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 부평 미군기지였던 캠프마켓이 부산시민공원과 용산공원에 이어 생태·문화·역사가 공존하고 인천을 상징하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된다. 14일 인천시에 따르면 시는 13일 인천시청에서 캠프마켓 마스터플랜에 시민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시민 대토론회를 개최하고 현재 수립 완료를 앞두고 있는 캠프마켓 마스터플랜을 공개했다. 인천의 도심, 상업·문화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캠프마켓(60만4938㎡, 약 18만3000평)은 과거 일제강점기 무기·탄약을 제조·저장·보급하는 장소인 조병창으로 사용된 후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주한 미군부대로 사용된 곳이다. A·B구역이 지난 2019년 12월 81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반환됐으며 D구역은 2023년 12월에 반환됐다.국방부는 A·B구역에 대해 이달부터 토양오염 정밀조사 및 토양정화작업을 시작했다. D구역은 내년부터 토양정화작업을 실시한다. 시는 올 상반기 중 마스터플랜 수립을 완료해 발표할 예정이다. 시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생태공원, 역사적 가치의 보존을 통한 역사문화공간, 문화·예술시설 및 주민 편의시설 확충,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공원 등에 부합하는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시는 일제 강점기 조병창 시기부터 유지되어 온 건축물을 최대한 보존하고 미군부대에서 추가로 설치한 건축물은 경관가치와 상태를 확인해 활용 및 철거하기로 했다. 공간구성은 습지, 숲, 역사, 문화, 도시공원을 주제로 한 5개 공간 축으로 조성한다. 부지 북쪽에는 인천제2의료원·소방소를, 네 모퉁이에는 각 공간축에 어울리는 광장을 조성한다. 황효진 시 글로벌도시정무부시장은 시민 대토론회에서 "마스터플랜 수립 이후 진행되는 설계 공모 등 공원 조성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도 시민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담겠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2024-04-14 18:59:41【인천=한갑수 기자】 인천 부평 미군기지였던 캠프마켓이 부산시민공원과 용산공원에 이어 생태·문화·역사가 공존하고 인천을 상징하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된다. 14일 인천시에 따르면 시는 13일 인천시청 대회의실에서 캠프마켓 마스터플랜에 시민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시민 대토론회를 개최하고 현재 수립 완료를 앞두고 있는 캠프마켓 마스터플랜을 공개했다. 인천의 도심, 상업·문화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캠프마켓(60만4938㎡, 약 18만3000평)은 과거 일제강점기 무기·탄약을 제조·저장·보급하는 장소인 조병창으로 사용된 후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주한 미군부대로 사용된 곳이다. A·B구역이 지난 2019년 12월 81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반환됐으며 D구역은 2023년 12월에 반환됐다. 국방부는 A·B구역에 대해 이달부터 토양오염 정밀조사 및 토양정화작업을 시작했다. D구역은 내년부터 토양정화작업을 실시한다. 시는 2022년 5월에 캠프마켓 활용 방안에 대한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착수했으며 숙의경청회와 시민공론화 과정, 다양한 시민 의견 수렴 등을 거쳐 올 상반기 중 마스터플랜 수립을 완료해 발표할 예정이다. 시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생태공원, 역사적 가치의 보존을 통한 역사문화공간, 문화·예술시설 및 주민 편의시설 확충,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공원 등에 부합하는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시는 우선 건축물의 경우 일제 강점기 조병창 시기부터 유지되어 온 건축물을 최대한 보존하고 미군부대에서 추가로 설치한 건축물은 경관가치와 상태를 확인해 활용 및 철거하기로 했다. 공간구성은 습지, 숲, 역사, 문화, 도시공원을 주제로 한 5개 공간 축으로 조성한다. 부지 북쪽에는 인천제2의료원·소방소를, 네 모퉁이에는 각 공간축에 어울리는 광장을 조성한다. 시는 재정상황 등을 고려해 캠프마켓을 3단계로 나눠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1단계는 B구역 내 식물원 및 서측 주진입 광장 조성, 부영공원 내 맹꽁이 습지 및 도시 숲을 조성한다. 1단계 공사는 착공을 시작해 3년 내 완료할 방침이다. 2단계는 D구역에 공원을 조성하되 건축물이 밀집한 동측은 순차적으로 진행을 추진한다. 3단계는 B·D구역 잔여 부지를 조성하되 유보공간의 사업을 반영하고 주변도시와의 연계 시설을 조성하기로 했다. 캠프마켓이 반환된 이후 부지 활용 방안을 두고 시민들간 갈등이 심해 통합된 의견을 이끌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김미경 캠프마켓 시민공론화 추진단 위원장은 “캠프마켓은 규모 면에서 인천시 거점공원으로서의 요건이 충분해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의견 수렴을 했고, 공원이 위치한 지역의 주민 의견 수렴 필요성도 있어 부평구민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했지만 협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밝혔다. 