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 칼럼
비상계엄 1년, 교훈이 필요한 시간"그동안 '유독(有毒)한 정치(toxic politics)'에 참여해 온 것을 사과합니다." 미국 공화당 연방하원의원 마저리 테일러 그린이 지난달 17일(현지시간) CNN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400명 중 한명이지만 그린 의원의 발언은 미국 정가에 커다란 파장을 불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선봉장으로서 반대 진영을 향해 독극물과 다름없는 거친 언행에 앞장서온 여성 의원의 반성이었기 때문이다. 충직한 돌격대장의 변신에 놀란 트럼프 대통령은 테일러(Taylor) 대신 배신자, 반역자(Traitor)라고 부르며 인신공격에 나섰다. "충성심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국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린 의원의 반격이다. "표결의 기록은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보다 오래 남는다." 토머스 매시 공화당 하원의원이 지난달 16일 앱스타인 파일 공개 법안 표결을 앞두고 동료의원들의 찬성을 독려한 발언이다. 미성년자 성착취범으로 수감 중 사망한 제프리 앱스타인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련 의혹이 다시 쟁점이 된 시점에 불거진 움직임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던 집권 공화당 의원들이 깨어난 것이다. 공화당원의 73%가 파일 공개에 찬성하는 유고브 여론조사 결과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에 앞서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필리버스터 폐지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의회 제도는 트럼프 대통령 3년 임기 후에도 존속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이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 승리를 거둔 11월 선거 1주년을 기념해야 할 즈음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공교롭다. 내일이면 이른바 12·3 비상계엄 후 1년이 된다. 우리나라야말로 그동안 유독한 정치가 계속되어 온 느낌이다. 정치판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도 독극물을 퍼뜨리는 정치인들의 말은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줄탄핵과 국정 발목잡기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손성진 칼럼
실패에도 박수를전임 윤석열 정부의 실책 중 하나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었다. 척박한 연구환경에서 그나마 과학자들이 버틸 수 있었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다. 정부 정책에 실망한 과학자들이 한국을 떠나기도 했다. 당시 정부에서 삭감 이유로 꼽은 것이 R&D예산 나눠먹기 풍토였는데,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해서 한국의 R&D투자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이스라엘에 이어 두번째다. 매우 높은 편이다. 각종 지표를 보면 한국의 과학기술력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과학기술 혁신역량은 2022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중 5위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올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7위를 기록했지만, 과학인프라 순위는 2위다. 지난해에는 1위였다. 피인용 상위 1% 논문 점유율은 14위로 6년째 정체돼 있지만, 낮지는 않다. 수치상으로 볼 때 R&D예산 순위에 필적할 만큼 한국 과학은 실질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단 한명도 없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 결정적 성과는 미진하다. R&D예산 나눠먹기에 대한 비판은 선택과 집중의 논리를 적용하면 온당치 않다. 성과 중심으로 집행해야 효율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연구를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면 R&D가 위축된다. 모든 연구와 개발이 성공할 수는 없다. 원래 의도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지원을 중단하거나 줄인다면 선뜻 연구에 나서기가 꺼려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 앞서가는 미국이나 중국의 경우를 보라. 미국에서는 스타트업의 실패가 흔히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의 R&D사업 성공률은 82%이다. 과학 선진국 미국에서도 열에 둘은 실패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업화 성공률은 20%에 그친다. 한국의 R&D 과제 성공률은 95%가 넘고 99%에 이른다고 한다. 도전 성공률이 100%에 가까운 것이 꼭
구본영 칼럼
‘종묘 뷰’, 종로 슬럼화 방치 구실 안돼야며칠 전 조선 왕조의 사당 종묘에 처음 가봤다. 인근 구도심 재정비 사업을 놓고 정부와 서울시가 부딪치고 있어서다. 주변에 고층 건물을 세우면 경관을 해친다는 '종묘 뷰' 논란의 진원지다. 그러나 갈등의 현장은 고즈넉했다. 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나지막한 건물들은 단아했고, 수목도 울창했다. 관람 후 바깥에서 맞닥뜨린 세운상가와 종로통의 남루한 풍광이 눈에 거슬렸을 뿐이다. 세운4구역 재개발 이슈는 20년째 '뜨거운 감자'였다. 그사이 극심한 슬럼화가 진행됐다. 1968년 준공된 세운상가는 2년 전 외벽 일부가 떨어져 상인이 부상을 입었을 정도다. 재개발 여론이 비등한 배경이다. 다만 사업성이 문제였다. 서울시가 이주비 등을 개발자에게 부담시키려고 종묘 부근 재개발 빌딩의 높이를 상향하는 조례를 채택한 배경이다. 하지만 이번에 국가유산청이 유네스코 권고를 빌미로 "세계유산 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제동을 걸면서 갈등이 더 커졌다.'