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빈센트 반 고흐의 초창기 자화상이 137년만에 발견됐다. 1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품 반 고흐의 1885년 작 '농부 여인의 초상' 뒷면에서 반 고흐의 자화상을 확인했다. 이 작품은 에든버러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알렉산더 메이트가 1960년 기증한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는 반 고흐 작품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 이 작품에서 수상한 이미지를 발견하고 엑스레이(X-ray)로 촬영한 결과 그 뒤에 숨어 있던 남성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목에 느슨하게 목도리를 묶었으며 수염이 난 얼굴로 강렬하게 응시하는 그림 속 남성은 반 고흐의 자화상 이미지였다. 반 고흐는 자신의 자화상 위에 판지를 접착한 뒤 뒷면에 농부 여인의 상반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의 반고흐미술관도 X-레이에 비친 남성의 그림이 반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1883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정진한 고흐는 1890년 사망할 때까지 모두 35장의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운 자화상이 확인됨에 따라 존재가 확인된 반 고흐의 자화상 수는 36장으로 늘게 됐다. 반 고흐의 자화상 중 상당수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체류했던 1886년부터 1888년 사이에 제작됐다. 이번에 발견된 자화상은 현존하는 자화상 중에서도 초창기 작품에 해당한다.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는 향후 자화상 위의 판지를 제거하고 작품을 복원할 예정이다. 내셔널갤러리 관계자는 "반 고흐는 생전 그림 그리는데 들어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종종 캔버스를 재사용했다"며 "고흐의 자화상은 그가 파리로 이주한 후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한 시기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의 프랑스 미술 수석 큐레이터인 프랑시스 파울은 "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발견이자 스코틀랜드를 위한 놀라운 선물과 같다"며 "당장 판지를 뜯어내고 싶지만, 접착제 층은 매우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하며 이는 복잡한 작업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는 이달 말부터 열리는 전시에서 기술을 이용해 새로 발견된 고흐 자화상의 엑스레이 이미지를 공개할 예정이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2-07-15 06:20:191965년 5월 6일 새벽 1시.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온 화가는 결국 숨을 거뒀다. 나이 쉰하나. 요절도 장수도 아니었다. '어느 예술가의 죽음/이젤조차 없이/가난으로 보낸 나날'. 신문은 그의 부고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던 무명의 화가. 하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국민화가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가 박수근(1914~1965)이다. 강원 양구의 열두살 수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노을 지는 프랑스 바르비종 들판에서 기도하는 농부 부부를 그린, 바로 그 그림이다. 줄곧 가난을 면치 못했던 그에게 밀레 그림은 생의 목적 같은 것이었다. 동시대 유명화가 중 그만큼 전람회 출품에 애쓴 이도 없다. 초등학력이 전부였던 탓에 자신을 알릴 기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평론가 최열은 '박수근 평전 시대공감(2011년)'에서 그의 진가를 알아봤던 이로 김환기를 꼽는다. 그렇지만 계파갈등이 만연했던 당시 화단에서 박수근이 설 자리는 비좁기 그지없었다. 서울의 외국인들이 박수근 그림에 빠졌던 것이 흥미롭다. 장녀 박인숙은 '내 아버지 박수근(2020년)'에서 '파란 눈의 손님이 오던 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손님들이 온다는 기별이 들리면 우리는 전부 부엌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숨었다. 그들은 화가의 집 대문을 밀고 들어온 순간 작가의 삶을 관통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은 시대와 현실을 사각틀에 봉인한 작은 한국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화가의 재평가가 시작된 건 그의 쓸쓸한 죽음 이후였다. 당대 유명 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이 타계한 그해 말 '격조와 고담의 미학'을 그에게 헌정했다. 강인하고 중후한 색층의 질감, 독보적 기법으로 그 시대 보통의 삶에 경의를 표하면서 박수근은 불멸성을 가졌다. 맷돌질 하는 여인, 아기 업은 소녀, 기름장수, 노변의 행상…. 그림 속 그들은 아내였고 딸이었고, 창신동 대문을 나서면 마주치는 이웃이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미국인 후원자 마가렛 밀러에게 쓴 편지에 나온다. 작가 박완서와의 인연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1951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둘은 함께 일했다. 스무살 박완서는 정규 영업사원, 30대 후반 박수근은 비정규 그림쟁이다. 정규 직원은 은근한 갑질을 불행의 시절 위안으로 삼아보지만 결국 알바 화가의 넘볼 수 없는 의연함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 20년 후 쓴 등단작 '나목(1970년)'의 배경이다. 작가는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 텅 빈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은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고 후기에 썼다. 주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 회고전을 봤다. 추운 날에도 석조전까지 줄이 길게 늘어섰다. 주최 측에 따르면 하루 1500명씩 몰린다. 이 중 4회 이상 재방문율이 26%나 된다. 