황효진 시 글로벌도시정무부시장은 시민 대토론회에서 “캠프마켓 시민공론화는 시민 대토론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며 마스터플랜 수립 이후 진행되는 설계 공모 등 공원 조성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도 시민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담겠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4-04-14 11:44:01【 원주=김기섭 기자】원주시가 국방부를 상대로 제기한 옛 미군부대 부지인 캠프롱 소유권 이전 관련 민사소송 1심 판결에서 일부 승소했다. 28일 원주시에 따르면 지난 2022년 10월 캠프롱 소유권 이전에 따른 감정평가 기준시점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이견을 좁히지 못해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시는 감정평가 기준일로 협약 체결일인 2013년 6월을, 국방부는 토양오염 정화작업 등 행정절차가 완료된 이후의 시점을 각각 주장해왔다. 원주시는 2013년 협약 이후 2016년까지 토지대금으로 665억원을 납부했으며 2019년에는 지가 상승분 125억원까지 추가로 납부했다. 지난 24일 열린 1심 판결에서 원주시가 주위적으로 청구한 2013년 6월은 기각됐으나 예비적으로 청구한 공여해제 반환일인 2019년 12월은 받아들여져 원주시가 일부 승소했다. 시는 이번 판결이 확정될 경우 내년 감정평가를 거쳐 2025년 상반기에는 소유권 이전 절차를 완료하고 캠프롱 부지에 추진 중인 공원조성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원강수 원주시장은 "캠프롱 부지에 과학관, 수영장, 미술관 등의 시설을 품은 자연친화적인 문화체육공원을 조성해 원주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kees26@fnnews.com
2023-11-28 18:34:07【원주=김기섭 기자】 원주시가 국방부를 상대로 제기한 옛 미군부대 부지인 캠프롱 소유권 이전관련 민사소송 1심 판결에서 일부 승소했다. 28일 원주시에 따르면 지난 2022년 10월 캠프롱 소유권 이전에 따른 감정평가 기준시점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이견을 좁히지 못해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시는 감정평가 기준일로 협약 체결일인 2013년 6월을, 국방부는 토양오염 정화작업 등 행정절차가 완료된 이후의 시점을 각각 주장해왔다. 원주시는 2013년 협약 이후 2016년까지 토지대금으로 665억원을 납부했으며 2019년에는 지가 상승분 125억원까지 추가로 납부했다. 지난 24일 열린 1심 판결에서 원주시가 주위적으로 청구한 2013년 6월은 기각됐으나 예비적으로 청구한 공여해제 반환일인 2019년 12월은 받아들여져 원주시가 일부 승소했다. 시는 이번 판결이 확정될 경우 내년 감정평가를 거처 2025년 상반기에는 소유권 이전 절차를 완료하고 캠프롱 부지에 추진 중인 공원조성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원강수 원주시장은 “캠프롱 부지에 과학관, 수영장, 미술관 등의 시설을 품은 자연친화적인 문화체육공원을 조성해 원주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kees26@fnnews.com kees26@fnnews.com 김기섭 기자
2023-11-28 09:15:24【파이낸셜뉴스 원주=김기섭 기자】 옛 미군부대였던 원주 캠프롱 부지에 문화체육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이 본격화된다. 17일 원주시에 따르면 최근 국방부와 캠프롱 부지 조기개방구역에 대한 사용 협의를 완료했으며 오는 5월부터 공사가 시작된다. 캠프롱 문화체육공원 부지면적은 33만4897㎡이며 이곳에 국립강원전문과학관, 미술관, 박물관, 청소년 문화의 집 등 문화시설과 수영장이 포함된 복합체육센터 등 체육시설이 조성된다. 조기개방구역은 전체면적 중 18만3598㎡로 국립전문과학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포함돼 있어 단계별로 캠프롱 문화체육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는데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기개방구역 사용 협의는 원주시의 지속적인 협의 노력과 국방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뤄낸 결실이라는 평가다. 특히 국방부는 원주시에서 요청한 지역과 오염도가 경미한 지역을 중점적으로 토양오염 정화작업을 추진, 지난 1월 조기개방구역에 대한 정화사업을 완료했다. 원강수 원주시장은 “문화체육공원 조성사업을 조기에 마치고 캠프롱 부지를 시민들에게 돌려드리겠다"며 "해당 부지에 문화체육공원이 조성되면 북부권 지역경제도 크게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kees26@fnnews.com 김기섭 기자
2023-03-17 09:01:28【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일제강점기 당시 조병창 근로자 병원으로 사용된 인천 부평 미군부대(캠프마켓) 내 조병창 병원이 철거 수순을 밟는다. 정동석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은 19일 인천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설명회를 열고 부평 캠프마켓 내 조병창 병원 건축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병창 병원은 일제 강점기 당시 무기·탄약을 제조·저장·보급하는 장소인 조병창 내 근로자 병원으로 사용됐으며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부대의 미군장교클럽으로 사용된 곳이다. 국방부는 부평 캠프마켓의 토양오염정화와 조병창 병원 건축물의 보존방안에 대해 오염정화를 법적기한 내 완료하기 위해 건축물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인천시에 제시했다. 문화재청은 조병창 병원 건축물의 원형이 훼손되고 증축돼 등록문화재로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결국 정화사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지난해 11월 조병창 병원 건축물의 철거를 시작했다. 