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은 가정폭력 피해자와 함께
설을 코앞에 둔 지난달 16일 오후 기자는 피해자보호센터를 찾아 서울 서대문구의 어느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사전에 대강의 위치를 파악하고 왔건만 비노출시설이라 간판조차 없어 찾아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지나는 몇몇 동네주민에게 물어봤으나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한참 후에야 3층짜리 작은 건물의 문을 열고 송수연 경감(49·여)이 기자를 맞았다. 그는 "과거 치안센터로 쓰던 건물을 개조했는데 혹시 피해자들에게 해가 갈까 싶어 외부에서 알아볼 수 있는 어떠한 표식도 하지 않았다"면서 "인근의 단골 식당이나 커피전문점 주인도 뭐하는 곳인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피해자보호센터에는 책임자인 송 경감을 비롯해 5명의 여자 경찰관이 근무한다. 이날 낮에는 경찰 입문 13년차인 류시현 경사(37)가 송 경감과 함께 피해자보호센터를 지키고 있었다. 송 경감은 "4조 2교대지만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데다 밤에는 혼자서 근무해야 하는 탓에 여경들로부터 인기가 없다"면서 "대부분이 1년을 근무하고는 다른 데로 가더라"며 웃었다.
류 경사는 "인근 파출소와 핫라인이 구축돼 있고 딱히 신체적인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자 혼자 밤에 일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크다"며 "실제로 술을 마시다 싸움으로 번져서 오는 사람,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입소하는 경우 통제가 불가능해 애를 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송 경감이 "술에 취해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난동을 피운 피해자는 지구대에 연락해 돌려보내기도 했다"며 "심하게는 똥·오줌을 싸는 사례도 있었다"고 거들었다.
이들은 이번 설도 가정폭력 피해자들과 보냈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는 어김없이 가정폭력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13∼2014년 설·추석 연휴기간 112에 접수된 가정폭력 신고는 하루 평균 적게는 770여건, 많게는 910여건에 이른다. 송 경감은 "명절 비용 문제와 가사노동 분담 여부 등을 놓고 가족 간에 사소한 시비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송 경감은 서울청 여성청소년과에서 일하며 2012년 피해자보호센터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그 덕분(?)에 지난해 2월부터 피해자보호센터를 맡고 있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능력은 충분하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늦깎이'로 대학에서 심리상담 공부를 시작, 지금은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년째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류 경사 역시 2013년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땄단다. 수사업무에 필요한 것은 물론 일곱 살짜리 딸을 키우는 엄마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1층 사무실에서 연결된 좁은 복도를 따라 올라가니 2·3층에는 작은 방과 휴게실 등으로 꾸며진 쉼터가 마련돼 있었다. 지금까지 하룻밤에 3명의 피해자가 입소한 것이 최고 기록이다. 류 경사는 "피해자와 자녀 등 7명이 한꺼번에 들어온 적도 있다"며 "주로 밤에 와서 하루를 지내는데 65%는 자택이나 친척집으로 가고, 나머지는 여성긴급전화(1366)와 연계해 보호시설로 옮겨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10대 여학생의 경우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8박9일 동안 보호했던 기억이 있다"며 "아침에 상담선생님이 데려가고, 오후에는 학교전담경찰관(SPO)이 하교를 책임졌다"고 부연했다.
송 경감과 류경사는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안전에 신경을 많은 신경을 쓴다. '욱'하는 심정에 자살 충동을 느끼는 피해자도 있고, 자기보호 본능에 흉기를 소지하고 있는 피해자도 있기 때문이다.
■'이혼'은 금기어…조언 대신 '들어주기'
피해자가 오면 송 경감과 류 경사는 먼저 피해자를 위로하고, 고소장 작성 등 사건 처리를 도와준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피해자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류 경사는 "피해자들이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한 얘기를 5∼6시간 동안 풀어놓으면 그대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송 경감은 "피해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밖에서는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못하지만 한 번 물꼬가 트이면 계속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꺼낸다"며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같은 여자로서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에게는 위로와 위안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에게 "이혼하세요"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다. 가정문제가 단박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입장에서는 마음이 굴뚝 같아도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가방을 싸들고 아이들과 함께 나와 쉼터로 가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 상당수가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란다.
'조언'도 가급적 피한다. 피해자들도 자기가 살아온 길이 있기 때문에 '조언'을 해주는 것은 오히려 맞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류 경사는 "무슨 얘기든 조언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조심한다"며 "대신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해준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폭력성이 강한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권유는 하지만 결국 돌아가는 피해자도 있고, 그 중에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입소한 피해자도 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판단은 피해자의 몫이다. 송 경감은 "우리 입장에서는 피해자가 정말 원하고,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송 경감은 "올해 1월에 만난 40대 여성 피해자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외국에서 살다 오랜 만에 친정을 방문했는데 오빠에게 폭행을 당해 출국 시까지 보호요청을 한 사례였다.
"피해자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자주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폭력성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면서 '태권도'를 하던 오빠에게도 맞았어요. 피해자가 결혼과 함께 이민을 가면서 폭행은 끝이 났죠. 그런데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가 진료차 8년 만에 귀국하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진거에요. 친정집에 머물던 피해자가 오빠에게 다시 폭행을 당한 겁니다. 피해자는 결국 처음으로 경찰에 신고하고,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송 경감은 "피해자보호센터에 머무는 동안 서너 차례에 걸쳐 상담을 진행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다"면서 "동거하는 친족이 아니라고 해서 1366에서도 처음에는 보호시설 연계를 거부했지만 적용 확대를 강력하게 요청한 끝에 해결했다"고 말했다.
류 경사는 지난해 8월 치매노인으로 신고된 70대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버스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할머니가 지구대로 왔는데 실제로 치매노인으로 등록이 돼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들한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며느리는 치매노인이라 보호시설에 가기 싫어 그렇게 얘기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얘기를 계속 하다보니 어르신이 숫자 개념은 조금 희박하지만 아들에게 맞은 사실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진술을 하더라고요, 존속폭행을 확신했죠. 즉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사건으로 처리했습니다. 치매노인으로 치부하고 가족들에게 인계했다면 가해자한테 피해자를 넘겨주는 꼴이 됐을텐데 상담을 통해 진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꼽은 가장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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