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국가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한 국가라는 자부심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12·3 비상계엄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공든 탑이 무너져 내렸다. 하필 미국에서 트럼프 2기가 개막하는 중대한 시기이다. 세계가 트럼프 시대를 대비하느라 분주한 이때 우리만 두 쪽으로 갈려 내전 중이다. 야당의 행태가 아무리 비상식적이어도 비상계엄이 헌법과 법률 위반인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태 수습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대통령도 탄핵되고, 수사대상이 된다는 법치주의 원칙이다. 하물며 탄핵, 수사 절차 등은 헌법과 법률을 철저히 지키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현재까지 진행된 절차에는 의구심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사소한 흠결을 문제 삼아 절차를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다. 동의할 수 없다. 지금은 무너진 법치주의의 공든 탑을 다시 쌓는 과정이다. 깨진 벽돌, 금 간 기와로 튼튼한 구조물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국민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절차적 정의는 그 정도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민주당은 정족수와 탄핵사유 논란에도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총리까지 탄핵을 밀어붙였다. 중앙대 로스쿨 이인호 교수는 한 총리가 직무정지를 수용하지 말고 민주당이 권한쟁의 심판을 하는 게 정도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시급성을 고려하면 헌재의 최우선 과제는 한 총리 측의 탄핵효력정지 가처분 결론을 내리는 것이지만 여태 소식이 없다. 헌재 심판 과정도 논란이다. 국회소추인단은 탄핵소추의결서에서 내란죄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논란이 일자 철회가 아닌 재구성이라고 한다. 형법상 내란죄가 아닌 내란행위만 헌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헌재가 형법상 내란죄를 확정할 수는 없다. 내란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란' 행위라는 용어를 쓸 수도 없다. 내란죄를 적시
끝을 알 수 없는 막장 드라마다. 상대가 쓰러져 죽어야 끝날 것인가. 오케이 목장의 결투처럼 정치판은 증오와 살기가 넘친다. 한쪽만 옹호하고 한쪽만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옳고 그름이 무분별해진 세상은 그악스러운 패거리들이 정의의 탈을 쓰고 설쳐댄다. 추락하는 한국 정치에는 날개가 없다. 망해야 추락을 멈출 것 같다. 한국의 정치 수준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3~4류라고 답한 사람이 63%였다. 3년 전 조사다. 이마저도 이젠 고평가다. 3류 정치란 말도 아깝다. 한국 정치인들은 합의와 삶의 개선보다 라이벌을 쓰러뜨리는 데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다는 영국 분석기관의 진단은 정확하다. 미국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개딸은 수출되어 글로벌화됐다. 한국에 태극기 부대가 있다면 미국엔 성조기 부대가 있다. 에이미 추아가 정치적 부족주의를 말한 때가 2018년이다. 동일한 인종·지역·종교·분파끼리 뭉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자기들은 다 옳다는 아집에 빠지고, 자기 패가 아니면 무조건 배척한다. 혐오정치는 정치혐오를 낳는다. 국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외면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 떨어진다. 국민의 무관심은 정치의 발호를 부추겨 더 타락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그러는 사이 후퇴한다. 프로야구가 1000만 관중을 동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썩은 정치가 낳은 반작용이다. 정치 못잖게 부패했다는 체육계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깨끗하다. 실력으로 승부하고 실력에 따라 연봉을 받는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장한다. 이유 없는 비방과 흑색선전 따위도 없다. 오직 실력이다. 프로야구 열기의 동력은 로봇 심판 ABS(Automated Ball-strike System·자동투구판정시스템)다. 거짓과 조작과 실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인간 심판의 정확도는 91.3%, 로봇 심판은 99.9%. 로봇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공정하고 냉철하다. 정치에 실망하고 지친 사람들은 야구장으로 간다. 한국 좌파의 친일 몰이는 워키즘(wokisme
