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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디지털 방코르의 실험대, APEC 정상회의

[기고] 디지털 방코르의 실험대, APEC 정상회의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오늘날의 글로벌 통화질서는 지속 가능성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달러에 대한 과도한 유동성 집중과 무역 결제 인프라의 정치적 종속성은 무역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지정학적 리스크를 전 세계로 확산시켜 왔다. "어떤 통화가 국제 기준이 되고, 누가 청산의 규칙을 설계하는가"라는 질문은 국제 권력 구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새로운 금융질서는 바로 이 권력 프레임의 재설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디지털 방코르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된 통화 실험이다. 특정 국가에 편향되지 않은 다자 합의 구조, 코드 기반 자동 실행, 분산형 거버넌스를 결합해 유동성 공급과 청산 메커니즘의 탈중앙화를 지향한다. 통화의 신뢰는 발행국의 권력이 아니라, 합의된 규칙과 집단적 투명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철학이 디지털 방코르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설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를 현실로 옮길 실행 전략이다.

출발점은 지역 기반 파일럿이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이행을 위해서는 제도화 가능성을 입증할 실험과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한 최적의 무대는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APEC)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통화 발행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자유무역, 금융 디지털화, 지속가능성 등을 공동 의제로 다룬다. 무엇보다 APEC은 안보동맹이 아닌 경제협의체로, 정치적 대립을 최소화하며 제도 실험을 설계할 수 있는 드문 다자 협의 틀이다.

올해 11월, APEC 정상회의가 대한민국 경주에서 열린다. 이는 디지털 방코르의 지역 기반 실험을 공식 제안할 수 있는 결정적 외교 무대다. 특히 미국의 무역수지 악화, 재정적자 확대, 금리 정책의 딜레마, 글로벌 달러 수요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디지털 방코르는 '달러의 지속 가능성을 보완하는 완충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달러 패권의 퇴조'가 아닌, '시스템 리스크의 분산'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을 설득함으로써 현실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한국이 제안국으로 나서고, 아세안 국가와 디지털 무역 선도국들을 파일럿에 참여시킨다면, 단순한 기술 검증을 넘어 제도 아키텍처의 초기 설계까지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다. 예컨대 블록체인 기반 청산 계정과 분산형 거버넌스 규칙을 적용한 제한적 거래 실험(테스트넷)은 이미 구현 가능한 단계에 도달해 있다.

한국은 이 실험의 기획자이자 연결자로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디지털 인프라, 미국·중국 양국과의 안정적 외교 관계, 주요 20개국(G20)에서의 활동과 주요 7개국(G7)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 경험은 한국이 중립적 금융 실험을 조율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한국은 수동적 참가국이 아닌, 새로운 통화질서 실험의 거점으로서 역사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다.

디지털 방코르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지역 기반 유동성 공급과 무역 결제 인프라의 전환을,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통화 구조의 재편을 지향한다. 이 실험은 미래 통화질서를 넘어, 인류 보편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 새로운 질서는 누가 설계할 것인가? 그리고 한국은 그 물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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