개발이냐, 보전이냐.' 세계 어디서나 숙명처럼 생기는 쟁점이다. 한때 도시계획학도였던 필자의 관점으론 그렇다. 그러니 종묘 인근 재개발을 두고 국가유산청이 반대에, 서울시가 찬성에 각각 방점을 찍는 건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전자의 존립 목적이 문화유산 보호라면, 후자엔 시민의 삶을 돌보는 게 우선인 까닭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관련 논쟁은 조악하게 비친다. 전문적 식견보다 답을 정해 놓은 흑백논리만 도드라져서다. 얼마 전 김민석 국무총리가 허민 국가유산청장 등과 함께 종묘를 찾았다. 인근에 고층 건물을 세우려고 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거친 언사로 직격했다. "종묘에서 보는 눈을 가리고 숨 막히게 하고, 기를 누르게 하는 결과가 걱정된다"는 식으로. 그러자 오 시장도 "세계인이 찾는 종묘 앞에 도시의 흉물(세운상가)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온당한가"라며 격하게 받아쳤다. 김 총리뿐 아니라 전현희·박주민·서영교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군도 논쟁에 가세했다. 내년 지방선거에
최진숙 칼럼
예고된 석유화학 위기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폭소를 터뜨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로테스크했다. 빈 살만이 자국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자로 지목되면서 서방의 비난이 들끓던 시기 둘은 만났다. 지난 2018년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홀로 덩그러니 있던 빈 살만에게 푸틴이 팔을 흔들며 걸어간다. 서슴없이 빈 살만의 손을 잡고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웃었다. 서방의 눈엔 무척이나 기이했을 것이다. 빈 살만에게 세계와 대화의 물꼬를 터준 이가 푸틴이라면 그의 체제를 공고히 해준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다. 시진핑은 푸틴의 요란한 제스처가 연출됐던 G20 회의에 같이 있었지만 내내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교감은 이전부터 있었고, 그때도 있었고, 이후엔 더 강해진다. 둘의 관계가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은 지난 2022년 12월이다. 사우디를 국빈 방문한 시진핑의 전용기는 빈 살만이 보낸 4대의 전투기 편대의 호위를 받으며 착륙했다. 6대의 곡예비행기들이 녹색 연기를 뿜으며 폭격 퍼레이드를 펼쳤다. 웅장한 세리머니에 세계는 둘을 다시 봤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 이들이 체결한 사업 내용이다. 양측의 계약 규모는 500억달러가 넘었다. 그중 대부분이 에너지·석유화학 분야였다. 석유만으론 미래가 없다는 사우디의 절박함은 빈 살만이 실권을 잡기 전부터 있었다. 사우디가 '석유에서 화학으로' 기치를 공식화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사우디 국영 아람코와 사빅이 원유에서 나프타 없이 바로 화학제품을 뽑아내는 기술(CTC) 연구를 그 무렵 시작했고, 기술이 완성된 때가 2020년대 들어서다. 프랑스의 토탈, 미국의 엑손모빌 등 세계 유수 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다. 숱한 정치적 논란에도 빈 살만의 공로는 이 기술을 상업화하고, 석유화학을 사우디 핵심 전략산업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CTC 기술의 파괴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원
조창원 칼럼
마스가, K조선 '판도라 상자' 되나2000년대 후반 한국 조선업이 해외로 진출하는 두 가지 빅 이벤트가 있었다. STX그룹은 중국 다롄에,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비크에 초대형 조선소를 세웠다. 한국 내 조선소 부지가 워낙 작아 아예 해외에 매머드급 도크를 짓자는 전략이었다. 목표는 원대했다. 해외의 저임금 노동력과 대규모 설비를 바탕으로 글로벌 발주를 싹쓸이하겠다는 야심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STX 다롄 조선소는 조 단위의 자금을 쏟아부어 해양플랜트 단지를 완성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해운 불황이 덮쳐 발주가 끊겼다. 현지의 숙련인력 부족과 품질불량 및 중국 당국의 지원조건 불일치 등도 발목을 잡았다. 한진 수비크 조선소 역시 금융위기발 발주 가뭄에다 품질 문제, 노사 분규, 부품조달 차질로 홍역을 치렀다. 해외 직접투자는 결국 모기업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한국 조선업의 대표적인 해외 직접투자 실패 사례로 기록됐다. 이제 한국 조선업은 미국과 협력하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해외 직접투자에 또 나선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 발전의 모멘텀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생길이 훤히 열렸다. 우선, 투자 불확실성이다. 2000년대 STX와 한진의 해외 투자는 현지에 처음부터 새로 시설을 짓는 그린필드 방식이다. 마스가의 경우 미국 필리 조선소를 인수해 추가 투자하는 브라운필드 방식이다. 언뜻 보면 브라운필드 방식이 리스크가 낮아 보이지만 꼭 그렇진 않다. 배를 만드는 시설 구조가 낡았다면 아무리 리모델링해 봤자 건조역량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미국 조선소 투자는 브라운필드와 그린필드가 혼합된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다. 돈이 더 들어갈 것이란 얘기다. 미국이 한국을 조선업 협력의 단독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각서도 없다.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했다고 독점과 같은 수준의 사업권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것이란 낙관은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해양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