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풍파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파친코), 재난이 불러일으킨 공포와 분노를 온몸으로 맞닥뜨린 사람들의 목소리(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역사라는 바다에 선명한 물결을 만든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재일 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며 출간 즉시 미국 사회에 큰 방향을 일으켰다. 주인공 선자를 둘러싼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방, 한국전쟁, 분단 등 한국 근현대사와 겹쳐지며,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의 삶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이 책을 쓴 이민진 작가는 일곱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5세대이다.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며 자이니치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작가는 "역사가 함부로 제쳐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함께 일본에 머물면서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작가는 책 제목인 '파친코'가 "도박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뜻함과 동시에,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한 타향에서 생존을 유일한 수단으로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재일 조선인들의 비극적 삶을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자이니치라는 이민자의 삶에서 시작한 소설은 가족, 사랑, 상실, 돈과 같은 인생의 전반을 다루면서,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힘을 증명하며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무덤이 되어버린 세상을 통과해 앞으로 나아갔다." 올해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를 맞았지만 이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여전히 적다. 2023년 광복절, SF소설가 황모과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100년 전의 이야기를 타임슬립 역사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로 선보였다. 작가는 지난해 1990년 백말띠 여아 선별 낙태 사건을 소재로 SF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로 큰 주목을 받으며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1923년 관동대지진 시기에 혼란에 빠진 사회를 수습하고자 조선인과 중국인 등 식민지 노동자를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SF로 소설화한다. 직접 일본에서 체류하며 유가족 및 시민사회 활동가 십수명을 인터뷰했고, 과거 학살 현장 및 추모비 등을 면밀히 취재해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이 소설은 유례 없는 재난의 공포가 불러온 비틀린 분노와 평범한 악의 민낯을 그려내며, 민간과 국가의 합작으로 이뤄낸 시스템적 학살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고 과거의 인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싱크로놀로지'라는 기술을 통해 당시를 조사하러 간 한국인 청년 민호와 일본인 청년 다카야가 당시의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들은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부터 사흘간 이곳에 머물러야 하지만 과거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민호와 이를 방관하는 다카야의 오판으로 인해 형벌처럼 과거를 반복 체험하게 된다. '파친코'와 '말없는 자들의 목소리' 모두 '역사를 관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라는 점에서 각 시대와 문화를 생생히 재현하며 약하고 힘 없는 이들의 위대한 여정에 주목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도 결국 최선을 다하는 개인들이 이루어간다는 것을 알아가며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해보게 하는 것이 위대한 문학일 것이다. 조용환 윌라 마케팅담당
2023-08-24 18:11:12[파이낸셜뉴스] 오역 논란이 제기됐던 윤석열 대통령의 인터뷰 녹취 파일을 직접 공개한 미국 워싱턴포스트(WP) 기자가 무분별한 악플세례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둔 지난 24일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 한국계 미국인 미셸 예희 리 WP 도쿄 서울지국장은 지난 26일 오후 SNS에 “지금 이런 문자를 받았다”면서 욕설이 담긴 문자를 캡처해 공개했다. 해당 문자에는 “X같이 생긴 게 워싱턴포스트 있으면서 미국인 척 한다, 너 낳은 XXX이 빨갱이...교통사고 나서 뒤져라, 오크(영화 반지의 제왕속 괴물)”라는 욕설이 담겨 있었다. 미셸 리 지국장은 욕설을 보낸 악플러의 실명을 그대로 공개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25일 오역 논란에 휩싸인 윤 대통령 인터뷰와 관련해 직접 녹취록을 공개해 윤 대통령을 옹호한 여당이 수세에 몰리자 이런 악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논란이 됐던 발언은 윤 대통령이 한일 역사 갈등과 관련해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대목이였다. 민주당에서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는 취지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때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민주당은 오역을 가지고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고 반박했다. 김정재 의원도 “인터뷰를 보니까 일본이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한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문장이 있는데, ‘일본’이라는 주어가 해석에서 빠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리 지국장은 결 지난 25일 자신의 트위터에 “번역 오류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확인해 봤다”며 “여기에 정확한 워딩이 있다”고 그 내용을 공개했다. 그가 첨부한 윤 대통령 발언 녹취록에는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돼 있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4-27 16:27:50[파이낸셜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 발언 보도를 둘러싸고 여당인 국민의힘이 '오역 논란'을 제기하며 윤 대통령 옹호에 나서자 인터뷰를 한 당사자인 WP 기자가 원문 녹취록을 공개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가 공개한 윤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에는 윤 대통령이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스스로 방일 논란에 대해 해명한 것으로 풀이됐다. 