건축물 철거가 시작되자 철거반대 및 존치를 주장하는 지역 시민단체가 시민의견 수렴을 요구하며 강력 반발함에 따라 인천시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좀 더 깊이 듣고자 국방부에 철거 잠정 중지를 요청하고 찬반 의견을 주장하는 시민단체들과 소통간담회를 개최했다. 이후 시는 3차례의 소통간담회를 개최했으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참여주체간 기본 입장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시는 국방부와 문화재청의 입장이 명확하고 조병창 병원 건축물 존치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의견이 상반되는 가운데 인천시가 토양오염정화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 의견을 뛰어넘는 가치판단을 하기에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시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방부에 B구역 정화공사 임시 중지 요청을 철회해 중단됐던 사업을 정상화하기로 했다. 정동석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은 “조병창 병원 건축물이 철거되더라도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을 실시해 유산을 최대한 보관하고 캠프마켓이 지닌 고유 가치를 이어가며 건강하고 안전한 공원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3-01-19 14:10:04【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시는 철거 여부를 두고 민민간 찬반 갈등을 겪고 있는 부평 미군부대(캠프마켓) 내 1780호 건축물(일본 육군 조병창 내 병원 건물)의 앞으로 처리방안에 대한 의견 교환 및 조율에 나선다. 2일 인천시에 따르면 캠프마켓 1780호 건축물에 대한 철거 및 보존 여부에 대한 소통·협의를 위한 현안 소통간담회 첫 회의를 오는 6일 개최한다. 당초 국방부는 캠프마켓 내 1780호 건축물을 철거키로 하고 철거 작업을 착수했으나 일부 시민단체(일본육군조병창 역사문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의 철거 작업 중단 및 보존 요구에 철거작업을 중단했다. 또 다른 시민단체(캠프마켓 부평숲 주민 추진위원회)는 건물의 철거 및 오염물질의 완전 정화를 요구하고 있어 민민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시는 두 시민단체를 비롯 대표적인 이해관계자, 인천시, 분야별 전문가의 4개 그룹별 대표 4명과 갈등관리전문가 등 총 18명이 참여하는 소통간담회를 개최해 이해관계자간 의견을 교환하고 쟁점 등을 파악할 계획이다. 시는 현재 추진 중인 ‘캠프마켓 갈등영향분석 연구 용역’ 갈등관리전문가에게 사회를 맡겨 소통간담회를 진행한다. 시는 지난 달 9일 ‘일본육군조병창 역사문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의 캠프마켓 1780호 건축물 철거 중단 기자회견 이후 소통간담회를 조속히 개최하고자 했으나 이해관계자들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시는 이번 간담회에서 1780호 건축물에 대한 관계자별 입장과 쟁점을 확인하고 추진경위와 국방부, 문화재청, 인천시 등 소관부처별 업무권한, 사실관계 등 객관적 사실을 전달할 예정이다. 시는 논의 후 현 상황에서 ‘합의 가능한 것’과 ‘이견이 큰 것’을 분류해 이견이 큰 사항에 대해 지속적으로 재논의해 개선방법을 모색할 방침이다. 시는 이번 간담회 결과에 대해 진행 중인 캠프마켓 갈등영향분석 연구용역 과업과 2023년도 시민공론화 의제 설계에 반영해 활용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소통간담회는 기본 2회 이상 4회 이내 부시장 또는 담당 국장이 주재하고, 간담회 진행 상황에 따라 개최 횟수도 변경될 수 있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2-12-02 10:56:09【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시는 부평 미군부대(캠프마켓) 등에 대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발전종합계획 변경(안)’을 마련하고 시민과 관계전문가 등의 의견을 듣기 위한 시민공청회를 오는 26일 부평구청 대회의실에서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발전종합계획’은 주한미군에게 공여되었던 지역 등의 각종 지원을 위한 종합계획으로 강화군 하점면과 부평구 캠프마켓 및 주변지역이 계획수립 대상이다. 이번 발전종합계획 변경은 2009년 최초 계획이 수립된 이후 13년 만에 이뤄지는 것으로 그간의 여건 변화 등을 반영한 캠프마켓 토지이용계획 및 총사업비 변경 등이 주요 내용이다. 캠프마켓과 주변지역을 포함한 총 부지면적 60만4938㎡ 중 공원면적이 42만8985㎡에서 48만7530㎡으로 확대돼 전체 공원 비율이 기존 70%에서 80%로 늘어나고 광장과 사회복지시설 등 공공시설(5개)은 앞으로 주민 수요 등을 고려해 공원 내 시설로 재배치될 예정이다. 총사업비는 지가상승과 토지이용계획 변경내용을 반영해 기존 6577억원에서 9373억원으로 증가하고 D구역 반환이나 토양정화 시기 등을 고려해 사업기간을 2030년까지 변경한다. 시는 26일 시민공청회를 통해 주민과 관계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앞서 실시한 주민설명회 및 관계부서 의견을 검토 보완한 발전종합계획 변경(안)을 5월초 행정안전부에 승인 요청할 계획이다. 한편 공청회 참석은 사전 신청자 50명으로 한정한다. 참석을 원하는 시민은 인천시청 캠프마켓과 또는 부평구청 도시재생과에 신청할 수 있다. 이번 공청회는 26일 오후 2시부터 인천시 유튜브 채널로도 실시간 중계될 예정이다. 정동석 시 도시계획국장은 “이번 공청회가 반환공여구역 등에 관심 있는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발전방향을 논의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2-04-20 09:56:33[파이낸셜뉴스] 요진건설산업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한 '인천부평 행복주택 및 도시재생뉴딜 혁신센터 건설공사'를 수주했다고 14일 밝혔다.