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아침 일찍 지인이 전화를 걸어 왔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서울 노원구의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며 "기도하는 분이니 잘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우 의장이 당선자 총회에서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뽑힌 16일 저녁 방송을 보고 전화한 것이었다. '명심'이 '추심'이라는 관측을 깨고 5선의 우 의장이 6선의 추미애 당선자를 꺾은 것은 이변이었다. 우 의장의 승리비결은 상대적 안정감, 이재명 대표에 대한 반발, 폭넓은 당내 인맥 등을 꼽을 수 있다. 22대 국회는 우 의장을 선출한 6월 5일 첫 본회의부터 '반쪽 국회'로 출발했다. 제헌국회 이후 여당이 불참하고 야당 단독으로 국회가 개원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불명예였다. 다음 날인 6월 6일 한 신문의 1면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의장단 선출 전 본회의장 맨 뒤에 앉아 기도하는 우 의장의 모습이었다. 우 의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여당은 중립적이 아니고 민주당 편에서 국회를 일방적으로 운영했다고 비판한다. 쟁점법안 강행 처리를 위한 본회의를 결국 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때로는 야권에서 "매우 당황스럽고 경악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9월 야당 주도로 법사위를 통과한 이른바 쌍특검법, 지역화폐법 등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 의장은 방송관련법, 특검법, 예산안 등에 대해 그 나름의 중재 노력을 기울였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첨예한 진영대립 때문이다.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 13일 발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우 의장에 대한 신뢰도는 56%였다. 이재명 41%, 한덕수 21%, 한동훈 15%. 국회 '월담'으로 신속하게 계엄해제요구안을 통과시킨 우 의장의 활약(?)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안하다. 야권은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 5명 이상의 국무위원 탄핵을 위협하고 있다. 비상계엄 관여 운운하지만 한 대행의 거부권 행사 때문이다. 국가신인도, 국정파탄 우려 등은 나 몰라라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막장 드라마다. 상대가 쓰러져 죽어야 끝날 것인가. 오케이 목장의 결투처럼 정치판은 증오와 살기가 넘친다. 한쪽만 옹호하고 한쪽만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옳고 그름이 무분별해진 세상은 그악스러운 패거리들이 정의의 탈을 쓰고 설쳐댄다. 추락하는 한국 정치에는 날개가 없다. 망해야 추락을 멈출 것 같다. 한국의 정치 수준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3~4류라고 답한 사람이 63%였다. 3년 전 조사다. 이마저도 이젠 고평가다. 3류 정치란 말도 아깝다. 한국 정치인들은 합의와 삶의 개선보다 라이벌을 쓰러뜨리는 데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다는 영국 분석기관의 진단은 정확하다. 미국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개딸은 수출되어 글로벌화됐다. 한국에 태극기 부대가 있다면 미국엔 성조기 부대가 있다. 에이미 추아가 정치적 부족주의를 말한 때가 2018년이다. 동일한 인종·지역·종교·분파끼리 뭉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자기들은 다 옳다는 아집에 빠지고, 자기 패가 아니면 무조건 배척한다. 혐오정치는 정치혐오를 낳는다. 국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외면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 떨어진다. 국민의 무관심은 정치의 발호를 부추겨 더 타락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그러는 사이 후퇴한다. 프로야구가 1000만 관중을 동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썩은 정치가 낳은 반작용이다. 정치 못잖게 부패했다는 체육계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깨끗하다. 실력으로 승부하고 실력에 따라 연봉을 받는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장한다. 이유 없는 비방과 흑색선전 따위도 없다. 오직 실력이다. 프로야구 열기의 동력은 로봇 심판 ABS(Automated Ball-strike System·자동투구판정시스템)다. 거짓과 조작과 실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인간 심판의 정확도는 91.3%, 로봇 심판은 99.9%. 로봇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공정하고 냉철하다. 정치에 실망하고 지친 사람들은 야구장으로 간다. 한국 좌파의 친일 몰이는 워키즘(wokisme