이와 관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같은 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인가 의심할 정도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비판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국민의힘은 "인터뷰 내용에 대해 주어가 빠져 있다며 오역의 소지가 있다"라며 기사가 잘못 작성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공식 논평을 통해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검찰에 송치된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또다시 대통령 발언의 진상을 확인하지 않고 선전·선동에 앞장섰다. 제발 이성을 찾아라"라며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직전 문단에서 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든 현안이든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강조했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유상범 대변인은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역을 가지고 실제 발언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나선 것"이라고 WP의 오역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WP 도쿄·서울지국장인 한국계 미셸 예희 리 기자는 25일 자신의 트위터에 "번역 오류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확인해 봤다"라며 "여기에 정확한 워딩이 있다"라고 그 내용을 공개했다. 리 기자가 첨부한 윤 대통령 발언 녹취록에는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돼 있다. 한편 이에 앞서 대통령실이 공개한 윤 대통령의 관련 발언에는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의 주어가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두고 생략된 주어가 '일본'인데 WP가 '나(윤 대통령)'로 오역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 기자가 실제 발언에 '저는'이라는 주어가 있었다며 오역 논란에 정면 반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리 기자는 WP가 대선 직전인 지난해 2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의 서면 인터뷰 기사에서 성평등 문제에 취약하다는 비판과 관련해 윤 후보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언급했다고 보도한 것을 두고 국민의힘 공보단이 "행정상 실수로 전달된 축약본을 보고 쓴 것"이라며 윤 대통령의 공식 발언이 아니라고 해명하자, 당시에도 인터뷰 원문을 공개하며 정면으로 반박한 바 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3-04-25 14:41:50[파이낸셜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 회복에 대해,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야권은 “윤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 “또 '입리스크' 터뜨렸다”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국민의힘은 “전문을 보라”며 방어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WP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벌인 국가들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며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을 갖고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과거사에 대한 인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을 지켜야 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충격적”이라고 개탄했다. 강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기에 일본을 대변하고 있나? 윤 대통령은 무슨 권한으로 일본의 침탈과 식민지배에 면죄부를 주나”라며 “우리나라가 용서하면 되는 문제를 여태껏 용서를 강요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말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날 당 고위전략회의를 마친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당황스럽고 참담하다”며 “수십 년 간 일본에 침략당해 고통 받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발언으로 생각되고 대통령의 역사 의식이 과연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되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위선희 정의당 대변인도 같은 날 국회에서 브리핑을 갖고 “윤 대통령이 또 ‘입 리스크’를 터뜨렸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위 대변인은 “국민을 폄훼하고, 국격을 실추시킨 망언”이라며 “망상에 가까운 생각으로 우리 국민을 무턱대고 과거에만 얽매여 안보나 한일협력에는 생각 없는 국민으로 매도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일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사과할 것은 분명히 사과하고, 전범 기업들이 피해보상을 직접 했을 때 가능한 것이고 이것이 국민적 요구이자 상식”이라며 “윤 대통령은 역사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역사를 잊고, 국민마저 폄훼하는 윤석열 대통령이야말로 무릎 꿇고 국민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의 공세에 여당은 '가짜뉴스'라고 대응했다. 국민의힘 유상범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대통령실이 공개한 한국어 인터뷰를 보면 윤 대통령은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해당 문장은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전했다. 안병길 국민의힘 의원도 SNS를 통해 “오늘 일부 언론들은 대통령의 WP 인터뷰를 인용해 ‘100년 전 일로 일본이 사과해야한다는 생각 못 받아들여’라는 제목으로 속보를 쏟아냈다”며 “이는 전후 맥락을 모두 삭제하고, 구체적인 윤 대통령의 표현까지 자의적으로 편집한 매우 심각한 왜곡 보도”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 인터뷰 발언이 논란이 되자 공지를 통해 “한일관계 정상화는 꼭 해야 하며, 늦출 수 없는 일”이라며 “유럽에서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듯이, 한일관계 개선은 미래를 향해서 가야 할 길이다”라고 했다. 이와 관련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화해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프랑스 관계가 한일 간에도 재현됐으면 한다’고 했지만,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처절할 정도로 과거사 반성을 했다는 걸 알기는 하냐”며 “일본은 지금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부정한다”고 질타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4-24 21:36:29[파이낸셜뉴스] 윤석열 대통령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본을 언급하고 “일본이 100년 전 일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공개된 WP 인터뷰에서 한국의 안보 상황이 매우 심각하여 일본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며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동시에 "결단이 필요한 문제"라며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3-04-24 15:47:35올해 22회를 맞이한 '2022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6~30일 아르코예술극장 등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서울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이 후원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 축제로 올해는 '전환'을 주제로 연극·무용·다원예술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 23편을 올린다. 