인천부평 행복주택 및 도시재생뉴딜 혁신센터 건설공사는 부평구 도시재생뉴딜 사업의 핵심앵커 사업으로 요진건설(65%)과 선두종합건설(20%), 큰빛종합건설(15%)이 공동도급 형태로 진행한다. 이 사업은 인천 부평구 부평동 65-17번지 일원(옛 부평 미군기지 오수 정화조부지일원)에 조성되며, 연면적 1만7608.54㎡(5326평) 규모로 행복주택 350가구와 2만4060.84㎡(7278평) 규모로 부대복리시설을 건설한다. 요진건설 수주금액은 338억원(총 공사금액 521억)이다. 공사기간은 착공일로부터 922일이다. 이번 수주에 앞서 지난달 요진건설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일원에 위치한 충북선 오송-청주간 석화건널목 입체화공사를 수주했다. 국가철도공단에서 발주한 이 공사는 요진건설이 60%의 지분을 갖고, 유광건설(40%)이 공동도급으로 참여했다. 요진건설 수주금액은 65억원(총 공사금액 108억원)이다. 공사기간은 착공일로부터 31개월이다. 요진건설 관계자는 "공공사업 부문에서 2022년 마수걸이 수주를 성공해 의미가 깊다"며 "창립 46년의 풍부한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 한 해도 양질의 사업 수주를 달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longss@fnnews.com 성초롱 기자
2022-03-14 11:39:37[파이낸셜뉴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와 김종필 예비역 중령 등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중심이 된 일단의 군 병력이 한강대교를 도강해 서울 중심부로 진입,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그리고 4.19 혁명 이후 각계각층에서 분출한 국민들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던 민주당 장면 정권을 축출(逐出)한 후 대한민국의 새로운 권력으로 떠올랐다. 역사는 이를 '5.16 쿠데타'라고 부른다. 5.16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 극명하게 나뉜다. 한편에서는 5.16 쿠데타를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건이며 이후 기나긴 군사독재정권의 암흑기(暗黑期)를 여는 서막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5.16 쿠데타를 극심한 혼란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의 길을 여는 첫 단추로 평가하고 있다. 후자의 관점은 용어에 있어서도 5.16 쿠데타가 아닌 '5.16 혁명'으로 부른다. 다만 역사적 평가는 엇갈려도 5.16 쿠데타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뒤바꾼 정변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나타낸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군부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띈 보수화 경향이 짙어졌고, 경제적으로는 급속한 성장 일변도의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를 논할 때 가장 첫 손에 꼽히는 정변인 '5.16 쿠데타' 전말을 되돌아봤다. ■혁명 후 혼란상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된 후 우리나라에는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뒤이어 자유당 정권 시절에 억눌렸던 정치·사회적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제시된 화두는 '통일'(統一)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4.19 혁명 1주년인 1961년에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표까지 참여한 민족통일 학생연맹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남북학생회담의 개최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조합 결성 등 노동 운동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는 추후 좌파 성향의 사회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과도기(過渡期) 속에서 장면 정권은 대처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초 장면 정권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자유당 정권과 차별화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장면 정권은 자유당 정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대처를 선택했다. 학생 운동 및 노동 운동 등에서 나온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을 앞세워 국가보안 체제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정치·사회적 요구들이 일부 급진적인 성격도 띄고 있었던 만큼 장면 정권의 대처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처는 결과적으로 더 큰 반발과 혼란을 불러왔다. 아울러 민주당 내부 분열의 심화는 혼란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新)파와 윤보선, 김도연 등을 중심으로 한 구(舊)파가 정치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참고로 신파는 학자와 법조인 출신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띈 반면 구파는 부유층이 많았고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 체제의 핵심은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당시에는 의원내각제였다. 