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경자유전'도그마로 농업 못 살린다농촌 공동화와 지역 소멸을 알리는 경보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전국적 출산율이 바닥권으로 떨어진 지 오래인 데다 수도권 인구집중 추세도 꺾이지 않고 있다. 노령화한 농촌 노동력을 대체할 귀농인구도 몇 년째 급감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어렵사리 지방으로 이주·정착한 청년층조차 최근 수도권으로 회귀하고 있다. 지난달 말 산업연구원이 낸 분석자료를 보라. 비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 3명 중 1명은 2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수도권으로 '유턴'했단다. 며칠 전 오랜만에 찾은 고향 마을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했다. 40~50대는 고사하고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인 필자 또래 지인도 만나기 어려웠다. 산업화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물결을 타고 대거 도시로 떠난 탓이다. 촌수가 가까운 어르신 댁에 들렀다. 90대와 80대인 내외분이 텃밭에서 힘겹게 기른 유채나물을 한 소쿠리 담아 주셨다. 집에서 먼 논밭은 이제 힘에 부쳐 돌보기 어렵다는 말씀에 가슴이 짠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딴 세상에 사는 건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전만 뜨겁다. 무너져 내리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해법을 찾으려는 시늉조차 않고 있다. 비수도권 단체장 후보들조차 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농지 관리 문제에 관한 휘발성 높은 발언으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국무회의에서 농지가 투기 대상이 돼 가격이 크게 올라 귀농·귀촌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다. 특히 경작하지 않는 농지를 전수조사해 위법행위 발견 시 강제매각 명령 방침까지 밝혔다. 현장 민심이 심상찮게 흐르자 고령농민 소유나 상속 농지는 강제매각 대상이 아니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 농지 관리가 너무 엉망이 돼 투기 대상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수도권, 그중에서도 개발 호재가 많은 신도시 주변의 농지에 투기 수요가 몰린 건 맞다.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 때 터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
노동일 칼럼
'참패한 보수'는 부활할 수 있을까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 에드윈 퓰너 이사장(당시)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대선 국면에서 모 대선주자와 퓰너 이사장의 면담 과정에 배석할 기회가 있었다. 시종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질문은 기자의 인터뷰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친한파로 불리지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한국의 차기 주자가 누군지 탐색하는 면접 과정처럼 느껴졌다. 2025년 사망 전까지 200회 넘게 방한한 그는 진영을 막론하고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여서, 한미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퓰너 이사장은 1973년 헤리티지재단을 설립하면서 '보수적 가치를 정책으로 구현하는 행동하는 싱크탱크'를 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미국 보수주의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사임, 포드 대통령의 닉슨 사면 이후 공화당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도덕적·정치적 파산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정책적 공백이었다. 민주당이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보수 진영은 이에 대항할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헤리티지재단은 '이념적 고립'과 '정책적 무력감'으로 인한 '미국 보수주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작은 정부, 개인의 자유, 기업의 자유, 전통의 보호, 국방력 강화를 보수의 핵심적 가치 표준으로 정립했다. 1980년에는 '리더십 지침'이라는 제목의 1093쪽짜리 정책 제안서를 발표했다. '보수'의 의미를 명확하게 재정립하고 공화당이 집권할 경우의 구체적 정책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보수 가치야말로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감세, 규제완화, 복지비용 삭감, 부국강병 노선 등 세부 정책을 개발했다. "동성애와 낙태운동 등 진보좌파가 사회를 타락시킨다"며 가족의 가치 등 미국 전통을 수호하는 정책을 마련했다. 고루한 이미지 탈피를 위해 대학생들의 자발적 공부 모임을 조직해 보수의 영역을 넓
손성진 칼럼