최석규 예술감독은 지난 4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술·환경·정치·사회구조의 변화와 팬데믹의 영향이 우리에게 던지는 동시대 질문을 예술가들과 함께 주목했다"며 "환경·나이듦·세대·젠더 등 동시대 화두와 예술과 과학의 기술 융합, 팬데믹 이후 공연 예술의 미래 등에 대한 고민이 올해 축제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또 기존의 연극·무용 중심에서 벗어나 음악의 실험과 확장(뉴뮤직) 등을 다루며, 관객 참여형에 과정 공유형 공연도 선보인다. 장애 관객들을 위한 배리어프리 공연도 7편 준비했다 ■세대부터 젠더까지 '동시대 쟁점' 주목 프랑스 안무가 파브리세 라말린곰은 78세와 23세 두 무용수를 통해 세대 간 관계의 문제를 다룬다. R.A.M.a컴퍼니의 '제너레이션:자화상의 결투'는 2022 아비뇽 오프 프로그램 참가작으로, 모든 것이 대비되는 두 몸의 만남, 두 세대 간의 대화를 몸짓으로 표현한다. 코끼리들이 웃는다의 '잠자리 연대기'는 어르신들의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다. 1922년 어르신의 출생을 시작으로 2022년 현재까지 100년의 시간에 담긴 6명 어르신들의 인생이 무대에 펼쳐진다. 트라이아웃 공연으로 선보이는 극단 돌파구의 '지상의 여자들'은 지방의 작은 도시 구주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남자들이 갑자기 사라지며 시작한다. 사라진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구주에 남겨진 여자들을 주목한다. 무제의 길의 '움직이는 숲 씨어터게임 1.0'은 기후변화로 절멸위기에 놓인 숲을 살리기 위한 관객 참여형 씨어터게임 공연이다. 무대에서 색다른 보드게임이 펼쳐진다. 공연은 관객의 선택에 따라 매회 다른 결론을 맞이하며 색다른 재미와 생각거리를 던진다. ■장르의 경계를 너머… 다양한 충돌의 조화 다원예술공연 '플레이/게임/언더 프래질리티'은 안무가 김형민과 독일·우크라이나·레바논 지역의 예술가들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명확한 규칙을 제시하는 게임과 자유로운 형태의 놀이는 어떻게 다르고 각각 기능할까?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공연은 한 게임의 규칙에서 출발해 그 규칙을 깨고 새로운 규칙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더불어 규칙의 부재로 모호해지는 관계와 감각만이 소통의 방법이 되는 상황을 실험한다. 5엣지스의 김형민 안무가는 "팬데믹 기간 독일을 오가며 나라마다 다른 방역 규칙에 주목했다"며 "각기 다른 규칙을 우리는 어떻게 지키면서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녹여냈다"고 말했다.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에 달하는데, "반드시 답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오로지 사유만으로 시간을 점령해보자는 의지가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최석규 예술감독은 이에 "불확실성에서 새로운 창의성이 나온다"며 "질문이 예술가의 몫이라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 아닌가"라고 부연했다. 모든컴퍼니의 '피스트:여덟 개의 순간'은 무용수의 움직임과 아트 콘텐츠를 결합한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다. 김모든 안무가는 "경쟁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펜싱에 빗대어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며 "공간과 연출된 움직임에 반응하는 영상기술은 '실시간'으로 작동한다. 칼끝의 센서가 몸에 닿는 순간 등을 미디어 아트적으로 어떻게 직관적으로 표현할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포스트팬데믹 시대의 공연예술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의 '섬 이야기'는 제주 4·3 사건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이경성 연출가는 "2007년부터 400여구의 유해가 발굴된 제주공항이라는 장소성에 주목했다"며 "1940년대에 사라진 몸과 유해 발굴의 키워드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들여다보고, 70여년 전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자행된다는 지역성과 초지역성으로 사건을 바라봤다"고 말했다. '뉴뮤직'으로 명명한 음악의 실험과 확장도 주목된다. 조은희 작곡가 겸 연주자의 '포스트 음악극 시'는 음악 그 자체가 서사가 되어 극을 만든다. 클래식을 전공하고 전자 음악 작업을 하는 조 작곡가는 이번 공연에서 두 영역을 오가며 3명의 전통음악 연주자와 협연한다. 팬데믹 기간에 솔로 작업에 전념했다는 그는 "2019년에 초연한 이 작품을 오랜만에 관객 앞에서 연주하게 돼 설렌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됐고, 팬데믹을 통과하며 공연예술의 새로운 성장을 가져왔다.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디지털 분자들로 가득한 무대를 탄생시킨 히로아키 우메다는 일본의 안무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다. '더블빌'은 우메다의 작품을 두 편 모아 소개한다. 2015 초연작 '인텐셔널 파티클'은 무용수의 몸에 근육 센서 등을 부착하며 그들의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인디바이저블 서브스탠스'는 무용 공연을 관극하는 세 가지 형식에 주목한다. 전통적 관극과 라이브스트리밍 그리고 VR을 통한 관람이다. 우메다는 "사회변화에 나를 적응함과 동시에 팬데믹 기간에 내 작업을 공유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다"며 "앞으로 무용 공연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2-10-06 18:00:48[파이낸셜뉴스] 3·1운동은 핍박받는 조선민족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이었다. 그 전후 지하에서 꿈틀거렸던 조직이 조선 대동단이다. 독립운동 역사에서 3·1운동이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동학민중항쟁, 그 후의 임시정부 활동, 만주 무장투쟁, 미국이나 연해주에서의 활동, 국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야학운동 등 모든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는 위대한 운동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가 되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저자 장명국 선생은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주요 활동무대가 중국 상해나 만주, 그리고 미국 같은 해외라고 배웠지만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당시 인구 2000만 명 중 성인 인구의 약 20%에 육박하는데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조직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3·1운동이 일어난 해 국내에서는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돼 비밀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한다. 