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됐지만 공개 기준 모호 지적 끊이지 않아
죄 여부에 상관없이 미성년자는 얼굴 공개 제외, 피의자가 원해도 공개 불가능
범죄자 신원 공개 ‘갑론을박’ 여전.. 여론조사는 찬성이 압도적
검찰·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강력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피의자의 신원 공개 여부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도 상황에 따라 공개 기준이 제각각이라 더욱 혼란스럽다. 또한, 피의자가 신원 공개를 요청해도 거부당하고, 여론에 밀려 억지로 공개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전 세계에서 피의자에게 모자나 마스크를 씌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심지어 피의자 얼굴은 모자이크까지 하며 가려주면서 경찰이나 수사 관계자 등 얼굴이 공개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한다.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 공개, 어떻게 해야 할까?
취재진 질문에 답하는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 경찰은 김성수가 우울증 치료 전력이 있었지만 분노 충동조절 실패로 보고 신원을 공개했다. /사진=연합뉴스
■ 같은 듯 다른 강남역 화장실 살인 사건과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
2016년 5월 강남역 부근 공용 화장실에서 모르는 여성을 살해한 김모씨는 신원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10월 강서구 PC방에서 알바생을 살해한 김성수는 얼굴이 공개됐다.
두 사건은 비슷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 김모씨의 신원이 비공개된 이유는 조현병에 의한 심신미약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계획적인 ‘성혐오 범죄’가 아닌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김성수는 우울증 치료 전력이 있지만 분노 충동조절 실패로 보고 경찰이 신원 공개 조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해서 공개했다. 비슷한 사건에 신원 공개 여부가 달라지자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외에도 강력범죄에 대한 피의자의 신상 공개는 계속 엇갈리고 있다. 서울대공원 토막 살인사건 피의자 변경석은 실명과 얼굴 공개됐으나 폐지를 줍던 50대 여성을 살해한 거제도 살인사건 피의자는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가 적용돼 얼굴이 비공개되며 논란을 가중시켰다.
‘연쇄 살인마’ 강호순. 서울고법은 2009년 7월 23일 사형을 선고했다. 강호순이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아 2009년 8월 3일 사형이 확정됐다. /사진=연합뉴스
■ 2010년 특정강력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 신원 공개 기준은?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피의자 신상 공개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신상 공개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지난 2010년 4월 ‘연쇄 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되면서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가 선별적으로 허용됐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 2항에 따르면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 사건 ▲피의자가 그 죄를 범한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경우 ▲국민 알 권리 보장, 피의자 재범방지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할 것 ▲피의자가 청소년(만 19세 미만)이 아닌 경우,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
경찰은 지난 2016년 6월부터 40개의 세부 기준을 따져 신원 공개를 결정하고 있다. 신상 공개 심의위원회는 경찰 위원 3명,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외부 전문가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공개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상황에 따라 혹은 여론에 밀려 공개·비공개 여부가 결정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피의자의 신원 공개 여부는 수사당국의 재량에 달려 있는 셈이다. 피의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 권리를 비교하고 고민해 검찰·경찰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 잔인해도 미성년자는 제외·피의자가 원해도 신원 공개 불가능
지난해 인천에서 초등생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신체를 훼손한 뒤 유기한 범인들은 사회적인 충격이 컸지만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경찰 수사 당시 피의자의 나이가 각각 만 17세, 18세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청소년(만 19세 미만)’은 얼굴, 성명, 나이 등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
지난 2016년 어버이날 친부를 무참히 살해한 40대 남매는 신상 공개를 원했지만 경찰이 마스크와 모자를 제공해 얼굴을 가렸다. 이동하던 남매가 마스크를 벗고 "얼굴 가리지 않겠다", "신상을 공개해도 괜찮다"고 완강하게 나와 얼굴이 그대로 노출됐지만 경찰이 취재진에게 얼굴 모자이크 처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 일본, 유럽은 범죄자의 인권보다 범죄 재발 방지와 국민의 알 권리를 더욱 중요하게 판단해 신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8살 초등학생을 유괴해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한 '인천 초등생 살해 사건' 범인들. 주범은 징역 20년, 공범은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13년이 확정됐다. /사진=연합뉴스
■ “피해자 인권보호” vs “범죄 예방 효과 없어”.. 당신의 선택은?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범죄자의 인권보호보다 피해자의 인권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강간, 살인, 사체 훼손·유기 등 범행 수법이 갈수록 잔혹해지는 상황에서 신원 공개는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신원을 공개하면 목격자와 제보 확보 등 수사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엉뚱한 사람이 범죄자로 오해를 받는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끝으로 국민의 알 권리 보장 및 강력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 고취라는 공익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반면 반대 측은 판결 전에 신상 공개를 하면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민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피의자 신상이 공개되면 피의자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인들의 신상정보까지 노출되기 때문에 2차 피해의 우려가 크다고 봤다. 덧붙여 신상 공개로 얻는 범죄 예방의 효과 등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에 대한 설문조사는 찬성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2016년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87.4%가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 공개에 찬성한다’라고 응답했다.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얼미터는 지난달 CBS 의뢰로 출소가 2년 남은 조두순의 얼굴 공개 여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또 다른 추가 범죄 가능성을 막기 위해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91.6%로 집계됐다.
피의자에 대한 신상 공개가 오락가락하고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신상 공개를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지 말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별개의 외부 기구를 만들 필요성도 언급했다.
한편, 조경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2016년 7월에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공개할 수 있다"로 돼 있는 문구를 "공개하여야 한다"로 바꾸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서 논의되지 못하고 여전히 표류 중이다.
hyuk7179@fnnews.com 이혁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