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준 경제부 기자
아버지가 사업을 접기 몇 해 전이었다. 중학교 3학년인 내게 영문서류 한 페이지를 건넸다. 무척 간단한 문장이었다. 서류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읽었지만 어려웠다. 이런 뜻 같다고 얼버무리자 번역해달라고 했다. 네이버 지식인 검색해 대충 썼다. 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괜히 화를 냈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을 쾅 닫았다. 아버지의 부탁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언어의 장벽이란 높은 것이다.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늘 와세다일본어라고 적힌 테이프나 에센스 영어사전을 책상 위에 뒀다. 외국어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고 싶었던 것 같다. 공부는 생계가 바쁜 사람에게 늘 쉽지 않다. 내 키가 자랄수록, 사업이 어려워질수록 테이프 박스 위에 먼지가 쌓였다. 나는 그 먼지를 볼수록 좀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30대 중반이 됐을 때 처음 패키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최근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국가별 무역장벽(NTE) 보고서'를 발표했다. 행정용어가 적힌 영문 파일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딥엘이란 인공지능(AI) 번역기를 쓰자 순식간에 영어가 꽤 정확한 한국어로 바뀌었다. 머리 싸맬 일 없이 간편하고 빨랐다. 높은 수준의 외국어 능력을 요하는 문장도 바로 초벌 번역됐다. 앞으로 언어능력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I를 다루는 능력이 새로운 장벽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AI가 있었다면 아버지를 자신 있게 더 도왔을 텐데. 지금 영어 실력이면 아버지에게 힘이 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AI산업을 주도하는 국가였다면 AI산업은 한국을 더 유리한 무역협상에 임하도록 도왔을 것이다. 전 세계가 AI산업 패권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신성장 4.0'에 3대 게임체인저 중 하나로 AI를 꼽았다. 국가AI컴퓨팅센터 등을 구축할 계획이다. 정부 역시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판을 바꾸기 위해선 기술의 힘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트럼프가 한국에 26%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인 입장에선 힘의 논리에서 밀리는 씁쓸한 기억이 됐다. 일방적인 미국의 정책에 정부는 대응전략을 바로 발표할 수도 없다.
신중한 모습이다. 이 당혹스러운 감정이 앞으로 AI산업 발전의 계기가 될 순 없을까. 내가 영어 공부를 할 때마다 아버지 서류가 눈에 아른거렸던 것처럼.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기억이 어떤 것을 열심히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다. 무력감이 가끔은 우리를 추동하는 감정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junju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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