항일운동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무장투쟁, 외교노선, 실력을 키우는 교육운동, 언론활동, 소작쟁의에 참여하는 방식, 납세거부운동, 노동운동 등이 그것이다. 야학 등 문맹퇴치운동도 독립운동이었다. 학교를 만드는 일, 언론사를 만드는 일도 넓은 의미의 독립운동이었다. 합법·반합법·비합법 등 자신의 처지에 따라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일제 치하의 조선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김가진도 형편과 처지에 맞는 운동을 했을 것이다. 추측이 아니라 역사의 페이지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서훈은 개인문제가 아니다. 이미 역사의 문제다. 정부가 나서 유해를 모셔오고, 수훈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해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 서둘러야 한다. 오는 7월4일이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서거 100주년이 된다. 김가진은 망명지에서 영양실조와 병고에 시달리다 끝내 눈을 감았다. 그는 유교 사회질서에서 태어나 스스로 노력으로 자신을 옭아맸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1919년 고종의 서거 후 군신(君臣) 의리에서 풀려난 김가진은 유교적 세계관을 떨쳐버리고 일제 무단통치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지하조직 조선민족대동단 총재가 되어, 죽는 순간까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조선대동단은 독립·평화·사회주의를 꿈꾸다 그런데 일부 학계에서 대동단이나 동농 김가진에 대해 복벽주의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동단이나 동농 김가진이 추구하는 바가 과거 왕조로 돌아가자는 노선을 걸었다는 것이다. 대동단은 1919년 5월 20일 강령을 발표했다. 독립·평화·자유였다. 그리고 같은해 9월에 2차 강령을 발표했다. 독립·평화·사회주의다. 자유를 바탕에 둔 사회주의로 바뀐 것이다. 대동단은 자유와 사회주의까지 주장하는, 지금으로 봐도 상당히 진보적인 조직이었다. 강령만 봐도 대동단은 복벽주의와 너무나 거리가 먼 단체이다. 동농 김가진선생은 그 단체의 총재이자 임정의 고문으로 활약했다. 복벽주의라는 낙인은 사실과 거리가 먼 표피적 비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동단으로 서훈 받은 분 83명, 단일조직으로 최다 대동단으로 서훈을 받은 분은 현재까지 83명이다. 단일조직으로는 최고 많다.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대동단은 아직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김가진을 따라 같이 망명한 아들, 그리고 뒤이어 상하이에 온 며느리도 모두 서훈을 받았다. 총재인 김가진선생만 서훈을 받지 못했다. 왜 대동단과 동농 김가진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없는 것일까? 우선은 대동단의 강령인 독립, 평화, 자유 및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회주의가 현재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대동단이 1919년에 독립 평화 자유에서 그해 9월에 독립 평화 사회주의로 보다 그 폭을 넓힌 것은 당시의 세계사적 조류와 시대상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1919년 9월의 강령인 사회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하는 보다 폭넓은 가치, 특히 경제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 후세학자들이 대동단과 같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의 의미를 낮게 보고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이들 독립운동가의 명예에 커다란 누를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친일행적으로 지적된 의혹들, 사실과 달라 동농의 친일행적으로 지적된 의혹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충청남도 관찰사 시절 의병을 진압하고 의병장 이남규 부자의 순국에 관여했다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등이다. 먼저 ‘친일시’와 관련해 살펴보자. 1889년 동농이 주일공사로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 나눴던 시와 20년 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시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20년 전에는 평화를 맹세하더니 지금은 병탄을 획책하는가”라고 힐난하는 내용이다. 김가진이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면 바로 다음해 일본잡지 ‘신공론’에 일본의 병탄야욕을 꾸짖는 글을 기고할 리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의병장 이남규 부자 순국 관련설’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 등 사료를 통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밝혀낸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동농은 1906년 4월 15일(이하 음력) 충남관찰사로 임명됐다가 1907년 4월 6일 해임된다. 그런데 이남규 의병장 부자 순국일은 1907년 8월 19일로 무려 4개월 이상 차이가 난다. 오히려 김가진은 재임시절 민종식 의병장을 숨겨준 혐의로 체포(1906년 10월 2일)된 이남규 부자를 풀어줬다. 고종 시절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법부(法府)로 각 지방재판소에서 보내온 공문서를 제책한 자료인 ‘사법품보(을)’에 따르면 충남재판관이었던 동농이 1906년 12월 3일 ‘이남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라고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남작 작위와 은사금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작위는 일제가 일방적으로 준 것이고, 은사금은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은사금과 관련해 저자는 이것이 오히려 동농이 친일인사가 아님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동농의 자택이었던 종로 청운동 일대 1만평 부지의 백운장은 헐값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다. 집사였던 방치선(方致善)이 동농의 도장을 도용해 전당을 잡힌 것이다. 결국 동농은 셋방살이를 하며 빈한한 생활을 해왔다. 그가 친일인사였다면, 그리고 은사금을 실제 받았더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이밖에도 저자는 일본 자치군 참모부가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동농을 요주의인물로 보고한 기밀문서 등 새로 발굴된 사료도 공개한다. 저자는 대동단이 지하비밀조직이었다는 점을 주목하며 “대동단 활동에 대한 연구가 일제의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에 근거하는 게 많은 데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강령과 복벽주의 공존 불가능 한편 동농이 ‘복벽주의자’라는 논리는 △그가 고종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는 점 △3.1운동 후 의친왕 이 강의 망명을 추진한 점 등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동농은 ‘친(親)고종 개화파’일 뿐 복벽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대동단 강령이다. 1919년 9월 나온 2차 강령의 키워드는 ‘독립’ ‘평화’ ‘사회주의’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와 복벽주의는 같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의친왕 망명 시도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과의 연계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고종이 합법적으로 나라를 이양했다’는 일본의 침략논리를 깨려는 의도일 뿐 복벽주의와 거리가 멀다. 