윤석열 정부가 지난 10일 임기 반환점을 돌았다. 하지만 정국은 지난 대선의 연장전 분위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이 사법 리스크가 현실화하자 윤석열 대통령 퇴진 공세를 일상화하면서다. 그는 얼마 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 재판에서 1년 징역에 2년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이대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차기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25일 '위증교사' 혐의 재판 1심에선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경기지사 때 경기도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윤 대통령도 위기인 건 마찬가지다. 지지율은 한때 10%대로 떨어졌다. 디올 백 스캔들에다 최근 명태균 공천개입 시비에 연루되기까지 '김건희 여사 리스크'가 갈수록 커지면서다. 그는 지난 7일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에서 "축구선수가 전광판 보고 뛰면 되나"라며 이에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연장선에서 "돌 맞고 가겠다"며 의료·연금 등 4대 개혁으로 난국을 돌파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다. 거야가 입법권을 틀어쥔 상황이다. 여론의 지지 없이 기득권층의 양보가 필수인 개혁 추진동력을 어디서 얻겠나.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구인난을 겪고 있다는 보도를 보라. 관료조직의 복지부동과 '레임덕' 징후가 어른댄다. 20%대에서 등락하는 지지율이라면 개혁은커녕 내각제라면 의회 해산 후 재신임을 물어야 할 판이다. 올 들어 일본 자민당 정권이 그랬듯이. 윤 대통령은 회견에서 "침소봉대는 기본이고 없는 것까지 만들어 제 처를 악마화시킨 것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부인을 변호해 '상남자 이미지'를 얻는 데 연연할 계제인가. 야권의 과도한 정치공세도 문제지만, 김 여사 스스로 부적절하게 처신한 측면이 더 커 보인다. 친북 목사의 몰카나 정치 브로커 명태균의 녹취록에서 보듯이. 그렇다면 윤 대통령에겐 "카이사르의 아내는 부정하다는 의심조차 받아선 안 된다"는 결기가 절실하다. 특별감찰관 임명은 뒷북치는 모양새라, 아예 김 여사의 대외활동을 전면
폐허의 땅에도 수출 무역선의 뱃고동이 울렸다. 1948년 2월 화신무역이 빌린 낡은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이 부산항에서 출발해 홍콩 빅토리아 부두로 향했다. 이 행로가 한국 수출의 첫걸음이다. 당시 앵도환에 실린 물품은 한천과 건어물이 전부였다. 상인들은 각지에서 소달구지로 옮겨와 다시 큼지막한 그물망에 담은 뒤 배에 실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무역협회, 무역연감). 수출다운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다. '잘 살아보세'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고 박정희 정부가 매달 수출진흥대책회의를 열던 그 시절이다. 당시 주력 수출품은 다름 아닌 가발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엿장수에게 팔거나 직접 가발공장에 팔았다. 다시 그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탈색해 새로운 모발로 엮은 이는 또 다른 젊은 여자들이다. 스무 살 남짓 여공들이 한 줌씩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고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 1964년 1억달러 수출의 숨은 공신이 그들이다. 가발 수출로 번 돈이 외화의 20%였다. 여공의 아버지들은 중동 사막 바람과 싸우며 오일달러를 보냈다. 거기서 길을 낼 때 시작된 수출이 시멘트다. 1억달러 수출은 10여년 만인 1977년 100배로 불어난다. 바야흐로 '팔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팔겠다'는 종합무역상사가 수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부터 미사일까지, 바늘부터 선박까지 가리지 않았던 이들이 상사맨이다. 국내 첫 종합상사 삼성물산이 팔았던 최초 제품이 이쑤시개와 비누였다. 상사 공개채용 공고엔 정장을 차려입고 007가방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에 서 있는 사진이 들어갔다. 세상에 못할 건 없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상사맨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세계의 오지, 때로는 사지(死地)까지 들어가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내는 게 일이었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뚫고 군부를 만나 무기를 팔았고, 리비아 사막에서 난로를 판 일화 등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널려 있다. 