를 고발했으며 2020년에는 테러로 의심되는 중독 증상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독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귀국과 동시에 수감되었고 푸틴의 5선 투표를 약 1개월 앞둔 지난 16일 4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사했다. 20일 미국의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온라인 브리핑에서 나발니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사인에 대한) 실질적인 과학적 결과에 관계없이 푸틴은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정부가 세계에 어떤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한다고 해도 푸틴과 그의 정부는 나발니의 사망에 분명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20일 영국 BBC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나발니의 모친에게 “화학적 분석” 때문에 앞으로 2주 동안 나발니의 시신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커비는 "이번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나발니에게 일어난 일과 2년에 걸친 사악하고 잔인한 전쟁 과정에서의 모든 행동에 대해 러시아에 책임을 지우는 중대 제재 패키지를 23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날 백악관의 카린 장 피에르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나발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중대한 제재가 있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사전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은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다양한 방법을 러시아를 제재했다. 서방 국가들은 다수의 러시아 개인과 법인을 제재 명단에 올려 서방과 거래를 막았고 러시아 중앙은행 자금 동결, 러시아 상품 금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전산망에서 러시아 퇴출 등 여러 경제 제재를 가했다. 미 싱크탱크 외교협회(CFR)의 스테판 세스타노비치 선임 연구원은 20일 브리핑에서 추가 제재에 대해 “선택지가 제한적이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방 국가들은 지난 2022년 12월부터 러시아가 바다로 수출하는 석유가 일정 가격 이상으로 팔리지 않도록 막고 이에 불응하면 해운 보험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석유 수출을 견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석유 소유권 세탁 및 중국·인도 거래 확대로 서방의 유가 상한 제재를 회피했다. 이달 미 싱크탱크 랜드(RAND)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 연방정부의 세입은 석유 수출에 힘입어 역대 최대인 3200억달러(약 428조원)를 기록했으며, 올해도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세스타노비치는 미 정부가 러시아 석유 수출에 적용하는 상한가를 지금보다 낮출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와 관련해 찰스 쿠찬 CFR 선임 연구원은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큰 변화를 만들려면 우크라에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며 이는 지금 완전히 멈춰있다”고 지적했다. 커비 역시 이날 하원에서 표류중인 우크라 지원 예산을 언급하고 야당에 예산 통과를 촉구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푸틴에 맞서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계속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우크라를 지원하는 초당적 국가안보 추경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4-02-21 09:01:16[파이낸셜뉴스] 국민의힘 이상민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당무에 복귀한 뒤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본인이 성남시장, 경기도지사일 때 벌어진 일로 20명이 구속됐고 5명이 의문사 했는데, 가책을 안 느끼나"라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18일 KBS 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에 출연해 이 대표가 당무 복귀 이후 "법으로도 죽여 보고, 펜으로도 죽여 보고, 그래도 안 되니 칼로 죽이려고 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굉장히 선정적으로 발언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그는 "사건 중심인물인 이재명 대표에 대해 강한 범죄 의심을 갖는 게 국민적 상식"이라며 "그런데 지금 수사나 재판받는 것이 검찰의 탄압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본인에게는 귀책사유가 없나"라고 되물었다. 이 의원은 "결국 이번에 습격당한 것이 반대 정파, 말하자면 윤석열 정부나 국민의힘 쪽 정치 세력에 의해서 됐다고 하는데 증거가 있나"라며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건 오히려 본인이 당한 피습의 의미나 앞으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부분을 오히려 희석하고 변질시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도 이날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 대표 발언을 두고 "한 개인의 범죄를 마치 정치 탄압인 것처럼 교묘한 프레이밍을 시도하고 있다"라며 "민주당이 이번 총선은 이 대표 피습 음모론을 무기 삼아 치르기로 작정한 모양"이라고 했다. 구자룡 비대위원은 "우리는 이 대표 주변의 안타까운 연이은 죽음을 알고 있다. 법으로도 죽여보고 펜으로도 죽여봤다는 게 혹시 자기 고백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보길 바란다"라며 "이 대표는 음모론을 그만두라"라고 했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2024-01-18 14:18:57[파이낸셜뉴스] 이슬람 성직자 출신인 이란 대통령이 ‘히잡 의문사’ 사건으로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자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는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주장하면서 폭력 시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강경 우파 성향으로 지난해 취임한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국영방송을 통해 히잡 의문사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했다"며 "사건을 보고받고 유족에게 전화를 걸어 애도를 표했다"고 밝혔다. 아미니는 지난 13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 순찰대'에게 체포됐다. 그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6일 숨졌다. 경찰은 조사과정에서 폭력을 쓴 적이 없다며 심장마비가 사인으로 추정된다고 해명했으나 유족은 아미니가 평소 심장질환을 앓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유족은 아미니가 머리에 큰 타격을 입은 뒤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경찰을 상대로 구금 당시 영상과 사진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라이시는 "조만간 아미니 사건에 대한 법의학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라면서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이란 안팎에서는 아미니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이슬람 정부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약 12일 동안 발생한 반정부 시위는 2009년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규모로 커졌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본부를 둔 이란인권단체 '이란인권'은 경찰의 진압으로 최소 7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며, 이란 경찰에 강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반관영 파르트 통신은 이번 시위로 약 6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시위와 관련해 체포된 인원 역시 약 2000명으로 추정된다. 라이시는 "누구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폭동은 용인할 수 없다"면서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고 재산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히 대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시위에 가담한 자들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한다. 