동농은 191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한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유일한 고문으로 추대된다. 동농은 대동단 조직을 통해 국내에서 2차 만세운동을 추진하고, 며느리 정정화를 국내에 들여보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왕성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 1922년 7월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동농 서거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그를 정부장(政府葬)으로 모신다. 요즘 식으로 하면 국장(國葬)으로 예우한 셈이다. 저자 장명국 선생은 “이런 삶을 살아온 그에게 ‘친일’ ‘복벽주의’ 낙인을 찍어 서훈을 보류해온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라고 비판한다. 지금 동농의 유해는 상하이 송경령능원에, 아들 김의한은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며느리 정정화는 대전 현충원에 묻혀있다. 대한민국 100년 현대사의 비극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들 가족의 이산은 언제 끝날까. 서거 100주년인 올해 그의 유해를 모셔 와야 하는 이유다. ■상대성 이론을 다시 생각할 때 1919년 해외에서는 인류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킨 4차원의 사고가 등장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1919년 5월29일 아프리카 프린시페섬에서 아서 에딩턴의 탐험대는 태양 근처의 별에서 나온 빛이 휘는 것으로 관축,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입증시켜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 인식이 뉴턴의 사고에서 아인슈타인 사고로 변화했다. 상대성 이론이 증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절대의 관점에서 봤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2차원의 이분법적 사고, 아니면 3차원의 변증법적 사고가 전부였다. 아이슈타인은 자기 이론이 절대 이론이라고 하지 않고, 상대성이론이라 했다.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사고다. 지금 이 시기 이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저자는 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미국에서 외교노선 강화, 모두 필요한 항일운동이다. 이중 국내 지하운동 항일 단체인 대동단이 있다. 대동단이 얼마나 점조직에 의한 결사 단체인지 지금도 그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저자는 본인을 포함 후배 사람들이 게으른 탓이라고 했다. 후학들은 이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고도 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한 상대성 이론처럼, 대동단 총재 김가진을 하나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 것이다. 단편적인 몇 가지 프레임으로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2022-02-21 17:04:42[파이낸셜뉴스] 중국 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 전문이 16일 공개됐다. 이번 역사결의에는 1981년 덩샤오핑이 주도한 2차 결의 때 포함된 '개인숭배 금지' '종신집권 폐지' 등의 문구가 빠져 일각에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염두에 두고 40년 만에 삭제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 공산당 100년 역사 중 시주석 집권 9년...전체 55% 차지 중국 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 전문은 공산당 기관지인 런민르바오(인민일보) 등 관영매체들에 일제히 보도 되었다. 이번 역사결의 전문은 모두 3만6000여자 분량인데 이중 시 주석 집권 이후 9년간의 역사를 다루는 데만 1만9000자 이상을 할애했다. 시 주석 집권기 관련 내용에선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결의는 "(개혁개방 이후) 배금주의, 향락주의, 극단적인 개인주의, 역사 허무주의 등 잘못된 사상 경향이 불시에 등장했고 인터넷 여론이 매우 혼란스럽다"면서 시 정권이 "일련의 중대한 정책·사업을 추진해 오랫동안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하지 못한 난제들을 풀고 당과 국가 사업에서 역사적 성취와 역사적 변혁을 이뤘다"고 치켜세웠다. 특히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결의는 "2020년 갑작스러운 코로나19에 직면하여 당 중앙위원회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침착하게 대응했으며 '인민 지상', '생명 지상'을 견지했다"고 평가했다. ■ 첫 등장한 '톈안먼 사태'..."정치풍파" "동란" 이 결의에는 89년 일어난 '톈안먼 사태'(6·4사태)에 대한 역사결의 상 기술이 처음 담겼다. 결의는 "당과 정부는 인민을 의지해 동란(폭동, 반란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해서 사회주의 국가 정권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며 반부패와 개혁 등을 요구한 대학생 중심의 시민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며 많은 사상자를 낸 톈안먼 사태를 "엄중한 정치 풍파" "동란" 등으로 규정했다. ■ "종신집권 폐지" "개인숭배 금지" 문구 사라져...시주석 장기집권 길 열리나 40년 전 2차 역사결의 때 덩샤오핑은 "지도자의 종신제를 폐지하고 그 어떤 형태의 개인숭배도 금지한다"고 명문화했다. 하지만 이번 역사결의에서는 이 문구가 삭제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사후 1인 통치체제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7∼9인)이 권력을 나눠 갖는 형태를 택했다. 하지만 시 주석 집권 후 시 주석에게 권력 집중화가 이뤄지면서 권력분점 원칙이 무너졌다. 시 주석은 2018년 급기야 '국가주석직 3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해 종신집권의 기틀을 다졌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수습기자
2021-11-18 10:28:32[파이낸셜뉴스]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 일기 中 1506년(연산 12년),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왕)의 광기어린 폭정(暴政)에 대신들 및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수한 피의 숙청을 불러온 두 번의 사화(士禍)와 사치 및 향락으로 세종, 성종 때 일군 조선의 정치·사회적 발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훈구파(勳舊派)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反正)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 '반정'은 그릇된 상태에 있던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중종·中宗)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왕이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유교(儒敎)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에 의해 왕이 쫓겨나가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왕이 즉위(卽位)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와 폭정이 도를 넘어선 만큼 반정의 명분은 충족됐고,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그렇게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단행한 반정 이후 일련의 개혁 정치는 실패했고, 조선은 훈구권신들의 득세라는 구태(舊態)로 회귀하게 된다. 