중국의 습격중국이 지난해 신차 판매량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외국 자동차기업들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이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를 호령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다. 2000년 이후 줄곧 1위를 지키던 일본을 밀어냈다. 중국 BYD와 지리그룹의 신차 판매량은 도요타에는 뒤지지만 혼다와 닛산을 넘어섰다. 조선은 이미 한국을 물리치고 세계 1위를 굳힌 지 오래다. 조선업의 3대 지표로 볼 때 중국은 16년 연속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선박 건조량, 신규 수주량, 수주 잔량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각각 56.1%, 69%, 66.8%로 계속 급성장 중이다.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습격은 매우 빠르게 다가왔다. 제조업의 핵심 산업인 두 부문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가전업체 TCL은 지난해 12월 삼성전자를 끌어내리고 월간 기준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비상체제에 들어간 것은 이상하지 않다. 거대 장치산업이나 대형 가전보다 소형 전자산업에서 중국의 물결은 더 먼저 밀려왔다. 오디오 애호가들은 중국에서 불어오는 급속한 변화의 바람을 일찌감치 낌새채고 있었다. 중국산 고성능 하이파이를 뜻하는 '차이파이'가 등장한 때가 2014년 무렵이다. 헤드폰 명품을 베낀 중국산 제품의 성능이 소비자의 인정을 받으면서다. 세계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중국은 훔쳐서라도 기술을 배워 따라 하기가 쉽다. 합법적 모방과 불법적 베낌으로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쨌든 발전해 갔다. 원품 대비 20%의 가격에 80%의 성능을 지닌 제품이라면 어떤 소비자라도 혹하지 않을 수 없다. '가성비'를 중시하는 한국 소비자는 값싸고 품질도 나쁘지 않은 중국산으로 몰려갔다. 주부라면 누구나 아는 '차이슨'이 뒤를 이어 한국 가정을 휩쓸었다. 고품질의 '다이슨'보다 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가격은 매우 싼 차이슨에 주부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차이파이나 차이슨이 다는 아니다. 오디오나 청소기 외에도 중국산의 점유율이 높아
최진숙 칼럼
문제는 젊은이 일자리변방의 비주류 리서치기관이 일요일 저녁 이메일 뉴스레터에 쓴 미래 시나리오가 미국 증시를 발칵 뒤집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설립 3년차 신생 리서치회사 시트리니가 최근 자사 플랫폼을 통해 구독자에게 공개한 '2028 글로벌 지능위기' 보고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글 작성을 주도한 시트리니 창립자 33세 제임스 반 겔런의 이력은 독특하다. 생물학, 심리학을 전공한 병원 구급대원 출신으로 각종 매체와 채널에서 금융투자 칼럼을 썼던 인물이다. 보고서는 정교한 분석 리포트라기보다 장문의 메모에 가깝다. 인공지능(AI)이 사무보조로 활용된 지 3년이 흐른 2028년에 쓰인 회상형 에세이다. 인간의 지능을 AI가 어느 정도 대체한 시점으로 상정된 시간이 2028년이다. 'AI 멸망 소설'인 건 아니라고 밝혔지만 글 대부분은 'AI 디스토피아'에 맞춰졌다. 컴퓨팅 자산을 가진 자본가는 부가 폭증할 수밖에 없는데 노동비용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령 GDP' 개념이 나온다. AI로 생산성이 올라가 이익은 크게 늘지만 소득은 사람에게 가지 않고 소비는 돌지 않는다. 숫자는 성장하지만 체감경제는 죽었다는 의미로 유령 같은 국내총생산(GDP)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하여 2028년 6월 미국 실업률은 10%까지 뛰어오르고 주가는 고점 대비 40% 추락한다. 죽은 소비는 다시 산 기업을 잡는데, 이로 인해 회사는 줄도산하고 중산층은 몰락의 길을 간다는 것이 시트리니 시나리오다. '이게 가능한가'라는 냉정한 분석도 하기 전에 시장이 먼저 움직였다. 메모가 유포된 다음 날 월요일 아침 보고서에 언급된 관련 종목이 줄줄이 폭격을 맞았다. 위기 전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화 '빅쇼트' 주인공 마이클 버리가 글을 공유했다는 사실도 공포에 힘을 보탰다. 보다 못한 백악관이 보고서는 공상과학일 뿐이라고 정리하는 사태까지 이른다. 소형 리서치회사의 메모에 백악관까지 참전한 사건이 됐다. 과도한 설정이며 극한의 상황 전에
조창원 칼럼
마스가, K조선 '판도라 상자' 되나2000년대 후반 한국 조선업이 해외로 진출하는 두 가지 빅 이벤트가 있었다. STX그룹은 중국 다롄에,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비크에 초대형 조선소를 세웠다. 한국 내 조선소 부지가 워낙 작아 아예 해외에 매머드급 도크를 짓자는 전략이었다. 목표는 원대했다. 해외의 저임금 노동력과 대규모 설비를 바탕으로 글로벌 발주를 싹쓸이하겠다는 야심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STX 다롄 조선소는 조 단위의 자금을 쏟아부어 해양플랜트 단지를 완성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해운 불황이 덮쳐 발주가 끊겼다. 현지의 숙련인력 부족과 품질불량 및 중국 당국의 지원조건 불일치 등도 발목을 잡았다. 한진 수비크 조선소 역시 금융위기발 발주 가뭄에다 품질 문제, 노사 분규, 부품조달 차질로 홍역을 치렀다. 해외 직접투자는 결국 모기업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한국 조선업의 대표적인 해외 직접투자 실패 사례로 기록됐다. 이제 한국 조선업은 미국과 협력하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해외 직접투자에 또 나선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 발전의 모멘텀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생길이 훤히 열렸다. 우선, 투자 불확실성이다. 2000년대 STX와 한진의 해외 투자는 현지에 처음부터 새로 시설을 짓는 그린필드 방식이다. 마스가의 경우 미국 필리 조선소를 인수해 추가 투자하는 브라운필드 방식이다. 언뜻 보면 브라운필드 방식이 리스크가 낮아 보이지만 꼭 그렇진 않다. 배를 만드는 시설 구조가 낡았다면 아무리 리모델링해 봤자 건조역량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미국 조선소 투자는 브라운필드와 그린필드가 혼합된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다. 돈이 더 들어갈 것이란 얘기다. 미국이 한국을 조선업 협력의 단독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각서도 없다.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했다고 독점과 같은 수준의 사업권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것이란 낙관은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해양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파