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보국(輸送報國).’
고(故) 정석(靜石)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집무실에 걸려있던 휘호다. ‘수송을 통해 나라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일관된 신념을 담은 이 휘호는 오직 ‘수송 외길’만을 걸어온 한진그룹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송기업인 한진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등 모든 길에서 한국경제의 동맥을 책임지고 있다.
한진그룹의 성장사는 우리나라 근대사 및 경제개발과정과 그 궤를 함께 한다. 특히 잿더미 위에서 신용을 밑천으로 대그룹 총수로 재기한 작은 거인 정석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수송업계의 대부인 정석은 끈질긴 집념과 노력, 그리고 일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평소에 쌓은 신용을 바탕으로 오늘의 한진을 일궈냈다.
조중훈 회장은 “미래를 내다보며 타이밍을 맞추는 센스와 결단이 기업경영의 성공요인”이라며 50여년의 경영노하우를 후배경영인들에게 남겨놓고 떠났다.
‘낚싯대 10대를 걸쳐 놓는다고 해도 고기가 다 물리는 것은 아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하늘을 보려고 하면 물이 쏟아지고 만다’는 ‘대분망천(戴盆望天)’이란 경영철학을 신앙처럼 믿고 한길만을 걸어온 정석과 그런 부친의 경영철학을 계승한 조양호 회장이 이끄는 한진그룹을 조명해 본다.
◇정석, 수송보국 외길인생=정석은 1920년 음력 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방정환, 안창남, 나운영씨 등이 졸업한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보를 중퇴한 뒤, 한국해양대학의 전신인 ‘진해해원양성소’를 수료했다. 조회장은 잠시 선원생활을 한후 약관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낮에는 조선 기술을 익히며 돈을 벌고, 밤에는 독학을 하는 주경야독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배를 타고 중국과 동남아 일대를 돌아보기도 했다. 이때 국제경영감각을 익히는 계기가 됐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그 해 11월1일 정석은 해방전 ‘보링공장’을 정리할 때 받은 돈과 저축해둔 것을 합쳐 구입한 트럭 한대를 갖고 인천에서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스물다섯살의 한창 나이에 반백년이 넘는 수송외길 인생에 뛰어든 것이다.
정석이 직접 지은 상호,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을 의미한다. 우리 한국의 진보를 위해서 한진상사가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두글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정석이 인천에 터전을 잡은 것도 오늘날 한진그룹이 왜 수송외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인천은 중국 상하이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 항구이며, 공업지구였던 것이다. 물자가 아무리 많아도 수송을 통해 필요한 곳으로 이동시키지 못하면, ‘자루속의 구슬 서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물류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다.
◇‘트럭 한대’로 재계 6위의 대그룹 일궈=6·25전쟁 후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 정석은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란 때 몰고 갔던 트럭 한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해방과 함께 세웠던 한진상사가 6·25전쟁 이전 트럭 30대, 화물운반선 10여척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을 일구어냈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 것이다.
트럭 1대로 재기에 나선 정석은 그동안의 경험과 조금씩 모아진 자금력을 바탕으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특히 66년부터 시작한 월남(越南)사업은 외화획득과 함께 수송그룹으로서의 기틀을 닦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진은 월남전 당시 미군의 물자수송을 맡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66년에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킨 이래 71년 전쟁종료시까지 5년간 한진그룹이 획득한 외화는 1억2000만달러였다. 64년 7월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가 4700만달러인 것을 비교한다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를 알 수 있다.
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세웠다.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에 5억7000만원을 주고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68년 2월에 한국공항을 설립하고, 3월에는 당시 국내 최대규모인 한진빌딩(현 해운센터빌딩 본관)을 착공했다. 그해 8월에는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 건설부문)을 세우고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69년에는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진출했다.
특히 대한항공공사, 대한선주, 대한준설공사, 대한조선공사 등 손댈 수 없을 만큼 부실화된 국영기업체들을 자의반 타의반 인수해 열정을 쏟아부어 되살려냈다. 이 결과 오늘날 한진그룹은 23개 계열사에 재계서열 6위의 한국대표 수송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업은 예술’이라 믿은 국제수송업계의 ‘큰 별’=조중훈 회장은 ‘사업은 예술(藝術)’이라고 믿었다. 예술작품은 조화와 균형, 개성과 창의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나타낸다.
정석은 기업도 국민경제와의 조화를 이루며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며, 창의와 열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이를 이룰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예술가에게 정년이 따로 없듯이 기업인에게도 정년이 따로 정해질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마음으로 기업을 가꾸고 발전시켜 국가와 국민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는 한진그룹을 만드는 일. 명실상부 세계적 종합물류 그룹으로서 고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나아가 기업으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일에 마지막까지 전력을 기울여 온 것이다. 그것이 기업 예술가로서 평생을 일관해오며 한국 수송업계의 ‘대부’이자 ‘거인’이며, ‘국제수송업계의 큰별’로 역할을 해온 그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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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1046@fnnews.com 차석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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