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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꼭 로또 1등 되게 해주세요" [한승곤의 인사이트]

희박한 확률 알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못 버텨"
"조작 아니냐?" 불신 속에서도 줄 서는 이유
5천 원에 사는 '일주일의 위안'

"제발 꼭 로또 1등 되게 해주세요" [한승곤의 인사이트]
한 복권판매점 앞에 시민들이 복권 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다../연합뉴스

고물가와 고금리, 저성장 늪에서 서민들이 붙잡은 마지막 동아줄은 아이러니하게도 '814만 분의 1'이라는 희박한 확률의 로또 복권이다. 연말을 맞아 역대 최대 판매량을 경신하고 있는 로또 인기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감춰진 서민들의 절박한 애환과 끊이지 않는 조작설, 우리 사회가 마주한 슬픈 자화상을 돌아봤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진짜 로또 좀 (당첨) 됐으면 좋겠네요."

814만 분의 1이라는 희박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복권 판매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고물가와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면서 서민층의 로또 구매 수요가 급증한 결과다. 조작설이 끊이지 않음에도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현상은, 로또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불황기를 견디는 하나의 '불황형 소비 트렌드'로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직장인 김 모(40대) 씨는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계속 올라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기분"이라며 "이번 달 대출 이자를 내고 나면 생활비가 마이너스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로또밖에 더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번에는 당첨?" 역대 최대 '로또 광풍'의 그늘

김 씨의 한탄처럼 팍팍한 가계 살림은 내년에도 나아지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국경제인협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2026년 우리 경제가 1.7%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지만, 이는 반도체 등 일부 수출 업종에 국한된 전망이다. 내년 소비자물가는 1.9% 오르며 지표상 안정세를 보이겠으나, 실질임금 정체와 높은 주거비 부담 탓에 민간소비 증가율은 1.6%에 그치며 내수 회복이 더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불황 소비 풍속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는 립스틱 같은 저가 기호품이 잘 팔리는 '립스틱 효과'가 불황의 상징이었다면, 최근에는 '로또 효과'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흐름이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복권 판매액은 3조 8183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규모를 경신했다.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되자 소액으로 기대 수익을 얻으려는 수요가 복권 시장으로 쏠린 결과로 풀이된다.

판매액 대부분은 로또가 차지하며, 3조 910억 원으로 전년 대비 4.1% 늘었다. 특히 인쇄복권은 4856억 원으로 18% 급증하며 상승 폭이 가장 컸다. 전자복권은 719억 원으로 0.9% 증가했고, 결합복권은 1697억 원으로 전년과 유사했다. 여기에 하반기 들어서도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7월 판매액은 6199억 원, 8월은 6485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각각 2.6%, 2.4% 증가했다. 올해 1~8월 누적 판매액은 5조 868억 원으로, 정부가 예상한 연간 판매액 7조 7000억 원의 66.0%를 이미 달성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지난해 기록 7조 3349억 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제발 꼭 로또 1등 되게 해주세요" [한승곤의 인사이트]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MBC 경영센터 내 스튜디오에서 열린 대국민 로또 6/45 추첨 공개방송 '645 데이'에서 추첨 시연이 되고 있다 . 로또복권 추첨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동행복권이 초청한 참관인 100명은 이날 추첨기 점검과 리허설, 추첨 생방송 등 추첨 절차의 전 과정을 참관한다. 2025.11.29. hwang@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사진=뉴시스화상

"조작 아니냐" 끊이지 않는 불신과 음모론

로또 판매량은 계속 늘고 있지만,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높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매주 토요일 밤 추첨 방송 직후 "이번에도 조작이다", "당첨자가 너무 많다"는 식의 게시물이 쇄도한다. 직장인 박 모씨(32) 는 "매주 1등이 10명, 20명씩 나오는 게 확률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정부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당첨자 수를 조작해 당첨금을 쪼개는 것 같다"고 불신을 드러냈다.

실제로 지난 2023년 3월4일에 추첨된 1057회에서 2등 당첨자가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664명 나와 논란이 됐는데, 당시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는 “어떠한 경우라도 조작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위원회는 당시 낸 보도자료를 통해 추첨은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고, 방송 전에 경찰관 및 일반인 참관 속에 추첨 기계의 정상 작동 여부 및 추첨 볼의 무게 및 크기 등을 사전 점검하고 있어 조작이 있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

여기에 더해 '1등 당첨금의 현실'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최근 1등 당첨자가 10명에서 20명씩 쏟아지며 당첨금이 20억 원 안팎에 머무는 경우가 잦다. 여기서 33%의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13억~14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자산 가치가 급등한 현실에서 이 돈은 빚을 갚고 주거 안정을 찾는 수준일 뿐,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과는 거리가 멀다. '로또 1등이 돼도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한다'는 말이 정설이 된 이유다.

"제발 꼭 로또 1등 되게 해주세요" [한승곤의 인사이트]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서울시내 한 복권판매점에서 방문객들이 복권을 구매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로또 1등 인생 역전이요?…다 옛날 얘기죠"

이 같은 분위기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 5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로또 구매 경험 관련 인식 조사’ 결과, 응답자의 60.7%가 "로또에 당첨돼도 인생 역전은 어렵다"고 답했다. 이는 2023년 조사(53.0%) 대비 7.7%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또 전체의 69.5%는 "요즘 로또는 예전만큼 당첨금이 크지 않다"고 평가했으며, 1등에 당첨되더라도 "하던 일이나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답한 비율은 무려 78.2%에 달했다.

설문조사에서 당첨 후에도 생업을 유지하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은, 대중이 로또를 일종의 현실 도피처가 아닌 '현실 보완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물가 시대에 5000원은 다른 여가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비용이다.
결과적으로 로또는 거창한 꿈을 꾸는 수단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부여하는 루틴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퇴근길에 습관처럼 판매점에 들른다는 40대 과장 박 모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1등 될 거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걸요? 그냥 일주일 열심히 일한 나한테 주는 5천 원짜리 선물 같은 거죠. 토요일 저녁에 번호 맞춰보는 재미로 사는 거지, 이거 믿고 회사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