조선사 최초의 '탄핵'(彈劾)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중종반정' 전말을 되돌아봤다. ■폐비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연산군의 친모는 '폐비(廢妃) 윤씨'였다. 폐비윤씨는 성종(成宗, 제9대 왕)의 첫 후궁 출신이었는데, 본래 후궁은 왕비가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그러나 폐비윤씨는 검소함과 겸손한 처신 등을 크게 인정받아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성종과 폐비윤씨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비윤씨는 이전과는 다른 성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함께 하는 것을 질투했고, 이러한 감정을 왕과 신하들 앞에서 여과 없이 표출했다. 당시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이 말은 낮에는 요순이요, 밤에는 걸주라는 뜻이다. 성종이 낮에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군인 요임금, 순임금과 같이 국정을 잘 돌봤지만, 밤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인 하나라 최후의 왕 '걸'과 은나라 최후의 왕 '주'처럼 여색(女色)을 밝혔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에 대한 폐비윤씨의 질투와 시기심은 높아졌는데, 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이와 관련해 "윤씨는 짐(성종)을 온화한 얼굴로 대한 적이 없다. 내 발자취를 없애겠다고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급기야 폐비윤씨에게 불행한 결말을 가져다주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성종과 폐비윤씨가 성종의 여색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폐비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것이다. 왕의 얼굴인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는 '중죄'(重罪)에 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성종을 직접 불러 왕비를 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다른 대신들의 경우 처음엔 추후 세자(世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친모라는 이유로 '폐비'를 반대했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의지와 성종의 결단으로 마지못해 찬성했다. 결국 폐비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났고, 폐서인(廢庶人)으로 강등(降等)된 후 사가에 머물게 됐다. 1482년, 연산군이 7살이 되면서 한 때 세자 책봉 논의와 더불어 폐비윤씨 복권(復權) 주장도 제기됐지만, 인수대비의 강한 반대와 소용 정씨 및 엄씨의 모함으로 복권은 무산됐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전국에 기근이 들자 대신들은 폐비윤씨가 굶어 죽을 것 등을 우려해 성종에게 별궁 안치를 청했다. 이에 따라 옛 정이 다소 남아있던 성종은 은밀히 내관이었던 안중경을 보내 폐비윤씨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당시 폐비윤씨는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전에 인수대비에게 밀명(密命)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윤씨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여기에 폐비윤씨의 기행(奇行)들을 낱낱이 기록한 정희왕후의 언문서한까지 더해지면서, 분개한 성종은 폐비윤씨에게 '사약'(賜藥)이라는 극형을 내리게 된다. 사사(賜死)를 당한 후 동대문 밖에 묻혔던 폐비윤씨는 처음엔 묘비도 없었다. 그로부터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죽기 전 향후 100년 간 폐비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연산군은 '폐비'의 자식이었던 만큼, 당초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종의 의지와 장자(長子)라는 정통성이 부각되면서, 1494년 연산군은 성종의 뒤를 이어 1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성종의 정실 소생이었던 진성대군(추후 중종)은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를 즈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밀려오는 먹구름, 사화(士禍)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연산군 때에는 그동안의 농업진흥 정책 등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됐고, 수리시설 및 시비법 개선에 따른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돼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형성됐다. 또한 중국과의 사무역이 증가했고, 국내 은광업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성종 때의 태평성대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성종이 중용한 사림(士林) 세력들이 성하면서 국가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림은 성리학(性理學)적 질서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가운데 재위 약 3년 째부터 조금씩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 시기를 전후해 폐비윤씨의 사건을 처음으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인해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신주와 사당을 세우고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된 대간(臺諫)들은 성종의 유언 등을 이유로 대놓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굴하지 않고 성종의 3년상(喪)이 끝난 직후 폐비윤씨의 묘를 개장 및 격상하는 작업을 강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과 사림 세력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훈구파가 나서서 이 갈등에 불을 질렀다. 훈구파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제7대 왕)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세력을 말한다. 훈구파의 권세는 이후 성종 때에 사림 세력이 득세(得勢)하면서 점차 축소됐다. 사림 세력은 스승 김종직의 주장을 기반으로 훈구파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격하(格下)했고, 단종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연산군은 사림 세력의 폐비윤씨에 대한 태도와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 격하 움직임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고, 적절한 시기에 사림 세력을 내칠 것을 모색했다. 