이에 따라 정치 권력의 핵심인 국무총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신파와 구파 사이에 벌어졌다.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은 국무총리로 구파였던 김도연을 지명했지만, 국회의 인준(認准)을 얻는데 실패했다. 이후 신파였던 장면이 국회의 인준을 얻어 국무총리가 됐다. 장면은 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구파는 협조를 거부했고, 결국 신파 위주로 내각이 구성됐다. 이에 구파는 반발,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며 떨어져 나갔다. 분당이 된 후 국회 의석 구조는 민주당 134석, 신민당 60석이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기반으로 했던 민주당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권력 투쟁 및 내부 분열 등에 시달리며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쿠데타 움직임 군부는 한국전쟁 이후 반공(反共)을 의식한 미국의 지원 등으로 급격히 성장해 있었다.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등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엘리트 집단화 됐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군부는 어느 정도 정치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와 함께 군부 내 인사 적체 및 부정부패가 심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4.19 혁명 후 정치·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군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박정희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 주도의 '정군운동'(整軍運動)으로 표면화됐다. 정군운동의 명분은 군부 내에서도 자행됐던 3.15 부정선거의 잔재와 각종 부정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군운동의 이면에는 승승장구하는 선배 군인들과 달리 승진 등에서 지지부진했던 후배 군인들의 불만도 작용했다. 이들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퇴진 요구 등이 담긴 정군 연판장(連判狀)을 군부 내에 돌렸고, 정군 운동을 비판하는 군부 인사들의 성명을 대놓고 성토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정군운동은 송요찬 총장 및 백선엽 대장, 그리고 일부 중장과 소장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등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당시 현석호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더 강력한 정군운동 추진을 건의하려 했지만 만나지도 못했고, 최영희 연합참모총장(현재 합참의장) 집무실에 몰려가 자진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되레 역풍을 맞았다. 장면 정권과 군 수뇌부는 이들의 행동을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하극상'(下剋上)으로 규정했고, 이후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다. 더욱이 군부의 안정을 원했던 미국도 정군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대거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김종필, 석정선 등 핵심 인물들이 군복을 벗게 됐다. 정군파의 리더격이었던 박정희도 강제 예편(豫編)을 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아온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으로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됨으로써 군에서 간신히 생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보다 과감하면서도 위험한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민주당 장면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였다. 이들은 1960년 9월에 서울 명동에 위치한 요정인 '충무장'에 모여 쿠데타를 결의(충무장 결의)했고, 이후 각자의 직책과 인맥을 총동원해 쿠데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정군파의 쿠데타 계획의 핵심은 장면 정권의 '비둘기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이었다. 비둘기 작전은 장면 정권이 드높아진 사회 운동의 열기를 물리력을 동원해 제압하기 위해 수립한 작전을 말한다. 정군파는 비둘기 작전이 시행되면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자연스레 서울 요충지들을 점령한 후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정군파는 시위 진압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해 나갔고, 그 결과 국방부, 육군본부, 육군 제1공수단, 육군 제33사단, 제34사단 등의 장교들을 대거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한편, 정군파의 쿠데타 모의와 별도로 해병대에서도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해군 준장이자 해병 제1여단장이었던 김윤근이었다. 