이경성이 평한 '시간을 넘어서는 불세출 소박한 화가'의 힘은 정직과 선함에 있을 것이다. 끝이 안 보이는 팬데믹 고난의 시대, 박수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2022-02-09 18:10:37우리나라 대표화가 박수근은 12살에 밀레의 ‘만종’을 처음 접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만종’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서양화중 하나다. 70년대 복제한 프린트 밀레의 만종이 집집마다 걸려있기도 했고 교과서에도 등장,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그림중 하나다. 언론인 이규태선생은 “서양은 자연과는 동떨어진 인공인조의 세상이라는 한국인의 선입견에서 이 전원배경의 순진한 농민의 일상적 모습이 이질감을 배제시키고 친근감을 주었을”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이 그림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편안하게 다가왔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복제화가 아닌 진품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21일 개막하는 오르세미술관 소장품 전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 전에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상파 그림 44점이 소개된다. 밀레의 '만종', 오르세미술관이 미술관 공식도록 표지로 사용하는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반 고흐의 '아를의 고흐의 방',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화가의 자화상', '타히티의 여인들, 해변에서', 폴 시냐크의 '우물가의 여인들', 앙리 루소의 'M부인의 초상', 드가의 '오페라좌의 관현악단', 모로의 '오르페우스' 등 흔히 볼수 없는 귀한 명화들이다. 장 뤽 말렝 주한프랑스문화원장은 “전시작품 중 '만종'은 지구상에서 '모나리자'와 함께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피리부는 소년'은 모더니즘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보급 작품”이라고 말했다. 전시기획사인 지엔씨미디어 홍성일 대표는 “이번 전시 작품 전체의 보험평가액은 약 8천억원으로 국내 전시사상 최고”라고 밝혔다. 기획사가 이번 전시를 진행하기 위해 쓸 예산은 35억∼40억원 정도. 2000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오르세미술관전을 열었던 지엔씨미디어는 2000년의 40만명보다는 훨씬 많은 관객이 들 것으로 전망했다. ◆밀레 만종=보험평가액만 1000억원 이상이다. 해질녘 들판에서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제작 당시로는 꽤 비싼 1000프랑에 미국으로 팔려나갔다가 1890년 프랑스인 한 명이 원래 그림값의 800배인 80만 프랑을 주고 되샀다가 1906년 루브르에 기증했다. 1986년 오르세미술관 개관과 함께 이전했다. 당시는 산업화 시절이었지만 밀레는 농촌의 모습을 담았다. 부부가 추수의 기쁨을 신께 감사하는 종교화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지만 부부 앞 바구니에는 죽은 아이가 담겼다는 등의 여러 해석을 낳았다. ◆피리부는 소년 = 마네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당시 파리 화상 뒤랑 뤼엘이 1500프랑에 샀고 20년 뒤 이작 드 카몽도가 20배의 웃돈을 주고 사들였다가 1911년 루브르에 기증했다. 인상파 탄생의 대부격인 마네의 대표작이다. 오르세는 이 작품을 특별 대우해 여러 도록의 표지로 사용하고 한쪽 벽면 전체를 이 작품을 위해 할애한다. 빨간 바지와 검은 상의를 입은 왕실 근위군 소년이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피리를 부는 이 작품은 무채색으로 처리한 화면, 원근법을 배제한 평면적인 묘사, 불필요한 장식을 삭제하고 핵심만 자세하게 강조한 기법 등이 특징이다. ◆오르세미술관= 1900년에 센 강변의 철도역으로 설립됐으나 1939년 폐역이된 후 방치됐다가 내부 개조를 거쳐 1986년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유리천장으로 자연 채광을 살리면서도 철도역이었던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커다란 시계 등이 상징물로 있다. 루브르박물관에 있던 작품 중 1848년부터 1차대전 발발 전인 1914년 사이 작품을 집중적으로 옮겨놓아 인상파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대표 박물관 중 한 곳이 됐다. 앵그르의 '샘', 마네의 '올랭피아', '풀밭위의 점심식사',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 '오베르의 교회',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등 회화의 걸작들과 로댕의 '지옥의 문' 등 근대조각 명품들도 자리잡고있다.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이 모임을 갖는 역사적인 계기가 된 바로 그 작품이다. 전시는 9월2일까지. 오전 10∼저녁 8시까지. 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성인 1만2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7000원.(02)322-0071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2007-04-10 18:50:02※따뜻한 시선으로 발효시킨 ‘한국 여인像’ 화가 박수근(1914∼65)은 왜 유명할까? 연신 고공행진중인 국내 최고의 작품가격 때문에? 아니면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여서? 모두 맞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그가 화가로서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귀감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수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박수근은 가장 서민적인 화가로 꼽힌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독학으로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화강암 재질을 살린 투박한 마티에르 기법은 박수근이 창조해낸 가장 한국적인 화면으로 평가 받는다. 단색조의 회색톤을 기본으로 깔고, 단순화된 형태와 선묘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다. 