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상근부회장
지난 3월 13일,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제계는 일제히 우려 섞인 강한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이사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기업들은 이미 여러 차례의 성명 발표와 건의를 통해 일방적인 처리 중단과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청해 왔다. 정부 역시 상법 개정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 상법 대신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일반주주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하지만 이번 상법 개정안 통과로 정부의 노력은 동력을 잃게 되었다. 기업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일반주주의 실리를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포기하고, 모든 기업에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라는 무거운 족쇄를 채운 셈이다.
이로써 국내 증시에서 행동주의펀드가 더욱더 활개 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소수지분만 갖고서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늘리도록 압박하거나, 투자재원 조달을 위한 유상증자에 대해서도 기존 주주의 의결권 희석을 이유로 반대하며 경영을 흔들 수 있다. 특히 개정된 상법을 근거로 배임죄 고발과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경영권 분쟁을 유도하고, 주가가 급등하면 차익을 챙기고 빠지는 전략도 언제든지 가능해진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에서 투기성 자본들이 이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들은 항상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가치 제고를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과거 행적을 돌이켜보면 이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남의 돈으로 알짜기업을 인수한 후 우량자산을 팔아치워 투자금을 회수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아무런 자구노력 없이 기습적으로 회생절차를 신청하기도 한다. 신용등급 하락 직전 대규모 채권을 발행해 빚을 외부에 떠넘기는 등 도덕적 해이를 보일 때도 있다. 처음에는 기업가치 제고를 내세우지만, 기업은 껍데기만 남고 주주 가치는커녕 수많은 근로자의 일자리마저 위협받는다.
지금 민생경제는 침체 일로에 있고 주력산업의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어 경제활력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전체 기업의 99.9%, 상장사의 86.5%를 차지하는 중견·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중견·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 생태계를 훼손할 수 있다.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으로 자금을 투자 대신 경영권 방어에 소진하면 기업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고, 침체된 경제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법 개정을 주장하던 측에서는 국회 본회의 직후 상법 개정안에 대하여 '기업 규제가 아니라 자유시장경제의 기초이자 주식회사 제도의 근간을 명시한 것으로 헌법적'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로 한정해왔던 상법 제382조의3은 반헌법적이고 자유시장경제 구현을 막는 걸림돌이었다는 말인가. 지나친 침소봉대다. 애초에 이번 논의는 기업의 물적분할과 합병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주의 피해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는 자본시장법을 통한 핀셋규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주주에게도 더 유리한 혜택이 가는 방안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 행사뿐이다. '상법 개정안 제382조의3' 단 한 개의 조항에 '주주' '총주주' '전체 주주'라는 용어가 혼재하여 있다. 이처럼 그 개념과 차이가 불분명한 용어를 뒤섞어 사용하는 것은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할 소지가 크다.
회사의 대리인인 이사는 회사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를 통해 거둔 이익은 근로자·주주·채권자·지역사회·협력업체·소비자 모두에게 돌아간다. 상법 개정으로 기업의 장기적 성장기회가 제한된다면 이해관계자는 물론 주주의 이익마저 훼손될 우려가 있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이 행사되어야 하는 이유다.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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