탄탄한 정보력, 기발한 상상력으로 수출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다. 한 도시에 갑자기 원인 모를 '백색 실명'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정부가 감염자들을 격리한 정신병원에선 식량 부족과 폭력 등 비인간적 상황이 벌어진다. 격리소 밖 도시 역시 실명 전염병으로 아비규환으로 전락한다. 유일하게 시력을 가진 의사의 아내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악전고투하던 중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시력이 회복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사라마구는 실명 전염병이 종식된 4년 후를 다룬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후속작을 냈다. 한 수도에서 선거가 치러지는데 투표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70% 이상의 유권자가 어느 후보도 선택하지 않는 백지투표를 했다.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한 정부가 재투표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작은 인간의 탐욕과 연대의 중요성을, 후속작은 시민들의 깨어남과 사회적 변화를 담았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이 작품의 핵심 기제인 '실명'은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현대사회에서 '눈먼 자'라는 인간 군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진실과 정보에서 배제된 자 혹은 가짜 뉴스에 현혹된 자가 쉽게 떠오른다. 어쩌면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눈먼 척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출간된 지 약 30년이 지난 지금, 비상계엄 사태로 대혼돈에 빠진 한국 사회가 아른거린다. 사실과 진실이 가짜와 거짓으로 둔갑하고, 서로가 눈먼 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암흑기. 그 뒤에 남는 건 말의 쓰레기 더미뿐이다. 후속작에서 눈뜬 자들이 내린 선택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투표용지에 적힌 선택지를 거부하고 압도적인 백지투표를 했다. 평론가들은 시민들이 4년 전 실명사건 당시 갖게 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일종의 기존 제도와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비상계엄 사태로 날개 없이 추락 중인 한국 사회는 반전을 고대한다. 현상유지나 이전 상태로의 복원은 아닐 것이다
한국 경제가 길고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1%대 저성장 고착. 필연적 전제로 보면 세 가지 연결고리가 맞물린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무서운 산업혁신이 첫 고리다. 값싸게 쏟아내는 중국산 범용제품이 우리 기간산업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철강·조선·석유화학과 같은 설비산업은 중국의 대규모 투자, 과잉생산에 속수무책이다. 전기차·배터리·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도 생산성은 물론 기술력까지 중국이 추월했거나 곧 따라잡을 태세다. 자유무역 붕괴가 두번째 고리다. 미국 트럼프 2기 정부의 초고율 보복관세 전쟁이 중국의 물량공세에 휘발유를 부을 것이다. 한국이 누렸던 자유무역의 혜택과 밸류체인이 무너진다는 의미다. 생산과 투자 위축, 일자리 파괴, 내수침체는 더 깊어진다. 일하고 납세할 생산가능인구는 20년 후 2700만명으로 쪼그라든다. '늙은 국가'(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 이것이 마지막 고리로 완성된다. 우리의 실책이 한둘이 아니지만, 세 가지를 너무 빨리 상실했다. 리더십과 정치, 추진력이다. 미래를 통찰, 개혁을 이끌 리더십은 실종됐다. 정치는 무능하고, 정부는 무기력하다. 노동·교육·의료·연금 4대 개혁을 주문하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료사회는 이미 레임덕, 추진력을 잃었다. 한국 경제는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유동성에 취했다가 역습에 기진맥진해졌다. 최근 몇 년간 저금리에 돈이 넘쳤다.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부의 사다리는 끊어졌다.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졌다. 노동의 가치는 추락했다. '영끌' '빚투'의 광기는 부동산과 코인에서 대박을 꿈꿨다. 넘쳐난 유동성은 인프라와 신산업에 제대로 투입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원자력발전에 대못을 박았다. 투자와 고용, 신산업을 옥죄는 규제는 악순환했다. 일자리가 많은 공장들은 해외로 나갔다. 양질의 일자리는 빠르게 사라졌다. 정부는 빚을 내 재정을 늘렸다. 문 정부 5년간 현금 24조원을 서민들 호주머니에 넣어줬다.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