정군파는 해병대의 단독 쿠데타 모의 소식을 접하고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신경군관학교(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인맥을 적극 활용했는데, 당시 해병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인 김동하를 고리로 김윤근(신경군관학교 6기)과 접촉해 함께 쿠데타를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5.16 쿠데타 군부 내에서 쿠데타 움직임이 가속화될 즈음 1961년 정치권 등에서는 이른바 '3, 4월 위기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부 내 정보기관과 주한미군은 정군파의 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정희의 존재는 장면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박정희는 이미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전력 등으로 정보기관의 주요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이에 장면과 현석호 등은 몇 차례에 걸쳐 장도영을 불러 박정희와 군부 내 쿠데타 움직임에 대해 캐물었다. 그런데 장도영은 쿠데타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박정희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며 안심시켰다. 이 때 장도영은 정군파에게 포섭됐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기회주의적인 위치에 머무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군파는 쿠데타 세력 규합을 완료한 후 구체적인 쿠데타 거사일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군파는 장면 정권의 '비둘기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계획한 만큼 혁명 1주기 시위가 예상되는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쿠데타가 용이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해 시위가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위한 공작도 꾸몄다. 하지만, 정군파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4월 19일에 별다른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정군파는 거사일을 그해 5월 12일로 다시 잡았다. 그런데 이 계획도 군부 내 정보기관에 감지돼 취소됐고, 결국 5월 16일이 최종적인 거사일로 확정됐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날이 밝았다. 총 3600명이 동원된 쿠데타 군은 당일 새벽에 작전을 개시했다. 선봉에 선 것은 김윤근이 지휘하는 해병 제1여단이었다. 뒤이어 박치옥 대령이 지휘하는 공수부대가 출동해 해병대와 합류, 서울 중심부로 진입하는 통로인 한강대교로 진격했다. 아울러 제6군단 4개 포병대는 육군본부를 향해 진격했다. 한강대교에 도착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그곳을 방어하고 있던 헌병 제7중대와 맞닥뜨렸다. 헌병대가 통과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자 쿠데타 군이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숫자와 기세 면에서 우세했던 쿠데타 군은 헌병대를 가볍게 제압했고, 서울 중심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육군본부를 향해 진격했던 제6군단 포병대도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이후 쿠데타 군은 부대를 효율적으로 나눠 서울 요충지들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쿠데타 군의 주력 부대는 서울시청,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 공수부대는 중앙 방송국 및 장면 숙소인 반도호텔 등을 각각 점령했다. 그런데 이 당시 쿠데타 진압을 진두지휘해야 했던 장면과 윤보선 등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쿠데타 성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장면은 쿠데타 소식을 접하자 미 대사관 및 대사관 숙소로 몸을 피하려 했고, 여기서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거절되자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피신했다. 장면은 수녀원에서 미국에게 쿠데타 무력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장면 정권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의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윤보선은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이 쿠데타 진압을 강하게 주장하자 서울 시내에서 아군끼리 내전(內戰)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반대했다. 추후 윤보선은 박정희 등과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는 의아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세는 점차 쿠데타 군에게 유리해졌다. 별다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사이 쿠데타 군은 서울 전역과 부산, 광주, 대전 등 지방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마침내 새벽 5시 쿠데타 군은 '군사혁명위원회' 조직 및 행정·입법·사법 3권의 통합 장악, 그리고 김종필 주도의 6개 항으로 구성된 '혁명 공약'을 방송을 통해 발표하기에 이른다. 혁명 공약의 주요 내용들을 보면 반공체제 강화, 미국 등 우방과의 유대 공고화, 사회 부패 일소 및 청신한 기풍 진작, 국가자주경제재건 총력,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 배양, 혁명 과업 성취 후 양심적 정치인에 정권 이양 등이 있었다. 