그것이 국민의 요구"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란의 정치 군대인 혁명수비대(IRGC)는 이번 시위가 쿠르드 반군과 연관이 있다며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반군 거점을 미사일과 무인기로 공격했고 13명이 사망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2-09-29 09:43:32[파이낸셜뉴스] 이란에서 한 20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됐다 의문사하면서 촉발된 이란 반정부 시위가 각계각층의 동참 속에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에 이란 정부가 강경한 진압을 예고해 시위는 향후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AFP통신 등 주요 외신은 이란 전체 31개주 80여개 도시에서 24일(현지시간)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고 전했다.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금된 뒤 지난 16일 의문사한 것에 반발하며 시작된 시위가 2009년 부정 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녹색 운동’ 이후 13년 만에 최대 규모로 확산된 것이다. 이란 당국에 따르면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를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경 5명을 포함해 이날까지 최소 35명이 숨졌다. 인권단체들은 최소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란 타스님 통신은 이날까지 적어도 1200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군경과 시위대 간의 무력충돌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외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보안군은 수도 테헤란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실탄을 사용해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테헤란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경찰이 창문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도 목격됐다. 그러나 당국의 과격한 진압에도 반정부 시위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란 전역에서 시위대는 “독재자에게 죽음을” “히잡에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 불에 태우고 남성들은 환호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사진이 불태워지고, 경찰 본부와 경찰 차량이 불길에 휩싸였다. 국제위기그룹의 알리 바에즈 이사는 “젊은 세대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아이(MME) 역시 “2019년 시위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전과 달리 이번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여성억압 종식이라는 문화적인 요구에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다”라고 전했다. 정치·경제 위기에 시달려온 이란 국민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집권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억압적인 통치에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테헤란 북부의 고층 아파트에 사는 부유층과 남부 노동계급의 시장 상인들, 투르크족과 쿠르드족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하나로 뭉쳤다”라며 “시위대의 다양성은 경기 침체와 사회 부패, 정치 억압 등 전방위적인 불만의 폭을 반영한다”라고 진단했다. 이란 당국은 시위를 막기 위해 인터넷 연결과 SNS 플랫폼 접속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란 정보부는 국민들에게 “반정부 세력이 조직한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 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국제사회와 IT기업 등은 지원 의사를 밝히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4일 트위터에 “이란 국민의 인터넷 자유와 정보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조치했다”는 온라인 성명을 냈다. 그러자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겸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트위터에 트위터에 “스타링크를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라이시 대통령은 22일 미국 뉴욕에서 히잡 착용 요구를 거절한 이란계 미국인 여기자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와의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수습기자
2022-09-26 08:30:43[파이낸셜뉴스] 2019년 가평 계곡에서 남편 윤모씨(당시 39세)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이은해(31)씨와 공범 조현수(30)씨에 대해 검찰이 공개수배에 나선 가운데, 이씨와 과거 인연이 있던 남자들이 의문사 했다는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JTBC '사건반장'은 지난 1일 방송을 통해 "이씨가 교제했거나 결혼한 남자 3명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명수배가 내려진 이후 이씨 관련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전날인 3월31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과거 이씨가 교제했거나, 결혼한 남자 세 명이 모두 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공유돼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방송에 따르면, 2010년 당시 이씨의 남자친구였던 김모씨는 인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고 당시 이씨는 김씨와 함께 차량에 탑승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에 출연한 박지훈 변호사는 "남자친구는 사망했고, 동승자였던 이씨는 이후 보험금을 수령했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사고 당시 이씨가) 동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행, 사기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다만 사망사고로 보험금을 수령했던 사실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 2014년에는 이씨와 교제 중이던 이모씨도 태국 파타야에서 스노클링을 하던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현지 경찰은 타살 가능성을 찾지 못했으며, 이씨의 사망은 사고사로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윤씨 사망 사건은 2019년 6월 경기도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발생했다. 검찰은 이씨와 조씨가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윤씨에게 다이빙을 하도록 부추긴 뒤, 구조하지 않아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검찰은 이들이 윤씨 명의의 생명보험금 8억원을 노려, 보험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4시간 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 5개월이 지나 보험사에 남편의 보험금을 청구했다가 거절 당했다. 보험사는 심사 과정에서 사기 범행을 의심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 씨는 직접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고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지난해 2월 전면 재수사에 나섰다. 이씨와 조씨는 같은 해 12월 검찰에 출석해 한 차례 조사를 받은 뒤, 다음날 2차 조사를 앞두고 도주했다.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검찰은 이들의 소재나 이번 사건과 관련한 단서를 알고 있다면 인천지검 주임 검사실이나 당직실로 연락달라고 당부했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2022-04-03 11:28:11[파이낸셜뉴스] "...(중략)...한진창씨는 광무태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만큼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는 모두 구강 안에서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中 20세기 초,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오랫동안 노렸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약 500년 간 이어진 조선과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主權)은 일본에게 철저히 종속됐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이제는 그저 일본의 식민지(植民地)가 된 나라의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그동안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황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민비 외척(外戚) 세력과 해외 열강들에게 크게 휘둘렸고, 결국 나라가 망국(亡國)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항상 뒤따랐다. 