세모의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탄핵정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불행 중 다행히 한 사람도 다치지 않은 채 국회 결의로 6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다. 다만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쏘아올린 뜬금포가 보수 여당을 초토화시켰다. 본인도 탄핵소추에다 내란 혐의로 수사를 받는 곤경에 처했다. 결과적으로 자해극을 연출한 꼴이다. 그래서 뭔가에 홀린 듯 '덜컥 수'를 둔 까닭이 궁금하다. 혹자는 그의 외고집과 음주벽으로 인한 판단력 문제를 지적한다. 그 연장선에서 김건희 여사를 지키려고 무리수를 뒀다는 추론이다. 디올 백과 명태균 녹취록 등 악재가 쌓인 가운데 최근 김 여사 특검법 공세에 한동훈 대표까지 가세하자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영국 더타임스도 "한국 국민이 계엄령의 이유로 '레이디 맥베스'를 지목한다"는 보도로 맞장구쳤다. 물론 소수이지만 윤 대통령 지지자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윤 대통령은 12일 담화에서 여러 가지 계엄 발동 사유를 적시하면서 그중 하나로 부정선거를 밝히려는 선제적 조치를 꼽았다. 주류 언론들은 이를 극우 유튜버들의 부정선거 음모론을 맹신한 결과로 본다. 하지만 고학력에 스펙이 화려한 인사 중에도 부정선거 신봉자가 적잖다. 국회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더 많은 계엄 병력을 보낸 것도 증거를 확보하려는 목적이라고 볼 정도로. 이게 한낱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불과한지 여부는 앞으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에서 드러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12·3 계엄을 윤 대통령의 편집증적 사고의 산물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찍이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대통령제의 위험성'의 핵심을 이렇게 짚었다. 즉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이 부딪칠 때 이를 해결할 제도적 장치가 없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지적이었다. 그 극단적 증상은 페루 등 남미에서 흔히 관찰된다. 다수 야당은 걸핏하면 탄핵을 일삼고 대통령은 수시로 군을 동원하는 고질
폐허의 땅에도 수출 무역선의 뱃고동이 울렸다. 1948년 2월 화신무역이 빌린 낡은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이 부산항에서 출발해 홍콩 빅토리아 부두로 향했다. 이 행로가 한국 수출의 첫걸음이다. 당시 앵도환에 실린 물품은 한천과 건어물이 전부였다. 상인들은 각지에서 소달구지로 옮겨와 다시 큼지막한 그물망에 담은 뒤 배에 실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무역협회, 무역연감). 수출다운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다. '잘 살아보세'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고 박정희 정부가 매달 수출진흥대책회의를 열던 그 시절이다. 당시 주력 수출품은 다름 아닌 가발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엿장수에게 팔거나 직접 가발공장에 팔았다. 다시 그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탈색해 새로운 모발로 엮은 이는 또 다른 젊은 여자들이다. 스무 살 남짓 여공들이 한 줌씩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고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 1964년 1억달러 수출의 숨은 공신이 그들이다. 가발 수출로 번 돈이 외화의 20%였다. 여공의 아버지들은 중동 사막 바람과 싸우며 오일달러를 보냈다. 거기서 길을 낼 때 시작된 수출이 시멘트다. 1억달러 수출은 10여년 만인 1977년 100배로 불어난다. 바야흐로 '팔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팔겠다'는 종합무역상사가 수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부터 미사일까지, 바늘부터 선박까지 가리지 않았던 이들이 상사맨이다. 국내 첫 종합상사 삼성물산이 팔았던 최초 제품이 이쑤시개와 비누였다. 상사 공개채용 공고엔 정장을 차려입고 007가방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에 서 있는 사진이 들어갔다. 세상에 못할 건 없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상사맨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세계의 오지, 때로는 사지(死地)까지 들어가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내는 게 일이었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뚫고 군부를 만나 무기를 팔았고, 리비아 사막에서 난로를 판 일화 등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널려 있다. 탄탄한 정보력, 기발한 상상력으로 수출의
