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코 이케무라 '토끼 관음상'. 헤레디움 제공
【대전=유선준 기자】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자연의 피조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서로 소통하고 연결돼 있다고 믿습니다."(레이코 이케무라)
이질적인 소재의 융합으로 주목받는 일본 출신 현대미술작가 레이코 이케무라(73·사진)가 국내 첫 미술관 전시 '라이트 온 더 호라이즌(Light on the Horizon)'을 통해 화합과 소통을 이끈다. 전시는 오는 8월 4일까지 대전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HEREDIUM)에서 열린다.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고 위로하고 싶다고 밝힌 그는 대표작인 '토끼 관음상' 등 최신작 총 31점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 '다양한 감정의 이해와 융합', '현실세계와 정신세계의 연결' 등 메시지를 전달한다. 서로 다른 면을 가진 개념을 연결하는 작업을 추구하는 만큼 그의 작품 키워드는 '양면성'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레이코 이케무라는 스페인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스위스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해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화교류의 융합과도 같은 이케무라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케무라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등 이질적인 분야를 통합해 낯선 상상의 공간을 탄생시키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그는 "비현실적이고 무한한 공간감을 가진 배경과 인간·동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형상 등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상 너머 존재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며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레이코 이케무라. 헤레디움 제공
이케무라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는 매력은 전시 장소인 헤레디움의 특수성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헤레디움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지어져 옛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난 2022년 지금과 같은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케무라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 헤레디움에서 여는 전시라는 점에서 이색적이지만 그의 융합과 포용적 사상은 전시 장소 선정에 있어 수긍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케무라는 "헤레디움의 역사를 전해 들어 알고 있다"면서도 "과거의 뼈아픈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 세대가 이것을 잘 다듬어 문화로 미래를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는 점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전시 장소 선정에 대한 그의 말처럼 대부분의 작품들도 다양한 아픔을 위로하고 있다. 대표작인 '토끼 관음상'은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원자력 유출로 인해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토끼에 관한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하게 됐다.
보편적인 애도의 상징으로 토끼의 귀와 우는 사람의 얼굴을 결합시킨 이 작품은 창조와 파괴의 순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이야기한다. 특히, 눈물을 흘리며 합장한 모습은 상처 받은 세계에 바치는 그의 '애도'이자, 풍성한 치마는 아픈 세상을 품는 하나의 피난처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발렌시아, 쿤스트 뮤지엄 바젤 등 세계적인 공공장소와 기관에 변형 버전이 등장해 주목받기도 했다.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헤레디움 제공
또 다른 대표작인 '수평선' 연작은 일본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이케무라의 예술적 원천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어느날 도카이선 열차에 앉아 바라본 풍경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 강렬했고, 그날의 경험은 이케무라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다가왔다고 전한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따뜻하게 감싸 포근한 휴식처 같은 인상을 준다.
레이코 이케무라 '소녀'. 헤레디움 제공
'소녀' 시리즈도 관람객들의 감정을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케무라는 전 세계 대중문화에서 소녀를 온순하고 무력하지만 성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자 했다. 작품 속 소녀는 일어서 있거나 날아 내려오기도 하는데, 이처럼 다양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기대와 불안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레이코 이케무라 '마운틴 레이크'. 헤레디움 제공
이밖에 '마운틴 레이크'는 비현실적이고 무한한 공간감을 가진 배경과 사람인 듯 동물인 듯 분명치 않은 형상을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 내면의 세계로 표현한다.
이케무라는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며 "사람들의 삶에 희망이 깃들고, 꿈을 꾸는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케무라는 1990년부터 2016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UdK)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 파리 퐁피두센터, 스위스 바젤 미술관, 일본 도쿄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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