물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국권(國權) 침탈 후 '유폐(幽閉)된 황제' 고종은 일본의 감시와 압제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나름의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안들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 무렵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서(急逝)였기에 민중들의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급기야 고종이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현재 정사(正史)로 받아 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과 증언 등으로 인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고종 독살설은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설움과 분노가 크게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민족 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 ■국권 침탈, 유폐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됐다. 직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돼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에 완전히 장악됐고 외교권은 박탈됐다. 이때부터 사실상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감으로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 고종에게 이를 재가(裁可)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늑약의 재가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으로 체결됐는데, 여기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고 조약 명칭도 기재되지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해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했다"고 주장하며 무효를 선언했고, 국제 사회에 친서를 보내 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했다.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보호 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急電)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을 밀사(密使)로 파견해 끝까지 을사늑약 무효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일본의 공작 등으로 인해 무위(無爲)에 그쳤고,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유약한 순종(純宗)을 즉위시켰고,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꿨다. 폐위된 고종은 '유폐된 황제'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한국의 황실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병력을 동원해 고종의 주변을 철저히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특히 '궁금령'(宮禁令)을 제정 공포해 모든 외부인들이 궁궐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도록 했다. 만약 허가증을 받지 않고 출입하면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와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는 '궁궐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결국 고종은 한 나라의 황제에서 신하들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매우 처량한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반전 모색, 급서 고종의 유폐 생활은 장기간 지속됐지만, 이 와중에도 고종은 은밀히 밀지(密旨)를 내려 항일 의병 투쟁을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과 농민을 비롯해 군인과 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8년에 이르러 고종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포착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중심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 원리의 하나로서 민족 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청산하는 국제 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울러 이 즈음 고종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베이징으로의 망명(亡命)을 은밀히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면 독립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求心點)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민비의 사촌동생인 민영달이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회영은 이 자금으로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 할 행궁(行宮)을 마련하려고 했다. 기실 고종이 망명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종은 1904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로의 망명을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총 5차례에 걸쳐 해외 망명을 모색했다. 이처럼 유폐된 황제는 나름대로 반전(反轉)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단순한 계획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밤, 별안간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건강했던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한 것이다. ■독살설 논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중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평소에 고종이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이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도 그가 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서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혹시 창덕궁(순종) 쪽이 아닌가 반문했다"면서 "그렇게 물은 것은 왕 전하께서 평소 병약하셨기 때문이며 덕수궁(고종)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승하하기 얼마 전까지도 고종은 수라(水刺)를 잘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민중들 사이에선 고종의 죽음과 관련한 논란이 증폭됐다. 바로 '고종 독살설'이다. 고종의 평소 건강 상태와 그가 은밀히 추진했던 반전을 감안할 때 고종이 일본 및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독살설은 그 이유와 연루자들의 실명까지 등장하며 구체화됐다. 광화문 앞 전수학교의 벽에는 '저들(일본)이 파리강화회의를 두려워해 우리 황제를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이 붙여졌다. 고종의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성명서'에는 일본이 이완용에게 윤덕영, 한상학이라는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리도록 했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외국인인 마티 윌콕스 노블의 일기에도 등장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한 때 독립운동가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쓴 일기였다. 윤치호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민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매우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 후 짧은 시간 내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그 시신의 팔다리는 하루 이틀 만에 크게 부어올라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실제로 염(殮)을 행한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전제한 후 죽은 고종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기다란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고 적혀있다. 승하 직후 고종에게 식혜를 올린 궁녀 2명도 의문사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병조판서를 지낸 민영휘가 홍건이라는 사람에게 한 말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고종이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 돼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고, 잠시 후 고종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돼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더욱이 고종이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어서 환관이 이를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한다. 