천문학적인 금액의 신산업 투자를 결정하려면 미래 시장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인공지능(AI)이 촉발할 신산업 진출을 놓고 글로벌 기업들이 고심하는 대목이다. 최근 폐막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5'는 기업들의 이런 의사결정 장애를 상당히 풀어줬다. CES에 등장한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의 확신에 찬 AI 시장 예찬론 때문이다. AI 진화를 넘어 본격적인 휴머노이드 로봇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그의 발언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젠슨 황의 AI 예찬론은 단순히 주관적 자신감이나 현란한 수사학에 머물지 않는다. CES에 앞서 지난해 11월 홍콩 등에서 그가 이미 언급한 AI 성장 가능성과 성공 포인트를 곱씹어 봐야 한다. 젠슨 황은 AI와 로봇공학의 결합으로 성장할 세 가지 로봇 유형으로 자동차 로봇,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을 꼽았다. 많고 많은 분야 중에 왜 이 세 가지를 유망 분야로 꼽았을까. 자동차 로봇은 지난 150년 동안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자동차 산업 덕분에 쉽게 상용화될 수 있다. 드론은 하늘이라는 물리적 제약이 적은 공간을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중화에 적합하다는 그의 설명은 더욱 솔깃하다. 인간형 로봇은 인간의 체형과 동선에 맞게 설계돼온 환경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방식인 '그린 필드'와 '브라운 필드' 간 차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린 필드'는 해외에 투자하려는 기업이 스스로 땅을 매입하고 현지 국가로부터 인허가를 받아 공장을 세우는 직접투자 방식이다. 투자비와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최신의 생산기술 등을 이전하는 이점이 있다. 반면 '브라운 필드'는 현지에 이미 지어진 설비나 빌딩을 사들여 진출하는 식이다. 그린 필드형에 비해 빠르게 생산 및 판매 거점을 확보할 수 있지만, 피인수 기업이 지닌 취약점을 떠안을 리스크도 있다. 젠슨 황은 이러한 전통적 투자전략을 AI와 로봇공학이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주항공 참사 열흘째다. 항공사와 무안공항, 당국의 구조적 문제와 감독 부실이 만들어낸 인재(人災)라 볼 수밖에 없겠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본부터 소홀했다. 항공안전 기초인 새떼 충돌 위험(버드 스트라이크)을 차단하는 조치가 부실했다. 이른 아침에 많이 착륙하는 동남아 국제노선이 취항했다면 동이 틀 무렵 활동하는 조류 특성상, 이 시간대 새떼 퇴치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했다. 철새 도래지와 인접한 무안공항은 환경영향평가 때마다 조류충돌 위험이 경고됐으나 줄곧 무시했다. 조류 퇴치 전담직원은 고작 4명, 조류 퇴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니 말이다. 둘째, 당국의 관리감독은 부실했다. 참사로 이어진 결정적 이유는 활주로 끝 콘크리트 둔덕(로컬라이저·방위각 시설)이다. 당국은 설치규정과 달리 단단한 구조물로 건설된 사실조차 몰랐다. 국토교통부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 타령'만 하고 있다. 공항 설계와 공사, 감리에 하자가 없었는지, 이를 허가한 당국의 관리감독이 제대로 되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항공기 정비의 적정성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제주항공은 지난해 3·4분기 여객기 1대당 월평균 418시간을 운항했다. 국내 주요 6개 항공사 중에 최장이다. 빌린 비행기 1대당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영이라지만 항공기를 혹사한 것이 아닌지, 정비가 규정에 맞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의심은 합리적이다. 제주항공은 "무리한 운항이 아니다"라며 정비를 정확하게 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운항 횟수가 잦은 데 비해 매뉴얼과 다른 부족한 정비 시간, 잦은 기체 고장, 정비에 따른 운항 지연 시 정비사 책임 추궁 등 내부에서는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공유됐다고 한다. 당국이 "이 정도쯤은" 하며 알고도 관례적으로 넘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셋째, 이해당사자의 유착 가능성이다. 무안공항은 지역 정치인들이 수요를 부풀려 밀어붙인 '정치 공항'이다. 새떼가 많은 해안 입지라 반대도 많았다. 그럼에도 지방공항 건설 광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