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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판매가격까지 공개하라니"..해도 너무한 美...삼성-SK 당혹

"반도체 판매가격까지 공개하라니"..해도 너무한 美...삼성-SK 당혹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미국 정부가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의거해 투자 보조금 신청을 하는 기업들에게 예상 현금흐름 등 수익성 산출 공식을 담은 엑셀 파일 제출까지 요구하자 국내 반도체업계는 크게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업계는 핵심 재무정보뿐 아니라 웨이퍼 종류별 생산 능력, 수율, 판매 가격 등을 공개하는 건 사실상 '경영간섭'이 될 수 있어 보조금 신청을 놓고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미국 정부와 개별 투자 기업간의 치열한 협상과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영업기밀 유출 땐 치명타
28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가 27일(현지시간) 내놓은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 보조금 신청 세부 지침을 놓고 '해도 너무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에 예상 현금흐름 등 수익성 지표를 단순한 숫자가 아닌 산출 방식을 검증할 수 있는 엑셀 파일로 제출하도록 했다. 기업이 예상보다 큰 이익을 남기면 초과 이익을 환수하겠다는 방침의 일환이다.

상무부가 제시한 모델에는 △반도체 공장의 웨이퍼 종류별 생산능력 △가동률 △예상 웨이퍼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 비율) △생산 첫해 판매 가격 △연도별 생산량 △판매 가격 증감 등을 입력하도록 돼 있다.

이를 두고 반도체 업계에서는 수율과 가동률 등의 항목은 업체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로, 영업기밀에 해당된다는 입장이다. 한 장의 웨이퍼에서 나오는 합격품 비율이 얼마인지에 따라 제품 단가, 기술력 등을 추산할 수 있다.

이 같은 핵심 영업기밀이 인텔 등 미국 업체나 경쟁사에 유출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보조금 신청 대상이 되는 한국 기업의 고심이 깊어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한화 약 22조3329억원)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2024년 말 가동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도 미국 내 첨단 패키징 공장을 신설할 예정으로 보조금 신청 대상에 해당한다.

"보조금 받되, 미국과 협상 이어가야"
미국 정부의 노골적인 반도체 정보 공개 압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반도체 부족을 겪은 지난 2021년에도 공급망 투명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 등에 영업기밀인 파운드리 재고량, 주문현황, 판매 내역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법 보조금 신청 이외에도 미국이 자국 업체들의 성장과 일자리 확대를 위해 다른 기업의 정보공개 요구가 상시화되고 있다"며 "2021년 공급망 사태와 최근 가드레일 규제 완화를 감안하면, 이번에도 개별 기업간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정부가 협상에 나서더라도 우리 기업들의 고심은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상무부가 총 390억달러(약 51조원)의 보조금을 책정했지만, 개별 기업에 지원금을 얼마나 책정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과 이익 공유와 노조 부담, 중국에 대한 반도체 투자 제한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국 정부가 주는 보조금의 득실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과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한 투자비용 확대와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보조금 신청은 불가피하다고 조언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 정부의 요구가 지나칠 수 있지만, 미국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을 비롯해 반도체 관련 원천기술을 보유한 국가"라며 "미국의 하이테크 산업과 고급인력들은 삼성의 비메모리 성장 등에 있어서도 필요하기 때문에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 정부와 기업이 미국과 협력을 이어가면서도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다"며 "미국 정부와 협상을 위해 미국 기업들과의 협력하는 방안도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김준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