윤치호는 일기에 증언자들의 실명을 모두 기재함으로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는 윤치호 일기에 나와있는 고종의 심한 경련은 독성 급성중독에 의한 것이고, 시신이 부어오른 것은 중독에 의해 사후 부패가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목에서 복부까지 난 검은 줄은 시신 부패 시 피부 혈관들이 그물처럼 나타나는 '부패망'이며, 고종이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쥔 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에 맞서 본능적으로 생명줄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고 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총독부의 주요 관리였던 구라토미가 남긴 일기와 (앞서 언급한) 곤도 시로스케가 남긴 회고록에는 한일 합방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 독살에 깊숙이 연루돼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구라토미 일기는 고종의 죽음에 '윗선'이 개입돼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즉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고종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자 윤덕영, 민병석을 통해 독살을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요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종이 공식적으로 한일 합방이 잘 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정황과 증언, 자료들을 토대로 기정사실처럼 받아 들여졌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만큼 현재에 이것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이 고종이 불미스럽게 죽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후과(後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독살설은 가능성이 희박한 설(說)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지 간에 고종의 죽음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민족운동의 도화선 고종이 사망한 후 민족의 설움과 분노는 끓어올랐다. 당시 민중들은 순종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고종을 마지막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렸지만, 어쨌든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석연치 않게 숨을 거뒀으니 민중들은 쓰라린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결국 거국적인 3.1 운동의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그런데 이 민족 운동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선 3.1 운동은 이전의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부 의병 운동이 조선 왕정 복위 등을 염두에 둔 복고(復古)적인 성격을 나타냈다면, 3.1 운동은 복고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해 보다 근대적인 '대한 독립'에 무게를 뒀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촉진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 같은 거국적 민족 운동의 열기는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는 독립 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 국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표방하고, 향후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됐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주권 국민의 대표 기관(정부)으로, 또한 대내적으로는 독립 운동 통할 기구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며 '광복'(光復)의 촉매제가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9-04 13:55:38[파이낸셜뉴스] 지난 1998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초소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고(故) 김훈 중위 유족이 순직 처리 지연 등을 이유로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5일 김 중위 유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 중위는 1998년 2월 JSA 경비초소에서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군 당국은 자살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유서가 없고 권총 자살일 경우 나타나는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등 의혹이 일면서 타살 가능성이 제기됐고, 육군 헌병대와 군 검찰로 구성된 특별합동조사단이 3차례에 걸쳐 조사했으나 군 당국의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이 사건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2006년 초동 수사 부실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또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는 김 중위에 대한 순직 처리를 국방부에 권고했고, 2017년에는 김 중위에 대한 순직 결정이 사건 발생 19년 만에 이뤄졌다. 이후 김 중위 유족 2명은 2018년 6월 "국가가 뒤늦게 순직 처리하고도 '자살'이라고 주장한다"며 순직 처리 지연 등을 이유로 국가에 5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은 "당시 순직으로 추정된다는 직접적이거나 명확한 근거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대법원에서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받은 2, 3차 수사과정을 통해 각 사망구분 결정이나 유지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인정될 정도로 위법하지 않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심도 "사망 구분을 심사했던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진상규명 불능의 경우 이를 순직으로 인정할 직접적인 근거조항이 없었고, 당시 뚜렷한 선례나 법령해석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바로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결정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며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JSA 내에서 의문사한 망인에 대한 순직처리의 거부 또는 지연이 일반의 공무원을 표준으로 볼 때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인정될 수 있는 정도로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원심판단을 수긍한 사안"이라고 전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2021-02-25 10:37:26[파이낸셜뉴스] 정의기억연대 마포 쉼터 소장인 손모씨의 사망과 관련, 곽상도 미래통합당 의원이 11일 "어떻게 보면 문재인 정부의 의문사로 갈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정의연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손 소장이 일했던 쉼터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진행한 바 있다. 이후 손 소장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을 놓고 곽 의원은 "사인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곽 의원은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손 소장) 사인이 납득이 간다면 저도 할 말 없지만 납득이 안 가고, 제 설명이 맞다면 이것도 의문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곽 의원은 "경찰에서 손 소장이 자살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제대로 조사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수사책임자인 배용석 파주경찰서장이 2018년 총경으로 승진해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 파견 근무했다. 올해 1월 파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한 경력 때문에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타살 의혹을 제기한 것인지에 대해 곽 의원은 "저희는 정확한 사인이 뭔지 분명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경찰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내용을 경찰이 좀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북부지방경찰청으로부터 공식 답변 받은 사건 당시 상황을 언급한 곽 의원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관계자에게 재차 확인을 요청했다"고 부연했다. 곽 의원은 또 "고인이 사망 전 누구와 통화했는지, 어떤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았는지가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핵심적인 부분"이라며 "수사기관은 포렌식 결과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hjkim01@fnnews.com 김학재 기자
2020-06-11 15:1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