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클럽가지마라 래퍼스 파라다이스 를 보라


가수 신해철의 어린시절은 우울했다.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낡은 집은 이웃에서 내는 작은 소음조차도 막아주지 못했다. 변기 물내리는 소리부터 싸우는 소리까지.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 소리마저 상처가 됐다. 그때마다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높혔다. 몇시간이고 음악만 들었다. 음악은 암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현실 도피 기능을 톡톡히 해낸 대표적인 음악 장르가 바로 힙합이다.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할렘가의 아이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랩에 담아 뱉었다. 백인 래퍼로 유명한 에미넴도 디트로이트의 빈민층이었다. 그 역시 밤마다 힙합클럽을 찾아 욕설에 가까운 랩을 쏟아냈다. 쓰러질듯한 트레일러 집과 약물중독인 엄마, 현실은 가혹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힙합과 랩에 경도된 사람이라면 입을 모아 숭배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2PAC(투팍) 이다. 국내 힙합가수중에도 투팍을 가장 닮고 싶은 가수로 꼽는 이들이 꽤 된다. 힙합에 별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투팍의 이름을 종종 들었으니까.

‘래퍼스 파라다이스’는 전설적인 래퍼 투팍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래퍼가 경쟁관계에 놓인 뒤 심각한 불화를 겪게 되고 의문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매우 극적인 사건이지만 힙합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생소할 것이다. 투팍과 비아이지의 음악을 사랑하던 이들이 그들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고 그게 바로 창작 뮤지컬 '래퍼스 파라다이스'로 태어났다.

출연자들은 존경하던 아티스트를 무대위에서 연기해야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투팍과 비아이지 마니아들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 사람’인 내 눈에는 근사하기만 했다. 랩을 할때마다 왼쪽 눈을 감은 듯 찡그리는 습관이 있는 투팍 역의 대팔. 탤런트 신현준을 닮은 외모 덕에 공연 후기마다 '대팔 잘 생겼다'는 평이 꼭 있을 정도라고. 비아이지 역을 맡은 쥬비트레인은 통통한 남자가 얼마나 귀엽고 섹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퍼프대디역을 맡은 채현원도 비열하고 능글맞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페이스 에반스 역을 맡은 김은영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다. 지하 소극장 구석 구석이 다 그의 것이었다. 균형잡힌 몸매와 그의 매력을 한껏 살려준 의상, 폭발적인 가창력. 주인공 세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다. 그가 꽤나 인정받고 있는 뮤지컬 배우란걸 안뒤에야 ‘그럼 그렇지, 뭔가 다르더라’는 생각을 했다.

아쉬운 점도 있긴 하다. 중간 중간 배경음악이 너무 커서인지 랩이 잘 들리지 않았다. 특히 채현원의 랩은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또 투팍이 감옥에 간 이후의 이야기 전개가 너무 빠르다. 배경 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투팍과 비아이지가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다 죽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투팍과 비아이지는 6개월 간격으로 각각 의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물론 이런 점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작품 자체가 너무 너무 신나기 때문이다. 홍대 클럽문화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하루저녁 심장 터질듯한 에너지를 느끼고 싶다면 래퍼스 파라다이스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클럽 몇번갈 돈 아껴서 ‘래퍼스 파라다이스’를 보라고 강요하고 싶다. 평소 조용한 분위기를 즐겨찾는 나조차도 어찌나 신이 나는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전용관이 있는 홍대앞부터 이화여대앞까지 흥에 겨워 몸을 흔들거리며 걸어가야 했을 정도니까.

관람 TIP하나. 공연 도중 투팍이 관객석으로 내려와 여성관객에 손을 내민다. 선택을 받았다면 그와 함께 무대위로 올라가 춤을 추라. 후회없이 흔들기 바란다.
필자는 얼떨결에 올라가 돌부처처럼 서있었다. 투팍 역의 대팔은 요지부동인 필자에게 몇번이나 “그냥 즐기세요”라고 귀띔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니 비극중에 비극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왜 그렇게 바보같이 서있기만 했나’란 후회가 몰려왔다. 투팍의 선택을 받고 싶다면? G열의 통로쪽 좌석을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