이런 가운데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이었던 유자광과 이극돈은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초(史草)에서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해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조의제문은 1457년에 문신·학자였던 김종직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하며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문서였다. 이를 통해 확실한 명분을 확보한 연산군은 눈엣가시였던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肅淸)하기 시작했는데, 역사는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첫 사화였던 무오사화는 매우 잔인하게 진행됐다. 심지어 김종직은 이미 죽었지만 묘가 파헤쳐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을 거의 몰아낸 연산군은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자신감이 오른 연산군은 훈구파와도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 등에 사용하기 위해 훈구파 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상당한 반발을 불렀다. 이런 가운데 임사홍에게 폐비윤씨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접수한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폐비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등 훈구파 재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이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그 숙청의 규모 면에서 무오사화를 능가했는데, 비단 훈구파 뿐만이 아닌 나머지 사림 세력도 모조리 숙청됐고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緣坐)되기에 이르렀다. ■광기의 심화 매우 폭력적인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연산군의 견제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했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광기(狂氣)를 표출한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고, 매일 연회를 열어 주색(酒色)을 탐했다. 특히, 궁궐 안으로 수많은 기생들을 들여왔는데, 이들을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 등으로 나눠 불렀다. 여기서 왕과 잠자리를 가진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했다. 대신들에게는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부여한 후 서울과 지방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색출해 각 원(院)에 나눠서 두게 했다. 아울러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연산군의 향락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악화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됐다. 연산군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실(宗室) 여인이나 사대부의 부인들도 연산군은 갖은 수를 써가며 취했다. 특히 성종의 친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劫奪)하기도 했는데, 이후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박씨 겁탈 사건은 추후 중종반정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으로 작용했다. 또한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온갖 고문을 가해 죽였다. 당시 연산군이 행했던 형벌을 보면 '포락'(凉烙, 단근질 하기), '착흉'(嫂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있었다. 실제 연산군 면전에서 대놓고 간언(諫言)했던 환관 김처선은 이와 같은 형벌을 당한 후 숨졌다. 성종의 친모이자 조정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인수대비도 연산군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가 깊게 관여한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직접 인수대비의 처소에 들이닥쳐 그를 머리로 들이받았고, 인수대비가 보호하고 있던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궐 뜰로 끌고 나와 때려 죽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연산군이 인수대비 등에게 가했던 광기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황으로 봤을 때 당시 현장에 사관(史官)이 부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전에 인수대비에게 적지 않은 효심을 보여줬던 연산군이 갑작스레 돌변한 것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산군의 광기 및 폭정이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행해졌다는 것은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종반정 이 즈음 궁궐 안팎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반란을 모색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가장 큰 반감을 갖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겁탈해 자결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친동생이었고, 과거 성종 때에는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에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있었다. 박원종은 친누나의 원수를 갚고 연산군의 폭정을 단죄할 것을 결심한 후 훈구파 계열인 재상 성희안, 유순정 등과 손잡고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이들은 마침내 거사일을 확정했고, 차기 왕으로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 거사의 명분은 '반정', 그릇된 상태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의 폭정 및 광기를 감안할 때 거사의 명분은 나름 갖춰진 셈이었다. 박원종 등은 우선 삼정승에게 은밀히 거사 계획을 흘렸는데,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찬성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좌의정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참는 것이 좋겠다"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박원종 등은 계획이 누설될 것을 염려해 거사를 앞당겼고, 1506년 9월 2일 밤에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전수원부사 장정 등과 일단의 무사들을 훈련원에 소집한 후 이들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반정군이 진격하는 동안 백성들이 호응했고, 궁궐 안팎의 저항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정군은 궁궐로 무난하게 진입한 후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임사홍, 김효선 등과 반정에 반대했던 좌의정 신수근, 신수영 형제를 척살했다. 