그곳에는 항상 따스한 시선으로 발효시킨 서민의 생활이 펼쳐진다. ■밀레에게 반해서 거침없이 잡은 붓 박수근에게도 북두칠성 같은 삶의 ‘롤모델(역할모델)’이 있었다. ‘이삭줍기’와 ‘만종’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바로 그다. 학력이라고는 양구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인 그는 어려서부터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 커다란 충격과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농군 부부가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이 그림은 어린 박수근에게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농군 부부는 결코 초라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난 밀레는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경건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런 밀레를 반 고흐도 흠모했다. 반 고흐는 밀레가 지향한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삶까지 닮고자 했다. 그래서 농부나 탄광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며, 진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에게 밀레는 영원한 우상이었다. 그는 밀레를 거울삼아 그림을 독학했다.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해결했다. 또 백내장으로 왼쪽 시력을 잃고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밀레는 박수근을 밝혀준 첫 번째 빛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빛은 따로 있다. 아내 김복순이 바로 그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 밖에” 없었던 그는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화가로서 꿈을 펼칠 수 있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을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낸 구애의 편지에서) 그는 아내에게 발견한 한국의 여인상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아내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주된 것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살다간 여인들의 초상을 만난다. 그들은 날씬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다. 시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펑퍼짐한 아줌마들이다. 그것도 노는 여인이 아니라 ‘일’하는 여인이다. 머리에 짐을 이거나 아이를 업고 절구질과 빨래를 하는 식으로 2중 3중의 일을 동시에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내의 빛으로 별이 된 화가 ‘절구질하는 여인’(1954)은 아내 김복순이 아기를 업고 절구질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단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코, 입이 비교적 뚜렷한 얼굴, 큼직한 손, 다리를 넓게 벌린 동적인 자세 등 일에 몰두하고 있는 주부의 모습이 생생하다. 박수근의 다른 그림이 그렇듯이 이 그림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따스하다. 그것은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난이 일상이었던 시절, 아내는 낮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일을 하거나 뜨개질로 푼돈을 모았다. 뿐만 아니라 사정이 급하면 시집올 때 가져온 옷감까지 팔았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소망은 그이가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로 대성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도록 전력을 기울여 내조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화가 박수근’ 뒤에는 이런 아내가 있었다.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나눠 진 아내가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처럼 뜨겁게 내조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은 어쩌면 ‘남편 박수근’이 아내에게 바치는 ‘헌화가(獻畵歌)’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박수근이 그렸지만, 그를 화가로 키운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촛불처럼 자신의 빛으로 남편의 화업을 찬란하게 밝혀주었다. 반 고흐처럼 박수근도 사후에 작품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지금도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진기록을 경신하며 가격이 상승중이다. 우리에게 박수근이 소중한 것은 개성적인 작품세계 때문은 아니다. 그것 못지않게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큰 꿈을 꿀 수 있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밀레의 빛을 좇다가 아내의 빛을 받아서, 우리 미술사의 하늘에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우리는 그 별을 보며 또 다른 꿈을 꾼다. /artmin21@hanmail.net ※키포인트=빌 게이츠는 존경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를 닮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빌 게이츠를 롤모델로 삼는 것은 놀라운 성공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큰 꿈을 꾸고 펼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도판설명=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97㎝, 1954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2007-04-05 16:3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