아울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될 군사혁명위원회의 위원장은 장도영이 맡게 됐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 때 박정희는 부의장을 맡으면서 서서히 권력의 정점에 나아갈 채비를 한다. 한편,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수녀원에서 나왔고, 서울 중앙청으로 이동해 임시각의를 주재한 뒤 내각 총사퇴 결의 및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 등을 발표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미국도 쿠데타 및 군정(軍政)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4.19 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정권은 이렇다 할 업적을 내놓지 못한 채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군사정권 출현 5.16 쿠데타 이후 정국의 무게추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그 정점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 입법 등을 장악한 초법적인 기구였고, 의장은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였다. 특히 장도영은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는 상태에서 임시정부의 내각 수반과 국방부 장관까지 차지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군부와 정부를 완벽히 장악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장도영은 쿠데타 발생 21일 만에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됐고, 이로부터 한 달 뒤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기실 쿠데타 직후부터 실권자는 박정희와 김종필 등이었고, 장도영은 잠시 이용할 만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혁명 사건 이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주체 세력은 반공법, 정치활동정화법 제정 및 사회악 일소 등을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정치·사회 변혁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부정한 공직자와 조직폭력배 등을 대거 몰아내면서 한 때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사회의 변혁이 나타나는 가운데 5.16 주체 세력은 김종필을 초대 부장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각종 정보정치 및 공작정치를 펼치며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 5.16 주체 세력은 장면 정권에서 설계한 초안 등을 기반으로 수출 주도 산업화 등 경제개발 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5.16 주체 세력이 당초 약속했던 '민정 이양'(民政 移讓)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져 갔다. 미국도 이 같은 요구를 적극적으로 했다.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처음부터 민정 이양을 할 마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부 군 지휘관들의 의견을 수용해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려고도 했지만, 전방위적인 압력으로 인해 결국 민정 이양 계획을 발표했다. 우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고, 선거 제도는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하기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1963년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확정했다. 그런데 민정 이양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순순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민정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이에 앞서 박정희의 든든한 우군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이미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파친코 사건 등 극히 부정한 방법이 동원된 4대 의혹 사건을 일으키면서 까지 박정희의 정당인 민주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에 나섰다. 이후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공화당을 창당했고, 박정희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자립, 자조, 민족 등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당시 윤보선 민정당 후보와 맞붙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의 15만표 차 신승(辛勝)이었다. 그해 12월 17일에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3공화국이 출범했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 간의 군사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10-01 18:3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