이후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반정군은 자순대비를 찾아가 반정 소식을 알렸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차기 왕으로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자순대비는 처음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계속된 간청에 결국 이를 허락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한편,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하며 곧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주게 하였다"라면서 "(연산군이)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반정이 성공한 당일 진성대군은 19세의 나이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종으로 즉위했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간 후 1506년 11월에 병사했다. 연산군은 광해군(光海君, 제15대 왕)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몇 안 되는 폐주(廢主)였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묘호 및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개혁의 실패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 등 반정 세력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이 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공신 세력에게 휘둘리기 일쑤였다. 물론 공신 세력은 연산군 때의 여러 잘못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부패와 전횡(專橫)도 일삼아 반정의 명분을 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종은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갖춘 개혁 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방편으로서 사림파의 명맥을 잇는 인물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했다. 중종 개혁 정치의 요체는 유교적 왕도정치 구현이었는데,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론이 이에 부합한다고 봤던 것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은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확충하기 위해 대간의 위상을 강화했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해 백성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려 했다. 또한 과거 제도를 대신해 천거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도입, 인재 등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국가적인 도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고, 대간을 앞세워 정국공신 중 공이 없으면서도 공신의 지위를 얻은 76명에 대한 위훈(偉勳)을 삭제할 것을 끈질기게 주장한 끝에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 같은 조광조의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은 보수적인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연산군 이전부터 나타난 훈구파와 사림 세력들 간의 갈등이 다시금 재연되는 모습이었다. 아울러 더 큰 문제는 중종의 우유부단한 성품에 있었다. 당초 개혁 정치를 목표로 했던 중종에게서 서서히 이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졌고, 되레 중종은 조광조 등의 개혁 정책들 및 군주의 자질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에 부담과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에게서 중종의 신임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훈구파는 조광조 등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후원에서 '주초위왕'이라는 글씨의 형태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됐는데, 여기서 '주초'란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훈구파였던 남곤이 사전에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공작(工作)한 일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종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된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는 물론 중종의 개혁 정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었던 중종이 스스로 이 같은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 이후 조정에는 다시 훈구권신들이 득세하게 됐고, 중종 말기부터 인종, 명종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권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이어져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7-24 03:02:38서유럽의 네덜란드는 '풍차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의 조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국토의 약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네덜란드말로 '낮은(Neder) 땅(Land)'이라는 뜻의 국호도 여기서 유래했다. 지난 14~15일 '100년 만의 폭우'가 서유럽을 강타했다. 평소 한 달간 내릴 비가 하루 사이 라인강 유역의 독일과 '베네룩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3국'에 쏟아졌다. 그러나 수마가 할퀴고 간 나라 간에도 희비는 엇갈렸다. 독일·벨기에에서는 2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160여명이 죽고, 1000여명이 실종된 독일은 초상집 분위기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선 20일 현재까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다. 19일 미국 CNN은 네덜란드의 치수(治水) 대응이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 대비와 관련해 전 세계에 청사진을 제시한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낮은 땅의 기적'이 거저 일어난 게 아니었다. 네덜란드 인구의 60%는 늘 홍수 위험에 노출돼 있는 만큼 유비무환의 자세도 절실했다. 특히 1953년 대홍수로 1835명이 숨지는 참사를 겪은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의 치수역량을 확보했다. 1997년까지 약 17조8000억원을 투입해 대대적으로 제방과 댐을 건설하는 국책사업인 '델타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반면 이번에 엄청난 인명·재산 손실을 입은 독일에선 정치적 갈등이 번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홍수 및 가뭄조절용으로 만든 4대강의 보를 철거하자는 일부 환경지상주의자들과 존속을 바라는 유역 농민들이 몇 년째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빚어진 희비 쌍곡선의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후자의 손을 들어줄 듯싶다."이런 홍수가 2050년쯤 닥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더 빨리 왔다"는 네덜란드 정부 당국자의 안도 어린 언급이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2021-07-21 18: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